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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조명
고전2:6~16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은 앞에서 세상의 지혜에 대하여 언급한 후에 이제는 참 된 지혜, 곧 하나님의 지혜에 대하여 교훈합니다.
(6)/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했습니다.
“지혜”라는 말은 “소피아/ 확고히 하다,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다, 도모하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란 “델레마/ 의로우신 요구, 선택, 결정, 기뻐하심, 원하심”이라는 말이며,
“의”란 “디카이오쉬네/ 십자가로부터의 반사 된 빛” 곧 중심으로서의 사랑을 가리킵니다”
“도모하다”는 말은 “포이에오/ 이루다”라는 뜻입니다.
“온전”이란 말은 “카탈티조/ 위골 난 뼈를 제자리에 맞추다, 찢어진 그물을 깁다, 잿물, 맑게하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라는 말은 결국 세상적 가치를 좇는 삶을 단장하고 하나씩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의를 이루는, 곧 중심으로서의 (레바/ 동기= 내 의나 유익,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 사랑하는 삶을 말합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시고 화목제물로서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을 십자가 위에서 대신 이루신 것입니다.
이것이 참 된 지혜임을 바울은 교훈하는 것입니다.
이를 증거 함은 즉 이미 구속함을 받은 고린도 성도들이 세상적인 가치 안에 갇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 지혜를 깨닫고 성숙한 자들이 되기를 바라고 참 구원의 믿음의 자리에 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지혜란, 이 세상의 지혜도 아니요 통치자, 곧 정치지도자들과 종교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그들이 아니라는 것을 교훈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참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 합니다.
(7)/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잃었던 천국영광을 다시 주시기 위하여 우리를 사랑하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의인 삼으시려고)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했습니다.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란
마25: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 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하라” 하심의 인용인 것입니다.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란 복음의 구원 진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골1:26~27/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그 십자가를 지고 주를 좇는 자에게 주어질 천국영생의 소망이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전4:1~2에 가서 그런 은혜에 빚진 우리에게 당부하여 이르기를/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그 비밀, 곧 드러난 그리스도, 곧 십자가의 중심적 사랑을 행할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했습니다.
“충성하다”는 말은 “피스토스/ 확신하다, 믿을 만 하다, 세워져 지탱하다, 신실하다, 입증되다”라는 뜻입니다.
소망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그날까지 지속적으로 이를 도모함으로써 세워져 가야 함을 교훈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라는 것입니다.
이는 “하기오스/ 거룩하다 라는 뜻과 같은 말로서 피조물과 구별되다, 하나님께 바쳐지다, 순결한 제물, 하나님께 속하다”라는 뜻의 말입니다.
즉 옛 사람의 가치요 세상적 가치를 좇는 것이 아리라 하나님의 자녀 된 자로서의 요구적인 가치 곧 중심으로서의 사랑의 삶인 십자가에 죽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정하신 것이라” 는 말씀이 그 말입니다.
즉 우리의 완성구원, 상급구원, 영광구원을 위하여 비밀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주시고 우리로 그 소망, 영광의 길을 열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그 삶을 도모하여 붙좇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왜 입니까?
세상은 알지 못하는 비밀이요 우리에게만 주신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 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특별하신 은혜, 그 비밀하신 사랑을 입은 자들로서 그 소망 가운데 행해야 함을 교훈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누구나, 아무 때나, 그렇게 가는 나라가 아닌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9)/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대속과 그 구원계획은 사람이 생각지도 못한 방법, 곧 하나님이신 분이 친히 몸을 입고 죄인의 모습으로 이 땅에 화목제물로 오사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실 줄 아무도 몰랐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우리를 구원하실 계획이요, 정하신 바임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입니다.
우리도 이를 알고 행하지 않고, 세속적이요 인본주의적이요 기복적인 종교인의 삶을 좇아 다른 길로 행하면 예수를 두 번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했습니다.
성령께서 이를 알게 하신 그 깊으신 뜻, 그 완성구원의 길을 우리로 깨달아 알고, 계시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좇아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1)/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했습니다.
사람의 속도 그 사람의 영 외에는 알지 못하거늘 어찌 사람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사정, 그 일을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가장 잘 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 무엇입니까?
요6: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 곧 예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피스티스/ 신뢰를 가지고 의뢰하다, 합의하다, 동의하다, 삶에 법을 삼아 따르다” 라는 뜻입니다.
