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생명
- 오정순-
가족이 함께 해외 여행을 떠났다. 집에 누군가를 남겨두고 오지 않아 홀가분하게 다니다 보니 마치 내 나라인지 남의 나라인지 별반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그냥 오래 산다면 나는 내 나라를 떠난 기분이 들지 않을 것 같았다. 그 순간 바로 나에게 다가온 단어가 ‘영원한 생명’이었다. 이렇게 욕망이 담긴 육적 세계를 떠나 영혼이 자유로운 영적 세계로 옮겨가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향한 여정임을 실감나게 이해했다.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바로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들어가는 비자를 발급받는 것과 다르지 않다. 비자에 찍힌 도장이 국가 간의 믿음을 통한 전 인격적 인증서인 것처럼 영적 삶 또한 믿음 없이는 가짜인 셈이다.
해외에 있는 우리를 한국에서 볼 수 없어도 우리는 살고 있으며, 연락을 하지 않아도 여행지에서 한국에 계신 어머니를 위해 기도했다. 산 자와 죽은 자가 기도 속에서 만난다는 말 또한 실감났다. 영원한 생명을 믿는 사람한테는 죽음이 그다지 두려운 과정이 아닐 것이며 살아서 천국을 살다가 육신의 옷을 벗으면 그뿐이다.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난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란 말씀을 믿고 진정으로 ‘아멘’ 할 수만 있다면 그 영원함이 바로 순간의 연속이라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저도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봄이나 가을을 좋아합니다. 즉, 아름다운 꽃이 피는 봄을 그리고 예쁘고 멋진 단풍을 볼 수 있는 가을을 좋아하지요. 더군다나 이 시기는 덥지도 춥지도 않아서 생활하기 편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주저 없이 봄이나 가을을 좋아하는 계절로 꼽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은 그렇게 길지가 않은 것 같습니다. 봄이 왔다 싶으면 어느새 더운 여름이고, 가을이 왔다 싶으면 어느새 추운 겨울입니다.
생각해보면 이렇게 계절만 그런 것이 아니네요. 좋은 시간일수록 시간이 빨리 흐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시간, 청춘의 시간, 노는 시간, 여행하는 시간 등은 왜 이렇게 짧다고 느껴질까요? 이러한 시간들은 좀 더 길고 영원했으면 좋겠는데 참 빠르게 지나가는 반면에 고통과 시련의 시간은 항상 길게만 느껴집니다.
그런데 우리가 짧게 느껴지는 그 좋은 시간들이 정말로 짧은 것일까요? 아니지요. 생각하면 그 짧은 시간 안에 오히려 영원한 아름다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짧게 지나가버린 시간 같지만 우리들의 머릿속에 그리고 마음속에 남아서, 순간순간에 우리를 미소 짓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짧다고 하면서 아쉬워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짧다면서 아쉬워하는 것이야말로 영원한 가치가 있음을 기억하면서 열심히 살아간다면 우리들은 지금 이 시간을 보다 더 의미 있고 소중하게 간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들은 매 순간을 의미 있고 소중한 시간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짧다고 느껴지는 그 시간들에 대해 아쉬움만을 간직한 채 끊임없이 과거에 연연하기 때문에, 지금 행복해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가져오면서 더욱 더 힘들게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불완전한 우리 인간들을 위해서, 그래서 제대로 살지 못하는 우리들을 위해 참되고 영원한 가치를 지니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들어 올려 졌습니다. 즉, 광야에서 뱀을 본 이스라엘 사람들이 죽지 않았던 것처럼, 들어 올려진 예수님을 믿고 바라본 사람들은 절대로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천년이라는 역사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굳은 믿음을 보였습니다. 그 결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었지요. 그 역사를 통해, 우리 역시 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 이 순간에 기쁘고 행복하게 사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완연한 봄입니다. 실내에만 있지 마시고 밖에 나가서 봄을 느껴보세요.
대화를 하십니까?
