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선수’라는 말을 듣게 되면 우선 떠오르는 이미지는 구릿빛 피부에 날카로운 눈, 상대를 단번에 제압하는 강렬한 표정, 선명한 근육 라인이라고 할까?
그러나 오늘 만날 그분은 출생년도와 얼굴을 오가며 보게 되는 앳된 얼굴, 그리 검지 않은 피부, 선한 인상이 매력인 대구FC의 든든한 수문장 백민철(대구FC, 30)이다.
2007년 시즌을 마치고 다가오는 2008년을 일찌감치 준비 중인 대구FC. 다가오는 12월 16일 사랑하는 그녀와 백년가약을 맺는 중대한 일을 앞두고 있지만 그 또한 팀에서 열심히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많은 변화가 있었던 2007년의 대구FC와 프로데뷔 6년째를 맞이했던 올해의 끝에서 지난 시간들을 뒤돌아보았다. 상황, 상황마다 앞을 가로 막는 일들이 끝없이 그를 괴롭혔지만 꿋꿋하게 다른 곳을 바라보지 않고 달려온 그의 축구이야기를 함께하자.
2007 대구FC, 변화의 바람이 불다
2007년 대구FC에는 많은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가장 큰 변화는 창단 이후 자리를 지켜왔던 박종환 감독이 물러나고 새로운 신임 변병주 감독님 취임한 것이다. 감독의 변화로 인해 코칭스태프 또한 대거 변화를 시도했다. 기존의 색깔을 과감하게 변화시키기 위한 첫발을 내딛은 2007년은 아마 처음이라는 말의 의미만큼 가장 진통이 심했다.
“2007년을 마무리 한다는 게 참 많이 아쉽죠. 다른 생각들은 저기 뒤에 있고 정말 아쉬워요. 시즌 종료를 앞두고 어느 정도 팀이 끈끈해지는 무언가가 경기를 할 때 생겨난다고 생각했는데 마쳐야 한다는 게 너무 아쉬웠어요. 이긴 게임은 역시 이겼으니까 그리 아쉬움이 크게 밀려오지 않지만, 진 게임은 내가 좀 이렇게 했으면 비겼을 수도 있을 텐데. 물론 이기는 게임을 해야 하지만 패배라는 걸 안아야할 때는 내가 그 순간 좀 그렇게 해서 비기는 결과를 만들어도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는 3경기를 놓쳤다는 것이 아쉽네요. 팀에 주어진 경기가 36경기였는데 3경기를 놓쳤어요. 올해는 상을 받고 싶었는데 아쉽네요. (웃음) 전북과의 경기에서 신인선수들이 대거 투입되게 되어서 그때 뛰지 못했고, 포항과의 게임에서 2 : 0으로 리드하다가 마지막에 2골을 내주어서 비긴 적이 있거든요. 그 경기 때 다치는 바람에 일주일 정도 운동을 못했어요. 부상 때문이기도 했지만 제가 실수가 많았다 보니까 뛰지 못한 것 같아요. 내년에 한 번 노려보아야죠. (웃음)”
36경기 중 33경기라는 기록만으로도 충분히 많은 게임에 출전했고 그는 대단하다. 수상의 기쁨은 올해 누리지 못하게 되었지만 그 아쉬움을 다가오는 2008년 시즌에 모두 쏟아 부어 꼭 기쁨의 수상을 즐길 수 있기를.
정확히 만들어진 틀과 안전한 경기 운영 강한 인상이 박종환 감독의 모습이었다면, 올해 변병주 감독의 모습은 공격에 힘을 실은 자유로운 축구이다. 보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보여지는 이 부분이 큰 차이로 다가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선수 본인은 정작 달라진 것이 그리 없다는 반응이다.
“글쎄요. 감독님이 바뀌셔서 저희 또한 많은 변화가 있었다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겉으로 보여 지는 것에서 머리를 기르거나, 염색을 하거나 그런 것들이 바뀌었다면 바뀌었을까요. 다른 부분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요. 다른 분들이 보시기엔 편해진 것 아니냐 그렇게 이야기를 하곤 하는데. 저희는 선수잖아요. 선수는 밑에서 배우는 입장인데 가르침을 받는 스승님이 달라진 것이니까요. 저희는 똑같이 배우고 있고요.
