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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아버지, 길선주 목사”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들을 찾아오셔서 마음 문을 두드린다.
밀란의 어거스틴을 찾아와서 마음 문을 두드렸고
평양의 길선주를 찾아와서 마음 문을 두드렸다.
한 사람이 마음 문을 열고 주님을 영접할 때 그의 운명과 민족의 운명이 바뀌어졌습니다. 어거스틴으로 인해서 고대 세계의 운명이 바뀌어졌고
길선주로 인해서 조선 민족의 운명이 바뀌어졌습니다. 그러면 ‘조선 교회 또는 한국교회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길선주 목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길선주 목사는 한국교회를 태동케 한 1907년 부흥운동의 주역이었습니다. 그는 이기풍 목사와 함께 한국 최초의 7분 목사님들의 한 분이었습니다. 길선주 목사는 불교와 선도의 도사였지만 29세 때 예수를 믿은 다음부터 40여 년 동안 십자가의 복음을 전했는데, 380여 만 명에게 복음을 전했고, 3천 여명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8백 여명을 목사와 전도사와 장로로 세웠고, 60여 개의 교회를 세웠다고 합니다. 이제 길선주 목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서 세 가지로 나누어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 길선주는 불교와 선도의 도사였다.
그는 1869년 3월 15일 평남 안주에서 출생했다.
이기풍 목사보다 4년 후에 태어났다.
길선주는 네 살 때부터 가정에서 어머니로부터 한문을 배웠고
일곱 살 때는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열한 살 때, 열 여섯 살 되는 신부와 결혼을 했다.
누나 같은 아내에게 어리광을 부리곤 했는데
부엌에 가서 누룽지를 달라고 조르기도 했고
아내 등에 업혀 뒷동산에 올라가 놀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길선주가 몸과 마음이 약한 마마보이는 아니었다.
거대한 체구와 건장한 기력을 가진 굳건한 남성이었다.
그는 ‘호랑이’라는 별명을 가질 만큼 장사 같은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길선주는 소년시절부터 무엇인가를 추구하고 있었다.
진리를 추구하고 있었다.
세상에 대한 환멸을 느끼면서 보다 나은 세계를 동경하게 되었다.
그래서 19살 때부터 산속에 들어가서 도를 닦기 시작했습니다.
창일이라는 도사를 만나서 그가 써준 ‘산신차력’이란 주문을
밤낮으로 외우기 시작했다.
대성산 절에 가서 일 주일 동안 밤낮으로 주문을 외우자
영이 내려 온 몸이 떨리고 기력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는 너무 기뻤다.
길선주는 수도에 더욱 정진하기 위해서 평양에 있는 장득한 도사를 찾아갔다.
장득한은 선도를 수련한 도사로 길선주에게 옥경의 구령삼정 주문을 가르쳐주었다.
길선주는 21살부터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밤낮으로 옥경의 구령삼정 주문을 외웠다.
때로는 21일 때로는 49일 때로는 100일씩 기도하며 주문을 외웠다.
결국 길선주는 선도의 영험과 신통력을 얻게 되었다.
그는 너무 기뻤다. 그는 아내에게도 이 도를 가르쳐 강령을 경험하게 했다.
길선주는 선도에서 큰 힘을 얻어 통나무 목침을 주먹으로 부수고,
다듬이 방망이를 손으로 분질렀으며, 웬만한 개천은 단 숨에 건너 뛰었다.
차력에 성공하고 선도에 통달한 길선주의 이름이 널이 알려지자
평양 시내에 그가 나타나면 그를 가리켜 ‘길도사’라고 부르며 수군거렸다.
그러나 그는 아직 영생의 진리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느끼며
계속해서 수도에 힘을 다했다.
여기서 길선주를 성 어거스틴과 비교해 본다.
어거스틴도 젊은 시절에 나름대로 진리를 추구했다.
19세 때 호르텐시우스라는 철학 책을 읽으면서
세상이 모두 무가치하게 보였고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가슴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영생의 진리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나름대로 계속해서 진리를 추구했다. 길
선주도 마찬가지다.
선도의 도는 터득했지만 아직 영생의 진리를 발견하지 못해서
계속 수도에 힘을 다했다.
둘째, 길선주는 예수님을 만났다.
1890년부터 평양 시내에는 이상한 소문이 퍼졌다.
키도 크고 코도 크고 눈이 파란 양귀자 즉 괴상한 서양 사람이 나타나서
서양 교를 전하는데 한번 거기에 빠지면 혼이 뽑혀서 미치고 만다는 소문이었다.
쌤 마펫 선교사를 가리켜 하는 말이었습니다.
쌤 마펫 선교사는 1890년 1월 제물포를 거쳐 경성에 도착했고
1893년부터 평양에 와서 살면서 복음을 전했다.
길선주는 평양 널다리 골에 살고 있었는데
괴상한 서양 사람이 나타나서 새 교를 전한다는 소문을 듣고 호기심이 동하여
마펫 선교사를 찾아가서 그와 담론은 나누었다.
쌤 마펫 선교사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를 두려워 말고,
몸과 영혼을 지옥에 멸하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전도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고 전도했다.
길선주는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알쏭달쏭하여 잘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 마음이 열렸다.
마치 어거스틴이 암브로스를 만나 복음을 들으므로
그의 마음이 어느 정도 열렸던 것처럼,
길선주는 마펫 선교사를 만나 복음을 들으므로 그의 마음이 어느 정도 열렸다.
길선주는 진리를 더 알아보기 위해서 친구 두 사람을 마펫 선교사에게 보냈다.
문흥준씨와 김종섭씨 두 사람을 마펫 선교사에게 보냈다.
김종섭은 길선주에게서 선도를 배운 그의 제자였다.
그런데 얼마 후에 돌아온 김종섭이 길선주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를 하는 것이었다. 길선주는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길선주는 그의 배도에 충격을 받았다.
길선주는 결국 마음에 번민을 가지고 깊은 밤 이른 새벽이 기도하기 시작했다.
마치 어거스틴이 무화과 나무 아래서 깊은 번민에 빠졌던 것과 같았습니다.
길선주도 고민하며 하나님께 이렇게 부르짖어 기도했다.
“지존하신 하나님이시여, 저는 지금 심한 고민에 빠져 있습니다.
여러 해 동안 신봉하던 선도는 정말 섬길만한 도인지 의심스럽고,
예수교에는 과연 영생의 진리가 있는지 알 수 없어 마음이 몹시 괴롭습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사 이 마음을 가라앉아 주옵소서”
이런 기도를 수삼일간 계속했다.
밤이 깊어 새벽 한 시쯤 되었을 때였다.
“정말 예수가 인류의 구세주인지 알려 주옵소서” 하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방안에서 청아한 피리 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탕탕 하는 요란한 총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라는 순간 하늘에서 “길선주야, 길선주야, 길선주야!” 하고 세 번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길선주는 너무나 무서워 고개를 들지 못하고 엎드린 채
“아버지여, 저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저를 살려 주옵소서!”라고 기도했다.
자기의 죄를 회개하며 울부짖었을 때 그의 몸은 불덩어리가 된 듯이 뜨거웠다.
그는 너무 기뻐서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길선주는 새로 태어났다.
길선주는 예수님을 만났다.
셋째, 길선주 목사는 한국교회의 아버지가 되었다.
예수님을 만난 길선주는 두문불출하고 기도와 성경에 전력했다.
그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크리스토와 만나고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에 도취되었다.
예수님의 탄생의 기록을 읽을 때는 환희와 감격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가 29세 되던 해인 1897년 8월 15일 길선주는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조롱했지만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했다.
상점 일을 돕고 있던 이정식에게 전도하여 예수를 믿게 했다.
아버지에게 전도해서 세례를 받게 했다.
어머니와 아내에게 전도해서 세례를 받게 했다.
온 가족이 다 하나님 앞으로 돌아 오게 되어
길선주는 너무 기뻐 하나님께 감사 드렸다.
자기의 가르침으로 선도에 입문했던
의제 김찬성에게도 전도하여 그로 하여금 흐느껴 울며 예수를 믿게 했다.
그는 후에 목사가 되었고 그의 두 아들도 목사가 되었는데
두 아들 중 한 사람은 저의 아버지와 함께 평양에서 목회하다가 함께 순교한
김화식 목사였다.
길선주는 1898년 30세 때 평양 널다리 교회의 영수가 되었습니다.
널다리 교회는 그 이듬해인 1899년에 장대현으로 옮겼고
1900년에는 2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웅장한 예배당을 건축했다.
1901년에는 33세 때 장대현교회의 장로로 장립되었고,
1902년에는 조사(전도사)가 되어 목회에 전념했다.