- 김우정 신부-
사람들이 일상을 풀어나가는 데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대화’입니다. 대화가 오가면서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고 여러 문제가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도 하며, 때로는 생각지 않은 이익을 얻기도 합니다. 이처럼 유익한 대화도 있지만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상황이 악화되기도 하고 관계가 깨어지기도 하며 엄청난 손해와 상처를 남기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수많은 대화 속에 숨어 있는 재미있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대화가 때로는 논쟁이 되고, 또 논쟁이 이따금 싸움으로 번지는 것을 보면서 처음에는 서로 그럴 마음이 아니었는데 왜 그럴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 원인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대화·논쟁·싸움으로 이어지는 구도에는 언제나 자신의 입장을 상대에게 관철시키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상대방의 말을 들어야 할 때 자신이 말할 것을 미리 생각합니다. 많은 경우 자신이 아는 것, 경험한 것 외에는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고 그보다는 내가 상대방을 이해시킬 수 있을까, 아니면 상대방에게 내가 설득당하지 않을까 하는 데 더 관심을 둡니다. 그러다 보면 서로에 대한 배려가 사라지고 계속되는 대화는 문제의 핵심에 접근해 그것을 풀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싸움으로 번지고 맙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과 니코데모의 대화를 듣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가능성은 염두에 두지 않은 채 자신 안에만 머뭅니다. 그래서 니코데모처럼 자신의 이해를 위한 질문에만 급급합니다. 그러다 보면 일반 상식조차 통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말씀하시기보다 언제나 우리의 말을 경청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상대방 안에 함께 계시는 주님의 말씀에 얼마나 귀 기울이고 있습니까?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양승국신부-
<우주 전체가 축복의 꽃밭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일생에 단 한번만 태어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그 극진한 사랑도 체험해보지 못하고, 위로도 받아보지 못하고, 일생동안 죽으라고 ‘쌩고생’만 하다가 쓸쓸히 이 세상을 떠나갑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습니까? 하느님 축복 속에 이 세상에 태어났지요. 다행스럽게도 물로 세례를 받으며 두 번째로 태어나지요. 그뿐만 아닙니다. 성령의 불로 또 다시 한번 태어납니다. 위로부터 태어나는 것입니다.
진정 ‘위로부터’ 태어날 때 얻게 되는 축복은 또 얼마나 풍성한 것인지 모릅니다.
위로부터 태어난 사람은 바람처럼 자유롭습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바처럼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흘러갑니다. 그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습니다.
위로부터 태어난 사람은 모든 세상만사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자리에 연연하지도 않습니다. 물건에 집착하지도 않습니다. 하느님 안에 진정으로 살아있는 것입니다.
위로부터 태어날 때 지루하고 고달프게만 느껴졌던 우리의 일상생활이 영롱하게 반짝반짝 빛나게 될 것입니다.
위로부터 태어날 때 매일 다가오는 갖은 형태의 십자가들도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선물로 변화될 것입니다.
위로부터 태어날 때 세상이 바뀝니다. 인생관이 바뀝니다. 거치관도 바뀝니다. 내 인생 전체, 우주 전체가 축복의 꽃밭으로 변화됩니다.
결국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평생의 과제는 위로부터 태어나는 것입니다.
<독서> : 믿음으로 하나가 된 초대교회 공동체
- 경규봉 신부-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신 교회는 각자가 자신의 재산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고 공동체가 필요로 할 때에 내어놓고 공동으로 사용했다. 이는 하느님 나라의 능력인 동시에 하느님 은총의 결과였다. 교회가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여 거룩한 친교를 나누게 되면 자연히 신자들도 서로 사랑의 친교를 나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도들이 전한 복음의 핵심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이며, 유다인들이 십자가에 죽인 그 예수가 바로 ‘메시아’임을 밝히는 것이었다. 사도들은 사두가이파 사람들과 산헤드린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담대하게 하느님의 뜻에 따라 복음을 전파했다. 이 복음을 받아들인 이들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화를 누렸다. 그리하여 신도들은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화로 한마음 한뜻이 되어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그 결과 초대 교회의 구성원들이 각기 다른 신분과 지위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사람이 하나도 없게 되었다. 사도들은 신도들이 내어놓은 재물을 구성원의 필요에 따라 분배해주었다. 그 결과 하느님의 백성 가운데 빈곤한 자가 결코 없을 것이라는 구약성경의 약속(신명 15,4)이 초대교회 내에서 실현되었다.
키프로스 태생의 레위 사람인 요셉은 사도들로부터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의 바르나바라는 이름을 얻을 정도였다. 그는 자신의 소유를 팔아 교회 공동체에 아낌없이 내어 놓음으로써 뛰어난 믿음의 행위를 보였고, 교회의 발전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으며(11,24)), 믿음을 갖게 된 첫 레위 사람으로서 복음에 대해 유대인이 가진 편견을 허물어준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밭을 팔아 사도들에게 모두 바쳤다.
사도들이 전한 복음은 초대교회 신도들에게 커다란 기쁨과 평화를 안겨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게 하였다. 그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함으로써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주십시오.”(요한 17,11)라는 주님의 기도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처럼 서로 일치된 이들에게는 더 이상 자신만의 것이란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었기에 형제의 아픔과 굶주림은 나의 아픔과 굶주림이며, 형제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이었다.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소유도 자신만의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자신이 가진 재산은 공동체의 필요를 위해 팔아야 할 필요를 느끼기 전까지만 자신에게 맡겨져 있는 하느님의 것이라는 믿음이 자라났다. 자신의 소유는 모두 하느님의 것이며, 따라서 이를 잘 관리해야 한다는 믿음이 초대교회 신도들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러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공동체가 재물을 필요로 할 때 아낌없이 자신의 것을 내어놓았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아까운 줄 몰랐다. 이처럼 신앙은 하느님과의 친교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형제들과의 친교와 나눔을 가져온다. 그럼으로써 신앙은 모두가 하나 되게 한다.