물론 팀 색깔에 대해선 많이 달라졌죠. 작년 같은 경우는 수비축구라고 정해진 그런 플레이를 했지요. 저희들끼리 하는 전술에 다 번호가 있었을 만큼 1번, 2번 이야기를 해서 선수들의 플레이가 정해져 있었지요.
지금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능력에 맞게 하는 것 같아요. 그때도 자신의 능력에 맞게 했지만 어떻게 보면 좀 딱딱한 면이 있었거든요. 올해는 좀 더 공격적인 모습이 강했고, 선수들의 개인기에 비중을 두었던 것 같아요. 물론 공격적이다 보니까 골은 많았지만 그만큼 실점률은 높았네요. (웃음)”
변화를 시작한 대구의 경기를 보면서 몇몇의 팬들은 오히려 달라진 대구의 틀이 보이지 않아 불안해하는 듯 했다. 보는 입장에 있어서는 오히려 정해진 전술이 ‘틀이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고 짜임새를 가진 견고함이 있다고 느끼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선수들 마다 컨디션이 다 다르잖아요. 1년 동안 게임을 하다보면 잘되는 날도 있고 안 되는 날도 있잖아요. 잘되는 날은 진짜 잘 되요. 골도 많이 넣고, 많이 먹어서 문제이긴 하지만. (웃음) 하지만 대량득점과 소량실점을 할 수 있는 날도 있었어요.
프로 데뷔 후 어느 정도의 시간을 보낸 선수들이 있어요. 하지만 그 선수들이 모두 프로 경력이 많은 것이 아니거든요. 보통 대학 때는 많이 뛰었지만 프로에선 그다지 경험이 없는 선수들이 많아요. 그렇기 때문에 기복이 심한 그런 느낌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공격축구를 선보이겠다는 변병주 감독의 이야기처럼 대구는 많은 득점을 성공시키며 공격력을 키워갔다. 그러나 득점만큼 실점도 컸던 것이 사실.
“올해 공격축구를 하면서 골을 많이 넣었어요. 그런데 문제는 그만큼 실점이 컸지요. 사람이 한 번, 두 번 공이 오면 그에 따른 실수도 줄게 되잖아요. 그렇지만 올해는 너무 많이 오니까 실점도 많았던 것 같아요. 이유라면 이유이고, 핑계네요. (웃음)
올해 공격력은 좋았지만 작년에 비해 수비가 약했던 것이 사실이에요. 후반기가 돼서야 무언가 끈끈함이 생겼다고 할까요? 시즌 종료를 앞두고 경기를 하면서 찬스는 줬지만 허무하게 내어준 것이 아니라 어렵게 같이 막으면서 상대에게 실점한 것이라, 경기는 졌지만 느껴지는 그런 것이 있었던 것 같아요. 서울과 마지막 경기 하면서 정말 아쉬웠어요. 이제 정말 뭔가 좀 되는 것 같은데, 좀 더 경기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
“실점이 많았던 만큼 올해 지난 시간동안 지지 않았던 팀들에게 연이은 패배를 했어요. 그래도 마지막 경기인 서울전에는 한 가지 해냈다는 생각이 들어요. 데뷔를 했던 팀이고, 사실 이적을 했다보니 상대팀으로 만났을 때는 솔직히 지기 싫거든요. ‘이렇게 열심히 잘 하고 있습니다.’ 하는 것도 보여주고 싶은 것이 사실이잖아요. 올해 첫 게임을 서울이랑 했는데 너무 허무하게 져서 마음이 편치 않았어요. 작년에 한 번도 져 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올해도 잘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결과 어떻게 그렇게 되 버려서. 내가 한 거 없이 진 것 같아서 속상했어요.