해박한 성경 지식과 유창한 설교와 기도와 성령충만한 그의 목회 사역은
장대현교회의 급속한 부흥을 가져왔습니다.
조사가 된 후부터 그는 돈과 부에 대한 관심을 모두 버리고
현 평생 청빈의 생활을 했습니다. 사모님의 격려가 큰 힘이 되었다. 많은 핍박과 탄압이 있었으나 길선주 조사는 더욱 더 기도에 파묻혔습니다.
1903년 평양 신학교에 입학했는데
그는 매일 한 시간씩 기도하고 한 시간씩 성경을 읽고 암송했다.
길선주 조사는 1905년 영국 웨일즈 지방에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평양 지역의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기 시작했다.
몇몇 사람들과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새벽기도회를 시작했다.
그것이 한국교회 새벽기도의 시작이었다.
드디어 1906년부터 부흥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1906년 황해도 재령에서 길선주 조사가 부흥회를 인도하는데
회개운동과 부흥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1907년 1월이 되었습니다. 장대현교회에서 사경회가 열렸다.
전국 각처에서 1,500여명의 신자들이 장대현교회에 모여 10일 동안 사경회를 가졌는데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당시의 상황을 묘사하는 글들을 소개합니다.
“2천명 이상을 수용하는 장대현 예배당에
회중이 차고 넘치도록 모인 사경회원 전체가 성령의 휩쓸린바 되어
혹은 소리쳐 울고 혹은 가슴쳐 통곡하며 혹은 흐느껴 울면서 기도하고 혹은 발을 구르고 자복하며 혹은 춤을 추면서 찬미하니 소리소리 합하여 소리의 기둥은 번제단에 타오르는 불기둥 같이 하늘로 떠 떠올랐다.”(「신학지남) 14권 제 2호).
“길선주 장로는 ‘이상한 귀빈과 괴이한 주인’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다.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이 이상한 귀빈이라는 것이었다.
존귀하신 분이 비천하고 누추한 땅에 오셨으니 이상한 귀빈이고,
귀중한 몸인데도 오셔서 밖에서 오래 기다리시니 이상한 귀빈이며,
전능하신 분이 간절히 두드리시니 이상한 귀빈이라는 것이었다.
귀빈을 맞아드리지 않으니 괴이한 주인이라는 것이었다.
자애하신 귀빈을 환영치 않으니 괴이한 주인이고, 간절하신 음성을 듣지 않으니 괴이한 주인이며, 굳게 닫은 방문을 열지 않으니 괴이한 주인이라는 것이었다.
길 장로는 ‘문을 열라 문을 열라 문을 열고 환영하라’고 준엄하게 외쳤다.
길선주 장로의 ‘마음의 문을 열고 성령을 영접하라’는 열띤 설교가 시작되었다.
설교가 끝나고 길 장로의 기도가 시작되자 감동을 받은 회중은 자기들도 모르게
‘아이고 아이고’ 소리를 지르며 통회 자복했다. 장내는 금새 울음바다가 되었다.”
(최현, “빛을 남긴 믿음의 위인” p. 182).
“그는 기도회 도중에 갑자기 일어나 큰 소리로 외치기를 ‘나는 아간과 같은 죄인이올시다’ 라고 하면서 지난 날의 죄를 뉘우치면서 회개했다.
길 장로는 기도하기를 ‘나는 하나님을 속였고 그 친구와 그의 부인을 속인 도둑놈입니다. 내일 아침 일찍이 그 돈을 부인에게 돌려주겠습니다’ 라고 공중 앞에서 눈물과 함께 자복하였다. ‘나 때문에 온 회중이 은혜를 받지 못하고 있으니 나는 죄인 중의 죄인이올시다’ 라는 자복기도는 쉬지 않고 계속하였다. 회중은 이 때 모두 마루 바닥을 치면서 회개하기를 시작하였다.” (김광수, 「한국기독교인물사」 pp. 140,1).
길선주 장로는 1907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한국 최초 일곱 분 목사님들 중의 한 분으로 안수를 받았고,
장대현교회 담임목사로 취임하고, 총회 전도국장이 되어 6년간 시무했습니다.
1919년 길선주 목사는 3.1 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분으로 독립운동에 앞장서시다가 2년간 옥고를 치렀는데, 옥중에서는 기도와 성경 읽기와 전도에 전념했다.
출옥 후에 전국을 누비며 부흥회를 인도하다가
1935년 11월 26일 평남 강서군 고창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고
마지막 폐회 축도를 마치고 뇌출혈로 쓰러져 35 곳의 집회를 남겨두고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하나님 품으로 옮겨갔다.
길선주 목사는 “한국교회의 아버지”로 한국교회를 세우는데 한 평생을 다 쏟아바치고 하나님 품으로 가셨습니다.
오늘이 있기까지에는 우리 신앙의 선배들의 철저한 헌신과 수고의 삶이 있었습니다.
길선주 목사님의 철저한 헌신과 수고의 삶으로
우리 민족은 어두움과 절망 속에서 소망과 생명의 빛을 받게 되었다.
2. “핍박자가 전도자로 된 이기풍 목사”
핍박자가 전도자로 변한 사람이 있었다.
‘조선의 사울’이라고 불리어지는 사람입니다.
그는 선교사를 때려 눕힌 핍박자였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예수를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다.
그는 평양의 어두운 밤 하늘을 밝힌 조선의 새벽 별이 되었고,
제주도의 어두운 밤 하늘을 밝힌 제주도의 새벽 별이 되었다.
그는 한국 최초의 7분 목사님들의 한 분인 이기풍 목사입니다.
첫째, 이기풍은 선교사를 때려 눕힌 핍박자였다.
그는 평양에서 유명한 깡패였다.
그는 1865년 12월 23일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출생한 그는 어릴 때부터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을 미워했다.
한 번은 평양 거리를 지나가던 평양 좌수의 거만한 행렬을 바라보다가 울화통이 치밀어 달려 들어 좌수를 땅 바닥에 내동댕이친 일이 있었다.
그래서 체포되어 형틀을 목에 메고 고생했다.
그는 지배층에 대한 반항심을 품고 주먹과 머리를 휘두르는 박치기 깡패로 유명했지만 학문에 대한 소질도 있었다고 합니다.
여섯 살 때 사서오경을 줄줄 외웠고
열 두 살 때는 백일장에 나가서 붓 글씨를 써서 장원이 되었다.
그가 서양 사람들을 미워한 이유는
그들이 우리 나라에 들어와서
우리 나라를 집어 삼키려는 음흉한 계교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서양 사람의 한 사람인 쌤 마펫(마포 삼열) 선교사가
이기풍이 지배하고 있던 평양 거리에 들어와서 날마다 복음을 전하자 깡패 두목인 이기풍은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포 삼열 선교사가 29세 되던 1893년이었습니다.
이기풍은 28세(한국 나이로는 29세)였습니다.
이기풍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는
마포 삼열 선교사의 말이 너무나 듣기가 싫었다.
그런 말을 못하게 해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거리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던 마포 삼열 선교사에게 돌을 던져 그의 턱을 부서뜨렸다.
마포 삼열 선교사는 피 투성이가 되어 길 모퉁이에 쓸어졌다.
그러나 마포 삼열 선교사는 수 많은 핍박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끈질기게 전해서 그 이듬해인 1894년에는 22명에게 학습을 베풀었고 7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리고 평양에 교회당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그 유명한 장대현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기풍은 서양 사람이 교회당을 세운다는 소식을 듣고 가만이 있을 수가 없었다.
교회당 건축이 진행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이기풍은 깡패들을 동원해서 교회당 건축현장을 모주리 때려 부수고
온통 수라장으로 만들었다.
교인들은 너무나 분개하여 모두들 맞서서 싸우자고 했다.
그러나 마포 삼열 선교사는 교인들을 달래며 말렸다.
그리고 깡패들을 부드럽게 대했다.
이 소문이 삽시간에 평양성 전체에 퍼졌다.
이때부터 평양 시민들은 그를 가르쳐 ‘마포 선교사’라고 부르며 그를 존경하기 시작했다. 그는 하루 아침에 ‘선량한 사람’으로 평양에서 유명해졌습니다.
선교사의 턱을 부서뜨리고 교회당을 때려부순 이기풍은 의기양양했지만
양심 한 구석에 찔림을 받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잠을 자는데, 꿈에서 예수님의 환상을 보았다.
“기풍아! 기풍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너는 나의 복음의 증인이 될 사람이다!”
그는 너무 놀라서 잠에서 깨었다. 그러나 즉시 항복하지는 못했다.
