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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시가 아닌것의 차이 -양황용
문학의 기원에 대한 견해 중, 허드슨의 <자기표현본능설>이 있습니다. 왜 내가 시를 쓰느냐? 마치 공작새가 치장을 잘 해서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거와 같다는 겁니다. 이것을 딜레땅뜨(호사취미)라고 하는데, 그 대표적인 분이 조지훈입니다. 김수영은 모든 것에 자유하기 위해 직장도 그만두고 시에 전념합니다.
시에 대한 열정이 중요합니다. 문학에 대해 열정을 갖고, 도저히 견디지 못하겠다, 쓰고 싶고, 표현하고 싶고, 억제하고 또 억제해도 도저히 못 살겠다 싶을 때 문학을 해야 합니다. 치열하게 써야 합니다. 자기 세계에 안주하면 안 됩니다. 또래끼리 단련하면 그 나물에 그 밥이 됩니다. 엄격한 사람이나 평론가를 모시고 동인활동을 해야 좋은 작품을 쓸 수 있습니다.
시는 근본적으로 독자를 의식하지 않고 씁니다. 그래서 <독백>입니다. 문자가 없었던 원시 시대에도 시는 있었습니다. 원시인이 알타미라 동굴의 벽화를 그리듯, 자기가 진짜 그리고 싶은 걸 그리는 겁니다. 자기 마음 속에서 진짜 부르고 싶은 노래를 부르는 게지요. 문학 장르 중에서 가장 원초적인 것이 자기가 표현하고 싶은 걸 독백하는 겁니다.
시의 양태에 있어 감동을 느끼도록 하는 장치를 도입하고 있습니다. 소설은 애초에 독자가 있었습니다. 설화 같은 것은 화자와 독자 간에 소통이 있으나, 시는 태생적으로 알아듣기 어렵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평론가가 엉뚱하게 해석하기도 합니다. 독자에 따라서는 비유 등이 엉뚱하게 해석되기도 합니다. 해서, 그렇게 되지 않도록 장치를 하기도 합니다.
소설은 소설가(화자)가 있지만, 등장인물을 내세워 이야기 합니다. 그러다 작가가 개입하지요. 희곡은 완전히 작가가 숨어 있습니다. 행동과 대화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전달합니다. 시는 원초적이면서 주관적입니다. 그러나 주관적이긴 하지만, 오늘날의 객관성 획득을 위한 장치가 곧 <리듬과 비유>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리듬을 케케묵은 것이라 하면서 비유(은유, 상징)가 있어야 시라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리드미컬하지 않는 것이 우리 시입니다. 불어 독어 중국어는 톤 랭귀지(tone language)이고, 일본어는 음절문자이지만 우리 언어는 음소 문자이지요. 3.4조, 4,4조, 7,5조는 일본에서나 가능한 운율입니다. 우리말에는 우리만이 가진 독특한 음보가 있습니다. 음보는 2음보 3음보 4음보가 있는데 4음보가 기본입니다. 음보를 잘 살린 사람이 김소월입니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3음보입니다. 2음보 3음보 사이사이에 2음보와 1음보를 써서 성공한 작품입니다.
시에는 반드시 리듬과 비유가 있어야 합니다. 수필을 적당히 잘라 행과 연을 구분한다고 시가 되지는 않습니다. 유치환의 <깃발>은 가장 청마답지 않은 시로 일컬어질 만큼 그야말로 감각적으로 그려놓은 비유의 천국이지요. 그러나 <깃발>은 리듬과 비유가 적절히 어울린 시입니다. 김수영의 <풀>도 그렇습니다. <풀>은 그가 죽기 보름 안쪽의 작품입니다. <창비>사에서 유고작으로 발표했지요. <풀>이 없었으면 그의 대표작이 무엇일까 궁금할 정도입니다. <풀>은 노동자이고 <바람>은 사용자란 도식도 위험합니다. <풀>은 약한 자나 문명일 수도 있고 자연 앞에 무기력한 인간도 될 수 있습니다.
비유에는 직유와 은유, 상징이 있습니다. 직유는 유사성을 직접적으로 드러냅니다. 그래서 보조관념과 원관념이 있습니다. <미인>을 <장미 같은 여자>라 했을 때, 장미가 보조관념이고 여자는 원관념이지요. <장미는 여자다>고 했을 때는 은유입니다. <장미, 오 모순이여!> 했을 때는 상징이지요. 장미엔 가시가 있다는 뜻이 내포돼 있습니다. 한용운의 <님>도 그렇습니다. 여자도 되고 부처도 되고, 나라도 되고, 진리도 됩니다. 이것이 상징입니다. 이 상징이 없으면 아무리 행을 구분해 놓아도 시가 될 수 없습니다. 교과서에도 이런 시를 싣고, 심사할 때도 이런 기준에서 봅니다.
운율과 비유도 중요하지만, 독서와 삶의 체험이 다양해야 좋은 시를 쓸 수 있습니다. 유년기의 체험을 형상화시키는 겁니다. 체험을 푹 삭혀서 잊었던 것을 다시 살려내야 시가 됩니다. 시적 화자로 어린 아이가 등장해도 어른의 생각이 들면 시이고, 어린 아이면 동시입니다. 영국시인 어셔는 <경험해서 잊어버렸다 확 튀어나올 때 쓰라>고 말합니다. 즉흥적으로 스케치를 해선 시가 안 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