서울과는 어쩌다 보니 처음과 마지막 경기를 하게 되었어요. 원래 마지막 게임이 서울이 아니었는데 밀려서 경기를 하게 되었잖아요. 마지막 경기는 지고 싶지 않았어요. (김)현수형 은퇴 경기이기도 했고, 지금까지 저희가 이기는 경기를 많이 하지 못해서 죄송스러웠기 때문에 이기고 싶었어요. 결국은 승리했고,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게 되었지요. 다행이었던 것 같아요.”
올해는 이기거나 지거나, 승패가 확실한 경기들이 많았다. 모 아니면 도라고 하듯 비기는 게임은 거의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로 인해 승점관리가 되지 않았고 올해 성적은 아쉬움을 남게 하는 기록이 되었다. 그러나 선수들의 입장에서 보면 비기는 게임은 큰 의미를 주지 않는다.
승리를 쟁취하는 것, 그것이 선수들이 가슴 쫙 펴고 깊이 들이마시는 상쾌한 공기이기에.
안양, 광주, 서울 찍고 대구 !
프로데뷔 6년차, 대부분 골키퍼들은 데뷔 경기를 치르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골키퍼라는 자리가 워낙 변화가 적고, 이미 팀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과의 경력 차이가 상당하기에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서야 데뷔가 가능하다. 그러나 보통 한해가 가기 전에, 늦어도 프로 2년차가 되면 리그 경기 출전은 의래 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프로 데뷔를 하기까지 3년의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내야했다. 줄곧 2군 경기에 출전하는 것이 프로 생활 내내 했던 경기이고, 정규리그 경기를 뛰는 골키퍼의 몸을 풀어주기 위해 출전 선수가 아님에도 경기장에 나가야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주기 위해 돌아, 돌아 둥지를 튼 대구. 그는 어떻게 대구에 오게 된 것일까.
“가득한 자신감에 부푼 꿈을 안고 제대를 맞이했어요. 전 소속팀에 전화를 해서 ‘이제 제대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고 물으니 당연히 팀으로 들어와야 한다더라고요. 그래서 들어갔지요. 제가 돌아갔을 때 모든 것이 바뀌었어요. 감독, 코칭스태프 모두 바뀐 상태여서 제가 아는 코치님은 이영진 코치님밖에 없는 거예요. 바뀐 것은 바뀐 것이고 열심히 해야 한다는 생각만 가지고 열심히 했는데 복귀 하자마자 2군으로 빠지게 됐어요. 그 전 해에 (원)종덕이랑 (박)동석이가 시즌을 반반 나누어 뛰면서 1군 선수라는 입지를 굳힌 그런 상황이었거든요.
사실 많이 기분이 나빴어요. 제대 당시에 다른 팀에서 오라는 이야기가 몇몇 있었어요. 하지만 본래 구단에서 들어오라고 하는데 가야하잖아요. 그래서 복귀했는데 2군이라니 기분이 좋지 않았지요. 그러던 중에 어깨 수술을 하게 되었어요. 2군 경기를 뛰고 있는데 뛰던 중에 다쳤나 봐요. 다친 것도 몰랐어요. 운동을 하려고 몸을 푸는데 어깨가 아픈 거예요. 병원에 가서 검사 받았더니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다시 돌아와서 운동을 했는데 결국 너무 아파서 운동을 못하게 되었어요. 다시 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받아보니 연골이 찢어졌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수술을 받았고, 그 해에 내내 재활을 했죠.”
광주에서 제대하기 전 마지막 경기까지 뛰면서 몸이 좋았던 그. 컨디션도 정상적이었고, 정말 몸이 참 좋았단다. 그러했기에 가득한 자신감에 복귀를 했건만, 결국 2군이라는 예전의 시절로 돌아가야 했다. 재활을 하던 시간 동안 그는 변화를 준비했고, 이적을 결심했다.
“원래 경남에서 이야기가 있었어요. 창단을 준비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에이전트 쪽에서 이야기가 잘 되었다고 들었어요. 그러던 중에 경남과 잘 안되어서 11월에 이야기가 깨어졌지요.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데 박종환 감독님이 부르셨어요. 식사를 하면서 ‘너는 다른 생각 말고 재활 열심히 해서 몸 만들어라’하고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서울과 잘 정리를 하고 대구로 이적을 했지요.