그 당시 청일전쟁으로 나라가 어수선해서 잠시 원산으로 가서 피신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의 앞에 이상한 옷 차림을 한 서양 사람이 나타났다.
평양 거리의 마포 삼열 선교사와 비슷한 모습의 서양 사람이었습니다.
원산에서 선교하고 있던 스왈렌 선교사였다.
그는 이기풍을 보자마자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는 마치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우뢰 소리와 같았습니다.
결국 이기풍은 스왈렌 선교사 앞에 무릎을 꿇고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가 29세 되던 해인 1894년이었습니다.
그는 즉시 마포삼열 선교사를 찾아가서
그 앞에 무릎을 꿇어 백배 사죄하며 용서를 구했다.
마포 삼열 선교사는 잃었던 한 마리 양이 돌아온 것을 바라보며
뜨거운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그 후부터 이기풍은 평양 시내를 누비며 예수를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다.
깡패가 전도자가 되었다는 소문이 평양 온 성안을 발칵 뒤집었다.
그는 동만 트면 나가서 전도하는 한국의 사도 바울이 되었다.
1896년에는 마포 삼열 선교사와 함께
함경도 지방으로 긴 전도 여행을 다녀 오기도 했다.
그러나 자기가 예수를 전하기에는 너무 무식하다는 것을 깨닫고
1903년에는 평양 신학교에 입학하여 전도자와 목회자로서의 훈련을 받게 되었다.
결국 한국교회에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던 해인 1907년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이기풍은 한국교회의 최초의 7인 목사들 중의 한 사람으로 안수를 받았다.
마포 삼열 선교사는 한국교회의 은인입니다.
그는 턱에 돌을 맞고서도 굴하지 않고 꾸준히 십자가와 사랑의 복음을 전한 결과
그는 조선에 이기풍 목사를 탄생하게 했고 길선주 목사를 탄생하게 했으며
나중에는 한경직 목사를 탄생하게 했다.
둘째, 이기풍 목사는 한국교회 최초의 선교사가 되었다.
이기풍은 1907년 9월 평양 장대현교회당에서 열린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에서
마포 삼열 목사의 선언에 의하여
우리 나라 최초 일곱 목사님들 중의 한 사람으로 안수를 받았다.
그분들은 서경조, 한석진, 양전백, 송린서, 길선주, 이기풍 목사님들이었다.
조선교회가 정식으로 세워진 것이었다.
그런데 이때 특이한 것은 노회 셋째 날인 9월 19일 길선주 목사의 사회로 열린 노회가 선교사들의 헌신적 노력에 보답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뜻으로 제주도에 선교사를 한 사람 파송하기로 만장일치로 결의한 것입니다.
그 당시 제주도는 풍속이나 방언이 다른 외국과 같은 곳이었다.
이 때 이기풍 목사가 제주도에 선교사로 가기로 자원하고 나섰다.
자신도 흑암에 사는 사람들로부터 돌 팔매질을 당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자신도 사도 바울의 발걸음을 따르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자신도 복음의 빚을 갚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선교사로 떠나기로 준비하는 동안 그는 마음이 약해져서
제주도 가기를 주저하기도 했다.
그러나 윤함애 사모는 남편을 격려했다. “우리가 안 가면 누가 불쌍한 영혼을 구하겠어요. 주저 말고 속히 떠납시다.”
그의 부인 윤함애씨는 선교사 이길함의 양녀이며
숭의여학고 제1회 졸업생으로 당시로서는 엘리트 여성이었다.
1903년 마포 삼열 선교사의 중매로 이기풍 신학생과 결혼을 한 후
기도와 사랑으로 남편을 격려했다. 결
국 이기풍 목사와 윤함애 사모는 1908년에 제주도를 향해 평양을 떠났다.
아기를 등에 업고 개나리 봇짐을 머리에 얹고 평양성을 떠나 인천항으로 향하는 두 사람을 보고 울지 않는 여전도회 회원들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기풍 목사 가족은 조그마한 목선을 타고 인천항을 떠나 여러 번 풍랑을 만나며 간신히 군산항을 거쳐 목포에 이르렀으나 거센 풍랑으로 사모는 함께 갈 수가 없었다.
사모와 자녀들을 목포에 당분간 남겨두고 이기풍 목사만 먼저 제주도를 향해서 떠났다.
제주도를 향하던 배가 난파하여 많은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었으나 이기풍 목사는
간신히 헤엄을 쳐서 추자도에 상륙했습니다. 그는 바울의 경험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 이후 13년 동안의 제주도 복음화의 사역은 수 많은 난관에 부딪혔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 고통스러웠고 미신과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고통스러웠다.
잠잘 곳도 얻지 못했고 먹을 것도 얻지 못해 때로는 산 기슭에 때로는 바닷가에 때로는 마구간에 쓸어져 기운이 없어 정신을 잃기도 했다.
길 가는 사람을 붙잡고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하면 마치 그에게서 가까이 하면 죽기라도 할 듯이 손을 흔들며 “설러버려 설러버려 야가기 끊어지갠” 이라고 말하면서 도망쳤다고 합니다. “그만 두어라 그만 두어라 내 목이 다라 난다” 라는 뜻이었다.
그 당시 대원군의 천주교 박해 정책으로 예수를 믿으면 핍박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이기풍 목사는 너무도 힘이 들고 괴로워서 제주도를 떠나려고 한 일이 있었습니다.
제주도를 떠나기로 작정하고 그 사실을 편지로 써서
인편에 마포 삼열 선교사에게 보냈다. 두어 달 후에 답장이 왔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이기풍 목사의 편지를 잘 받았소이다.
그런데 당신이 내 턱을 때린 흉터가 아직 아물지 않고 있으니
이 흉터가 아물 때까지 더욱 분투하시오.” 이기풍 목사는 그 편지를 받아 읽고서
그 자리에 쓰러져서 대성통곡하며 회개했다고 합니다. 얼마 동안 울다가 일어나니
성령님의 역사로 그의 마음에는 기쁨과 희망과 용기가 넘치게 되었다.
이기풍 목사는 산 속 동굴 안 구렁이 신에게 제물로 바쳐진 소녀를 구하기 위해 동굴 속으로 들어가서 구렁이를 때려 눕힌 일도 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이기풍 목사와 사모가 금식하고 기도하므로 미치광이를 고친 일도 있었다.
그 미치광이는 후에 예수를 믿고 집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기풍 목사는 사도 바울이 경험한 경험을 모조리 경험한 것 같습니다.
이기풍 목사는 13년 동안의 제주도 사역을 통해 제주도에서 사탄 마귀의 어두움의 세력을 몰아내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을 비추게 했습니다. 30여 개의 교회를 설립했습니다. 1934년에는 제주도 독노회를 조직하게 했습니다.
이기풍 목사의 성공적인 제주도 사역 뒤에는 윤함애 사모의 기도와 사랑의 수고가 있었던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기도의 여인이었고 사랑과 봉사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항상 머리맡에 약 상자와 성경책을 두고 자다가도 부르면 벌떡 일어나
제주도민들을 돌봐주었다고 합니다.
그는 교인들 중 누가 운명하면 항상 달려가서 시체를 목욕시키고 얼굴에 화장을 해 준 다음 손수 만든 수의를 입히고 밤새 유가족을 위로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또한 그늘진 곳에서 울고 있는 영혼들을 사랑으로 돌보았다고 합니다.
그의 집은 항상 아침에는 거지 떼들로 낮에는 나병 환자들로 가득 찼다고 합니다.
손이 떨어진 나환자에게는 손수 밥을 떠서 먹여주었다고 합니다.
나환자들이 돌아간 뒤에도 그녀는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였다.
이기풍 목사와 윤함애 사모는 제주도의 어두운 밤 하늘을 밝힌 두 개의 새벽 별들이었다.
셋째, 이기풍 목사는 신사참배를 반대한 순교자가 되었다.
그는 사도 바울이 걸어갔던 길을 그대로 따라다.
평생 복음을 전하다가 마지막에는 순교의 길로 걸어갔습니다.
이기풍 목사는 제주도 복음 사역을 마친 후에도 조선교회를 위해서 평생을 바쳤다.
그는 특히 전라도 복음화를 위해서 그의 남은 생애를 바쳤다.
광주에서, 순천에서, 고흥에서, 벌교에서, 여수군 남면에서, 돌산 완도 등지의 도서지방에서 복음을 전했고 1927년에는 다시 제주도에 가서 복음을 전하기도 했다.
