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신앙고백서 Article 5: The Authority of Scripture / #성경의권위
We receive all these books and these only as holy and canonical, for the regulating, founding, and establishing of our faith.
우리는 이 모든 기록물들을 유일하고 거룩한 정경으로 받아들여 우리 신앙을 규정하고 기초로 다지며 세워나갑니다.
성경을 신앙의 유일한 표준으로 삼는다는 것은 신앙과 관련된 우리의 지식과 행위가 반드시 성경에 근거해야 하고 성경으로 점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아무리 신자라 하더라도 여전히 죄성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성경을 신앙의 표준으로 삼는다고 하면서 아전인수격으로 성경을 자신들 입맛에 맞게 왜곡하기가 쉬우므로, 우리의 해석이 과연 성경에 보편적으로 부합하는지를 다른 탁월한 해석가들의 해석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교회와 성도들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보혜사로서 우리에게 성경을 깨닫게 해주신다는 것은, 다른 해석가들의 저서들은 아예 무시하고 오로지 성경만 파고들어도 된다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성령께서는 탁월한 성경교사들을 통해서 성경을 가르치시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교사들의 성경해석을 부지런히 읽고 듣고 배워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And we believe without a doubt all things contained in them-- not so much because the church receives and approves them as such but above all because the Holy Spirit testifies in our hearts that they are from God, and also because they prove themselves to be from God.
또한 우리는 의심의 여지 없이 신앙을 위한 모든 것이 성경에 있음을 믿습니다. 이는 교회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해서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성령께서 성경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우리의 심령에 증거하시고, 또한 성경 자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스스로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신앙을 위한 모든 것이 있다는 것은 모든 신자들의 모든 상황에 대한 세세한 해법이 들어있다는 것이 아니라 핵심되는 지식과 원리들이 들어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교회와 성도들은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아무리 불분명해보이고 모호해보이는 상황을 만나게 되더라도 성경에 제시된 원리를 따름으로써 헤쳐나갈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 대해서 성경적으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도무지 모를 때에는 교회의 목사들에게 자문을 구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타당하다. ‘오직 성경’을 추구한다 하면서 어떤 목사의 가르침도, 어떤 신앙서적도, 어떤 탁월한 성도의 조언도 거부하고 그야말로 성경만 읽는 것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언약궤를 가지고 나갔다가 크게 패하고 언약궤도 빼앗겨버린 엘리 제사장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과도 같은 우상숭배를 저지르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봤을 때, 지금의 성경이 66권의 목록으로 자리잡게 된 것에는 교회와 성경교사들의 역할이 중추적이고 핵심적이며 지대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신앙을 가진 이는 남녀노소 빈부귀천 등을 막론하고 마땅히 모두 성도라 칭함받지만, 그 중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분별과 가르침은 통상적으로 교회 안에서 성경교사들을 통해서 이뤄져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많은 신앙인들의 가르침들과 글들 중에서도 과연 어떤 기록물들이 하나님의 말씀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도 그러한 성경교사들의 합의를 통해서 이뤄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나 섭리적으로 봤을 때는 그렇게 성경의 목록들이 확정되기까지는 주님의 성령께서 오랜 기간동안 기록자들과 보존자들과 번역자들과 이후 성경교사들을 감동시키심으로써 역사해오신 것이기 때문에 이야말로 가장 크고 절대적인 원인이라 고백하는 것이 마땅하다. 성경의 목록을 확정하는데 있어서 교회가 지대한 역할을 맡아왔다고 해서 성경을 정하는 권세가 교회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령의 감동하심과 역사하심을 무시하는 처사이고 주님께서 맡기신 말씀에 대한 권세를 원래부터 자기 소유였던 것처럼 도둑질하는 것과도 같다. 받은 은사를 가지고 교회에 덕을 세우는 것은 우리 자신이라 하더라도 그 은사들은 원래 우리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성령께서 부여하신 것과도 같은 원리이다. 그래서 성경의 목록들이 확정되기까지 참된 교회와 성경교사들은 자신들의 권세나 공로들을 내세우지 않고 오로지 주님의 성령께서 성경을 기록하셨다고 참되고 겸손하게 고백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칼빈 선생을 비롯한 신앙개혁가들과 청교도들은 성경의 가르침들을 통일성있게 보존하기 위해서 여러 신앙고백과 교리문답들을 작성하였고 그 탁월함에 대해서는 이루 말할 수 없다 할 정도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고백서나 교리문답들을 감히 성경과 같은 반열에 둘 엄두도 내지 못하고 다만 언제든지 성경에 의해 검증되어야 하고 필요시 개선되어야 하는 부차적인 기록물로 인정받는 것에 만족하였다. 따라서 오늘날 신앙개혁가들과 청교도들의 신앙을 추구하는 교회와 성도들은 신앙고백과 교리문답 자체를 성경보다 위에 두는 우를 범해서는 안되며, 그것들을 함부로 가볍게 다뤄서도 안되지만 그렇다고 절대 불변의 진리라고 여겨서도 안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For even the blind themselves are able to see that the things predicted in them do happen.
심지어 보지 못하는 사람들조차도 자기자신들 안에 선포된 말씀들이 역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백서 기록자가 언급한 ‘보지 못하는 자들’이란 교회와 성도에 속해 있으나 아직 여러모로 연약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이들일수도 있고, 교회와 성도에 속하지 않은 세속인들 또는 교회와 복음의 원수들을 의미하는 것일수도 있다. 연약한 신앙인들은 말씀에 대한 분별력이 없어서, 세속인들은 복음 자체에 관심이 없어서, 교회의 원수들은 지식적으로만 알고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주님과 교회를 대적하기 때문에 이 모든 현상을 보지 못하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예수님께서 들을 귀 있는 사람만 성령께서 교회에 하시는 말씀과 복음을 들으라 하시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신앙이 연약한 성도는 점점 신앙이 자라고 견고해감에 따라서 성경을 더 풍부히 알게 되고 성경대로 이뤄지는 것을 보게 된다. 복음에 무관심한 세속인들은 자기들의 인생이나 세상이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서 귀동냥으로 주워들었던 성경의 내용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대로 이뤄져가는 것을 보고 알게 되면서도 복음을 받아들이기는 커녕, 그 모든 책임을 교회와 성도들에게 전가하고 하늘의 주님을 저주하고 비방하게 된다. 교회의 원수들은 마귀와 귀신들이 주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를 알면서도 주님께 대적하다가 영원한 멸망을 당하게 되는 것처럼, 성경을 지식적으로 잘 알면서도 교회를 대적하다가 결국에는 성경대로 스스로 멸망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