6개월 동안 운동을 쉰 상태에서 운동이 정상적으로 될 수가 없잖아요. 그래도 이적을 했는데 처음부터 아프다고 그럴 수도 없고 밉보이기 싫었어요. 이 악물고 뛰었어요. 정말 아킬레스건 다 올라오고. 동료 선수들이 제가 골키퍼인줄 다 몰랐데요. 필드 선수인줄 알았다더라고요. (웃음)”
“대구에 왔을 때 저랑 (김)지운이형, (김)태진이까지 세 명이 있었어요. 개인적으로 지운이형하고는 상무에서 1년 동안 같이 지냈었고, 태진이랑은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은 없지만 대회나 결혼식장이나 이런 저런 곳에서 서로 많이 보아서 쉽게 친해졌어요.
솔직히 경쟁에서 살아남아 최고가 되었을 때 경기에 나갈 수 있는 거잖아요. 당시에 태진이는 허리 수술을 해서 운동을 제대로 시작한지 얼마 안 된 상황이었고, 어떻게 보면 저도 어깨 때문에 쉬었고. 비슷할 수 있지만 태진이는 이전에 팀에서 해놓은 것이 있었잖아요. 저는 오자마자 쉴 수가 없었어요. 이적 하자마자 쉴 순 없잖아요.”
비슷한 상황이지만 확실한 차이가 있던 상황.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에 보여주기 위해서 그는 아픔을 참고, 잃어버린 감각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 했다. 더 이상 뒤에서 지켜보는, 도움만 주는 존재가 아닌 자신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에.
쉽지 않았던 대구에서의 출발
잃어버린 꿈을 찾기 위해 그는 대구에 왔다. 그러나 처음부터 쉽게 주전의 자리는 그의 것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연이어 찾아온 기회가 그에게 손짓했고, 그는 그 손짓에 반응했다. 이후 그는 밀어낼 수 없는 주전의 자리에 든든히 자리하고 있었다.
“지운이형이 스타팅으로 뛰게 될 예정이었어요. 그런데 게임 얼마 남겨두지 않고 운동 하다가 근육을 다친 거예요. 그래서 저 밖에 뛸 사람이 없는 상황이 되었고, 제가 출전하게 되었죠. 다행스럽게 그 대회에서 팀이 우승을 했고, 좋은 인상을 심어주는 기회가 되었죠. 그래서 개막전에 선발출전 했어요. 전남과 2 : 2로 비겼는데 그 다음 경기부터는 리저브에도 제 이름이 없었어요. 조금 상처받았죠.
그러던 중에 팀이 연패를 했고 저한테 다시 기회가 왔죠. 경남 게임에 출전하려고 준비를 했는데 손가락이 찢어진 거예요. 축구선수 생활 하다하다 손가락 찢어진 건 또 처음이었어요. 그러면서 기회를 놓쳤죠.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가 공교롭게 골키퍼 두 선수가 연이어 다쳤어요. 태진이는 옆구리를 차이면서 허리에 무리를 줘서 다시 허리 수술을 했고, 지운이형은 어깨 수술을 하게 되었죠. 또 그렇게 기회가 왔죠.”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손을 다쳤을 때 나을 때 까지 어차피 운동을 못하니까 게을리 할 수 있었는데 눈치가 보여서 그랬는지 매일 매일 조깅을 정말 열심히 했어요. 그래서 당장 경기에 출전하라고 했을 때 그리 힘들지 않더라고요. 정말 준비하는 자에게 기회가 온다는 말이 현실이 되었죠.
그때 제가 손이 다 낫지 않은 상황이었어요. 그래도 출전을 했지요.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연습을 하다가 또 손이 찢어졌어요. 오른쪽 새끼손가락 사이를 다쳤는데 안 되겠다 싶어서 깁스를 했어요. 이후에 경기 뛸 때 깁스하고 내내 뛰었어요. 장갑 끼니까 사람들이 다 몰랐을 거예요. 그 해에 내내 깁스를 한 채 있었어요. 다른 손가락들은 두고 새끼손가락만 고정시키고 주먹을 쥘 수 있게 했죠. 펀칭도 하고 다 했어요. 그때 감독님이 무조건 공이 오면 쳐내라고 그러셨어요. (웃음)
보통 대부분 골키퍼들이 인사할 때나 입장할 때 장갑 안 끼고 나와서 악수하고 인사하고 그러잖아요. 전 깁스 숨기기 위해서 안에서 장갑을 끼고 나왔어요. 그렇게 깁스 한 채 일 년을 보냈어요. 다행히 후반기에 경기 결과가 좋아서 행복했지요.”