그러나 불신은 사람들을 서로 갈라놓아 적이 되게 하고 사람과 하느님과의 사이도 갈라놓는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고 하느님을 불신했기 때문에 하느님과도 멀어졌고, 그들 사이도 서로 갈라졌다. “내 뼈에서 나온 뼈요,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창세 2,23)라고 외쳤던 아담이 하와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을 거스르게 되었다고 자신의 잘못과 죄를 하와에게 전가했던 것이다. 그래서 서로 믿지 못하는 사회 안에서는 부부도, 부자나 모녀 사이도 서로 하나 되지 못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적이 되고 만다. 이러한 사회에는 분열과 불화만이 있을 따름이다.
신앙은 그 자체가 축복이며 은총이다. 예수님께서도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라고 말씀하셨다. 신앙 안에서 신앙으로 살 때, 우리는 하느님과 하나 되고, 이웃과 하나가 된다. 이러한 속에서만 우리는 기쁨과 평화를 누릴 수 있다. 그러므로 주님께 대한 믿음을 통해 주님과 하나 되고, 이웃과 하나가 됨으로써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기쁨의 삶을 누리자.............◆
-김웅태 신부-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죄의 사함을 받고, 주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을 받게 된다고 알고 믿고 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될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보면 예수께서 니꼬데모에게 "다시 나야한다!"하는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즉 예수께서 가르쳐 주시는 올바른 진실을 진실 그대로 우리는 알아듣고 받아들여야 하는데,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기에서 두 가지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첫째로, 진실을 파악할 수 있는 지식의 부족과 경험의 부족입니다. 즉, 지식의 부족과 경험의 부족에서 뿐만 아니라, 진실을 알아보려는 의도가 없기때문에 진실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즉, 보기를 거절하기 때문에, 알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 마음을 닫아버리게 됨으로써, 진실을 외면하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 복음에서, 영원한 삶을 살기위하여 "다시 나야 한다"는 예수님 말씀의 진실을 외면하면, "다시 나야 한다"는 그 의미를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변화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기를 변화시킬 수 있는 하느님의 능력에 대하여 고의로 눈을 감고, 마음을 닫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보면, 니꼬데모는 예수님께서 일러주시는 말씀에 대해서 "당신이 말씀하시는 "다시 나야 한다" 는 것이 가능할 지는 모르나, 그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떤 작용으로 그렇게 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는 것입니다. 그러한 니꼬데모에게 예수님은, "나는 그대에게 쉽게 말해주려고 했다. 나는 일상 생활 속에 있는 소박한 사람들의 일들을 사용해서 말했다. 그런데도 그대는 알아들을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게나 평범한 일도 그대가 깨달으려고 하지 않는다면 하물며, 더 깊은 일을 어떻게 그대가 깨닫기를 바라겠는가?"하십니다. 여기에 우리 모두에게 향한 경고의 말씀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하신 이 모든 말씀이 사실일지? 혹은 반대로 사실이 아닐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무슨 권리로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을까요? 그 말씀이 사실이란 것에 어떤 보증을 찾아 볼 수 있는가?하는 점입니다. 그 답은, 예수님이 그런 말씀을 할 수 있는 진리, 그분이 하느님을 직접 알고 계시며, 알고 계신 분으로써 그 신비를 세상 모든 사람에게 전하러 오신 분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믿음
-김유철 신부-
예수님에게는 소원이 한 가지 있습니다. 니코데모와의 대화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위로부터 태어났으면’(3,7 참조)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의 권능을 위로부터 태어나지 못한 자들에게 보여줍니다.
아픈 자를 낫게 하고, 마귀를 쫓아내며, 가르침을 통해 하느님의 나라를 알립니다.
모든 사람들이 알고 깨달아서 물과 성령을 통해 거듭 태어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한다”(3,11). 즉 모르는 것은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유한한 인간은 유한한
삶을 삽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둘러보면 모든 것은 다 수명이 있습니다.