평양 출신으로 이방과 같은 제주도와 전라도에 가서 평생 복음을 전했다는 것은 사도 바울과 같은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1921년에는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의 제10대 총회장으로 한국교회를 봉사하기도 했다. 그는 몸을 돌보지 않고 한 평생 복음을 전하며 조선교회를 봉사하다가 성대가 막혀서 말을 못하기도 했고 관절염, 귓병 등으로 심한 고생을 하기도 했다.
일제 치하에서 조선교회가 심한 박해와 시련을 겪을 때 그는 과감히 일어나 일제에 대항하여 교회를 지켰다.
일제는 1936년을 기점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했는데
그는 이에 정면으로 맞서서 투쟁했다. 주기철 목사와 같은 길을 걸었다.
일제는 그를 미제의 스파이라는 죄목으로 1938년 체포해서 순천 감옥에 투옥했다.
그리고 그에게 갖은 고문을 가했다. 칠순의 노구로 당한 일경의 취조와 고문은 견디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순천에서 광주형무소로 이감되는 도중에 그는 쓸어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는 1942년 6월 20일 77세를 일기로 바울처럼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그의 마지막 생명을 순교의 제물로 주님께 드렸다.
3. “예수 천당, 최권능 목사”
사도 바울은 예수에 미친 사람이었다.
“우리가 미쳤어도 주를 위한 것이요.” 사도 바울의 몸은 예수로 충만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우리 나라에도 예수에 미친 사람이 있었고, 예수로 충만한 사람이 있었다.
그분은 평생 예수에 미쳐서 ‘예수 천당’을 외치면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한국교회가 신사에 무릎을 꿇을 때 마지막까지 일본 형사들 앞에서도 ‘예수 천당’을 외치며 회개하라고 호통을 치던 사람이다.
그분은 이기풍, 길선주 목사들과 함께 한국교회의 아버지와 같은 분이었다.
이기풍 목사는 1865년에 평양에서 출생했고, 길선주 목사는 1869년에 평남 안주에서 출생했고, 최권능 목사는 같은 해인 1869년에 평양에서 출생했다.
그러면 평생 ‘예수 천당’을 외치며 전도한 최권능 목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다.
최권능 목사의 본명은 최봉석이다.
이제 최봉석 목사가 어떤 분이셨는지를 세 가지로 나누어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 최봉석은 ‘예수 천당’을 외친 사람이었다.
최봉석은 1869년 1월 7일 평양에서 출생했다.
그는 7살 때부터 서당에 들어가서 공부를 했는데 글씨를 잘 썼다고 합니다.
성격은 무척 괄괄하고 급했다고 합니다.
최봉석은 16살 때 평양 감사 민병석의 비서가 되었고 나중에는 평양 감사 아래 감찰의 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는 감찰의 자리를 이용해서 국고금 3만 량을 횡령했다는 죄로 반년 동안 투옥되었다가 나중에는 평북 삭주로 유배되었다.
그는 날마다 울분 속에서 술에 취해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삭주에는 1896년에 교회가 설립되어 복음이 전파되고 있었다.
삭주에 백유계란 유명한 한의사가 있었는데 예수를 믿게 되었다.
어느 날 최봉석을 찾아와서
예수를 믿고 죄를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어 참다운 생활을 해 보라는 말을 했다.
그리고 복음서를 주고 갔습니다.
최봉석은 복음서를 읽고 마음에 감동을 받아서
예수를 믿고 삭주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33살 때였습니다.
그 다음 해인 1903년 그가 34살 되었을 때 꿈을 꾸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벼락불에 맞아 죽는 꿈이었다.
그때부터 불 같은 열심이 일어나고 전도하고 싶은 마음을 솟아나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전도는 간단하고 단순했습니다.
‘예수 천당’이라고 소리를 지른 다음 예수 믿고 천당 가라고 했습니다.
1905년에는 삭주교회의 집사가 되었고 후에는 영수가 되었다.
그는 삭주교회에서 전도와 목회 사역을 너무 열심히 해서 교회가 크게 부흥되었다.
그는 또한 압록강 지역과 만주 지역을 다니며
‘예수 천당’의 복음을 전하며 많은 사람들을 예수 믿게 했고 여러 교회를 세웠다.
1907년에는 평양 장로회 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공부를 하며
벽동교회에서 조사의 일을 했습니다.
최봉석 조사는 신학교에 다니면서도 공부보다는 기도와 전도에 열중했다.
공부는 겨우 하고 시간이 있는 대로 평양 거리를 돌아다니며 ‘예수 천당’을 외치며 전도를 했고 밤에는 밤을 새워가며 기도를 했다.
아침에 시험을 볼 때는 백지를 내는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시험을 잘 보게 해 다라고 성령님께 간절히 기도했지만 여전히 답을 쓸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시험에는 성령님도 쩔쩔 매는구먼!”
그는 다음 날 시험도 아랑곳 하지 않고 또 평양 거리를 돌아다니며
‘예수 천당’을 병력 같은 소리로 외치며 전도를 했습니다. 그것이 그가 받은 달란트였다. 죄인들을 무너뜨리는 가장 성능이 좋은 총탄은 ‘신학탄’이 아니라 ‘예수탄’이라고 믿고 ‘예수탄’을 쏘아 댔습니다.
방앗간 앞을 지나다가 방앗간을 향해 ‘예수 천당’하고 소리를 질렀다.
망아지는 놀라서 벌떡 뛰었고 방아가 엎어져 난리가 났습니다.
주인이 최봉석 조사에게 달려 들어 야단을 했지만
그는 계속해서 ‘예수 천당’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결국 방앗간 주인은 항복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둘째, 최봉석은 기도로 신학교를 졸업했다.
최봉석은 1907년에 신학교에 입학했기 때문에
4년 후인 1911년에는 신학교를 졸업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졸업식이 지났는데도 최봉석 조사는 계속해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그래서 벽동교회의 교인들이 물어보았다.
“조사님, 졸업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최봉석 조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1년 더 공부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3년이나 반복되었다.
1913년도 졸업생 명단에도 최봉석의 이름이 들어있지 않았다.
3년 동안 계속해서 낙제를 했기 때문이었다.
최봉석 조사는 좀 난처한 생각이 들었다. 교인들을 볼 면목이 없게 되었다.
그래서 최봉석 조사는 교무실로 들어가 교수들을 만났다.
3년씩이나 낙제를 한 44세가 된 노 학생을 바라보는 교수들의 마음은 거북하고 곤란했다. 최봉석 조사가 입을 열었다.
“교수님들에게 아뢸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교수님들 먼저 저와 함께 기도하십시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저같이 부족한 죄인을 불러서 예수 믿게 하시고 또 신학교에 와서 공부하게 하시고 또 목사 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공부만 잘해야 목사가 됩니까? 하나님의 종은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전도해야 하는데 저는 기도하고 전도 할레기 공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교수님들이 나에게 졸업장을 주어 나도 목사 될 수 있도록 길을 열러 주옵소서. 주실 줄 믿고 감사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간절하고 뜨겁게 기도를 했기 때문에 교수들은 모두 덩달아 아멘 했습니다. 기도를 마친 최봉석은 샘 마펫 교장에게 졸업장을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러나 교장은 “안됩니다. 1년을 더 공부해야 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최봉석 조사는 “교장님과 교수님들이 약속을 어기면 어떻게 합니까? 조금 전에 저의 기도에 모두 아멘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과 약속한 것을 어기면 어떻게 합니까?”
교장과 교수들은 할 수 없이 졸업장을 주기로 했습니다.
전무후무한 낙제의 기록을 세운 최봉석 조사가 이렇게 해서 졸업장을 받게 되었다.
당당한 기도에는 교수들도 쩔쩔매며 졸업장을 주고 말았다.
셋째, 최봉석 목사는 고난의 십자가를 짊어진 사람이었다.
최봉석 조사는 1913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8월 목사로 안수 받은 후 벽동교회에서 1년 동안 목회하다가 1914년부터 노회의 파송을 받아 만주 전도에 전념했다.
넓은 만주 벌판을 10리 20리씩 걸어 다니며 조선 동족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수많은 고난을 무릅쓰고 12년 동안 복음을 전한 결과 28개의 교회를 세웠다.
때로는 굶기도 하고 때로는 몽둥이와 돌멩이로 맞아서 쓸어지기도 했다.
정신을 잃고 쓸어져 있다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다시 일어나서 ‘예수님은 누구신가’ 찬송을 부르면서 걸어가곤 했다.
너무 배가 고파서 때로는 올챙이를 잡아 먹기도 했고,
어떤 때는 소 똥에 들어 있는 콩알을 꺼내어 먹기도 했다.
최봉석 목사는 12년 동안의 만주 전도를 마치고 1926년에 평양으로 돌아와서
평양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평양 거리는 이제 최봉석 목사의 ‘예수 천당’소리로 날이 밝게 되었다.