냉정한 프로의 세계
대학교 4학년, 학교의 대회 성적이 좋지 않아 드래프트와 실업팀에서의 콜에서 고민해야 했다. 남자라면, 운동을 했다면 최고에 도전해야한다는 결정을 하고 그는 드래프트를 신청했다. 낮은 순위였지만 안양LG에 입단했고 그는 프로에 대한 꿈을 현실에 그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너무나 큰 벽이 있었다. 바로 당시 안양의 주전 골키퍼 신의손이였다. 넘을 수 없는 벽이었기에 그는 2군 리그에서 뛰어야했다. 데뷔전을 미루고 또 미루어 결국 그는 군 입대를 해야 했고, 광주에서 첫 데뷔전을 치렀다.
“광주 창단 첫 승을 했던 부천SK와의 경기가 제 데뷔전이에요. 그 경기도 제가 뛰는 것이 아니었는데 제가 뛰게 되었어요. (웃음) 당시에 (이)광석이형이랑 지운이형, (박)호진이형이 있었는데 대부분 광석이형이 경기를 뛰고 리저브로 호진이형이 이름을 올렸죠. 그러던 중에 자체게임을 뛰었는데 제가 좀 잘했어요. 저희는 성남에서 머물면서 경기가 있을 때 그 지역으로 내려가거든요. 2003년에 경기가 많았어요. 아마 44경기가 있었던 것 같은데, 한번 지방을 가게 되면 한 달을 있다 오는 그 경기에 제가 리저브로 딱 들어가게 되었어요.
광주에서 홈 경기였는데 경기 전날 비가 좀 왔었어요. 광석이형이 연습하면서 다이빙을 떴는데 ‘악!’하면서 소리치더라고요. 장갑을 벗어 보니까 새끼손가락이 빠진 거예요. 그래서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고 제가 나가게 되었죠. 첫 승해서 케이크 자르고 첫 데뷔, 창단 첫 승 제대로 기쁨 만끽 했죠. (웃음) 이후에 2군리그를 왔다 갔다 하면서 경기를 뛰었어요. 전국체전도 나가고, 결국은 리저브로 뛰던 형이 다쳐서 다시 리그로 돌아오고. 그렇게 하면서 제대 전에는 꾸준히 연승하면서 마무리를 했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이런 저런 일들이 참 많았어요. (웃음)
그때도 그랬던 것 같아요. ‘아, 경기가 좀 더 있었으면 좋겠다.’하고요.”
힘으로 얻어낸 골키퍼 자리, 그 인연을 이어 지금까지
초등학교 4학년 우연한 기회에 그 또한 다른 선수들과 다르지 않게 맛난 음식과 멋있는 유니폼에 마음을 빼앗겨 부모님께 떼를 썼다. 자신이 다니는 학교에 축구팀이 있는 것조차 몰랐던, 내성적인 백민철 어린이. 1년에 한 번 열리는 반 대항 축구대회에 다른 친구들이 출전한다는 것을 보고 자신도 또한 하고 싶다는 생각에 한자리 남은 골키퍼 자리를 반 협박으로 친구에게 뺏어낸 그. 그 인연을 이어 지금까지 그는 든든하게 골문을 지키고 있다.
“저희 반이 우승을 했어요. 그것도 단 한 골도 실점 없이. 축구부 코치님 눈에 띄게 되고 운동해보지 않겠냐며 먹을 거 사주면서 유니폼도 주고 그러니까 좋았죠. 집에 가서 운동하겠다고 이야기를 하니까 절대 안 된다고 그러셨어요. 막 떼쓰고 결국 운동을 했어요.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정식적으로 하다 보니 힘들잖아요. 만날 도망 다녔어요. 이젠 반대로 반대하시던 부모님이 얼른 운동하러 가라고 밀어내셨죠. 저희 학교가 성적이 좋아서 동대부중으로 진학을 했어요. 집에서는 솔직히 제가 이걸 직업으로 삼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으셨어요.
