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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0. 창조절 열한째주일
예배 시편 / 시편 104편 5-15절
찬송 / 217장 ·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성서 / 이사야 6장 1-13절, 마태복음 13장 13-23절
말씀 / 거룩한 씨는 남아서, 그루터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밤나무나 상수리나무가 잘릴 때에 그루터기는 남듯이, 거룩한 씨는 남아서, 그 땅에서 그루터기가 될 것이다. (이사야 6장 13절)
그런데 좋은 땅에 뿌린 씨는 말씀을 듣고서 깨닫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인데, 이 사람이야말로 열매를 맺되, 백 배 혹은 육십 배 혹은 삼십 배의 결실을 낸다.(마태복음 13장 23절)
Ⅰ
지난 주일에는 예배를 마치고, 지금은 상상캠퍼스라고 부르는 옛 서울대학교 농대를 찾았습니다. 따스한 가을 햇살 아래 커다란 고목들과 노랗고 붉게 물든 나뭇잎들이 정말 눈부시도록 아름다웠지요. 물론 오래된 나무에서 때에 따라 떨어지는 낙엽도 그냥 지나치면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떨어지는 낙엽들 하나하나도 참 경이롭고 아름다웠습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순리에 따라가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만, 생각해 보면 신비한 것이고, ‘그것이야말로 아름다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어쩌면 이러한 자연의 순리를 경이롭게 바라보는 것, 자연의 거부하거나 거절할 수 없는 섭리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 그렇지만 이러한 순리를 기뻐하는 것, 다만 이러한 순리를 거스르지 않는 것이야말로 참된 신앙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면서 그저 쓸쓸함과 허무만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마도 자연의 비움과 멈춤이 끝이 아님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우리는 겨울이 다가오면, 나무가 광합성을 멈추고 나뭇잎을 떨어뜨리지만, 겨울 동안 느리더라도 더 단단하게 성장하는 것을 잘 알고 있고, 다시 새봄에 싹을 틔울 것을 믿고 있기 때문이지요. 또한, 올 한 해 결실들이 다시 씨앗이 되어서 더욱 풍성하고 아름다운 자연을 이루어 가는 것이 순리이며,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섭리임을 우리가 믿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신앙도 그렇지 않을까요? 세상의 눈에는 보잘 것 없는 작은 씨앗이지만, 신앙이란 그 씨앗을 통해 커다란 나무와 숲을 이룰 것을 믿고 꿈꾸는 것이고, 우리 아이들의 맑은 미소에서 하나님의 크신 꿈과 소망을 발견하는 것이고, 서로가 서로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바라보는 것 아닐까요? 연약한 우리를 통해 이루어가실 하나님의 섭리를 기대하며, 기다리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분의 뜻을 믿고 따르는 것이야 말로 참된 신앙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의 마음과 눈을 열어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순리를 기뻐 따르는 사람들로, 하나님의 계획과 그 부르심에 응답하며, 하루 하루 살아가길 기원합니다.