믿음이란 그 어떤 추상이나 관념, 지식이나 논리, 어떤 스펙이나 직분, 신앙의 연조가 아니라
예수께서 보이시고 이루신, 그리고 새 계명으로 명하신 최고한 법인 서로 중심으로서 사랑하는 삶이 완성구원에 이르는 믿음인 것입니다.
왜요? 어째서요?
요6:4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하셨기 때문이요,
요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지금 사도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알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했습니다.
세상의 영은 본질적으로 타락한 영입니다. 그래서 본질이 깨끗한 하나님의 본질, 그 품성, 본성, 속성, 그 형상인 그 십자가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형상”이란 말은 그 어떤 모양이나 이미지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에이컨/ 본성, 속성, 품성” 곧 그 사랑을 이르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 자체가 사랑이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형상을 이루도록 좇아 행하면 하나님을 아는 자요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입니다. 즉 완성구원, 영광구원, 상급구원을 얻을 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도 이르기를
요일3:23~24/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했습니다.
요일4:7~1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 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요일4:16~17/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요일4:21~5:3/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요일5:12~13/ “아들이 잇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사도 바울이 누구입니까?
석학 아닙니까?
그런데 바울은 세상적인 지혜로 가르치지 아니하고 성령께서 조명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친다고 말합니다.
“가르치다” 라는 말은 “디다스콘/ 언제나 그러하다, 변절치 않다, 왜곡시키지 않다” 라는 뜻입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복음의 본질을 왜곡시켜 가르치지 아니하고 그 본질만을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것은 영적으로만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는데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별함이니라” 했습니다.
“분별”이란 말은 “코데쉬/ 곧은길을 가다, 자르다” 라는 뜻입니다.
성령의 조명을 받는 사람이라야 분별 곧 곧은길인 하나님의 요구대로 세상적인 가치들을 잘라내면서 성화의 길을 갈 수 있으며, 그렇지 아니한 육에 속한 사람 곧 세상적 가치를 좇는 사람은 이를 인정하고 따르지도 못하며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알지 못하므로 여전히 옛 사람의 가치를 좇으면서 교회 마당만 밟고 왔다리 갔다리 한다는 말인 것입니다.
즉 여전히 세상적인 가치를 좇는 사람은 성령의 조명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즉 육에 속한 성령을 받지 못한 자들은 성령의 일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므로 ㄱ리스도 예수를 실제로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종교인의 삶을 믿음이요 신앙으로 오해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눈에는 보지도 못한 예수 십자가의 사랑을 믿으면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 어리석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앞서 살핀 대로 복음은 세상 곧 육의 사람들에게는 감취어진 비밀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4~5)에서/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했던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만 모든 것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앞서 1장에서 살핀 대로
고전1:17~21/ “~~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했습니다.
그런즉 전도함 곧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가감이나 변절, 왜곡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구원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구원은 십자가의 도를 좇아 행함 곧 중심으로써 사랑하는 하나님의 능력 곧 그 삶에 있다는 복음의 본질을 왜곡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래서 복음을 왜곡시키는 자들을 향해서 주님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하고 책망하셨습니다.
변화산에서 이튿날 내려 오셨을 때 한 사람이 귀신들려 부르짖으며 경련을 일으켜 거품을 흘리며 심히 상하게 하고 떠난 외아들을 데리고 오면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내어 쫓아 주기를 구했지만 저희가 능히 못하더이다 합니다.
그때
눅9:4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를 참으리요. 네 아들을 데리고 오라 하시니” 했습니다.
왜 변화산에 함께 하지 아니하고 밑에 잇던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 외의 제자들은 이를 하지 못했을까요?
주님의 대답에 그 답이 나와 있지 않습니까!
믿음이 없고 패역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믿음” 이란 “피스티스/ 신뢰를 가지고 의뢰하다, 합의하다, 동의하다, 삶에 법을 삼아 따르다” 라는 뜻입니다.
주께서 담당하시고 이루신 그리고 새 계명으로 주신 능력, 곧 서로 중심으로써 사랑하는 삶인 것입니다. 믿음은 명사가 아니라 움직임 씨 즉 동사입니다.
즉 삶으로서 증거해야 하는 능력, 곧 중심으로써의 사랑의 삶인 것입니다.
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치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거기에 더 보태어 패역한 세대여! 하십니다. 왜 일까요?
“패역하다” 는 말은 “디아스트레포/ 외면하다, 굽게하다, 은혜를 배반하다, 애곡하다” 라는 뜻입니다.
