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쌓기
지은이:벌마로(김윤식)
정아 씨와 알게 된 이후로 영우는 시간만 나면 정아 씨네로 놀러 가거나 선미 씨가 일하는 미용실로 가서 이야기꽃을 피우곤 했다. 정아 씨네 가면 거기서 은정
씨도 만날 수 있어서 좋고 그러다가 아예 선미 씨가 있는 미용실로 가서 시간을
보내다 오곤 했다. 살짝 미용실 주인아주머니 눈치가 보였지만 손님이 없을 때만
머물다가 손님이 들어오면 각자 집으로 가곤 했다. 그들은 비슷한 또래들이라 마음도 잘 맞고 대화가 통해서 좋다. 나이로 따지면 영우가 넷 중에 가장 어린데
그래서 더 좋다. 언니들과 안면을 트고 나니까 하루가 따분하게 지나지 않았고
새로운 일들이 많아졌다.
게다가 이곳은 이야깃거리도 많고 전설도 많고 사연도 많은 곳이란 것도 언니들
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여기서 알게 된 언니들은 각자의 사연과 인연으로 여기까지 와서 살게 됐지만 이곳에 사는 군인 가족들의 최대 관심사는 언제 다른 곳으로 전출을 가게 되는가
이다. 그중에서도 오산 비행장으로 가기를 원하는데 그곳이 아니라도 이곳만 벗어나면 좋겠다는 심정은 누구나 똑같았다. 이곳이 싫어서가 아니라 도시물을 먹었던 여자들로선 시골의 환경에 적응이 쉽지 않았고, 특히 겨울의 혹한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는데, 특히 변덕스러운 날씨에 시도 때도 없이 내리는 눈은 도시에서 느끼는 환상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물론 이곳에 있는
동안은 이곳에 적응하고 현실에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하겠지만 속마음은 도시
가까운 곳에서 문화생활을 접하며 살고 싶은 욕망은 어쩔 수 없는 심리일 것이다. 더욱이 군인가족 여자들에겐 그랬다.
저녁을 일찍 먹은 병휘와 영우는 병휘가 부대에서 퇴근길에 들고 나온 사진기로
뜰안에 있는 배롱나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당연히 사진사는 주인집 아주머니다. 사진을 찍어 주면서도 아주머니의 입은 가만히 있지를 않았다.
“아이고! 어쩜 이렇게 잘 어울릴까, 신혼부부가 따로 없네, 우리 집 배롱나무가
꼭 병휘신랑을 위해서 꽃이 피어 있었나 보네”
어느새 호칭이 병휘총각에서 병휘신랑으로 바뀌었다. 아주머니는 늘 이렇게 자기 멋대로이다. 사진 찍기를 마치자 아주머니가 신기한 것을 보여주겠다며 밖으로
산책을 나가려던 두 사람을 불러 세웠다.
“새댁 이리 와서 배롱나무 가지를 문질러봐”
영우가 의아해하며 시키는 대로 배롱나무 가지를 한줄기 붙잡고 한 손으로 문질렀다. 순간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배롱나무의 다른 가지가 흔들리는 거였다. 신기해서 여러 번을 해봐도 똑같은 현상이 생겼다. 영우가 중간 굵기의 나뭇가지를
잡고 빠르게 문지르면 다른 쪽 가지도 빠르게 흔들렸고 천천히 문지르면 천천히
흔들렸다. 영우의 눈에 간지럼을 타는 것처럼 보였다. 필시 간지럼을 타는 게 분명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아주머니가 설명해 주었다. 간지럼을 타는 나무라고 해서 간지럼 나무라고도 하는데, 배롱나무에 얽힌 전설이 있었다. 서로 연모하는
연인이 있었는데 어이없는 실수로 사랑을 이루지 못한 처녀가 자결을 하게 되었다. 총각이 양지바른 곳에 처녀의 시신을 묻어 주었고, 세월이 흘러 그곳에서 나무 한그루가 자라서 꽃을 피웠는데, 백일동안 꽃을 피웠다. 그래서 백일홍이라고
불렸고 세월이 흐르면서 백일홍이 배롱으로 바뀌었다. 절에서는 세속적 욕망과
번뇌를 벗어버리는 상징으로 여긴다고 했다.
