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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법망구의 보살, 광덕 큰스님
백운지흥(白雲知興) - 부산 금정산 미륵사 주지
8. 청백가풍(淸白家風)
갑오년의 불교정화운동이 일어나자 진진거사는 처음에는 범어사와 선학원을 왕래하다가 곧 창원 성주사에 토굴을 얽어 정진에만 전념한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정화운동이 점점 활발하게 계속되자 범어사로 돌아와 조실스님을 모시고 종무행정 일체를 도맡아 처리했다. 그러다가 역시 조실스님의 뜻을 받들어 상경하여, 아슬아슬한 지경에 처해 있던 위태로운 통합종단을 바로 세우는 일에 견인차 역할을 해냈다. 뿐만 아니라 동국학원을 살리는 데도 큰 힘이 되었으니 어쩌면 한국불교를 중흥시키려고 태어난 사람 같았다.
이런 여러 가지 점을 살펴보면 진진거사는 참으로 한국불교를 바로 세우고 부처님의 가르침과 조사의 뜻을 회복하기 위해 출현한 보살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뒷날 광덕스님이 입적하시자 평생의 도반이었던 일타스님은 비문에서 ‘대한불교 청백가풍’이라고 첫머리에 내세웠듯이 사실 오늘의 종단이 있기까지 진진거사의 공로는 지대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10년이나 지난 뒤에 계를 받기로 결심했던 것도 종단을 구하고 한국불교를 바로 세우기 위한 서원이자 다짐이라고 본다. 만약 종단이 순조로웠다면 평생을 무명의 처사로 살다가 입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진진거사에게는 계를 받고 안 받고 보다 어떻게 하면 더 열심히 수행.정진하는가에 모든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예부터 진실한 수행자는 오직 도를 닦기 위해서 모든 것을 감수하고 희생했고 짐짓 온갖 천한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고 했던가. 이름을 감추고 대중 속에 묻혀서 없는 듯 있고, 있어도 없는 듯 살아간 무명의 도인들도 무수히 많았던 것을 보면 그런 진진거사를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진진거사는 오직 한 사람의 진실한 수행자로서 남기를 원했다. 그러기에 헌신과 무아의 보살행을 닦아서 오늘의 우리들과 미래의 후학들에게도 하나의 사표가 되고 있다고 하겠다.(시봉일기 3, 38쪽 월탑거사 박경훈의 기록에 자세히 나와 있음)
내가 여기서 이렇게 말하는 더 깊은 까닭이 있다. 만약에 진진거사가 대각사로 돌아가 불광을 만들지 않고 끝까지 총무원에 남아서 활약했다면 그의 10년 행자생활이나 용맹정진이나 무수한 보살행도 특별한 뜻이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총무원은 보살행의 장소이기도 하지만 부처님께서 수행자들에게 한 나무 아래서 사흘을 머물지 말라고 하신 가르침 때문이다. 진진거사 스스로도 그런 점을 잘 알고 있었으리라 본다. 그랬기에 홀연히 종단 일에 손을 놓고 대각사로 돌아가서 새로운 불교사상운동을 전개해 나갔을 것이다. 사람들은 진진거사의 그러한 일을 단순히 포교사업이라고 쉽게 말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는 분명 새로운 불교사상운동이다.
왜냐하면 용성조사로부터 이어져 온 각사업(大覺敎運動)을 한 상좌(동산대종사)는 종단정화운동으로 이었고, 또 한 상좌(소천스님)는 반야사상을 표방한 구국구세운동으로 꽃피웠다. 그러나 두 분 공히 불교만을 위해서 그러한 일을 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불교 이전에 나라를 바로 세우고 백성을 구제해야 하는 보살도 차원에서 새로운 정신운동을 시의적절하게 일으킨 것이라는 생각이다. 두 분은 그 당시 전쟁으로 피폐해진 민심을 어루만지며 국민정신을 새롭게 하고 또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수행 전통을 되찾는 일대 각성운동을 선언한 것이 아닐까. 그러기에 불교정화는 한 시대의 물리적 운동이 아니고 도도히 흐르는 정신운동으로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차원에서 이 두 가지 일은 매우 놀라운 일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고, 앞으로 좀 더 세월이 지날수록 그 뜻은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아무튼 용성조사의 후계자들은 연속 부절로 대각교운동의 근본정신을 꾸준히 이어갔다. 그 후에 결성된 용성문도회를 통해 윗대의 정신을 단절시키지 않고 시대상에 맞게 적절히 펼쳐나가고 있는데 사실 이 점이 더더욱 놀라운 일이다. 반드시 여기에는 부처님의 지극한 인도와 가호가 있다고 본다. 즉 이것은 구세대비의 보살원력이 우리의 현실 가운데 나타난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선상에서 조사의 뜻과 종사의 가풍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새 길을 개척한 후예가 바로 진진거사, 뒷날 금하당 광덕 대선사라는 이야기다.
광덕스님은 대각사에서 불광회를 모체로 월간 불광지를 창간했고 이어서 불광법회를 창립했다. 이는 바로 조사의 뜻을 받들어 나갈 것을 내외에 선포한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조사의 뜻이 어린 대각사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며, 또 방편은 달라도 근본은 같기 때문이다. 방편이 다르다는 것은 시대가 달라졌음을 의미하는 것뿐이다.
광덕스님이 새 불교운동의 시작을 문서포교로 했다는 것은 여러 의미가 있다. 우선 지성인들, 특히 대학생들을 상대로 전법을 펼치겠다는 착안으로 보인다. 그리고 현대인들의 수준은 과거 어느 시대보다 앞서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들은 상대로 하는 일에 있어서 가장 효과 높은 것은 역시 문서를 한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불교의 문서포교가 아주 미미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아무튼 대각사 이후의 활약은 너무도 잘 알려져 있으므로 굳이 내가 이 글에서 언급하지 않아도 될 일인 것 같다.
광덕스님. 이 땅, 이 시대에 위법망구의 구세보살로 오신 광덕스님. 지칠 줄 모르고 온몸을 던져 오직 부처님 가르침을 따라 살다 가신 우리 시대의 큰스님. 수많은 저서를 통해 당신의 사상을 천명했던 대석학이자 참다운 수행자로 말법시대의 우리에게 진정한 사표가 되어 주셨다.
지금까지 내가 토해 낸 이 추억담은 광덕스님의 아주 작은 겉모습이 일단에 불과함을 솔직히 시인하며 도리어 부끄러움을 감출 길이 없다. 후일 구안자가 나타나 삼십방(三十棒)을 내리더라도 달게 받을 채비를 해야 하겠다.
임오년 가을에 사제 백운 謹書
광덕스님 시봉일기 4 위법망구, 송암지원, 도피안사 |
첫댓글 큰스님의 행적을 아주 요약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선구자적인 지혜로 나라를 위하고, 중생을 위하며, 종단을 위해 나아가신 모습을 오늘날 종단에서도 이어가실 분들이 많이 계시겠지요?
부처님께서 한 나무에 사흘을 머물지 말아라는 말씀이 와 닿습니다. 오래 머물다 보면 익숙해져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나태해져 있는 자신을 돌아볼수 있습니다.
큰스님의 밝은 혜안 덕분에 불광 잡지를 통해 밝은 부처님법을 공부할 수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큰스님같은 삶을 꿈꿔봅니다.
보문님, 오늘도 공양 감사드립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