Ⅱ
오늘 우리는 구약 말씀으로 이사야서 6장의 말씀을 받아 읽었습니다. 일명 이사야의 ‘소명’장이라고 부르는 장입니다. 성서를 읽어보면,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다는 건 두렵고 떨리는 일이며, 신비하고 놀라운 사건이지요. 모세는 하나님께 부름을 받을 때 호렙산에서 ‘불타는 떨기나무’를 보았습니다. 분명 불이 붙어있는데 타지 않는 신기한 나무 가지였지요. 그는 그 거룩한 체험 가운데 경외하는 마음으로 엎드려 신을 벗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선 모세에게 ‘고통받는 백성의 신음을 친히 들으셨다’고 하셨지요. 불타오르지만 상하게 하지 않는 불, 바로 그건 모세 개인의 단순한 내면적 체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이끌어 내시겠다는 부르심’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지도자로 부르신 것은 고통받는 백성들을 당신의 섭리와 은총으로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었던 것이지요. 하나님의 부르심은 불타듯 타오르는 민중의 고통과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응답이며, 그 불타듯 타오르는 백성을 상하게 하지 않는 희망의 불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선 모세를 통해 민중들을 그렇게 불타오르지만 상하게 하지 않는 뜨거운 불꽃처럼 생명과 평화의 길로 놀랍게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이사야 6장에서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부르시는 장면은 우리의 기대와 다르게 어딘가 조금은 이상하고 의아합니다. 이사야는 모세와 같이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두려움에 휩싸였지요. 이사야는 하늘을 우러르며 사는 사람이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기에 “거룩, 거룩, 거룩”을 외치는 스랍들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스랍들 소리 앞에 두려움에 사로잡혀서는 “나는 죽었구나”하고 탄식했지요. 그런데 바로 그때 스랍 가운데 하나가 불타는 숯을 들고 와선 이사야의 입에 대며 그 입을 정결케 하였습니다. 그리곤 하나님께선 이사야에게 물으십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께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를 보내어 주십시오." 하고 당당하게 응답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맡기는 말씀이 어딘가 의아합니다. “너는 가서 이 백성에게 ‘너희가 듣기는 늘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는 못한다. 너희가 보기는 늘 보아라. 그러나 알지는 못한다‘하고 전하라는 것이었지요.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말씀하시길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고, 귀가 막히게 하고, 눈이 감기게 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들이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또 마음으로 깨달을 수 없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주시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이 ”보고 듣고 깨달았다간, 돌이켜서 고침을 받을까“ 걱정하신다니 정말 의아한 말씀이지요. 그래서 이사야는 하나님께 다시 ”주님! 언제까지 그렇게 하실 것입니까?“ 하고 묻습니다. 하나님께선 ”성읍들이 황폐하여 주민이 없어질 때까지, 사람이 없어서 집마다 빈집이 될 때까지, 밭마다 황무지가 될 때까지, 사람들을 먼 나라로 흩어서 이곳 이 땅이 온통 버려질 때까지“ 그렇게 하신다고 하십니다. 마치 겨울을 앞두고 광합성을 멈추는 자연처럼, 나뭇잎을 모두 떨어뜨리는 나무처럼, 물도 영양도 흡수하는 것을 멈추는 나무처럼 그렇게 모든 것을 비워내고, 덜어내고, 멈추어야만 한다는 두려운 말씀입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직접 그들을 멈추도록 하시고, 그들이 자기를 비워내도록 하시고, 그들의 잘못된 것들을 깎고 또 깎아 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비움과 멈춤이, 그 깎아 냄이 끝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밤나무나 상수리나무가 잘릴 때 그루터기가 남듯이 남은 나무의 밑동은 남을 것이라고 하셨지요. 바로 거룩한 씨앗이 남아서 그 땅에서 그루터기가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루터기와 같은 거룩한 씨! 바로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보여주신 새 희망의 기초입니다. 절망과 좌절뿐인 곳에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희망의 씨앗이고, 어둠만이 덮인 곳에 피어나는 한 줄기 빛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루터기’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단어는 ‘마체베트’입니다. 마체베트의 본 뜻은 ‘기둥’이고 ‘형상’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남기신 거룩한 씨앗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살아가는 사람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아멘으로 응답하는 사람들,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도 기둥처럼 무너지지 않은 사람들, 곧 당신의 형상으로 남기신 사람들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왕의 통치를 나타내는 고대의 형상처럼 자기가 있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과 통치를 나타내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이사야처럼 하늘을 우러르며 살아가는 사람이요,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이며,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사람들, “누가 나를 위해 갈까?” 하고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음성에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응답하는 사람들, 작은 씨앗에서 나무를 보고, 숲을 보는 사람! 어둠 속에 빛을 내고, 닫힌 귀를 일깨우는 하나의 소리가 되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우리가 작고 연약할지라도, 때에 따라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의 뜻과 그분의 마음을 가는 곳마다 드러내는 사람들입니다.