신기한 아주머니의 말씀을 뒤로하고 동네 산책을 나갔다. 오늘이 토요일이라 면회온 애인과 외출 나온 군인들로 거리가 제법 활기차게 움직였다. 어떤 이들은
팔짱을 끼고 걷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이인지 조금 사이를
띄우고 걷는 연인들도 있고 지난번 편지지를 사려고 건넜던 냇가의 뚝 풀밭에 앉아 있는 연인은 여자가 싸 왔는지 삶은 닭을 맛있게 먹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그렇게 거리는 쌍쌍이들로 가득했다. 거리풍경을 보며 걷던 병휘가 불쑥 말을 던졌다
“영우! 내가 업어줄까,,,”
“아이! 보는 사람들도 많은데, 창피하게,,,”
“누가 본다고 그래! 그리고 뭐 보면 어때”
“싫어! 안 돼! 창피해! 어—어”
영우가 싫다는 말을 끝내기도 전에 병휘는 벌써 영우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등을 보였다. 마냥 거절을 하기엔 등을 보이며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광경이 누가 볼까 봐 더 창피했다. 영우는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병휘의 등에 몸을 맡겼다. 창피함은 병휘오빠가 덮어 주리라는 믿음으로,,, 영우를 등에 업은 병휘는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가자는 영우의 말은 들은 척도 않고 마을 안쪽의 구멍가게로 향했다.
“오빠! 어디로 가는 거야! 사람들이 다 보고 있잖아! 나 내릴래 빨리 내려줘!” 앙탈을 부리는 영우의 마음은 아랑곳없이 병휘는 영우를 업은 채 가게에 다다렀고 그곳에서 부라보콘을 한개 사서 영우에게 건넸다. 가게 아주머니의 호기심 스런 눈길이 부담스러웠던 영우는 병휘의 등에 얼굴을 감추었다. 손만 뻗어 부라보콘을 받아 든 영우는 자신이 한입 먹고 병휘의 입에 한입 주고하며 그렇게 냇가의 풀밭에까지 이르는 동안 병휘의 등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병휘의 등에 업힌 지금 영우의 눈에 보이는 풍경은 모든 것이 감미로웠다. 여기 군인 연인들 모두가 사연이 있고 사랑을 하고 그리운 날들을 기다리다 오늘 만나서 저렇게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으리라, 물론 영우도 병휘와 만났다가 헤어지기 싫어서 수원에서 이곳 횡계까지 따라오지 않았던가, 그리고 벌써 며칠 째 집에도 안 가고 이곳에 머물고 있는 게 아닌가. 저들은 오늘이 지나고 내일이면 헤어져야 하고 또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그리움을 묻어야 하지만 영우는 그러지
않아도 되는거 아닌가? 영우는 지금 병휘와 함께 있는 이 시간이 마냥 즐겁고 행복하기만 하다.
어느 날 저녁 무렵 마을에 만물차가 들어왔다. 퇴근해서 방안에 누워있는 병휘오빠에게 반찬거리를 사러 가자고 했다.
“오빠 우리 만물차 보러 갈까?”
“그래! 그런데 우리가 뭐 살만한 게 있을까?”
“그냥 답답하기도 하고 매일 먹는 하숙집 밥 말고 내가 오빠한테 저녁밥 맛있게
해 주고 싶어서,,,”
“영우가 음식도 할 줄 알아?”
“잘은 못해도 내 손으로 한 번쯤 해주고 싶어서 엄마가 하는 것 보고 배운 게 있어서 한번 해볼게”
“그럼 영우가 해주는 밥맛 좀 볼까”
병휘가 반가운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은 바깥바람도 쐴 겸 외출을 하기로 맘먹고 현관문을 나섰다. 마당에서 아주머니가 지하수 펌프질로 물을 퍼 올리고 있었다. 병휘가 얼른 다가가서 펌프 손잡이를 뺏어 잡으며 말했다.
“아주머니 오늘 저녁 밥은 영우가 해주기로 했어요. 오늘 우리 밥은 안 해도 돼요.”
“그래! 그럼 쌀은 마루에 있는 장독에 있고 양념은 안채부엌 찬장에 있으니까 꺼내서 써. 그런데 색시가 요리도 할 줄 안데,,,?”
결혼한 사이도 아닌데 아주머니는 맨날 색시라고 한다. 그런 아주머니의 호칭이
듣기에 싫지 않았다. 어쩌면 병휘도 즐기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아주머니 부엌에 쓰실 물은 제가 나갔다 들어와서 퍼 나를 거니까 그냥 이대로
놔 두세요”
펌프질로 퍼 올린 물을 양동이마다 가득 채운 병휘가 아주머니에게 당부하며 영우의 손을 잡아끌었다.
“알았으니까 다녀와. 잠깐! 이것 좀 만물차 아저씨 갖다 줘”
아주머니는 밖으로 나가려던 두 사람을 불러 세우고는 급하게 마루에 쌓아 놓은
담배종이 소품을 들고 나오셨다.
