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공생
애성 이그나티우스의 영성수련 (3)
◇ 예수의 가르침을 성경에서 찾아보면 사랑과 겸손, 자비심으로 집약된다. *출처=shutterstock
이그나티우스의 영성수련 두 번째 단계는 조명(illumination)의 단계이다.
두 번째 단계의 영성훈련의 중심적 관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인데, 예수의 삶의 모습, 가르침 등을 현재적인 체험으로 관상을 통하여 생생하게 시각화(visualization)하여 본다.
예수의 삶의 모습과 가르침의 핵심을 성경에서 찾아보면 사랑과 겸손과 자비심(compassion,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집약이 된다.
일전에 어떤 사람이 나에게, 예수는 왜 사랑을 그렇게 강조했는지 그 이유를 물어본 적이 있다. 예수가 사랑이나 겸손, 그리고 자비심 등을 강조한 것은 단순히 윤리적인 이유에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사랑은 바로 생명을 살리는 신비한 에너지이기 때문에 예수는 사랑을 그렇게 강조한 것이다.
에덴동산의 이야기는 단순히 신화나 설화가 아니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는 신(神)과 인간, 인간과 인간, 그리고 자연과 인간의 분리(separation)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분리의 결과 신과 인간 사이의 영적인 교류가 단절되고,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권력자와 평민, 남자와 여자, 백인과 흑인 등의 구별이 생기고, 이에 따른 갈등과 폭력이 생겼다. 인간 사회에 일어나는 모든 비극은 이런 분리에서 생긴 것이다. 예수는 이런 분리된 존재들을 다시 하나로 통합하는 연결고리를 사랑이라고 본 것이다.
예수의 사랑은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하여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잠시 놔두고라도 온 산과 들을 다 뒤져서라도 그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으라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가 강조하는 사랑의 핵심이다.
불교 명상에서는 자비심 명상을 한다. 이그나티우스의 영성수련에서는 예수의 생애를 생생하게 시각화하여 바라봄으로 사랑과 겸손, 그리고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을 자신의 의식 속에 형성한다.
이런 문화에 익숙한 서구인들은 자비명상을 “loving-kindness meditation”이라고 번역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지킬 수 없는 계명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예수는, 인간은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영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신앙을 통하여, 영성수련을 통하여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훈련할 수 있다.
불교의 자비명상은 명상의 상상 속에서 미워하는 사람까지도 껴안고서 말한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는 당신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번민에서 벗어나서 평화롭고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진실로 행복하기를… 행복하기를…”
이그나티우스의 영성수련 두 번째 단계에서는 예수의 공생애를 시각화하여 바라보고 동참함으로써, 신과 인간과 자연이 다시 하나가 되는 연결고리인 사랑을 훈련하고, 나아가서는 하늘나라를 소망하는 깊은 차원의 영성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것을 조명(illumination)이라고 한다.
신앙이 좋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주일 잘 지키고, 헌금 잘 내고, 새벽기도를 빠지지 않고 잘 나오면 신앙이 좋은 것일까? 물론 이것은 기독교인이 지켜야 할 중요한 덕목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의 진리가 깨달음의 빛으로 비치기 전에는 절대로 신앙이 좋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조명이란 밝게 비친다는 뜻이니, 예수의 삶과 가르침이 깨달음의 밝은 빛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도록 하는 단계가 두 번째 단계이다.
세 번째 단계는 고통의 예수와 하나 되는(union with suffering Jesus) 경험의 단계이다.
그리스도의 고통 속에는 하느님의 신성이 숨겨져 있다. 기독교 신앙에 의하면,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었지만, 세상에서 사실 때 머리 하나 변변히 뉘일 곳이 없는 가난한 분이었다. 그는 명예도 권력도 탐하지 아니했다. 그뿐만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고통과 모욕을 당하면서 돌아가셨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부귀와 영광만을 취하는 것이 아니며, 필요할 때는 가난과 고통도 취해야 함을 의미한다. 기독교인은 그리스도의 고통과 연합하는 경험을 통하여 슬픔 속에서 기쁨을, 약함 속에서 강함을, 그리고 부족함 속에서 감사함을 체험할 수 있다.
예수의 고통과 하나 되는 경험 속에서 기독교인은 그들의 삶의 모습과 원칙을 선택하게 된다. 기독교인은 나의 편함과 명예만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필요할 때는 고통까지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의 삶은 항상 봉사의 삶이어야 한다. 비록 그것이 어렵고 고통스러워도 그렇다. 슈바이처나 이태석 신부, 그리고 마더 테레사가 그런 삶을 살았다. 그러나 꼭 슈바이처나 이태석 신부, 혹은 마더 테레사가 될 필요는 없다.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든 말든 삶에서 알게 모르게 봉사하는 삶을 살면 된다.
글 | 윤종모 주교
출처 : 마음건강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