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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여름이로구나 싶은 날을 보냈습니다. 주말의 장마 예보가 있으니 다소 수그러지겠지요. 장마, 예년에 비해 좀 늦게 올라왔습니다. 그만큼 본때를 보여줄지도 모른답니다. 초장부터 장대비를 내린다고 하는데 이 주말을 샤워하면서 보내지 않을까 모르겠습니다. 어떻든 와야 할 것은 와야 하고 당해야 할 것은 당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큰 피해 없이 지나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미국과 캐나다 서부에 몰아친 상상을 초월한 더위처럼 공포의 장맛비라도 쏟아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거의 섭씨 50도에 가까운 더위라니, 어떻게 산대요? 우리의 기록은 몇 년 전 섭씨 39도였나요? 아 남부지방에 40도를 가리킨 곳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세상에!!
7월, 장마로 시작하여 곧 무더위하고도 짝하며 살아야 할 시간이 다가옵니다. 그런데 코로나19는 물러갈 생각을 안 하고 있습니다. 이 여름을 또 함께 지내려니 한숨이 나옵니다. 다행히 백신은 맞았으니 다소 두려움은 사라졌지만 2차를 맞아야 마음도 편할 텐데, 이게 여름 하반에나 차례가 옵니다. 하기야 뭐 여름휴가를 떠날 것도 아니니 뭔 걱정이겠는가 마는 마음이 편치 않다는 말이지요. 답답해하는 사람들을 보면 역시 답답해집니다. 주변 사람들의 한숨이 전염되어 오잖아요. 더위도 이겨야 하고 코로나도 이겨야 하고,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의 마음을 지키는 겁니다.
여름입니다. 열정의 계절이라지요. 어떻게든 이겨야 합니다. 이왕이면 건강하게 그리고 신나게 이 한 달을 지내면 좋겠습니다. 오랜만에 외쳐봅니다. 파이팅!! ^&^
2021년 7월 3일 김종우 목사
첨부 : 21-06-29주일설교(왜 너냐?)
성경 : 누가복음 4 : 16 - 22 2021년 6월 27일
설교 : 왜 너냐? 김종우 목사
얼마 전에 현대 대한민국의 지성을 대표한다는 분이 예수를 믿게 된 것이 토픽이 되었습니다. 온 기독교계의 기쁜 소식이기도 하였습니다. 아마 세상 사람들은 실망하였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역시 놀라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과연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저런 분도 예수를 믿는구나. 예수를 믿게 된 동기가 궁금하기도 하겠지요. 사람이 아무리 똑똑하고 잘났다 하더라도 누구나 사람의 한계를 가지고 있게 마련입니다. 나는 쓰러지지 않을 것 같아도 나의 사랑하는 사람이 쓰러지면 내가 쓰러지는 아픔보다 더 깊은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자식의 고통에 나 몰라라 눈 돌릴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결국 그 앞에서 무릎을 꿇게 됩니다. 전능하신 분 앞에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평소에는 다 해줄 수 있을 것 같아도 그러나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기 어렵지요. 많이 배우고 못 배우고, 똑똑하고 못하고, 그런 것을 떠나서 죽음이라는 한계 상황에서 우리는 나약한 사람일 뿐입니다.