새벽 4시 마다 들려오는 '예수 천당'의 외침은 생명 길을 알리는 새벽 첫 닭의 울음소리였고, 나라 잃은 평양 시민들의 멍든 가슴을 후련하게 하는 청량제였다.
이렇게 된 데는 길선주 목사의 주선이 컸다고 합니다.
길선주 목사는 “최봉석 목사의 ‘예수 천당’소리가 멈추는 날
조선의 예루살렘인 평양이 망한다”라고 말하며
최봉석 목사를 격려하며 돌보아주었다.
그는 불타는 심정으로 ‘예수 천당’을 외쳤는데 그 소리에는 능력이 나타났다.
그 소리를 듣는 사람들은 모두 항복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래서 그를 가리켜 ‘최권능 목사’라고 불렀다.
하루는 머리 좋고 설교 잘 하는 채필근 목사가 지나가는데
최봉석 목사가 큰 소리로 ‘예수 천당’하고 소리를 질렀다.
깜작 놀란 채필근 목사는 “나 채 목사요”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최봉석 목사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목사는 목사지만 뻘지(벙어리) 목사요.”
최봉석 목사는 일본의 신사 참배를 앞장 서서 반대하다가
1939년 평양 경찰서에 끌려가서 극심한 고문을 당했다.
기절하면 물을 끼 얹고 기절하면 또 물을 끼 앉으며 고문을 했다.
그는 6년 동안 감옥에서 갖은 고문을 다 당했다.
고문을 심하게 하면 할수록 “예수 사랑 하심은”을
큰 소리로 불러서 감옥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 찬송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감옥에서 기도하고 찬송하고 전도하는 일에 전념했다.
그래서 감방 안에 들어 온 사람들은 그의 전도로 예수 믿고 그의 기도로 힘을 얻고
그의 찬송으로 기쁨을 누렸다.
그래서 감방이 교회와 같이 되었다.
형사들이 신사참배를 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고문할 때마다
최봉석 목사는 이렇게 대답을 했다.
“내가 죽는 것은 영광이요. 나는 죽기 위해서 오늘까지 당신들의 신을 경배하지 않고
살아왔소.
내가 죽으면 천당에 가오. 주님이 나의 집을 예비하고 나 오기를 기다리고 계시오.”
하루는 형사가 몽둥이로 최 목사를 때리니까 최 목사는 매를 맞을 때마다
‘예수 천당, 예수 천당’ 이라고 소리를 질렀다.
형사가 매를 멈추고 왜 이렇게 시끄러우냐고 물으니까
“내 몸에는 예수가 꽉 차 있어서 나를 때리면 내 몸에서 예수가 나옵니다”
라고 대답을 했다. 그는 예수로 충만한 사람이었다.
최봉석 목사는 때때로 감방에서 금식 기도를 했는데
1944년 3월 1일부터 40일간 금식 기도하기로 작정했다.
그런데 3월 1일 사모님과 아들과 딸이 음식을 준비해 가지고 면회를 왔다.
그는 반갑게 가족을 맞았습니다. 보통 때는 사모님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말하면
사모님이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하므로 간단히 면회를 마치곤 했는데
그날의 면회는 길어졌다.
“내가 금식 기도 작정한 것을 알고 마귀가 맛있는 음식으로 시험하는군”
이라고 말하며 웃었다.
“애들아, 집에 가서 날 위해 기도해야 한다.
금식기도 끝나는 4월 10일까지 누구도 면회 오지 말고 기도해다오.
미안하다. 땅 위에서 육신을 가진 사람들인데 내가 주님께 충성하다 보니
지나치게 가정과 너희들에게 등한히 하였구나. 하하, 이것도 육신의 생각이지” 하더니
딸과 부인의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렸다.
“하나님이 너희들을 지켜 주시고 축복하실 것이다.
내가 하나님 품에 안기게 되고 너희들도 나와 같이 저 낙원에 가서
즐거이 살게 될 때 그때 땅에서 못 받던 위로를 하늘 나라에서 받자.”
그날의 면회는 정이 넘치는 면회였다.
그날 가족이 가지고 온 음식은 모두 죄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최봉석 목사는 40일 금식기도를 마쳤다.
그러나 그는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서 몸을 가눌 수 없게 되었다.
결국 4월 11일 병 보석으로 평양 기홀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 소식을 들은 산정현교회, 장대현교회, 서문밖교회 성도들이
기홀병원으로 몰려들어 “목사님!”하고 부르며 울기 시작했다.
그러나 최봉석 목사는 오히려 성도들의 손을 붙잡고 그들을 위로했다.
“박 집사, 오집사, 왜 이러는가? 그동안 나 위해서 기도 많이 했지.
또 주기철 목사 위해서, 박관준 장로 위해서, 이기선 목사 위해서, 한상동 목사 위해서,
손양원 목사 위해서 기도 많이 했지. 모두 고마워.”
그의 주치의인 장기려 박사가 안정해야 한다고 하며 면회를 사절시키려고 했지만
“장 박사, 그러지 마시요. 나를 위해 오는 형제들을 내가 기쁘게 맞이해야 하지 않겠소”라고 말하며 성도들을 일일이 맞았다.
이렇게 병원에서 15일 동안 의사와 간호원과 가족들의 따뜻한 간호를 받으며 찾아오는 교우들을 다 만나보다가
1944년 4월 25일 오후 1시에 부인과 아들과 딸과 며느리와 손자와 산정현교회 성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에서 전보가 왔구나, 나를 오라고 하신다” 하면서
찬송가 “고생과 수고 다 지나간 후”를 부른 다음 세상을 떠나 하나님의 품으로 옮겨 갔습니다. 그의 나이 75세였습니다.
주기철 목사가 순교하신 지 4일 후였습니다.
주기철 목사는 4월 21일 최권능 목사는 4월 25일 순교하셨다.
평양의 어두운 밤 하늘을 밝게 비치던
두 개의 큰 별이 4일 간격으로 하늘로 올라갔다.
4. “일사각오의 순교자, 주기철 목사”
주기철 목사는 1897년 11월 25일 경상남도 창원군 웅천면 복부리에서
주현성씨의 4남 3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일제가 웅천에 침략해올 것을 우려했던
주목사 일가의 어른 주기효는 민족 수난을 극복하기 위해선 힘을 길러야 한다면서
이곳에 1906년 개통학교를 세웠는데 어린 기철은
이 학교에 입학하여 투철한 민족정신과 남다른 민족애를 키웠습니다.
이즈음 그의 맏형인 주기원은 이곳에 웅천교회를 세워 목회활동을 시작했는데
어린 기철은 이 교회에 열심히 다녀서 `소년 목사'라는 칭호를 듣기도 했다고 합니다.
개통학교 7년 과정을 마칠 무렵,
그는 당시 부산에서 우연히 춘원 이광수의 애국 강연을 듣고 감동을 받아
이승훈 선생이 세운 평북 정주의 오산 학교에 진학하기로 결정했다.
주기철 목사는 일본이 발악하던 1930년대에 일어나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이에 대항해서 싸우며 한국 교회를 지킨 신앙의 용사였다.
기미년 3월 1일 전국에 독립 만세 소리가 울려 퍼질 무렵
부흥사 김익두 목사가 마산 교회에 와서 부흥회를 열었다.
“성신을 받으라”는 그의 외침에 큰 감동을 받은 주기철은
1921년 평양 신학교에 입학하여 1925년에 졸업했다.
그는 평양 신학교 19회 졸업생으로 30세 때 목사로 안수 받았다.
주기철 목사는 1926-1931년까지 6년 동안 초량교회에서 사역하며
교회를 크게 부흥시켰습니다.
그 기간에 진주 성경 학교와 경남 성경 학원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교수의 일을 겸했다.
1931년 7월 주기철 목사는 임지를 마산 문창교회로 옮겼는데 거기서도 6년간 목회하며 교회를 크게 부흥시켰다.
목회 성공자로서 알려지자 전국 각지에서 사경 부흥회를 인도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그가 가는 곳곳마다 성령의 역사가 크게 일어났다.
평양 산정현 교회는 길선주 목사의 뒤를 이어
한국 교회를 이끌고 갈 지도자로 주기철 목사를 담임 목사로 청빙했다.
주기철 목사는 1936년 7월 하순 평양 산정현 교회로 부임하여
1937년에 교회당을 신축하고 교회를 크게 부흥시켰다.