병휘가 소품을 받아들며 자세한 의도를 몰라서 물었다.
“만물차에 그냥 드리기만 하면 되요?”
“응 그러면 돼. 아저씨가 나중에 알아서 계산해 줄거야. 바가지를 주던지, 내가
원하는 다른 거를 주던지,,,”
아주머니의 대답을 뒤로하고 동네어귀로 나왔다. 만물차에는 벌써 동네 아주머니들이 몇 분 나와서 필요한 것들을 이것저것 사서 봉지에 담고 있었다.
그곳에 정아 씨도 있었다. 정아 씨를 보고 병휘가 가볍게 인사를 했다. 정아 씨는
남편이 생선을 좋아해서 생선 몇 마리 사는 중이란다. 정아 씨는 늘 남편위주로
사는 것처럼 보였다. 만물차에는 부식거리 말고도 플라스틱 제품, 주방용품, 목장갑, 철물제품, 심지어 어디서 장만해서 가져오는지 카세트 라디오도 팔았다. 마을에 식료품점도 있고 어지간한 생활필수품 가게는 있었지만 기가 막히게 마을에서
팔지 않는 것 만 골라서 실고 다니는 것 같았다. 소품을 전달한 두 사람은 이것저것 뒤져보다가 정아 씨처럼 생선만 사기로 했다. 야채종류는 주인집 텃밭에 거의 다 있었기 때문에 구하기 어려운 싱싱한 생선을 사기로 한 거다. 달랑 생선
몇 마리 산건데 두 사람은 벌써부터 신이 났다. 생선을 먹게 돼서 신이 난 건지
아니면 다른 기분 좋은 느낌이 들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병휘는 담장 옆 텃밭에서 아주머니가 여름내 가꾸어 키운 시금치를 뽑아 물에 씻어서 영우에게 가져다주었고 영우는 안채 부엌에 들어가서 저녁 준비를 했다. 제일 먼저 석유곤로에 불을 붙였다. 석유 타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부천 집에서 엄마가 밥을 할 때 석유곤로에 불을 붙이던 기억이 난다. 엄마는 방에 불을 때지 않는 여름철에는 봉당에 있는 석유곤로에 불을 붙여 밥을 하곤 했는데 영우에게
그 역할을 맡기곤 했다. 그럴 때마다 영우는 석유냄새가 너무 싫어서 하기 싫다고 투정을 부리곤 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석유냄새가 그리 싫지가 않다. 곤로의
불이 적당히 달궈지자 쌀을 씻기 시작 했다. 조리질하는 모습을 찬찬히 보고 있던 아주머니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색시 조리질 하는 걸 보니 밥도 제법 해본 솜씬데”
“네 형제끼리 서울에서 따로 자취할 때 해 봤어요”
작년까지 서울에서 언니오빠들하고 자취할 때 쌀 씻어서 불에 올리는 일은 주로
영우 몫이었다. 그래서 조리질 정도는 식은 죽 먹기다. 그런데 오늘은 영우가 모든 상차림을 혼자서 하고 있다. 씻은 쌀을 올려서 밥을 하고 시금치 나물을 무치고 밑반찬을 꺼내서 밥상을 차렸다. 아주머니는 그 모습을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병휘는 그사이에 야외화덕에 장작불을 붙이고 방금 사온
생선을 불에 구웠다. 생선 굽는 냄새가 비릿하면서 고소하게 퍼졌다.
영우가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아주머니와 함께 한상에서 밥을 먹는다. 그 동안은
영우도 불편했고 아주머니도 그런 영우의 어색해하는 마음을 알아차리고 밥상은
따로 차려 주었었는데 오늘은 마치 한 가족처럼 밥상을 가운데 놓고 세 사람이
같이 밥을 먹게 되었다. 두 사람도 행복했지만 아주머니가 더 좋아했다.
세 사람 모두 밥그릇을 싹싹 비웠다. 병휘가 몸을 뒤로 젖히고 부른 배를 비비며
흡족하게 웃었다. 아주머니가 슬쩍 일어나더니 숭늉을 떠오셨다. 영우가 죄송한
마음으로 숭늉 그릇을 건네받으며 말했다.
“저에게 시키면 제가 떠 왔을 텐데요”
“괜찮아! 오히려 내가 대접을 받아서 미안하구먼, 그런데 새댁,,, 애기도 생기면
낳을 거지? 애기가 있어야 두 사람 사이가 더 가까워지는 법이거든,,,”
순간 부끄러움과 당황스러움이 동시에 밀려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