죽지 않는 것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모두가 유한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것들뿐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유한한 세상을 살면서도 ‘영원한’, ‘무한한’,
‘끝없는’, 이런 단어를 알고 있고 그 의미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잘 인식하지는 못하지만 우리의 마음 깊숙한 곳에는 영원한 나라에서 살던
기억조각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本)고향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타향에서 이방인으로 살던 삶을 이젠 그만 끝내라고
말씀하십니다. 유한한 세상에서 머리를 들어 영원한 나라로 우리를
다시 모아들이려 오신 당신을 믿고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은 이처럼
우리를 영원한 고향으로 이끄는 강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부활 제2주간 화요일
- 이성주 신부-
오늘도 우리는 어제 복음에 이어 니코데모와 예수님과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제는 아니었지만 율법을 공부하는 열심한 바리사이였던 니코데모도 예수님의 말씀이 어렵기는 어려운가봅니다. 위로부터 태어나야 된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율법과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니코데모는 자기의 생각이 맞다고 무조건 우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내 생각이 틀리면,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받아들일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니코데모는 우리에게 남의 이야기를 들을 줄 아는 열린 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는데, 니코데모는 이스라엘의 스승이면서도 아직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실 이름이 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만큼 많이 공부해야 되고, 지켜야할 율법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외우고, 또 실천까지 해야 되기에..... 그렇게 이름이 난 니코데모도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힘들었던 것입니다. 미처 몰랐던 것이고 그냥 외울 수만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니코데모를 통해서 우리는 신앙은 외워서 받아드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처럼 새로 나야 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오고 하늘로 올라간다는 것을 어떻게 우리의 머리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신학교시절 시험공부를 하다보면 이해하기 보다는 무조건 외우려고만 했습니다. 아니 기도문도 외우려고만 했습니다. 이해하지는 않고, 남들보다 못하다는 말은 듣기 싫어서 말입니다. 그런데 살다보니 외우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성령의 힘으로 부활신앙이 삶의 중심에 자리 잡아지고, 예수님에 대한 기도문이 마음으로 와 닿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름난 스승 니코데모가 율법을 외우지 못해서 예수님을 찾아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보여 주시는 표징을 통해서 하느님이 손수 인간이 되신 그 사랑을 알고 싶고, 받아 드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두려워 밤에 찾아갔지만,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새로 나야 되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 니코데모는 요한복음7장에서, 예수님을 끌고 오지 않은 성전경비병들에게 질책하는 수석 사제들과 다른 바리사이들 앞에서 당당히 자신의 생각을 말합니다. “우리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 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말이요?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7,51-52).”라고 핀잔을 주는 예수님의 반대세력들이 하나도 두렵지 않게 된 것입니다.
우리 때문에 십자가 위에 들어 올려지고, 돌아가시고,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두려움이 없어지게 됩니다. 오늘 사도행전4장이 전하는 독서의 말씀이 이를 잘 알려줍니다. 초대교회 신자 공동체는 자기가 남들보다 못하면 어떻게 되지 하는 두려움에서 벗어나, 기꺼이 자기 것을 내어 놓고 함께 나누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나누는 것은 율법 속에만 머물지 않고, 우리와 함께 계신, 살아계신 하느님을 보여주는 사랑표현입니다. 부활신앙은 외우는 것이 아니라, 실천이고, 내가 남들보다 뒤쳐지는 것은 아닐까하고 걱정하는 우리 자신을 죽이고, 하느님의 힘을 받아드리는 용기입니다.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은 “성령을 받아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성령이 주는 믿음의 은사를 통해서 우리는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도 니코데모처럼 예수님을 찾아가야 되고,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처럼 귀를 활짝 열고서 들어야 되고, 또한 주님을 우리 집에 머물도록 청해야 됩니다. 아멘.
"새로 나야된다."
-양승국신부-
<적어도 80까지는>
귀가 시간이 많이 늦어져서 택시를 탔습니다. 개인택시 기사님의 서비스는 제 마음을 훈훈하게 해주었습니다.
꽤 연세가 지긋해 보이셨던 기사님(아마도 제 부친 뻘 되어 보이시는)께서 아직 새파란 제게 깍듯이 인사를 건네시는 바람에 갑자기 저는 무안해졌습니다.
"감사합니다. 어서 오세요. 날씨가 많이 더워졌죠?"
갑자기 요즘 보기 드문 "과잉친절"을 받은 저는 너무나 황송해서 어쩔 줄을 몰랐지만, 진심으로 감사 드리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집에 도착하기 직전 그 어른께서 제게 하셨던 말씀은 너무도 감동적이었습니다.
"제 나이가 올해 일흔이 넘었지만 자식들 신세지지 말고 건강 허락하는 날까지 열심히 뛰어야지요. 개인 택시, 이거 이래봬도 무시 못합니다. 슬슬 해도 하루 칠 팔 만원은 거뜬히 벌지요. 하긴, 택시 몰다보면 별 사람 다 만나고 속상하는 일도 많이 생기지만 그러려니 합니다. 남의 돈 벌기가 어디 쉬운가요? 나이 들수록 허세 부리지 말고, 뒤로 빼지도 말고 더 열심히 살아야 됩니다. 지금 마음 같아서는 80까지는 뛸 수 있을 것 같아요."
연로하심에도 불구하고 겸손과 성실의 미덕을 지니신 기사님의 삶은 제게 많은 생각거리를 안겨주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어제에 이어 "새로 나야 된다"고 강조하십니다.
새로 난다는 말은 "내가 올해로 종신서원한지 몇 년짼데" "이 몸이 올해 몇 살인데" 하는 마음먹지 말고 매순간 새롭게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새로 난다는 말은 내가 사젠데" "내가 수도잔데" "내가 누군데" 하는 마음 갖지 말고 매일 겸허하게 자신을 떠난다는 말입니다.
새로 난다는 말은 나이 들수록 삶의 연륜이 쌓여갈수록 교만해지지 말고 조심조심 시작했던 초심자의 마음으로 돌아간다는 말입니다.