꼭 그런 한계 상황을 당해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일도 있지만 단순하게 신앙 세계로 들어오는 사람도 많습니다. 생각해보면 참 신기한 일 아닙니까? 믿음이란 것이 아주 단순한 것 같아도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아무리 설득하고 권해도 믿지 못 하겠다 하는 사람에게는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사람의 권능으로 되는 일이 아니지요. 살후 3 : 2 “또한 우리를 무리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 아멘! 그렇습니다. 이렇게 큰 무리 없이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도무지 믿지 못 하겠다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 신앙의 문제는 세상에서 가장 가깝다는 피붙이도 통하지 않습니다. 아비가 자식을 강제할 수 없고 자식이 통사정을 해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더라는 것이지요. 우리 모두 믿음 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을 믿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상에 종교도 많고 미신도 많습니다. 같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다르게 믿는 경우도 있지요. 똑같이 성경을 가지고 있는데도 다릅니다. 분명 종교는 같은데 종파가 갈라집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그것이 하나님의 뜻하신 바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의 부족함과 어리석음 그리고 나아가 그 어리석은 고집 때문이라고 봅니다. 더구나 조금 지나면 나름대로의 세력을 형성하게 되고 그 다음부터는 그 속에 이권이 개입되게 됩니다. 그러면 돌이키기 힘든 상황이 되지요. 그래서 종파 간에 협력하여 하나를 이루는 일은 대단히 힘들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명하신 일은 결코 아닙니다. 엡 4 : 4 - 6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하나이신 하나님을 믿는 방법은 왜 이렇게 많은지 이해하기 힘듭니다. 장로교 안에서만도 200개가 넘는 교단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셨습니까? 아니지요. 누가 만들었습니까?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믿음은 쉬우면서도 어렵습니다. 갈라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유가 있다면 성경을 보는 눈 때문인 줄 압니다. 그리고 자기가 보는 관점만이 옳다고 고집하기 때문이지요. 전쟁 중에서 가장 잔혹한 전쟁이 바로 종교전쟁입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문제에서는 그 누구도 일호의 양보를 쉽게 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고집입니다. 마치 순교자인양 목숨을 겁니다. 자기 것만이 옳다는 거지요. 서로 협력해서 하나를 이루어가려는 것이 아니라 안 맞으면 갈라서는 겁니다. 그것이 또 안 맞으면 이단으로 몰아서 축출하려고 합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무서운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타날 때는 이 보이는 육신의 세계에서 잔혹한 처벌로 드러납니다. 끔찍한 일입니다. 역사에서나 읽을 수 있는 사건이 아닙니다.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세계 속에도 이상하고도 괴이한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하실 일을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암 3 : 7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선 당신의 종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그것을 기록한 것이 성경 속의 예언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마귀가 미리 안다면 하나님의 계획이 성사되겠습니까? 마귀가 가만있을 리 없습니다. 분명히 방해할 것이고 하나님의 계획에 차질이 생길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 대로 이루시는 분인데 그 성취함에 차질이 생겨서는 안 되겠지요. 마귀의 방해를 차단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미리 말씀하셔도 그것을 마귀가 알아보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마치 우리가 군대생활하면서 경험한 것과도 같습니다. 아군끼리만 통하는 암호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만 알아야지 적군이 알아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말 그대로 암호입니다. 식별이 어려운 한밤중에 인기척이 납니다. 어찌 압니까? 아군인지 적군인지 분별을 제대로 해야 대처를 하지요. 그 때 슬쩍 암호를 던져봅니다. 상대방에게서 약속된 대답이 나오면 아군이고 그렇지 못하면 적군으로 간주하는 겁니다. 하나님도 그와 같은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세상이 마귀의 수중에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은 그 세상을 구원하실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 하실 일을 말씀으로 기록하여 주셨습니다. 당신 백성이 읽고 깨닫고 알아서 믿고 행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마귀가 알아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암호화하였습니다. 시편기자도 그것을 말합니다. 시 78 : 2 - 3 “내가 입을 열고 비유를 베풀어서 옛 비밀한 말을 발표하리니 이는 우리가 들은 바요 아는 바요 우리 열조가 우리에게 전한 바라” 우선 여기 ‘내가’가 누구입니까? 당시로서는 물론 시편 기자이겠지요. 그러나 사실은 예언입니다. 즉 오랜 후에 이루실 말씀이란 것이지요.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예수님이 오셔서 그대로 하셨기 때문입니다. 마 13 : 34 - 35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아멘! 그러므로 예수님은 천국에 관한한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천국은 비밀이지요. 마귀가 결코 알아서는 안 됩니다. 누구만 알아야 합니까? 하나님 백성만 알아야 합니다. 우리 집 비밀번호는 우리 집 식구만 알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천국의 비밀번호는 하나님 백성, 하나님의 가족만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면 성경을 읽을 때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물론 그 내용 중 역사나 교훈에는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오직 앞으로 이루실 일에 대한 것에 유의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크게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약속이 무엇입니까? 메시야 곧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요 5 :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잘 아는 대로 당시 성경이라면 구약성경밖에 없었습니다. 그 성경이 누구를 증거한다고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예수님이 왜 어떻게 어디에 오시는지 등등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예수님은 오셔서 그 구약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증거하셨습니다. 눅 4 : 16 - 21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아멘! 예수님은 한 마디로 하나님 백성에게 ‘자유’를 선포하려 오셨습니다.
