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4공민왕이 시해당하고, (이인임이 배후에서 조종하여) 호송관 김의가 명나라 사신들을 살해하고 납치해서 북원으로 도주하는 사건이 발생한 뒤, 여-명관계는 한동안 침체에 빠집니다.
홍무제와 명나라측에서는 이번 일을 통해서 북원과 교류하는 고려와의 관계를 아예 끊으려 했는데 반해, 고려 내에서는 친원이냐 친명이냐를 두고 여러 의견이 오고갔습니다. 다만 집권층들 전반에 원나라시기의 워낙 안좋았던 기억이 워낙 팽배해 있었고(이인임조차 덕흥군의 난때 활약하며 정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인물) 아울러 "중원을 완전히 장악한 명나라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을 수는 없다"는 판단에는 모두 공감하고 있던터라, 고려 조정은 매년 명나라에 관계회복을 위한 사신을 파견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신이 억류당한다던가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고요.
1383년에 이르러서 고려가 이번에도 사신을 파견하여 관계회복(우왕의 왕위계승 승인)을 요청하자 홍무제가 갑자기 "그럼 5년치 세공을 한꺼번에 바쳐 성의를 보이라"는 지시를 내립니다.
그렇게 우리랑 다시 잘 지내고 싶어? 그럼 한 5년치 세공을 바쳐보던가?
5년치 세공이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는 건 사실이었지만 고려로서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각계각층에서 비용을 각출하는 하여(소위 "영끌"해서), 1384년 윤10월에 이원굉을 사신으로 파견, 1385년 1월에 5년치 세공을 바쳤으며, 홍무제는 고려의 성의를 잘 보았다며 사신들에게 긍정적인 반응을 보냅니다.
그런데 이렇게 양국 조정에서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지던 와중, 양국의 국경에서는 소규모 군사충돌이 일어났습니다.
1384년 1월에 요동에서 군사를 파견하여 고려군을 잡아가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요동(遼東) 군사 1백여 기가 강계(江界 : 지금의 자강도 강계시)에 침입해 별차(別差) 김길보(金吉甫)와 백호(百戶) 홍정(洪丁)을 사로잡아갔다."
그러다가 같은해 11월에는 요동도사에서 여진족을 동원하여 함경도로 군사를 진입시키기 까지 합니다.
"요동도사(遼東都司)에서 여진(女眞) 천호(千戶) 백파파산(白把把山)으로 하여금 기병 70여 명을 거느리고 북청주(北靑州 : 지금의 함경남도 북청군)를 기습하게 하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1월과는 다르게 이원굉이 요동을 지나며 미리 정보를 입수, 만호 김득경이 이들을 격퇴시킵니다.
"만호(萬戶) 김득경(金得卿)이 군사를 이끌고 피하는 척하다가 밤을 타서 적의 군영을 공격해 불사르고 마흔 명을 죽이니 백파파산이 패주했다. 처음에 이원굉 등이 요동까지 갔다가 요동도사에서 합라(哈刺 : 지금의 함경남도 함흥시)·쌍성(雙城 : 지금의 함경남도 금야군)으로 군사를 파견해 북원의 사신을 중간에서 막으려고 하는 것을 탐지하고서 몰래 사람을 보내 알리자 도당(都堂)에서 즉시 김득경에게 공문을 보내 미리 대비시킨 것이었다."
김득경은 조정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여 고려의 경내에 침입한 명나라군을 훌륭히 격퇴시킨 것 뿐인데, 문제는 다음해에 발생합니다.
1385년 2월에 요동에서 적반하장 식으로 왜 우리 군사를 죽였냐고 따진 것 입니다.
"요동도사(遼東都司)에서 백호(百戶) 정여(程與)를 파견해 김득경이 자기네 군사를 살해한 이유를 질문했다."
근데 고려로서는 이에 제대로 대응 할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이 사건을 제대로 따지고 들어가기 시작하면, 결국 고려는 북원과 연락하고 있다는 문제가 수면위로 떠오르게 되니 말입니다.
위에서도 설명했듯이 현재 작년 윤10월에 고려사신이 국내 각계각층에서 "영끌"한 5년치 세공을 가지고서 남경으로가서 양국 국교정상화 협상중이었는데, 북원과의 관계 문제가 수면위로 떠오르게 되면 지금까지의 노력이 자칫 헛수고가 될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결국에는 2월에 당시 집권자 임견미 등은 김득경을 체포해서 남경으로 보내기로 결정하고, 아울러 이 문제를 김득경 독단이 벌인 일로 덮으려고 합니다.