새로 난다는 말은 순간순간 우리라는 작은 자아를 포기하고 크신 주님의 머물기 위해 모든 집착에서 떠난다는 말입니다.
새로 난다는 말은 죽는 순간까지 새 마음, 첫 마음, 소박한 마음, 겸손한 마음을 지닌다는 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죽은 지 오래된 뿌리만 남은 나무등걸에서도 새순이 돋게 하는 분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죽은 지 오래되어 살 썩는 냄새만이 진동하는 라자로에게 새 생명을 부여하신 분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갖은 죄와 악행으로 오염된 우리 영혼에게서도 생명수가 솟게 하시는 분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새로 나야 된다.
-정민수 신부-
◆예수님이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시자 니고데모는 “다 자란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 하고 반문합니다. 예수님은 영적으로 다시 태어남을 말씀하시는데 니고데모는 육체적인 재생으로 오해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예수님은 영적 재생의 필요성을 말씀하시면서 짤막하게 성령론을 펴십니다.
우리도 가끔은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바람을 가집니다. 다시 태어난다면 절대로 저런 사람을 만나 결혼하지 않을 것이고, 지금보다 공부도 더 잘할 것이며,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완전히 다른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지요. 내가 다시 태어날 때는 온갖 지식과 좋은 환경에서 태어난다는 보장도 없을 뿐더러 또다시 갓난아기부터 시작해서 지겹도록 공부해야 하는데 어찌 지금보다 더 잘할 수 있고, 더 나은 상황이 나에게 주어지리라고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니고데모처럼 육적인 재생만이 내가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결과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듯 우리는 성령으로 다시 태어났으며 그렇기에 늘 새롭게 변화된 삶을 살아갈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육적으로 새로 태어나는 것보다는 영적으로 새로 태어나는 것이 훨씬 쉬운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지금 나와 함께 살아가는 가족과 이웃이 내가 만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그들을 더욱 사랑하는 삶을 통하여 새로 태어나 영원한 생명에 한 발자국 다가서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바람같은 자유인
-강영구신부-
그대에게
나무(木)를 심는 것은 생명을 심는 것입니다.
五行은 木生火, 火生土, 土生金, 金生水, 水生木입니다. 땅(土)은 모든 것의 바탕입니다. 땅 위에 물이 흐르고 나무가 자랍니다. 나무(木)는 물이 있어야 자라지만 나무가 없으면 물(水)의 성질을 다스릴 수 없게 됩니다. 나무는 동물들이 숨을 쉬게 하고 먹을 것과 안식처를 제공하고, 따뜻함(火)을 보존하도록 합니다. 나무(木)는 땅(土)을 비옥하고 아름답게 만듭니다.五行의 相生原理에 따르면 나무를 심는 것은 생명을 심는 것입니다.
땅(土)에 나무(木)를 심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슴과 영혼에 나무를 심고 가꾸는 것도 중요합니다. 당신은 신앙인이니까요.
성령으로 난 사람은 바람 같은 자유인(自由人)이 됩니다.
하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하늘의 뜻을 따르는 성령의 사람은 무애인無碍人이 됩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십자가도 그분을 죽음의 권세에 넘기지 못합니다.
무덤도 그분을 가두어두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께서 맺어주시는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그리고 절제입니다. 이것을 금하는 법은 없습니다.”(갈라5,22)
그러나 하늘을 외면하고 이기(利己)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늪에 빠진 처지와 같습니다.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의 족쇄는 몸부림치면 칠수록 더욱 숨통을 조입니다.
그리고 ‘음행, 추행, 방탕, 우상숭배, 마술, 원수 맺는 것, 싸움, 시기, 분노, 이기심, 분열, 당파심, 질투, 술주정, 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것, 그 밖에 그와 비슷한 것들’(갈라5,19)을 열매 맺습니다.
당신은 성령의 사람이 되어 자유를 누리시기를 원합니까?
욕망의 노예가 되어 향락을 누리시겠습니까?(一明)
하느님 영의 역동성과 창의성
-박상대 신부-
교회는 오늘 부활 제2주간 월요일부터 예수님의 부활사건에 관한 복음선포를 접어두고 성령강림대축일 직전인 부활 제7주간 목요일까지 사람들이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통하여 얻게되길 희망하는 '생명'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작업을 시도한다. 생명의 의미를 밝히는 작업은 무엇보다도 이 시기동안 봉독되는 사도행전의 독서말씀과 요한복음서의 복음말씀으로 시도된다. 특히 '생명의 책'이라 불리는 요한복음에서 선택된(3장, 6장, 10장, 12-16장) 말씀들이 생명의 의미를 충분히 밝혀 줄 것이다.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시작으로 오늘 복음(요한 3,1-8)이 그 장(場)을 열고 있다.