인간은 오랜 세월 죄에 묶여 살았습니다. 그 죄의 결과는 사망이고 멸망입니다. 그 죄에서의 해방을 이루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히 2 :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또한 사망을 무기로 하여 인생들을 잡고 있는 마귀를 멸하려 하시는 것입니다. 요일 3 : 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니 이런 일들을 미리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 마귀가 알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결코 알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암호화하여 기록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 선지자들이 이런 것을 먼저 듣고 보았지만 그러나 자기들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은 실제로 이루실 때까지는 비밀이기 때문이지요. 과연 예수님이 오셔서 그 비밀을 당신의 모습으로 나타내 보여주셨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이루어주었는데 정작 하나님의 백성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믿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요 1 :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걸까요?
예를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탄생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 7 : 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아멘! 그런데 이것이 말이 되는 일입니까? 처녀가 아들을 낳는다고요? 처녀가 잉태하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어떻게 되지요? 한 마디로 간음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제 7계명이 “간음하지 말찌니라,”입니다. 하나님이 계명을 정해주시고 하나님이 계명을 어기셔야 합니까? 그렇다면 이 말씀을 왜 주셨는지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어찌 보면 있어서는 안 될 일을 만드시는 겁니다. 달리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을 만드시는 거죠. 그런데 과연 얼마나 이 말씀을 깊이 있게 생각하였을까요? 그냥 건성으로 읽고 암송한 것 아닐까요? 이것이 비밀입니다. 마귀도 이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러니 나중에 예수님이 태어나시고 나서야 알게 된 것이지요. 그 때서야 부랴부랴 메시야를 죽이려고 발버둥 칩니다. 그 결과 베들레헴 경내의 애매한 젖먹이들이 살해당하는 일이 발생하였습니다.(마 2 : 16)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마귀가 몰랐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마귀가 모르도록 그렇게 비밀 속에서 이루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메시야 장’을 보겠습니다. 사 53 : 2 - 3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아멘! 여기에 말씀하는 ‘그’가 누구일까? 이스라엘 백성이 생각을 했을까요? 고운 모양도 풍채도 없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상상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할 메시야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요? 6절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하나님은 그에게 우리의 죄악을 담당시키신답니다. 그러므로 해서 인생들이 드디어 죄에서 해방되어 자유함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야가 오신 것이고 그 하나님 뜻대로 이루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믿지 않은 것일까요?
이제 예수님은 구약성경을 이루시고 하나님은 그것을 또한 기록하여 우리에게 남겨주셨습니다. 요 19 : 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물론 이루신 것뿐만 아니라 다시 이루실 일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신약 곧 ‘새 언약’입니다. 신약성경에는 예수님이 오셔서 구약성경을 이루신 것과 다시 오셔서 이루실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도 다시 이루실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것이지요.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 날까지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빌 2 :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그것이 그렇게 만만하고 쉬운 일은 아닙니다. 벧전 2 : 2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그렇습니다.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자라야 합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신부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신부가 되려면 그만큼 자라야 하겠지요. 어린아이에게 결혼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무엇을 먹고 자랍니까? 육신이 밥을 먹고 자라듯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 말씀을 먹고 자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알지도 못하면서 구원받았다는 말이 됩니까? 그게 바로 마귀의 속임수입니다.