주기철 목사는 신사 참배를 선봉에 서서 반대하다가
1938년 2월 8일 경찰에 1차 검속되었다가 27일만에 석방되었고,
1938년 8월 제 27회 장로회 총회를 전후하여 2차 검속되어
6개월간 대구 경찰서에 수감되어 있다가 1939년 2월 석방되었으며,
1939년 8월 3차 검속되었다가 9개월 후인 1940년 4월 20일 석방되었고,
1940년 9월 다시 4차 검속되어 평양 경찰서와 형무소에서 4년간 옥중 생활을 하다가 1944년 4월 21일 밤 9시30분 경 49세를 일기로 순교의 제물이 되어
주님의 품에 안겼다.
첫째, 주기철 목사는 예수님을 닮은 하나님 중심적 목회자였다.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로서의 예수님의 삶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하나님 중심적인 삶이었는데, 일사각오의 자세로 믿음의 길을 달려가다가 순교한 주기철 목사야말로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 하나님 중심적 목회자의 삶을 살았다.
주기철 목사의 삶에는 예수님의 삶과 비슷한 모습들이 많았다.
예수님이 하나님께 절대 복종하고 헌신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던 것처럼
주기철 목사도 하나님께만 절대 복종하고 헌신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의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당며 아버지의 뜻을 이룬 것처럼
주기철 목사도 옥중에서 갖은 고초와 순교를 당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다.
예수님께서 온유하고 겸손하신 모습으로 양 무리들을 사랑하시며 희생적으로 돌보셨던 것처럼 주기철 목사도 비단결같이 부드러운 목자의 성품으로 양 무리들을 사랑하며 희생적으로 돌보았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만 전파하셨던 것처럼
주기철 목사도 하나님의 말씀만 타협 없이 전파했다.
예수님의 생애가 성령으로 일관되었던 것처럼
주기철 목사의 생애도 성령으로 일관되었다.
주기철 목사는 한국 교회의 대표적인 설교자요 목회자였는데 하나님 중심적 설교자요, 목회자였다.
둘째, 주기철 목사는 기도와 말씀의 사람이었다.
주기철 목사의 부산 초량교회의 목회는 기도와 설교에 주력한 목회였는데
그의 설교는 기도의 동산에서 영근 설교였습니다.
주 목사는 구덕산에 올라가 종종 철야 기도를 하였다.
그는 금요일과 토요일에는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준비한 메시지를 놓고
특별 기도를 하며 지냈고 설교 원고를 작성하다가도 가끔 산에 올라갔다.
“주 목사는 비상한 고심과 정성으로 설교 원고를 작성했다.
산에 가서 철야 기도를 하고 이슬에 젖은 몸으로 새벽에 집으로 돌아올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민경배, 순교자 주기철 목사, p. 89).
주기철 목사의 마산 문창교회의 목회도 기도와 설교에 주력한 목회였다.
무학산에서 기도를 하다가 축축하게 밤이슬에 젖어서 내려오는 때가 종종 있었다.
“무학산에는 주 목사가 오르내리는 길이 빤질하게 닦아지게 되었다…
주 목사의 설교의 하나하나는 모두가 피땀 나는 기도와 체험의 소산으로 이룩된 공든 탑 아닌 것이 없었다.”(김충남, 순교자 주기철 목사의 생애 p. 157).
주 목사는 교인들에게 새벽 기도를 권면하며 “새벽 시간은 은혜가 많은 시간입니다”라고 자주 말했습니다.
자기 자신은 한 번도 새벽 기도를 빼먹는 일이 없었다.
주기철 목사의 마지막 목회였던 평양 산정현 교회의 목회도
일사 각오의 기도와 설교에 주력한 목회였다.
주 목사는 1936년 7월 하순 평양 산정현 교회에 부임한 후
흐트러진 신앙의 분위기를 기도와 성경으로 일신하므로
산정현 교회의 교인들은 영적으로 모두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다.
주 목사는 신사 참배 강요에 대항해서 죽기를 각오하고 투쟁할 것을 작정하고
기도와 목회에 전력을 다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결연한 충성과 헌신의 자세로 강단에 나설 때마다
주 목사의 태도에는 무슨 광채라도 나는 것만 같았습니다.
산정현 교회는 주기철 목사 취임 후 현저히 진흥했다고
김인서 장로가 그 당시의 상황을 기록하면서 “교회가 더워지고 교인이 증가하는 비방을 주 목사에게 찾아보니 기도와 전도와 설교였다”고 지적했다.
신사 참배의 강요가 더 심해지자 1938년 6월 주기철 목사는 김화식 목사,
이유택 목사와 함께 묘향산에 들어가 10일간 기도했는데 5일간은 금식을 했다.
주 목사는 다 넘어진 한국 교회를 홀로 버티어 세우기 위해 죽음의 준비를 하면서
비장한 각오를 다짐했다.
피와 땀나는 기도로 밤을 새우는 일도 있었다.
주 목사는 기도하는 마음속에 여러 가지 계시의 광선이 심령으로부터 비쳐 들어옴을 느끼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산에서 기도에 열중하는 가운데
무아지경에 들어가서 불 솟듯이
때로는 마음속에서 기도가 강물처럼 흘러나옴을 느낄 때도 있었다.
너무나 감격에 휩싸여서 30분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다른 말은 없이
'아버지'란 말만 되풀이해서 부를 때도 있었습니다.
주기철 목사는 1938년 8월 2차 검속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른 후 석방되어
1939년 2월 첫 주일 아침 평양역에 도착했다.
그 길로 주 목사는 교회로 달려가서 성전에 엎디어서 기도하는 동안에
한국 교회를 위해서 자기 자신이 저 나라에 가서도 기도를 계속하겠다는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는 새로운 결심을 가다듬고 예배를 인도했다.
주 목사는 마5:11-12과 롬 8:18, 31-39을 봉독한 후
‘다섯 종목의 나의 기도’란 제목으로 설교를 했다.
다섯 가지 종목의 기도 제목은 .
1)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
2) 장기간 고난을 견디게 하여 주옵소서
3) 노모와 처자를 주님께 부탁합니다
4) 의에 살고 의에 죽도록 하여 주옵소서
5)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주기철 목사의 목회는
일사 각오의 기도와 설교를 삶과 죽음으로 나타내 보여준 삶과 죽음의 목회였다.
그의 기도와 설교 그리고 그의 삶과 죽음으로 인하여
한국 교회의 남은 자들은 그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
셋째, 주기철 목사는 성령으로 기도하고 설교한 성령의 사람이었다.
주기철 목사는 기도와 설교에 주력하되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성령 안에서 설교한 성령의 사람이었다.
주 목사는 “성신과 기도”라는 설교에서 성신의 도움을 받아야만 바로 기도할 수 있다고 지적하면서 성신은 바로 기도의 신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주기철 목사는 “성신을 받으라”는 설교에서
신자가 성령을 받아야만 주님 말씀대로 행할 수도 있고, 설교나 전도할 수도 있고,
환난 날에 승리할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주기철 목사는 강단에 서서 설교할 때 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났고
평양 경찰서 유치장에 고문을 받고 있을 때도 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났다.
“성신을 받으라”는 설교의 일부는 다음과 같습니다.
“성신은 지금도 신자에게 충만하시고 교회 안에서 역사하신다.
성신을 받으면 각양 은혜를 받는 중에 특히 예수의 교훈을 실천하고 전도하여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며 모든 환난에서 이기는 것이다.
주님 명하신 대로 행하려면 성신을 받아야 한다.
성신 받지 못한 사람은 예배당에까지 나올 수는 있으나
예수의 교훈을 실행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려면 성신을 받아야 한다.
전도란 한갓 사람에게 윤리도덕을 가르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요,
악신 마귀를 따라가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고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니 사람의 재주로 못하고 성신의 권능으로 하는 것이다.
악한 날에 승리하려면 성신을 받아야 한다.
‘악한 날’이란 주 재림 때뿐 아니라 최종 말일이 오기 전에도 악한 날에 성신으로 무장하여야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 성신을 받아야 까부는 환난을 이길 수 있는 것이다.
10년 20년을 예수를 믿노라 하여도 성신을 받지 못하고
사람 앞에서 예수를 부인하면 지옥에 갈 것이니 그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
깨어 기도하여 성신을 받으라. 악한 시험을 이기라.
성신이여 강림하사 나를 감화하시고 애통하며 회개할 말 충만하게 합소서.”
넷째, 주기철 목사는 사람들을 사랑한 겸손하고 소박한 사람이었다.
주기철 목사는 하나님께 대한 일사 각오의 충성과 헌신에서는 사자같이 단호하고 강했으나 목양지의 성도들에 대해서는 비둘기같이 순수하고 부드러웠다.
김충남 목사는 평양 산정현 교회에서의 주기철 목사의 목회를 “비단결같이 부드러운 교역”이라고 묘사했다.
