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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 멸망사 1. 강유 부각의 정치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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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 멸망사 2. 막부의 의의와 한중막부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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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 멸망사 3. 제갈량 사망 직후의 혼란과 정계 구조의 재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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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 멸망사 4. 양로원 혹은 막부의 붕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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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 멸망사 5. 꼬리에 불이 붙은 사냥개는 집을 불태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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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 멸망사 6. 범은 불타는 집의 냄새를 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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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 내려온 범
263년 여름, 사마소는 촉 원정에 앞서 부정적인 의견을 낸 등애를 설득하고, 원정군을 낙양에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원정군의 총 규모는 진서 문제본기에서는 18만, 위서 종회전에 나온 병력은 종회군 10만, 등애군 3만, 제갈서군 3만으로 총합 16만이 되어, 두 사료 사이에 2만의 차이가 난다.
앞선 글에서 나는 이 2만의 차이를 종회의 군 추정치에 반영하여 종회군을 10~12만으로 간주하였으나, 이 글을 쓰는 지금 돌이켜보면 꽤나 섣부른 비정이 아니었나 싶다. 소집된 총 인원이 18만이라는 서술과 전선에 투입된 위군이 16만이라는 서술은 사실 서로 충돌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집된 병력이 반드시 원정에 투입된다고 볼 까닭은 없다. 기록에서 원정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던 사마소가 총 지휘관으로 언급되므로, 소집되었으면서 원정에 참여하지 않은 2만여의 병력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 예비대로서 사마소와 함께 후방인 장안에 머물렀다는 가정이 아마도 사실에 더 가까울 것이다.
시작하기에 앞서 위군의 계획을 다시 지도로 간단히 정리해보자.
위군의 작계
제 1군은 등애를 지휘관으로 하여 3만 명이 배정되었고, 제 2군은 제갈서를 지휘관으로 하여 3만 명이 배정되었다. 제 3군은 종회가 직접 이끈다. 제 1군(등애)과 제 2군(제갈서)의 목적은 답중이라는 외따른 고도에 혼자 주둔한 강유군이 한중에 구원하러 가는 사태를 막고, 가능하다면 그를 포위섬멸한다. 특히 제 2군(제갈서)의 음평교두 점령이 중요한데, 강유가 물을 따라 후퇴하는 이상 따라서 음평교두를 막으면 강유의 퇴로가 완전히 차단되기 때문이다. 한편 가장 규모가 큰 제 3군(종회)은 촉의 주력군이 포위된 사이에 한중을 급습하여 점령하는 역할을 맡는다.
가을 8월, 실각이 두려웠던 강유가 주력군을 이끌고 답중 총파업에 돌입한지 약 1년여가 되갈 무렵이었다. 사마소는 원정 불가론을 말하는 장군을 참수하고, 낙양에서 총 18만에 달하는 원정군을 출진시켰다. 여러 기록들을 교차해볼 때 원정군이 각자의 위치에 도달한 시점은 8월 말엽으로 비정해볼 수 있다. 그렇게 이 짧고 허망한 원정은 막을 올렸다.
양치기 소년
누가 그의 말을 믿을까
이보다 조금 앞서, 강유는 위군의 기색이 이상함을 감지하고 유선에게 자신의 방어전략대로 장익과 요화를 보내 양안관, 음평관에 주둔시키라고 건의했다. 유선은 황호가 부른 무당의 점궤를 근거로 이 제안을 거절했으며, 신하들에게 알리지도 않았다.
이 사건은 유선의 무능함과 황호의 간악함, 강유의 우국지심을 한번에 설명하는 용도로 종종 언급된다. 예컨데 황호 말을 듣지 않고 강유의 말을 들었다면 촉의 멸망을 막을 수 있었다는 주장도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나 세간의 인식과는 별개로 촉 조정의 조치는 지극히 합리적이었으며 또한 강유의 건의가 이뤄졌다고 해도 촉이 멸망을 피할 단계는 이미 한참을 지나와 있었다.
첫째로, 이 시기 강유 본인이 어떤 존재인지를 되새김해볼 필요가 있다. 그는 대장군 직위를 내려놓기 싫다는 이유로 투정을 부리며, 촉의 중앙 기동군을 이끌고 답중에 틀어박혀 수도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는 사실상의 반 쿠데타 상태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외지에 보낸 군은, 자칫 잘못하면 쿠데타를 을으킨 장군에게 포섭당할 위험이 크다. 쿠데타를 저지른 장군이 보낸 정보를 곧이곧대로 믿고, 외지로 군을 보내라는 요구를 수락하는 정권은 없다.