유대인들이 왜 예수님을 믿지 못했을까요? 한 마디로 말한다면 성경을 몰랐기 때문이지요. 성경을 몰랐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몰랐다, 그것은 곧 하나님을 몰랐다는 것이고(요 1 : 1) 하나님을 모르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과도 같습니다. 모르는데 어떻게 믿습니까? 하나님도 말씀하시지요. 호 6 : 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제사 드리기 전에 우선 제대로 알고나 드려라 그 말씀입니다. 누군지도 모르면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성경을 읽어도 모르면 모르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성경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에게조차 인정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말씀이지요. 요 8 :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여기 ‘너희’가 누구입니까? 서기관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백성의 영적 지도자들이었지요.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로 자부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단순히 나사렛 출신, 게다가 목수의 아들일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는 도무지 인정해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 13 : 55 - 57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뇨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렇습니다. 눈에 보이는 예수님은 단순히 한 가난한 집안의 자식일 뿐이었습니다. 어디 하나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어질 만한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더구나 하나님 말씀을 순종해야 하는데 오히려 거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공격성 질문에 더 짜증이 납니다. 눅 6 : 9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이 질문에 대답하기 곤란합니다. 그러니 죽일 생각만 하는 거죠. 11절 “저희는 분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 것을 서로 의논하니라”
우리는 지금 이미 이루어진 일들의 기록을 통하여 과거의 사건을 보다 쉽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앞에 또 하나의 사건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지요. 다시 오십니다. 어떻게 오실까요? 어디로 오실까요? 왜 오실까요? 생각 없이, 준비 없이, 기다리기만 하다가 역시 유대인의 전철을 밟을 것입니다. 그들은 외쳤습니다. 왜 너냐? 특히 서기관 바리새인들 그리고 제사장들의 입장에서는 도무지 용납하기 싫었을 것입니다. 행색도 별거 없고 나이도 한참 젊은 녀석이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것이 아주 눈에 거슬렸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혹시 와야 할 선지자가 이 사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하고 있습니다. 가당치도 않은 일이지요. 하나님의 아들이 어떻게 저런 하찮은 모습으로 올 수 있느냐, 그 말입니다.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질문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당신이야? 이렇게 고상하게 묻지도 않을 것입니다. 심보대로라면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왜 너야? 어떻게 너 같은 작자가 메시야가 될 수 있어?
생각해보겠습니다. 우리 또한 다시 오시는 그 분을 본 적도 없습니다.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냥 무작정 기다리면 됩니까? 교회들이 가르치고 있습니까? 우리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지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냥 기다리면 된다는 식으로 신앙생활 하고 있습니다. 누구의 모략입니까? 계 18 : 23절에서 분명히 마지막 때 “만국이 미혹되었도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국이, 다시 말해서 모두가 속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현실이 아닙니까? 아는 것도 없고 더 심각한 문제는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주님 다시 오십니다, 말은 합니다. 왜요? 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으니까. 예수님이 약속하셨으니 말은 해야지요. 그러나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바라고 기다린 적이 있을까요? 2천 년 동안 아무 일도 없었는데 설마 이제 뭔 일이 있을까 싶지요? 그것보다는 교회 부흥이 급선무이고 성전 건축이 당면한 문제인지도 모릅니다. 왜 그렇게 교회 부흥과 건축에 안달을 할까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요? 말이야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속은 자신의 세를 과시하고 싶은 것 아닙니까? 그래야 노회장도 하고 총회장 출마도 할 테니 말입니다. 개척교회 섬기는 목회자가 노회장이나 총회장 할 리가 없습니다. 꼭 그렇게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다 해도 동기 목사님들에게 속된 말로 쪽 팔리죠.
아무튼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 무난히 입성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하며 목회하는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눅 12 : 54 - 56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름이 서에서 일어남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남풍이 붊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 무슨 뜻입니까?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어찌 때는 분변하지 못하느냐 하고 꾸짖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때를 분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때를 분변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요? 우리가 하나님 말씀은 우리 영혼의 양식으로 알고 있습니다. 육신의 양식이 있듯이 영의 양식이 있는 줄 신앙인은 다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덮어놓고 먹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특히 마지막 때에는 더 중요합니다.