그 귀신들려 거품을 물고 소리를 지르며 경련을 일으키는 그 아이에 대한 긍휼, 그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도
롬1:1617/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구속/ 리트로시스의 믿음) 믿음에 (소테리아의 믿음)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구속하심으로 의롭다 인정함을 받고 자녀 된 우리는) 믿음으로 (소조의 믿음) 말미암아 (그 중심으로써의 사랑의 삶의 결과로) 살리라 함과 (완성구원, 상급구원, 영광구원. 영생, 천국상속권자) 같으니라” 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사람의 지혜로 가르치지 않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즉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교훈하는 것입니다. 그런 거짓 복음에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골로새 성도들에게도 같은 말을 반복합니다.
골1:21~22. 26~29/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성도= 거룩한 자/ 피조물과 구별된 삶, 곧 성령의 조명, 그 요구를 좇는 자들에게) 나타났고 ~~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영광의 소망이니라. ( 그 영광나라를 위해 우리도 그 삶을 도모하여 좇음으로써 받게 되는 것인즉 소망 <(/ 엘피스= 이루어짐을 확신하다) 중에 바라고 좇아야 한다는 것>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했습니다.
이는 성령의 조명을 좇아 그 인도하심과 이끄심을 따라 도모하여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능력의 삶을 사는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고 박수갈채를 받으며 그 어떤 판단도 받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도리어 핍박과 고난, 환난을 당하게 됩니다.
“신령”이란 말은 “프뉴마/ 성령, 가장 고귀하고 진실한 마음” 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성령의 조명을 좇아 그 사랑하는 진실한 마음으로 그 도를 좇아 행하는 사람은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으나 담대하며 오직 구원의 길, 영광의 길이 이것임을 알기에 그런 것들, 곧 현상에 지배를 받지 아니하고 그 길을 가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에게 이를 교훈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주님의 그 마음, 그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그 마음을 주셔서 우리는 이제 그 일을 할 수 있는 자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즉 이제는 성령의 조명을 순종하여 그 일을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을 정리합니다.
바울은 (1~5)까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가르칩니다. 곧 우리도 그 능력을 좇아 행해야 주님처럼 그날에 부활의 영광, 완성구원에 이름을 교훈합니다. 그 능력은 십자가의 도, 곧 중심으로써 서로 사랑하는 삶임을 가르친 것입니다.
(6~16)까지는 성령께서 그 사실을 우리에게 알게 하셨다는 것을 증거한 후
(14~15)에서 육에 속한 사람과 신령한 사람을 대조적으로 교훈함으로써 돌이켜 영의 사람으로 살아가야 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신령한 것이라고 하니까 무슨 신비하고 추상적인 뜬구름 잡기식의 관념적인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감동을 소멸치 아니하고 순종하여 믿음으로 붙좇는 것이 신령한 것이며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영적예배요 아버지께 참으로 드리는 예배인 것입니다.
요4:23~24/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지금, 여기서, 내가, 내게 주신 것으로, 내 이웃을 향하여, 중심으로써의 사랑의 삶을 성령의 요구, 감동을 소멸치 말고 행해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중심으로써의 사랑을 행함으로)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지니라” 했습니다. 이는 영적예배를 가리킵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이 영적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무엇입니까?
롬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패역한 세대의 풍습을 곧 세상적 가치를 좇아가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로 하라” 했습니다.
“거룩” 이란 말은 “하기오스/ 성도, 피조물과 구별되다” 라는 뜻입니다.
구속함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 된 자로서 세상적, 그 옛 사람의 가치를 십자가에 다 못 박는 삶입니다. 구속 받기 전의 옛 사람의 가치를 좇지 않는 삶인 것입니다. 이것이 처음 사람인 피조물과 구별 된 성도, 곧 거룩인 것입니다.
“산 제사”라는 말은 “디쉬아 자오/ 살아 있는 희생, 삶으로 드리는 예배”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분별 있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 곧 완성구원의 계획을 알고 그 길을 좇는 영적예배의 성공자라는 것입니다.
환경, 처지, 형편, 현상에 굴하여 복음의 본질 박의 것으로 다투고 분쟁함으로 실제적인 성령의 조명을 거스르는 자리에 서지 말고, 또 성령의 조명 곧 요구하시는 감동을 소멸치 말고 충만하여 그 뜻을 이루어감으로써 주님의 기쁨이요, 그날을 준비하는 참 예배자로서 견고히 세워져가고 하나님의 그 선하시고 기뻐하심의 일에 존귀하게 쓰임 받는 주인공들이 저와 여러분 모두이길 간절히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