둘째로, 강유의 건의를 따르더라도 한중 점령이 기정사실화 되었다는 점이다. 그는 음평관과 양안관을 강화하라고 했다. 음평관은 자신의 퇴로에 해당하고, 양안관은 한중에서부터 성도로 이어지는 길목에 해당한다. 강유가 세운 작계에도 한중 외부의 주둔군은 어디까지나 강유가 화려하게 도착하기 전까지 한중을 "밖에서 돕는" 위치에 불과하다. 즉 강유가 유선에게 보낸 건의란, 거칠게 말하면 "내가 화려하게 도착해 한중을 구원할 테니까 통로나 잘 보전해놔"에 불과한 것인데, 이 시점에서 한중에 들이닥칠 종회의 군은 10만이다.
셋째이자 가장 중요한 측면은, 유선이 겉으로는 이 건의를 묵살했을지언정 위군의 침공이 사실일 가능성을 고려하고 유사시에 대단히 빠르게 움직였다는 점이다. 앞으로의 글에서 다루게 되겠지만, 강유의 일탈을 제외하면 촉 조정, 그러니까 유선은 빠르고, 정확하며, 준비된 조치들로 자신의 능력을 입증했다. 사실 그는 이 원정에 한해서 종회와 사마소만큼이나 합리적인 행위자였다. 유선의 잘못은 강유를 일찍 처리하지 못한 데서 찾으면 모를까, 이 원정 중의 대응에서 찾을 수는 없다.
진격과 대응
잘 준비된, 너무나 빠른
유선은 여름 중에 이미 위나라의 원정이 현실화되었음을 파악하고 요화를 답중으로, 동궐과 장익을 양안관(양안관구)로 파견했다. 가을 8월에서야 위군이 낙양에서 진군을 시작했으므로, 유선의 상황판단은 아주 빨랐고 군대의 움직임 또한 그러했다. 이를 볼 때 유선은 답중에 틀어박힌 강유의 의심스러운 건의가 사실일 가능성을 신중하게 고려하며 대응을 준비해왔음이 분명하다.
동궐과 장익은 양안관에 가는 대신 음평교두로 향했다. 이것이 촉 정부와 상의된 움직임이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한편 요화는 답중으로 강유를 구원하기 위해 떠났다. 이 움직임은 어떻게든 강유와 그가 이끈 기동군을 살려서 데려오기 위한 발악이었음이 분명하다. 유선의 사태 파악이 정확하고 빨랐기에 동궐과 장악은 음평교두에 도착하고도 무려 한 달이라는 시간을 강유를 위해 기다릴 수 있었다. 역산해보면 동궐, 장익, 요화가 음평교두에 도달한 시점은 8월 둘째 주 중순이다. 동궐과 장익이 음평교두를 장악한 사이 요화는 강유의 구원을 위해 북상했다.
8월 말에서 9월 초 사이, 위군은 예정된 움직임을 시작했다. 강유는 답중에 갑작스레 나타난 등애의 3만 군과 전투를 벌였다. 제갈서는 건위를 거쳐 음평교두를 향해 남하했다. 강유는 아직 자신이 어떤 덫에 갇힌지도 몰랐고, 9월 초까지 등애와 전투를 벌였다. 귀중한 시간이 낭비되고 있었다. 종회군은 한중으로 남진했다. 한중의 몰락이 다가오고 있었다.
9월 첫째 주에서 둘째 주 사이에, 종회군은 한중에 무혈입성한다. 한중의 촉군은 계획대로라면 청야를 마치고 한성, 낙성에 숨었어야 했지만, 청야가 성공적으로 이뤄졌을 가능성은 낮다. 앞선 글에서 고려한 현실적인 문제점들과 더불어, 화양국지 유은전에서 다수의 위(보루)가 한중 평야지대로 나온 종회에게 항복했다는 서술이 남았기 때문이다.
한성, 낙성에서는 각각 5천명의 촉군이 저항을 이어나갔는데, 종회는 각각 1만씩의 병력으로 두 성을 포위하고 한중 전체를 종횡무진했다. 그는 심지어 한가로이 제갈량의 사당에서 예를 취할 시간마저 있었다! 한중 민간이 완전히 장악된 상황에서, 원정 시작 단 2~3주만에 촉의 정치적 중심지였던 한중은 이렇게 허무하게 생명을 다했다.
강유는 한중이 날아갔을 즈음에서야 비로소 위군이 한중을 공격한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요화와는 이 무렵에 합류에 성공한 것으로 보이는데, 정확한 시간대는 명확하지 않다. 어쩌면 요화군이 한중 공격 사실을 전한 주체일 가능성도 있다. 강유는(혹은 강유와 요화는) 음평교두를 향해 퇴각하며 추격해오는 등애와 전투를 벌였고, 강천구에서 다시한번 패퇴한다.