부모님이 중학교 때 까지 단 한 번도 제 경기를 보러 오신 적이 없으세요. 고등학교 때 처음 제 경기 보러 오셔서 직업을 생각한다는 걸 아셨지요. 특기생으로 입학해서 운동만 했으니까요. 중학교 때도 성적이 좋았는데 중요한 고등학교에서 성적이 안 좋았어요. 같이 운동했던 친구들이 다른 유혹에 빠져서 다 그만둔 거예요. 총 남은 선수가 12명이었어요. 제가 3학년이었는데 당장 대학 진학을 해야 하는데 막막하잖아요. 결국 12명이 대회에 나갔어요.”
“지금 한국철도에서 뛰고 있는 (김)상균이랑 인천에 있는 (김)상록이가 저랑 같은 학교인 동대부고였어요. 당시 같이 뛰었는데, 거의 세 명이서 경기를 했어요. 제가 골키퍼고 상균이가 수비보고. 그러니까 둘이서 수비하고 상록이 혼자서 공격을 했죠. 밑에서 밀어주면 그걸 골로 연결하거나, 코너킥을 얻어서 상록이가 올리고 상균이가 헤딩 슈팅으로 득점하는. 상록이랑 상균이랑 친 형제거든요. 그 형제랑 저랑 그렇게 고등학교 생활을 했어요. 내내 승부차기를 해서 4강까지 올라갔던 적도 있고,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야했으니까요.
좋은 기회로 동국대에 입학을 했고, 4년을 보냈죠. 항상 제 앞에는 걸림돌이 있었어요. 원래 골키퍼는 2년에 한 번씩 뽑는 게 제 위에 선배가 있었어요. 4학년 골키퍼 선배도 있었고요. 제 위에 선배가 경기를 많이 뛰었는데 입학 이후로는 조금씩 저랑 나누어가면서 경기를 뛰었지요. 제 앞에 놓인 걸림돌을 하나씩 넘어가야 했어요. 그래도 초반에 경쟁이 있었지만 이후엔 제가 많이 뛰었어요. 승부차기는 전담으로 뛰었고, 그렇게 대학교 생활을 보냈어요.
지금 이렇게 돌아보면 어떻게 평탄한 시절이 없었던 것 같아요. 어찌 보면 지금이 가장 평탄한 것 같아요. 그전에는 꼭 무슨 사건이 터지거나 일이 있거나 그랬죠. (웃음)”
시작은 비록 그리 깔끔하지 않았지만 그는 그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했고, 지금까지 이어왔다. 힘들었던 나날들이 더 많았고 지친 일들이 가득했지만 그는 절대 축구를 그만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단다. 그만 둘 수 없다는 것을 어린 시절 알았기 때문에 평범한 생활을 꿈꾸기도 했지만 이미 그렇게 하기엔 너무 많이 달려왔기에. 그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현실에 충실했다. 누군가가 자신을 축구계에서 떠나게 하지 않는 이상, 그는 떠나고 싶지 않았다.
“골키퍼니까 막는 일이 대부분이에요. 슈팅 막았을 때 그걸 내가 어떻게 막았는지, 경기를 이기고 걸어 나갈 때 그 기분은 경기를 뛰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거예요. 한해, 한해 지날수록 더 많은 느껴지는 것 같아요. 정말 축구하기 잘 했다는 것을 해가 거듭될수록 다른 느낌들로 받고 있는 것 같아요.
서울에 있었을 때도 축구팬분들이 알아봐주시고 그랬지만 대구 와서 경기를 많이 뛰다 보니까 더 많이 알아봐주시고 그렇잖아요. 감사해요. 넘치는 사랑을 주셔서, 환호해주셔서 어떻게 제가 해야 하는 걸까 생각을 많이 해요. 경기장에서 정말 열심히 하는 모습 보여 드리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아요.