"김득경을 체포해 명나라 서울로 압송하기로 했는데, 떠날 즈음에 도당에서 김득경을 보고, “북청주(北靑州) 사건은 네가 그 허물을 쓰고 나라에 누가 되지 않게 하라.” 고 설득하자 김득경은, “나는 다만 도당의 공문대로 시행했을 뿐이니 명나라에서 물으면 어찌 감히 끝까지 숨길 수 있겠소?"
자 지금 상황이 안좋으니까 그냥 너가 독박쓰는 걸로 하자?
사실 김득경으로서는 자기는 조정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한 죄(?) 밖에 없는데 이제와서 자기가 모두 독박쓰라니 너무 억울 했을 것입니다. 그러자 이인임의 조카이자 훗날 태종의 책사인 하륜이 해결책을 내놓습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밀직제학(密直提學) 하륜(河崙)이 몰래, “일은 임기응변이 중요하오. 지금 왜구가 온 땅에 깔려있는 판에(當今倭寇充斥) 적을 만나 죽는 자가 어찌 없겠소?” 하고 일러주자 임견미가 크게 기뻐했다. 김득경이 철주(鐵州)에 당도하자 한밤중에 물래 죽여버리고는 왜적을 만나 죽었다고 황제에게 보고했다.
일은 임시 변통이 중요한 것이다. 지금 서북에 왜적이 가득하니(當今西北,倭寇充斤), 어찌 도적을 만나서 죽는 자가 없겠는가." 하니, 견미가 크게 기뻐하여 마침내 그 계책을 따른 것이다.
남경으로 가는 도중에 철주에서 몰래 죽여놓고는 왜구 만나 죽었다고 보고해 버린 겁니다...... (참고로 고려사 절요에서는 서북에 왜적이 가득하다고 하고 있는데 실제로 작년 12월에 고려군이 왜구와 덕적도(德積島 :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에서 전투를 벌였고, 1월에는 해도부원수이자 전 개성윤인 조언이 여주도(汝走島)에서 전투를 벌였으며, 2월에는 왜구가 서해도 피곶(皮串 : 지금의 황해남도 해주시)을 침구하는 등 한반도 중서부 연해지역에 왜구가 침공을 한 것 자체는 사실이었습니다.)
참 머리들 좋아. 우리를 이렇게 써먹네.
그리고 요동에서온 백호 정여 등의 명나라 인물들을 설득하는 것은 미리 뇌물을 줘 둔 터라 더더욱 간단하게 해결 할 수 있었겠죠.
"우왕이 임견미·이성림과 함께 정여(程與)를 극진히 대접하는 한편 몰래 장자온(張子溫)을 시켜 금 50냥을 뇌물로 주었으며 겸종(傔從) 세 명에게도 은 50냥씩을 주었다."
"우왕이 정여를 크게 후대했으며 임견미와 이성림도 자기 집에 연회를 열어 후히 대접하고 모시베[細布]까지 선물로 주었다."
이렇게 문제를 잘 덮은 덕분인지(?) 1월에 5년치 세공을 받고난 뒤 홍무제의 여-명관계 회복의지는 그대로 유지되어, 4월에는 구류되었던 고려사신들이 풀려났고, 9월에는 우왕이 정식으로 홍무제의 책봉을 받음으로서 여-명관계는 다시 정상화 됩니다.
공민왕대 인당이라던가 이번의 김득경 사건도 그렇고, 고려말에는 강대국과의 군사충돌이 자칫 외교문제로 비화될 것 같으면 적당히 현지 지휘관을 희생양으로 만들어 해결하는 방법을 가끔 쓰고는 했습니다. 이걸 힘이 없는 국가의 비애라고 해석 해야할까요, 아니면 국제관계의 냉혹함이라고 해야할까요.....
그리고 정확히 3년 뒤 "강대국과의 전면전을 앞둔" 고려의 지휘관은 군대를 돌려 되려 국내 정권을 전복시킵니다.
우리는 개경으로 돌아간다!
첫댓글 김득경:???저는 시키던대로 일을 했을 뿐인데...
옛 트황상이 주둔비용을 기존의 몇배나 받으려 했던 일이 생각...
과연 그 황상이 돌아왔을때 희생양은 누가(?)
윤석열,국힘당:이럴때는 역시 전정권 탓을 하면서 민주당과 전직 대통령을 조진다!
현지 지휘관을 희생양으로 만들었다니 김득경은 억울했을듯
고려말보면 명장들이 어이없는 이유로 희생되는경우가 많은거로 압니다
이성계 최영 앞의 세대 장군들인 3원수 안우,이방실,김득배와 당시 총병관 정세운이 그대로 희생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