문맥상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오늘 복음의 이전 부분을 잠시 보자. 거기에는 과월절을 맞아 상경하신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머무시는 동안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셨고 이 기적들을 본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믿음도 아니고,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믿음도 아니다. 따라서 이 믿음은 영원한 생명과는 무관한 믿음이다. 그저 예수께 대한 호감(好感)이라 표현함이 적당할 것이다. 그래서 요한복음사가는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마음을 주지 않으셨다"(2,24) 라는 표현으로 이 점을 암시하고 있다. 이 암시는 곧 영원한 생명에 대한 예수님의 언명(言明)이 있어야 함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제 예수께 대한 호감(好感) 이상의 마음을 가진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를 찾아와 묻는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고서야 누가 선생님처럼 그런 기적들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2절) 이 대목은 어느 율법교사가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선생님, 제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루가 10,25) 라는 질문과 비슷한 유형이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질문을 던질 만큼 준비되어 있지는 않다. 그것이 그가 밤에 예수를 찾아온 이유이다. 이는 유다인들의 지도자에 속하는 니고데모가 다른 유다인들의 눈을 피하고자 하는 속셈일 수도 있고, 니고데모 스스로가 지금까지 몸담아 왔던 유다교 신앙에 대하여 혼돈과 의심을 가지고 있다는 간접적인 표현일 수도 있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가 던진 질문 이상의 차원으로 응수하신다.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3절) 새로 태어나야 함의 의미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니고데모의 반문에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님은 강행(强行)하신다.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며 영에서 나온 것은 영이다."(5-6절)
이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영(靈)에 의한 삶을 영위하려 하거나, 하느님의 나라를 직관(直觀)하려 하거나, 하느님의 나라에 입적(入籍)하려 하는 자는 물과 성령의 세례(洗禮)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요한복음이 말하는 '물과 성령의 세례'는 우선적으로 내적 변화를 통한 새사람이 됨을 의미한다. 니고데모에게 주어진 과제는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다. 니고데모는 오늘 예수님으로부터 육체를 지배하는 율법에 의한 묵은 삶을 벗어버리고 영을 지배하는 사랑에 의한 새로운 삶에로 초대받은 것이다.
이어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가 계속된다. 오늘 복음의 대화는 물과 영으로 '새로 남'의 의미에 대한 추가설명(7-10절)과 예수님의 자기계시적(自己啓示的) 가르침(11-15절)의 두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앞의 복음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최소한, 그러나 절대적인 조건으로 '새로 태어나야 함'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니고데모의 생각은 더 이상 진행될 수가 없었다. 이 세상에 한 번 태어난 사람이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올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 따라서 예수께서는 '물과 영'으로 새로 태어나야 함을 제안하신 것이다.
'물'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물은 생명(生命)과 정화(淨化)를 상징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생명과 깨끗함을 가져다준다. 문제는 '영'에 대한 것이다.
영(靈)에 대한 지식은 모두가 짧다. 히브리어의 '루아흐'(Ruah)나 희랍어의 '프네우마'(Pneuma)는 구약성서에서 '바람, 호흡, 영혼, 정신' 등을 가리키는 의미로 다양하게 쓰인다. 예수께서는 '영'을 니고데모뿐 아니라 사람들이 이해하기 쉬운 '바람'에 비유하여 설명하신다. "바람은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분다"(8절)는 말은 '영'의 자유로운 속성을 가리킨다. 바람이 부는 소리는 우리가 들을 수 있으나, 어디서 불어와 어디로 가는 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오늘날 과학의 발달에 힘입어 기상대가 관측하여 바람의 방향을 예보(豫報)할 수는 있으나, 예보는 어디까지나 예상(豫想)이며, 가정(假定)이다. 따라서 바람의 방향은 언제나 불확실하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바람의 성질을 통하여 영의 역동성(逆動性)과 창의성(創意性)을 암시하신다. 그래서 곧바로 "성령으로 난 사람은 누구든지 이와 마찬가지다"(8절)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공동번역 성서는 여기서 '성령'이라고 말하지만, 희랍어 원문에는 그냥 '영'으로 기록되어 있음에 주의해야 한다.
아직까지 하느님 성삼(聖三)의 구조를 언급할 단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대목의 '성령(聖靈)'은 그저 '거룩한 영'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언급을 한다고 해도 하느님에 대한 유일신(唯一神) 사상을 전부로 알고 있는 니고데모가 이를 이해할 턱이 없다. 따라서 니고데모의 반문은 하느님 '성령'이 아니라 막연한 '영'에 의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9절) 라는 식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이어서 예수님의 "너는 이스라엘의 이름난 선생이면서 이런 것들을 모르느냐?"(10절)라는 꾸중은 니고데모가 '영'에 대한 사고의 지평을 넓혀야 함을 고무하는 말씀인 셈이다.