한 마디로 유대인들은 구약의 마지막 때 먹어야 할 양식을 거부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증거하신 말씀을 거부했다는 말입니다. 결국 예수님에게 버림을 받은 것이요 그것은 하나님께 버림당한 것과 같습니다. 쉽게 말한다면 모두 지옥행 열차를 탔다는 뜻입니다. 자기네는 하나님을 믿고 살았지만 결과는 지옥입니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신앙하면 안 되지요. 모두 예수 믿는다고 교회도 다닙니다. 그런데 지옥이라니 말이 안 되지요. 유대인들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생각대로 천국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 뜻대로 지옥으로 간 것입니다. 우리도 이제 신약의 마지막 때 살고 있다면 그 때에 맞는 양식을 먹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마 24 : 45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마지막 때 주인으로부터 칭찬을 듣는 종은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주는 자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목회자가 되어야 하고 이런 목자를 찾아야 합니다. 쉽게 말하면 때에 맞는 말씀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구약의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풀어주셨습니다. 오늘 말씀도 바로 그것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눅 4 : 21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무슨 뜻입니까? 이사야의 예언이 지금 이루어져서 너희 앞에 있다고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았습니다. 22절 “저희가 다 그를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하찮은 목수, 요셉의 아들이라고 무시했습니다. 다시 오셔도 하나님 백성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똑같이 말씀하실 것입니다. 신약의 예언의 말씀을 읽고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증거해줄 것입니다. 믿을까요? 그러기를 바랍니다. 사람을 보려하지 말고 증거하는 말씀을 들어봐야 합니다. 섣부른 판단을 하지 말고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우물 안 개구리가 되지 말고 여기저기 들어보십시오. 그리고 서로 알려주기를 바랍니다.
<발신제한>
우리나라에서 총기류를 소지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혹시 구했다고 하더라도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살아야 합니다. 행여 발각되면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형벌을 받습니다. 그러니 뭔 특별한 이유와 목적이 없는 한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만큼 개인의 신변 위험 요소가 적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정 넘어서까지 담대하게(?) 거리를 쏘다닐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인터넷을 통한 수만 가지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기에 총기 자체보다 어쩌면 더 위험한 폭발물을 가질 수 있다는 것에 놀랍니다. 소위 사제폭탄을 제조할 수 있는 기술을 쉽게 접한다는 것이지요. 총 한방보다 훨씬 강력한 살상력을 가집니다.
그래서 있을 수 있는 이야기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평범한 일반 시민이 분노하였습니다. 그리고 복수심에 이성을 잃었습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억대의 빚을 해결하고 그 다음 일은 계획이 없는 듯합니다. 물론 아무도 모르게 처리되고 일이 끝나기를 바라겠지요. 그러나 만약의 경우라는 것도 있습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사람의 마음과 계획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행여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일일진대 나만 무사할 것을 기대하는 것도 무리입니다. 상대방이 쉽게 따라와 일이 무사히 끝나고 당사자 둘만 알고 끝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입니다.
임신 중인 아내가 은행의 팀장의 추천과 안내를 믿고 거액을 투자합니다. 그러나 얼마 후 금융사고로 끝납니다. 당사자는 용케 사건에서 피하지만 피해를 당한 고객들은 아우성입니다. 그래도 개인적 안면이 있기에 은행 담당 팀장을 주차장에서 만나 조언을 듣고자 합니다. 물어내라고 다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처지를 어떻게 극복해야 되는지, 이 손해를 어떻게 최소화할 수 있을지 조언을 구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팀장은 따라붙는 여자를 나 몰라라, 듣는 둥 마는 둥 모른척하고 차를 몰아 나갑니다. 아마도 그 빚에 견디지 못하여 극단적인 선택을 한 모양입니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된 남편은 어떻게 대응할까요? 사랑하는 아내와 태중의 아기를 잃었습니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바쁜 아침을 당합니다. 출근길에 아이들 등교도 돕습니다. 앞좌석에 타려는 큰딸을 뒤로 보내고 조수석을 비워둡니다. 그래야 편하지요. 사무 도구를 놓거나 핸드폰을 둘 수도 있습니다. 운전하면서 나의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딸은 상을 찡그리며 뒷좌석에 남동생과 같이 앉아 갑니다. 운전하면서도 아빠는 이곳저곳 전화 받느라 바쁩니다. 딸 ‘혜인’이가 자기 내릴 곳을 지나칩니다. 아빠를 다그칩니다. 그런데 전화가 울립니다. 들고 보니 ‘발신제한’ 표시가 되어있습니다. 모르는 고객일 수도 있지요. 받습니다. 그런데 ‘팀장님!’ 하고 부릅니다. 모르는 목소리인데 누구지? 그 다음부터 심상치 않습니다.
