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의 노래
비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처럼 아무 말 없이 마루 끝에 내려앉았다. 처마를 타고 흐르는 물줄기는 낮은 목소리로 세상을 적시며, 나는 그 곁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한옥의 나무결은 젖은 빛을 머금고 세월의 숨결을 드러내고, 발끝에 닿는 마루의 온기는 차갑지 않아 오히려 누군가의 체온처럼 잔잔하게 나를 감싸 안는다.
문은 반쯤 열려 있고 안쪽에서는 은은한 불빛이 새어 나오며, 그 빛은 바깥의 흐린 풍경과 어울려 마치 경계가 없는 하루처럼 안과 밖을 부드럽게 이어 준다.
나는 그 경계 위에 앉아 비를 바라보는데, 비는 어디서 시작되어 어디로 흘러가는지 묻지 않고 그저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살아내듯 조용히 내려온다.
장독대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은 둥근 항아리의 어깨를 타고 또 하나의 작은 물길이 되어 소리 없이 흐르며 묵묵히 시간을 쌓아가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삶도 저 물길과 닮아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늘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묻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지금 흘러가고 있는 이 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비 내리는 마루 위에서 더 또렷해진다.
마루에 앉은 나는 잠시 모든 목적지를 내려놓고, 비가 내려도 괜찮고 그치지 않아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이 고요한 시간에 몸을 맡긴다.
그녀는 가볍게 손을 들어 작은 인사를 건네고, 두 손가락 사이로 번지는 미소는 어린 시절의 맑은 기억처럼 순하고 밝아서, 그 순간 비는 더 이상 외로운 소리가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듣는 따뜻한 이야기처럼 다가온다.
젖은 땅은 향기를 내고 풀잎은 더 깊은 초록으로 숨 쉬며 멀리 보이는 들판은 안개 속에서 천천히 사라지는데, 나는 사라지는 것이 끝이 아니라 다음 장면을 위한 여백이라는 것을 조용히 깨닫는다.
마루에 앉아 있는 시간은 흐르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가장 깊이 흐르는 시간이어서, 손에 쥔 작은 물건 하나와 무심히 놓인 발끝의 방향, 그리고 살짝 기울어진 어깨의 각도까지 모두 하나의 풍경이 되어 간다.
그 풍경 속에서 나는 나를 잊는 듯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나다운 모습으로 남아 있다. 비는 여전히 내리며 세상은 젖어가지만 마음은 오히려 맑아져 간다.
어쩌면 우리는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조용히 앉아 하루를 받아들이기 위해 살아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마루 끝에 앉은 한 사람과 그 곁에 머문 비 한 줄기가 만들어낸 이 작은 장면은 오늘 하루의 전부이자 가장 완전한 순간이 된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앉아 있지만,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는 것을 비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다. 그래서 이 고요한 시간은 흐르면서도 멈춰 있는 듯, 멈춰 있으면서도 깊이 스며들며 나의 하루를 조용히 채워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