“주 목사의 단호한 태도와 비단결같이 부드러운 교역으로 인해서
그 동안 이지러지기 시작한 영적 상처가 낫고 다시 건전한 교회 질서가 잡히기 시작했다.” 주기철 목사는 부드러운 성품을 가진 소박한 사람으로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부드러웠습니다. 고등계 형사들까지도 그의 사랑과 인격에 감동했습니다.
주기철 목사가 부산 초량교회를 시무할 때 어느 날 경관 정복을 입은 순사 하나가 찾아왔습니다.
주기철 목사는 그에게 복음을 가르치며 그를 위해서 성심 성의껏 기도했다.
그 김석진이라는 순사는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으며 나중에는 목사까지 되었다.
그와 같은 개인 접촉의 방식으로 예수 믿고 목사나 교육자가 된 사람들이 다수였다.
주기철 목사는 사람에 대한 정도 많았습니다.
마산 문창교회에서 목회할 때 사모님 안갑수 여사가 병으로 죽었는데
그 때 주기철 목사는 방성 통곡하며 슬퍼했다.
주기철 목사는 분쟁으로 상처 입은 마산의 문창교회를 기도와 말씀,
사랑의 구제, 그리고 그의 관후하고 온유한 인격으로 치료하고 부흥 발전시켰다.
주기철 목사는 마산 문창교회에서 목회할 때 이웃 성결교회와 친밀한 교제를 유지했고 심지어는 문창교회에서 갈라져 나간 독립교회와도 친밀한 교제를 증진시켰는데
독립 교회와의 제직 연합 간친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그래서 민경배 교수는 주기철 목사에게
“정신의 높이와 심령의 광활함”을 본다고 지적했다.
“타협을 거절하고 외곬으로 물불을 가리지 않고 돌진한 심리의 남다른 과격성을 가진 인간이 아니었다.
그는 우리 주변에서 너무나 자주 만날 수 있는 형의 한 인간일 따름이었다.”
주기철 목사는 평양 경찰서와 형무소에서 옥중 생활을 할 때 같은 방의 동료들에게는 물론 자기를 고문하던 형사들에게까지 온유한 사랑으로 대하므로 그들에게 깊은 감화를 주곤 했습니다. 공산당 주영하도 주 목사만은 존경했다.
“주 목사는 주먹밥 한 개도 반만 먹고 배고프다는 같은 감방에 있는 자에게 나눠주는 것은 보통으로 하는 일이었다.
그의 이러한 사랑엔 불량배들마저 그 앞에서는 어린아이처럼 순진해지는 신적 권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김충남, 순교자 주기철 목사의 생애, p. 234).
5. “한국의 예레미아 김치선 목사”
고등학교 시절과 대학교 시절 나에게 깊은 신앙의 감화를 준 신앙의 선배는
김치선 목사님이었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과 대학교 시절에 김치선 목사님이 시무하시던 서울 창동교회(후에 대창교회와 한양교회로 개명)에 다니며 김 목사님으로부터 많은 신앙의 감화를 받았다. 김 목사님은 설교할 때마다 회개를 촉구하며 우시었고
이만 팔천여 동네마다 우물을 파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시곤 했다.
새벽기도회 때마다 “성령이여 강림하사 나를 감화하시고 애통하고 회개할 맘 충만하게 합소서”를 거듭, 거듭 부르시면서 회개와 성령 충만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시곤 했다.
사실 한국교회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길선주 목사님도 집회 때마다 “성령이여 강림하사..." 찬송을 부르시곤 했다고 합니다.
나는 김치선 목사님이 인도하시는 부흥회와 산상기도회도 좇아 다니며 은혜를 사모하곤 했는데 삼각산, 관악산, 대구의 주암산까지 간 적이 있었습니다.
회개와 성령 충만의 은혜를 사모하시던 김 목사님의 간절한 마음은 나에게 한 평생 깊고 오랜 영향을 미쳤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지금도 김치선 목사님을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그러면 이제 김치선 목사의 삶과 사역을 기술해 봅니다. 실은 안양대의 이은선 교수가 2006년 10월 한국복음주의협의회 월례 모임에서 발표한 "김치선 목사의 회개론"을 중심으로, 아니 그 발표문을 거의 그대로 요약하면서, 김치선 목사의 삶과 사역을 기술해 보려고 합니다. 김치선 목사는 한국의 예레미야라고 불릴 정도로 한국 교회와 민족의 죄에 대하여 뜨겁게 회개하며 민족의 부흥을 위하여 일생을 바쳤던 인물입니다.
1950년대 한국교회의 부흥을 위하여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총신대학교의 전신인 장로회신학대학에서 구약학 교수로 구약을 가르쳤고 대한신학교(현재 안양대학교)를 설립하여 신학생들을 육성하여 전국 2만 8천여 동리에 가서 우물을 파라고 외쳤던 교육자이자 부흥사였습니다.
첫째, 김치선은 1899년 함경도 흥남읍 서호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가 태어날 당시 그의 집안이 유복하여 어릴 때 서당에 다니며 한문을 배웠으며
서당의 훈장이자 크리스토교 신앙을 받아들여 영수가 되었던 김응보의 영향으로
크리스토교 신앙에 입문하였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집안이 몰락하여 화전민으로 생계를 유지하게 되었을 때
김응보 영수가 부친을 설득하여
김치선을 함흥에 파송된
카나다 선교사인 영재영(Lither Lisger Young) 선교사에게 소개시켜
선교사의 양아들로 삼게 하였다.
김치선은 영재영 선교사가 설립한 영생중고등학교를 다녔는데,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학교의 대표로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간 옥살이를 하였다.
그가 형무소에서 보낸 1년은 하나님의 소명을 깨닫고 목회자로서 자신의 생을 불태우겠다고 결심하였던 가장 소중한 시기였다.
옥고를 치른 후에 영생중고등학교에 재학하고 있던 중에 영재영 선교사가 시무하던 신창리 교회에 화재가 발생하였는데 새벽에 홀로 기도하고 있던
김치선은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 들어가 실신한 양아버지인 영재영 선교사를 구출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영재영 선교사는 김치선을 자신의 친자식같이 사랑하며 공부를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후원자가 되었다.
김치선은 1922년 영생중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들어가
1927년 3월에 졸업한 후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런데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영재영 선교사가 1928년 일본으로 가게 되자
김치선도 평양신학교를 중퇴하고 그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신호중앙신학교(현 개혁파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김치선은 30세에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안수를 받으면서 영재영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한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와가야마에 조그만 개척교회를 시작하였다.
그 후 영재영 선교사는 그를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어
1933년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1935년 달라스 신학교에서 모세오경의 영감론을 연구함으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조선으로 귀국하였으나 사역지를 찾지 못하고 있을 때 영재영 선교사의 초청으로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신호중앙교회를 설립하여 목회를 하였고,
1939년에는 동경 신숙중앙교회에서 사역하였다.
그는 여기서 한국어로 설교하지 말라는 일본정부의 명령을 어기고
한국어로 설교하다가 체포되어 여러 달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 시골의 작은 메구로교회에서 목회를 하다가
1944년 귀국하여 남대문 교회를 담임하게 되었다.
일본이 미국의 공격을 받아 패색이 짙어지던 상황에서
김치선 목사는 이제부터는 살든지 죽든지 조국에 돌아가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생각과 민족의 해방을 조국에서 맞아야 한다는 간절한 소망으로 귀국하였던 것이었다.
그는 일제의 심한 감시 하에서도 새벽기도를 계속하면서 민족을 위하여 한없이 울었다.
둘째, 김치선 목사는 300만 구령운동을 일으켰습니다.
김치선 목사는 해방 후 한국을 진정한 제사장 나라로 건설하려면
이 백성이 예수를 믿어서 변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먼저 3천만 민족의 십 분의 일인 300만 명이 하나님을 믿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믿는 우리가 먼저 “남한의 2만 8천여 동네에 가서 우물을 파야만 이 민족의 살 길이 있다”고 부르짖었고 우물을 파기 위해서는 300명의 기드온 기도 특공대가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300만 구령운동”의 시발이며 그는 이 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기 위하여 “3백만 부흥전도회”를 결성하였고 1946년에는 회장에 취임하여 70인의 전도 목사들을 전국에 파송하는 중요한 사역을 시작하였는데, 그 당시 유명한 부흥강사였던 이성봉 목사, 박재봉 목사, 손양원 목사 등도 전도팀에 가담했습니다. 한편 그는 300만 부흥운동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기관지로 “부흥”지를 창간하여 민족각성 운동과 구령 운동에 필요한 자료와 논문을 게재하였습니다. 그는 미국의 1857-59년의 정오기도회와 평양 대부흥운동시의 선교사들의 정오기도회를 이어받아 한국교회의 부흥을 위하여 정오기도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그는 이러한 한국 교회의 부흥은 오직 성령을 받아야 하고 참된 부흥이 수반될 때 가능하다고 보습니다.