좌석 밑에 사제폭탄이 설치되어 있답니다. 무슨 농담을? 이 바쁜 아침에 웬 장난전화요? 누가 장난해요? 그러나 듣자하니 장난이 아닙니다. 일거수일투족을 다 보는 듯이 말합니다. 뒤에는 아이들이 동승하고 있습니다. 자기 혼자 당하는 일이 아니지요. 거액의 송금을 요구합니다. 아이들만 일단 내려줄 것을 청하지만 듣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절로 굴러들어온 인질인 셈입니다. 당장 급한 것은 위협을 당하고 있는 팀장이지 자기가 아닙니다. 아이들도 처음에는 아빠가 웬 장난전화로 괴롭힘을 받고 있구나 싶었습니다. 그러나 도움을 청해 찾아온 처제와 동서가 탄 승용차가 바로 옆에서 폭발하는 사고를 당하고 나서 이것이 실제임을 깨닫습니다.
사건이 확대됩니다. 폭파 살인사건이 발생한 것이지요. 경찰들이 동원됩니다. 사건을 뒤쫓습니다. 폭발 사고 때 아들이 다쳐서 출혈이 심해집니다. 아이만이라도 살려달라고 애원하지만 소용없습니다. 지시대로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경찰까지 따돌려야 합니다. 그렇게 시내를 질주합니다. 여기저기 엉망진창을 만들면서 돌아다닙니다. 그리고 결국 바닷가 공터에서 포위됩니다. 아들은 일단 구조대에 맡겨집니다. 경찰의 도움을 받고 딸도 차에서 내립니다. 범인이 경찰과 협조하는 듯하여 팀장에게 다가와 동승합니다. 왜 이 지경이 되었는지 설명해줍니다. 비단 금융사고 피해자가 한 사람은 아니지만 이 남자는 가족을 잃은 한이 서려있습니다. 아직 신혼도 끝나지 않은 듯한데 다 잃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도 돈도.
범인도 살았다 한들 살인자입니다. 정상이 참작되겠지만 청춘을 감옥에서 보내야 할 것입니다. 안 됐기는 하지만 그렇게 인생 끝낸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이 팀장은 삶의 방식이 바뀔까? 하는 의문을 갖습니다. 물론 이 사건은 오래도록 각인되어 어떻게든 살아온 방식과는 다르게 인생을 만들 것이라 기대합니다. 가정과 가족들에게 그리고 직장에서도 여태 살던 방식이나 의식과는 다르리라 나타나리라 기대합니다. 문제는 얼마나 지속될까 하는 것이지요. 물론 사건의 크기와 당했던 심리적 고통이 트라우마로 작용하리라 짐작합니다. 영화 ‘발신제한’(HARD HIT)을 보았습니다. 주로 자동차 안에서 나타나는 배우의 심리 묘사가 대부분입니다. 애썼지요. 그런데 이 영화 2016년 작 스페인 영화 ‘레트리뷰션 : 응징의 날’(2015년 작)을 복사한 듯합니다. 내용이 거의 같습니다.
<낫아웃>
그렇게 큰돈을 요구하는 줄 몰랐을 것입니다. 아는 순간 낙담하였을지도 모릅니다. 그저 단순히 일이 백 정도로 짐작했겠지요. 세상의 형편을 잘 모르고 있을 때입니다. 사실 일이 백 정도라 해도 ‘광호’에게는 대단히 큰돈입니다. 아무튼 자기 힘으로 한 열흘 정도 고생하면 되겠지 싶었을 것입니다. 자기가 애쓴 것으로 가져갔는데 감독에게는 한 마디로 어린아이 장난이나 마찬가지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세상 물정 모르는 학생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나하고 장난하자는 거야?’ 광호의 입장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떻게 고생해서 만든 돈인데 말입니다. 자기 딴에는 꽤나 큰돈이니 전혀 예측하지 못한 무시를 당했습니다.