그래도 요즘 제 이름 외쳐주시고 그러면 손도 흔들고, 조금 여유가 생겨서 반응하곤 해요. (웃음)”
새로운 시작, 결혼
큰 팀에 소속되어 있지만 제대로 된 경기에 나오지 못하는 아들이 얼마나 가슴 아팠을까.
같이 운동했던 아들의 친구들은 대표팀 옷을 입고 텔레비전에 나와 경기를 뛰는데 우리 아들은 찾을 수가 없으니. 그 속상함을 모두 잊게 한 지금의 생활. 스포츠 신문에 나오는 선수명단에서 아들을 이름을 흐뭇하게 바라보시는 그 모습이 행복하다는 그.
운동 때문에 집에 있는 시간보다 밖에서 머무르는 시간이 많아 동생들과 때론 모른 척 길을 걸었던 적도 있고, 데면데면 마주하기도 했단다. 가까이 있지만 함께할 수 없었던 가족들에게 항상 미안한 그가 다가오는 12월 한 가정의 가장이 된다.
“지금 이렇게 대구에서 뛰고 있는 모습 보시면서 흐뭇해하세요. 너무 행복하고 동생들에게도 고맙고, 부모님께도 감사해요. 아들로써, 형, 오빠로써도 살지만 이제는 또 한 남자의 남편이 되게 되었어요. 다가오는 12월 16일 결혼을 해요. 처음 만난 순간부터 마음에 들어 이후 휴가 내내 하루도 안 빠지고 만났어요. 못내 불안했던 거죠. 대구를 내려가면 만나지 못할 테니까 마음이 멀어지지 않게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너무 적극적이어서 초반에 다투기도 했지만. (웃음) 놓치고 싶지 않았어요. (웃음)
이제 만남을 가진지 1년 정도 되었거든요. 결혼이 좀 빠르다곤 하지만 그렇다고 한 해 미루기엔 1년이 너무 길 것 같았어요. 그래서 결정을 하게 되었죠. 저 하나만 보고 생활하던 서울이 아닌 지방으로 내려오는 거잖아요. 너무 고맙고, 감사해요. 앞으로 더 열심히 사랑하고 아껴줘야죠. (웃음)”
“아직 프로포즈는 안했어요. 이번 휴가 때 하려고요. 안하면 평생 힘들 것 같아서. (웃음)”
2008년, 더 크게 웃을 수 있도록
2008년이 되면 싱글이었던 그는 한 가정의 가장이 되고, 인생의 한 해를 또 보낸 만큼 연륜이 묻어나는 철벽 수문장으로 거미손을 움직일 것이다.
어느 누구보다 환한 미소로 승리의 순간을 즐기는 그의 얼굴. 미소가득 번지는 그의 얼굴을 내년 시즌 내내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 결혼을 축하합니다.
“은퇴를 생각해 본적이 없어요. 지금도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은데. 이것을 제대로 하려면 더 많이 투자하고 노력해야하는데 은퇴까지 신경 쓸 만큼 여유롭지 않아요. 지금 제가 소속되어 있는 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하면 미래도 그만큼 행복하고 편안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먼 미래보다는 지금의 현실을 제대로 살면서 미래에 차곡차곡 투자할래요.
이제 혼자의 몸도 아니고 더 신중하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 같아요.
해마다 해마다 많은 것을 느끼기 때문에 내년에는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되는 선수가 되도록 노력할 것이고, 그래야만 2008년도 있고 2009년도 올 것이라고 생각해요.
저희는 어차피 상품이에요.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이 저희의 일이니까 더욱 열심히 해서 좋은 모습 보여드리겠습니다. 날씨가 더욱 쌀쌀해져 가네요. 감기 조심하시고, 2007년 한해 많은 성원과 사랑 아낌없이 쏟아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2008년에도 주신 사랑에 보답할 수 있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FC 백민철
존내길어 ㅎㄷㄷ
민철신 하악
으응 나의 역할모델~
민철신 내년에도 선방 ㅎㄷㄷ 부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