김치선 목사는 기도온 300용사를 선발하여 민족복음화를 이루면서 해방된 조국을
민주국가로 건설하기 위해서는 크리스토교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신학교가 필요하다고 역설하였고,
그러한 소원이 결실을 맺어 1948년 8월에 남대문 교회에서 야간신학교를 개설하였다. 이 학교 설립목적은 북에서 내려와 주경 야독해야 할 사람들을 민족복음화의 중심에 세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1949년 1월에 교사를 서소문으로 이전하면서 교장직을 맡고 1950년 1월에 “대한신학교”로 개명하였고 1951년에는 장로회총회신학교 구약학 교수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남대문 교회에서 시무하다 6.25사변 이후에 사임하였는데, 1954년에 남창동에 “창동교회”를 세우고 목회를 하면서 관악산에 “벧엘기도원”을 세웠습니다. 1956년에 창동교회를 “한양교회”로 개명하고,
대한신학교와 함께 남산 중턱으로 옮겼으나 화재가 발생하여 모두 불타게 되었습니다. 그 후 장로교 총회가 대한신학교를 인정해주지 않자, 1961년 6월에 ICCC의 칼 맥킨타이어 박사와 손을 잡고 “성경장로회”를 창립하였으며, ICCC의 기증으로 용산구 서계동에 교사를 마련하여 대한신학교를 재건하였습니다. 그는 대한신학교 발전을 위해 노력하다가 1968년 2월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셋째, 김치선 목사는 한국의 예레미아로 회개운동을 일으켰습니다.
김치선 목사가 한국의 예레미야라고 불리는 것은 예레미야가 우상숭배의 죄를 지어 망해가던 유다 왕조를 위해 눈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자신의 민족을 위해 기도했던 것과 같이 한국 민족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며 복음을 전파하려고 노력한 것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입니다.
김치선 목사는 강의 시간에도 늘 눈물로 강의하였고
한국교회의 부흥을 위하여 자신의 일생을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김치선 목사의 회개론은 그의 구약개론을 비롯한 그의 강의와
유고 형태로 남아있는 140여 편의 설교들에 잘 나타나 있다.
김치선 목사는 해방된 조국에서 우리 민족의 고난의 원인을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우상숭배라고 생각하여 회개운동을 전개하였다.
김치선 목사는 이스라엘 민족의 상태를 소개하면서 미가의 가정이
이스라엘 전 민족의 가정을 대표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미가와 그의 어머니의 우상숭배 행위를 통해서 그 당시의 종교적 형편을 알 수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거의 다 하나님을 버리고 저들의 소견대로 행동하였다는 것이었다.
이런 현상은 급기야 이스라엘 백성과 베나민 지파 사이의 골육상쟁을 가져왔다고 지적했습니다.
김치선 목사는 이스라엘 백성간의 골육상잔을 우상숭배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으로 결론을 지으면서 한국의 6.25 민족상잔을 같은 맥락에서 보고자 했다.
김치선 목사는 “예레미야 강해”에서 예레미야를 “유명한 선지자로 민족을 위하여 눈물로서 호소한 거룩한 하나님의 종"으로 묘사했다.
그는 선지자의 소명에 대하여 하나님의 권세를 잡은 대리자라고 설명하며
그는 뽑을 수 있고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6. 25 동란 후에 되어진 것을 보면 자연과 시가지뿐만 아니라 인생까지 멸망케 한 것을 볼 수 있다고 하며 이것이 죄악의 값인 것을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한다고 경고했다.
김치선 목사는 한 설교 가운데서 회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사 돌아오라는 요구뿐인 것을 알아야 한다.
'너희가 나에게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우리는 회개하는 것이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인 것을 알아야 한다.
과거 우리의 모든 죄악을 하나님께 회개하는 것이 있을 뿐인데,
이것은 다만 우리의 믿음인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과거의 우리의 모든 부족한 것을 주님께 내어놓고 주님만 의지하면 이것이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다. 성도여 우리는 이제 우리의 모든 부족한 것을 주님께 직고하자. 이것만이 우리의 할 일이다. 회개는 우리의 잘못된 것을 내려놓고 주님께로 돌아가서
모든 죄를 용서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비” 아모스 9:11-15. 1962.6.).
김치선 목사는 설교 시간에 자신의 죄를 공개적으로 지적하고 용서를 구하기도 했다.
김치선 목사는 설교하면서 자신의 신사참배의 경력을 인정하며
그 죄의 용서를 구했다.
1952년에 대구중앙교회에서 했던 “전쟁 중의 부흥”이란 제목의 설교에서
이방 신들과 우상들을 제하여 버리지 않으면 부흥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자신의 우상숭배의 죄를 회개했다.
“오날 여러분 나붙어 더러운 일본 우상에게 절하던 자이옵니다.
그러니 엇지 이 나라가 부흥할 수 있겠나이까
우리는 몬저 이 더러운 것붙어 다 제하여 버려야 하겠나이다.”
그는 또한 1961년에 했던 한 설교에서도 자신의 신사참배의 죄를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가 아버지를 생각지 않고 미소기바라이에게 참배할 때 그 마음이 얼마나 앞프셨겠나이까? 생각할 때 참 마음이 괴롭씁니다.
나는 부모에게 불효막대한 죄인인데, 하나님 아버지께 대한 불효의 죄는 태산보다 더하리라. 여러분 나는 아브지 하나님을 이렇게 아프게 하고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말로 할 수 없는 고난 받으신 주님의 마음을 앞프게 한 다시 죽어도 맛당한 이 죄인을 사랑하시니 그 감사는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그는 다시 “고멜을 보라”는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신사참배의 죄를 고백했다.
“크리스챤지에서 미소기바리이에게 신사참배한 자가 교회를 설립한다고 욕질한 기사가 씌였는데, 그 기사를 보고 퍽이나 고민하다가 문득 깨달아진 것은 나는 고멜이구나 하는 생각이 일어났습니다. 나도 고멜이와 같이 내 남편 주님을 버리고 일본 신사에 가서 그것들과 음행을 범하였습니다.
해방 후 회개 운동이 내가 돕던 남대문교회에 일어나 회개 금식 기도회를 할 때,
내가 깨달은 것은 나의 남편 주님을 버리고
일본 귀신 아마테라스 오미가미를 섬겼으니 이는 고멜과 같이 음녀라는 것입니다.”
김치선 목사는 자신이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못한 죄를 회개했고,
자신이 사사로서 가정을 다스리는 파수꾼을 사명을 다하지 못한 죄를 회개했으며,
자신이 부모에게 효도하지 못한 것도 회개했다.
이와 같이 김치선 목사는 다른 사람들에게 회개하기 전에 자신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설교시간에 공개적으로 말하면서
자신의 죄부터 철저하게 회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김치선 목사는 교회와 민족의 죄를 회개했다.
그는 해방 후의 교회들이 민족의 양심이 되고 민족의 상처를 싸매주는
선한 사마리아 인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문제점들을 그 죄를 회개했다.
서로 감투를 쓰겠다는 생각과 대립에서 발생하는 시기의 질투의 죄를 회개했다.
그리고 회개를 촉구했다.
“오날 북한이나 남한에 요구하는 것은 회개인줄로 생각하나이다.
국가적으로 회개하여야 하겠나이다. 하나님이 오날 이런 시련 중에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회개인 줄로 생각하나이다. 그럼으로 우리는 개인으로 회개할 것이 없다고 한 대도 국가적 의미에서 회개하는 태도는 따라야 하겠다.”
한국의 예레미아라고 불리던 김치선 목사는 자신의 죄에 대하여 가장 철저하게 회개했고 한국교회와 사회의 죄를 철저하게 회개하며 회개를 촉구하던 분이었습니다.
특히 6.25 이후의 민족의 위기를 바라보며 민족의 파수꾼이 되어 민족과 교회의 죄를 회개할 것을 촉구하였습니다.
특히 그는 이스라엘이 우상숭배 때문에 망한 것이라는 것을
이스라엘 역사와 예레미야서 분석을 통하여 제시하면서,
이러한 죄를 회개하며 민족을 위해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불쌍히 여겨 부흥을 주실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민족을 위하여 늘 눈물로 기도하며
민족의 죄를 회개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흥을 주실 것을 기대하며 기도하였고
실질적으로 부흥과 민족의 복음화를 위하여 일생을 바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