웬만큼 뛰어나지 않다면 그저 실력만으로 세상을 이겨낼 수는 없습니다. 소위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네 사회생활 곳곳마다 스며들어 있습니다. 일반적인 공개채용 속에서조차 편법이 숨어있어 나중에 발각되어 지탄 받는 경우도 가끔 봅니다. 속된 말로 재수 없어서 걸린 것이지, 거기 한 곳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다는 아니더라도 널리 알려진 이름이 아니라면 각각의 속에서 은밀하게 이루질 것입니다. 대부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고 있으니 사건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일을 당하는 개인의 입장에서는 일단 자기만 통과하면 그만일 테니 공론화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 관행은 은밀하게 지속됩니다. 더구나 그 일을 행하는 사람이 이미 자기도 당한 대로 되찾으려는 마음이 있지 않겠습니까?
고등학교 운동부 감독은 사실 선수들에게 있어서는 왕 같은 권력자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장래를 지도하고 지시하고 안내까지 합니다. 좀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감독의 한 마디 또는 추천하는 한 마디가 그 선수의 장래를 좌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이런 사실을 알게 되면 자연히 선수의 부모까지 나서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일반 경쟁이 아니라 감독의 추천이 막강 힘을 가지고 있기에 어쩔 수 없이 감독에게 잘 보이려고 힘을 씁니다. 짐작하겠지만 그냥 힘쓰는 것이 아니라 그만한 대가가 오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실 정말 뛰어난 1등이 아니라면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만큼 가격이 올라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선수보다 부모가 힘들게 됩니다.
운동선수들 속에 숨겨진 애로사항입니다. 어떻게 보면 진로가 매우 좁습니다. 그 분야에 국한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만큼 경쟁도 세고 선수들은 자신의 장래를 생각하며 고민도 많이 할 것입니다. 과연 이 길이 내가 가야 하는 길인가? 반복하여 생각하고 고민할 것입니다.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일찍 다른 길을 모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정말 좋아하고 또 하고 싶은 운동이고 이것으로 직업을 삼고 싶다는 결심이 선다면 감독과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감독이 어여삐 보고 잘 배려해준다면 그나마 다행한 일입니다. 그러나 여러 선수들을 다루며 제한된 운동선수 취업의 문을 찾아야 하는 상황에서 감독은 그 나름대로의 애로사항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인간적으로 자신의 실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함께 살아온 의붓아버지이지만 나름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입니다. 가능하면 의붓아들 광호를 잘 뒷바라지해주고 싶습니다. 그러나 조그만 음식점은 생각만큼 충분하게 경제적 도움을 이끌어내지 못합니다. 함께 일해오던 아내(광호 친엄마)는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었습니다. 혼자서 지탱하기도 버거웠을 것입니다. 이제 광호도 자기 앞길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든 야구를 하고 싶어 합니다. 하기야 아버지가 일찍 권해서 들어선 길이기도 합니다. 이제는 광호가 좋아해서 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장애를 만난 것이지요. 필요한 것은 돈입니다. 어쩔 수 없이 불법 휘발유 판매에까지 뛰어들었지만 그마저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프로에 입단하려 했지만 선발에서 제외됩니다. 그래도 야구를 하려니 진학으로 바꿉니다. 결국 아버지는 가게를 처분하고 아들의 진학을 돕습니다. 아버지와 다투기도 했지만 사실을 알고 나서는 아버지의 수고를 이해하였을 것입니다. 어렵게 진학을 해서 일단 다시 야구는 계속하게 됩니다. 과정이 어렵고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얻은 것이 있습니다. 우선 아버지와의 관계입니다. 비록 의붓아버지이지만 친아버지만큼의 애정으로 돌봐주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분명 광호의 인생길에 앞으로도 큰 힘이 되어주리라 믿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회의 일면도 배웠을 것입니다. 세상은 실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말입니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습니다. 매우 답답함을 느끼며 이야기를 따라갑니다. 더구나 광호의 성격이 밝고 활달한 것도 아닙니다. 말도 적고 표현도 제대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주변 사람들과도 그다지 친밀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분위기 그렇지, 사람이 그렇지, 상황 또한 어렵지, 참으로 보기 힘든 영화입니다. 그만큼 광호 역할의 연기가 괜찮았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말은 적게 하면서 몸과 표정으로 나타내야 하니 말입니다. 영화 ‘낫아웃’(NOT OUT)을 보았습니다. 글쎄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정도로 해석해야 하나요? 어둡지만 해피엔딩으로 봅니다. 다행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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