이제 '정말 잘 들어 두어라'(11절)라는 요한복음의 특유한 표현으로 두 번째 단락이 시작된다. 즉 예수님의 자기계시적 가르침이 주어진다는 뜻이다. 이 가르침은 단지 니고데모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니고데모가 어제 복음에서 "선생님, 우리는..."(3,2) 하고 시작했던 물음의 서두를 기억하여 예수께서도 제자들을 포함한 '우리는'이라는 표현과 니고데모와 같은 부류에 속하는 유다인들을 지칭하는 '너희는'이라는 표현으로 가르침을 내리신다. 이 가르침은 '너희'를 포함한 세상에 대한 예수님의 자기계시를 의미한다. 예수님의 자기계시(自己啓示)는 그분이 말씀하시는 '하늘의 일'이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자기계시적 가르침은 사실상 보류(保留)되고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예고하는 암시로 마무리된다. 그것은 니고데모를 포함한 세상 사람들이 '세상의 일'(바람에 비유된, 또는 바람과 같은 영의 의미와 능력) 조차도 깨닫거나 믿지 못하기 때문에 '하늘의 일'을 깨우치거나 믿는다는 것은 더욱 어렵기 때문이다. 성서학자들은 십자가 죽음에 관한 예고의 대목(13-15절)을 예수님의 직접적인 발설(發說)이라기보다는 요한복음저자의 독자적인 편집으로 간주한다. 그것은 공관복음에서 세 번씩이나 발견되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예고가 요한복음에는 없기 때문이며, 물과 영으로 다시 태어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께 대한 믿음에 연결시키고자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과 영으로 새로 태어남'은 분명 세례성사를 의미한다. 세례성사에서 물의 역할을 아주 중요하다. 모든 성사에서 합법적인 성사거행을 위해 필수 불가결한 것은 형상(形象)과 질료(質料)이다. 세례성사에서 물은 질료에 속한다. 물은 생명(生命)과 정화(淨化)를 상징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생명과 깨끗함을 가져다준다고 했다. 그렇다고 물이 성사를 베푸는 것은 아니다. 물은 어디까지나 상징적인 것이다. 따라서 세례성사가 목적으로 하는 '새로 태어남'을 가능하게 하는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힘, 새 생명을 가져다주는 힘은 바로 하느님의 영이다. 이는 세상을 창조한 하느님의 기운(창세 1,2)이며, 진흙 인간이 숨을 쉬도록 생명을 가져다 준 하느님의 입김(창세 2,7)이다. 하느님 성령은 "모든 사람에게 숨길을 불어넣어 주시고"(민수 16,22), "땅위에 움직이는 모든 것들에게 숨결을 주시며"(이사 42,5), "마르고 비틀어진 뼈들 속에 숨을 불어넣어 다시 살려주시는"(에제 37,6) 힘이다.
이러한 하느님 성령의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활동이 세례성사 안에서 드러나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에 맞물려 작용하기 시작한다는 것이 바로 오늘 복음의 핵심인 셈이다. 그렇다면 세례 받은 사람은 이미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하느님의 영에 따라 사는 사람인 것이다.........◆
†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 - 성령으로 새로 태어남 †
어제복음에서는 두려움을 느끼는 두 인물에 대해 묵상했습니다. 한명은 소외지역 나자렛 촌구석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마리아 처녀가 하느님(천사)를 만나면서 느끼는 두려움이고, 다른 한명은 호사스런 집단에서 부와 명예를 누리고 있는 바리사이파 사람 니고네모가 주님을 만나면서 느끼는 두려움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그 두려움의 인물 중 가난한 영인 마리아는 즉각 반응하여 순명했으나, 지식계층 니고데모는 여러차례 주님께 반문을 하고 따지는 논리적 대응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결국 니고데모도 요한이 전하는 마지막 복음에서, 주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몰약을 장사지내는 대열에 참가했다는 기록을 보면, 시간이 다소 걸리기는 했지만 거듭태어난 것은 틀림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문제는 니고데모와 같은 지식 계층들이 주님을 받아들이는데는 일반인들과는 달리 그들만의 주관으로 논리적으로 따지는 것이 많아서 시간이 많아 걸린다는 사실을 우리는 복음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새술을 헌부대에 담으려 하기 때문에 스스로 찢기우고 터지고 하면서 만신창이가 된 이후에야 자신의 무지함을 깨닫게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니고데모는 주님과의 만남에서 '두려움'을 느꼈다는 사실입니다. 니고데모는 두려움 속에서 거듭태어남의 영광을 얻으려고 노력한 인물입니다. 이런 상황으로 볼 때 인간이 지니게 되는 두려움이란 무조건 부정적 의미만을 띠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때때로 두려움은 인간의 생명을 보호하고 지속시키는 중요한 생체활성화의 도구적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두려움은 인간을 더욱더 폐쇄적이고 아집적으로 몰아가기도 합니다. 주님수난의 역사에서 악한 역할을 해 온 대부분의 바리사이파 족속들은 주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더욱 완악하고 독선적으로 그들의 이기적 수구생활을 이끌어갑니다. 이와같이 인간이란 존재는 참으로 미묘한 존재여서 생명을 위협하는 절박한 상황 앞에 서게 되면 거의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끼게 되고, 그로 인해서 자기 방어의 조치를 취하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어느날 산길을 가다가 호랑이를 만난다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은행에 갔다가 총을 들고 있는 강도를 만났다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칠흑같이 어두운 밤, 양쪽이 낭떠러지인 벼랑길을 걸어갈 때 우리는 어떤 느낌을 갖겠습니까? 다른 생각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로지 두려움뿐일 것입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두려움의 순간 우리 인간들은 자동적으로 위기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최선을 다합니다. 호랑이를 피해 마하속도로 줄행랑을 칠 것입니다. 또 권총을 든 은행강도 앞에서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무조건 바닥에 엎드리는 수밖에. 또 한밤중에 벼랑 끝에서 길을 걸을 때는 아주 조심해서 조금씩 더듬거리면서 앞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결국 두려움은 우리 인간을 나약하고 비열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생명의 위협이나 위기 상황 앞에서 생명을 지속시키고 싶은 생명활성의 원동력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란 우리의 영적인 삶을 질적으로 향상시키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느끼는 두랴움 속에서 보다 영적으로 쇄신된 인간으로 만들어져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두려움이란 우리의 영적인 생활을 위해서, 그리고 인간 존재 그 자체를 위해서 꼭 필요한 감정입니다. 그러나 때로 너무 지나친 두려움은 우리들의 삶을 속박시킬 뿐만 아니라 기도 제대로 못 피고 위축된 삶을 살아가게 만듭니다.