한중이 날아간 시점에, 답중에 주둔하던 강유는 이제서야 몸을 빼고 있었고, 어떻게든 강유와 그가 가지고 도망친 기동군을 살리기로 결정한 촉군, 동궐과 장익은 한중 구원을 포기하고 음평교두에서 애처로이 강유의 도달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촉군은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아 한중을 잃었다. 촉군은 한중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강유와 그의 기동군을 살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촉군이 그렇게 살리고 싶었던 강유는 등애에게 쫓겨 위태롭게 도망칠 뿐이었다. 한편 제갈서는 3만 군을 이끌고 강유를 포위하기 위해 음평교두로 향했다. 한중을 포기하고 벌어낸 귀중한 시간이 다해가고 있었다….
9월 중순, 제갈서는 음평교두에 도착했다. 동궐과 장익과의 교전은 기록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이를 볼 때 동궐과 장익은 수적으로 우세한 제갈서군에 맞서 음평교두를 방어를 포기하고, 전투 없이 한수로 후퇴했다고 보인다. 이제 촉군이 한중을 포기해가면서까지 어떻게든 살리려던 강유는 앞으로는 제갈서 군에게, 뒤로는 등애 군에게 포위당한 채였다. 같은 시각 종회는 한성과 낙성을 제외한 한중 장악을 마치고, 한중에서 성도로 향하는 양안관을 함락시켰다. 이제 촉군은 한중에 역습은 커녕, 접근할 능력조차 잃었다.
등애에게 패한 강유는 음평에 도달했지만, 음평교두를 막아선 제갈서군과 마주했다. 뒤에는 등애군이 달려오고 있었다. 강유는 과감하게도, 아예 본국 구원을 포기하고 농서 방면으로 역공을 시도하는 척 제갈서를 기만하려 했다. 제갈서가 기동에 속아 음평교두를 비우고 북상한 사이 강유는 음평교두를 재빨리 통과했고, 드디어 동궐, 장익과 합류할 수 있었다.
이 기동은 촉멸전에서 강유가 전략, 전술적으로 보여준 수많은 우행들 중 유일하게 긍정적인 모습이고, 그가 결코 마냥 무능한 인물이 아니라는 작은 입증이기도 했다. 실제로 그는 이 기동을 통해 포위섬멸을 피하고 촉의 기동군을 어떻게든 다른 군대와 합류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자위한들 이미 그가 벌여 놓은 실책들은 이 작은 서커스를 아득히 상회한 채였다. 그를 구하기 위해 촉군은 전체 전쟁에서 가장 중요했던 한 달을 속절없이 허비해야 했고, 이는 오롯이 그가 대장군을 내려놓기 싫다고 투정하며 답중에 틀어박힌 탓이었다. 촉의 정치적 심장이던 한중은 그의 작계 변화로 인해 전쟁 한 달이 채 지나기 전에 증발했고, 그가 그토록 바라던 '왕의 귀환'은 양안관의 함락으로 불가능한 옹알이가 되었다. 무엇보다, 8만에 달하는 종회군이 양안관을 지나쳐 촉의 마지막 관문, 검각으로 향하고 있었다.
강유는 숨을 돌릴 새도 없이 동궐, 장익과 함께 헐레벌떡 검각으로 퇴각했다. 이제 촉과 종회의 8만 대군 사이를 가로막은 것이라곤 마지막 관문인 검각 뿐이었으니까. 이 엉망진창인 퇴각길에 놓인 강유는, 이때쯤이면 자신이 세운 한중으로의 멋진 역습이라는 계획이 얼마나 미친 소리였을지, 자신이 얼마나 오만했는지를 깨달았을까. 이제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안타깝게도 이후의 정황을 보면 딱히 그런 것 같진 않다.
전쟁 시작 한 달, 촉군에겐 그렇게 검각만이 남았다. 우스운, 정말로 우스운 전쟁이었다.
[출처] 촉 멸망사 7. 현관에서 울부짖는 범 (【부흥】네이버 대표 역사 카페) | 작성자 황제펭귄
첫댓글 쿠데타 운운 대단히 억지입니다. 황호나 강유나 유선의 암묵적인 지지 아래 활동할 수 있었던 거고, 동궐과 제갈첨의 강유 실각 건의를 저지한 것도 유선입니다. 초반부 연재글 그나마 냉철하게 분석하는 모양세였지만 갈수록 위진남북조 갤러리의 주장을 그대로 따와서 비판이 아닌 비난을 하는 모양세네요.
걔들이 뭐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우러 전쟁 땜시 군갤 가는게 주) 부흥에선 이 시리즈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꽤 있는걸로 보이는것 같습니다.
근데 위진갤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서구사학계 자체에 내재된 큰 오류로 보입니다. 대의명분이랄까 동양철학에 대한 이해가 1도 없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