Ⅱ
오늘 우리는 복음서의 말씀으로 예수님께서 전하신 비유의 말씀을 받아 읽었습니다. 흔히 ‘씨뿌리는 자’의 비유라고 부르는 말씀입니다. 이 비유는 기독교인들에게는 친숙한 비유이지요. 이 친숙한 비유가 지니고 있는 중요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들 가운데 이 비유는 공관복음서 모두에 전승되었고, 무엇보다 다양한 비유들의 제일 앞자리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중요하지요. 어쩌면, 예수님의 다양한 비유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어릴 적부터 익히 들어온 이 비유는 단순하고 명백해서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닷가 한 편에 앉으셔서, 예수를 따르는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씨를 네 종류의 땅에 뿌렸는데 좋지 않은 땅에서는 열매를 맺지 못했으나, 좋은 땅에서는 열매를 맺었다는 당연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비유를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는지요? 흔히 이 비유의 말씀은 우리의 신앙의 문제, 특히 마음의 문제로 이해되곤 합니다. 우리의 마음의 밭을 옥토와 같이 만들어서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성장을 하는 축복을 누리자는 해석이지요. 그러니까 돌밭과 같은 마음이 아니라, 옥토로 비유되는 착하고 순종적인 마음을 지니면, 재산도 사업도 교회도 크게 성장할 수 있다고 강조하는 해석입니다. 이 해석에는 언제나 강조점이 백배에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 어디에도 이 비유가 마음의 문제라고, 우리의 마음을 옥토와 같이 만들어야 한다는 그런 말씀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의 말씀은 도대체 무슨 말씀일까요?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도대체 왜 비유로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왜 비유로 말씀하시는지 여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의 말씀을 듣는 이들에게 설명하여 주셨습니다. “너희 무리에게는 하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을 허락해 주셨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게 해주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오늘 우리가 구약말씀으로 받아 읽은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시면서,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가 어떤 이들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의 예언대로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깨닫도록 하시지만, 어떤 사람들의 눈은 보지 못하도록 하고, 듣지 못하도록 하고, 알아듣거나 깨닫지 못하기 위함이라고 풀어서 말씀하시곤, 그 다음 이사야가 새 희망의 기초로 거룩한 씨앗을 노래한 것처럼, 비유로 말씀하여 주신 씨앗 비유를 자세히 설명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씨앗의 비유를 설명하시면서 네 가지 종류의 땅이 각각 ‘그런 사람’과 ‘이런 사람’이라고, 곧 어떤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설명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씨 뿌리는 비유는 마음의 문제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네 종류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씀이라는 것이지요. 먼저,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를 두고 하는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고 하시지요. 길가에 뿌린 씨는 ‘그런 사람’을 두고 하신 말씀이라고 설명하십니다. 어떤 사람일까요? 바로, 예수님의 말씀에 완강히 저항하고 결국은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간 적대자들이겠지요. 희망의 씨앗이 자라지 못하도록 하는 사람들이요, 희망의 불꽃을 무참히 꺼버리는 사람들입니다. 여기 저기, 이곳 저곳 떠돌며, 명당을 찾고, 대박을 찾고, 탐심과 이익에 눈이 멀고 귀가 먼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그 다음 예수님의 말씀에 즉각적으로 응답하지만 환란과 박해에 직면하여 신뢰를 포기하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이 돌밭과 같은 사람들은 아마도 ‘돌’이라고 불렸던 베드로처럼, 예수님 앞에서 호언장담하면서도 예수님을 모르는 체했던 제자들과 같은 사람들일 겁니다. 그리고 가시덤불에 뿌린 씨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 말씀을 막아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한 사람들을 가리키지요. 아마도 세례 요한의 말을 기꺼이 들었으면서도, 권력과 탐심에 요한을 죽였던 헤롯과 같은 권력자들,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으면서도 종교적 권력과 정치를 이유로 타협하고 야합하는 지도자들을 향한 것입니다. 