우리 주변에는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문제들에 대해서 무조건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 안타깝습니다. 일이 의외로 쉽게 잘 풀릴 수도 있을텐데, 꼭 최악의 상황만 예견하면서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부정적인 의미의 두려움은 우리의 존재 자체를 부정적으로 이끌어 갑니다. 그러면서 겪게 되는 고통은 또 얼마나 심한 것인지요. 그냥 바람같이 한번 스쳐 지나가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때로 정말 아주 시시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천지개벽이라도 일어날 것 같이 밤잠을 설치면서 괴로움과 좌절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도대체 왜 그럴까요?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 지난 과거 안에서 아직 치유되지 않은 상처들, 분노 등등이 우리 삶을 짓누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죽어도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 맺힌 마음이 우리 마음 안에 자리잡고 있는 한 자기 쇄신의 길, 자기 정화의 길은 요원하기만 합니다.
두려움에 대한 가장 좋은 처방전은 사랑입니다. 이유를 묻지 말고 감싸주는 것입니다. 또한 두려움에 대한 가장 좋은 처방전은 "당당한 직면"입니다. 그것이 힘들다면 깨끗한 포기입니다. 오늘복음에서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두려움에 대한 처방전을 주고 계십니다. 고가에 대한 깨끗한 포기와 새로 태어남입니다. 그것은 거룩한 성령의 도움으로 가능하다는 성령론을 펴십니다.
주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시듯이 우리도 성령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늘 새롭게 변화된 삶을 살아갈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제와 오늘복음에서 육적으로 새로 태어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영적으로 새로 태어나는 것은 매우 쉽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거룩한 영이 임하시면 마리아 여인과 같이 즉각 순명하는 변화도 배웠습니다. 그리고 오늘복음에서는 영원한 생명이란 어떤 것이며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에 대해서도 주님께서 니고데모와 우리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오늘복음의 마지막 성구인 '영원한 생명'에 대해 묵상해 보겠습니다.
영원이라는 말을 떠올리면 인간의 육적 생명인 유한한 생명과 죽음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과 관련하여 우리의 죽음의 문제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죽으리라는 것을 알지만, 그리고 나도 언젠가는 죽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아무도 그 죽음은 지금의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치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것 같이, 어떤 면에서 볼 때 정말 열심히 살아갑니다.
아침에 기분 좋게 일터로 나가면서 나도 죽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모습 속에서 그 죽음은 나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싶을 뿐입니다. 결국 나의 문제로 다가오겠지만 그것을 깊이 생각하고 싶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삶의 모습이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죽음,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인류가 태어난 이래로 이 죽음의 문제는 수없이 제기되어 왔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해 왔습니다만 예수님 외에는 어느 누구도 명확한 대답을 해준 이는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어제 복음에 이어 예수님을 찾은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언젠가는 죽게 되는데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 다음에 오는 세계에서 영원한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과 답변이라 하겠습니다.
주님의 대답은 명확합니다.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으며,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의 아들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예수님처럼 이렇게 명확하게 그리고 단호하게 죽음 다음의 세계에 대해 언급한 분은 없습니다. 다행히도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있으며 그분의 모습을 따라 살아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확실한 목표와 희망이 있으며, 그리고 작은 일에 충실하는 나의 모습이 무한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적어도 우리는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현실에 더 충실할 수 있고 자신 있게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를 시작함에 있어, 내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얼마나 크나큰 행복인가를 생각하면서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합시다..... 아멘.........◆
-두올-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