권력이 부패하고 무능한 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염려와 유혹의 덫에 걸려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마지막으로, 좋은 땅과 같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앞에서 말씀을 듣는 무리일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예수님 앞에서 당신의 말씀을 듣는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뜻과 그 나라에 관하여 설명해 주시지만, 이 무리의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도록 비유로 들려주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의 강조점은 네 분류의 사람들 가운데, 정치 지도자와 종교 지도자들이 아니라, 권력과 탐심에 눈과 귀가 먼 사람들이 아니라, 때로 흔들리며 갈등하는 제자들과 당신을 따르는 이름 없는 무리들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흔들리며 갈등하는 제자들과 하늘 나라에 대한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들, 바로 이 무리들이야말로 백 배 혹은 육십 배 혹은 삼십 배의 결실을 낸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바로, 말씀을 듣고 깨닫는(!) 너희가 이사야가 말한 그루터기, 곧 기둥이며 하나님의 형상이요, 거룩한 씨앗이요, 생명과 평화를 향한 새 희망의 기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의 강조점은 하나님의 뜻과 나라의 말씀을 받아 살아가는 사람들, 바로 이 무리들을 통하여 이 땅과 역사에서 이루어져 갈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비록, 의심하며 환란과 박해에 흔들리는 제자들이지만, 또한 이름 없고 보잘 것 없는 무리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너희’, 곧 이 무리를 통하여 당신의 뜻과 나라를 놀랍게 이루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땅에 뿌려진 씨앗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자라듯이 하나님께서는 부족하고 이름 없는 무리들을 하늘의 씨앗으로 부르시고, 기둥으로 부르시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부르셔서 하나님의 섭리를 이끌어 가신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때로 우리의 삶도 뿌려진 씨앗처럼, 마치 세상에 내던져진 것과 같은 막막함 앞에서 흔들리곤 하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 하늘을 우러러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우리의 힘 밖에 있는 일처럼 보이는 환경과 상황 속에서도 우리를 지켜주시고, 성장과 결실로 이끌어주십니다. 때에 따라 씨앗이 싹을 틔우고, 잎과 줄기를 내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가는 것처럼, 우리가 당신의 섭리를 믿고 따라 살아갈 때, 우리의 삶과 가정과 교회와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성장하도록, 우리 가운데 뿌려진 평화와 생명의 씨앗이 놀랍게 자라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Ⅲ
해마다 봄이 되면 싹이 나고, 여름이 되면 성장하여 자라나고, 가을이 되면 열매를 맺습니다. 그리고 겨울을 맞이하며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면, 때로 이 반복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이 자연의 섭리에 우리의 믿음의 기초가, 우리의 희망의 기초가 있습니다. 씨앗은 자라 나무가 되고, 그 나무의 뿌리는 더욱 깊어지고, 나무가 커지고 굵어집니다. 그렇게 커다란 숲을, 원대한 자연을 이루어가겠지요. 새로운 결실이 다시 소중한 씨앗이 되어 자라나고, 마침내 백배에 이르는 큰 결실을 이루게 되는 것이지요. 마침내 그 숲과 자연에는 뭇 생명과 평화가 깃들 것입니다. 작은 씨앗에서 큰 희망을 보시는 하나님께선 우리의 가정과 교회를 통해서도 이 땅의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뜻과 나라가 자라나게 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섭리 안에서, 순리대로 자라나게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우리에게 주신 믿음의 씨앗과 새 희망 씨앗을 소중하게 지켜나갈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우리를 하늘의 씨앗으로, 하나님의 든든한 기둥이요, 하나님의 형상으로 부르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이루어 가시는 역사를 믿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며 살아갈 때, 작은 씨앗에서도 큰 숲을 기대하시는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인도하여 주시고, 풍성하고 아름다운 생명과 평화의 결실을 맺어가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