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에 대한 조명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얘기 중에 연산군에 관한 이야기를 가장 많이 들었다. 연산군이 어머니를 잃은 것에 분노한 나머지, 폭정과 황음을 저지르고, 어머니를 죽이는데 찬성한 신하들에게 복수를 한 것뿐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런 얘기를 들으면,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조선에서의 임금이란 어떤 존재였는가라는 것을 안다면, 연산군의 행동은 지나치다못해 방종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일어난 중종반정은 시대적인 흐름이었다는 사실을.. 물론 그 주체세력은 결국 부패하고 말지만 말이다. 어쨌든 연산군의 폭정이 왜 나쁜지 일단 살펴보도록 하자.
일단 그의 황음(荒淫)에 대해서 다룬다. 한자로 쓰니까 어려운 것처럼 보이지만, 말하자면, 속된 말로 색마다. 연산군의 여자 밝힘증은 거의 상상을 초월한다. 요즘도 한참 쓰는 말 중에 하나가 흥청망청, 흥청망청 중에 흥청은 연산군이 전국에 있는 미녀들을 모아서, 흥청, 운평이라 불렀다. 흥청은 더러운 것을 뜻하는 사예를 씻었다는 뜻이오. 운평은 태평성대를 만났다는 뜻이다. 광희는 흥청, 운평이 춤출 때 연주하는 악공을 말한다. 그 숫자는 연산군 10년(1504년)에 이르면, 흥청은 300명, 운평은 700명인데, 연산군의 여자가 될 정도라면, 재주와 미모가 뛰어나야 할 정도라고 한다. 요즘으로 치자면, 북한 정권의 기쁨조 수준이라고 할까나?
그 여자 밝힘증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 흥청, 운평만도 거의 보통 남자라면, 숨이 넘어갈 지경일텐데도, 이 아저씨는 자기 신하들의 아내나, 왕실의 인척들도 건드리기 시작했다. 가장 추한 짓은 자기 큰어머니인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와 자기의 의붓누이인 임숭재의 부인인 옹주를 건드린 것이다. 이 사건으로 박씨는 세상을 떠났고, 박씨의 오빠인 박원종은 연산군에게 분노를 느껴, 반정을 꿈꾼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연산군은 자신이 좋아하는 사냥터를 만들기 위해 경기도 일대에 금표비를 세워, 동금표, 서금표, 남금표에 세웠다. 그리고 허락없이 통과하는 사람을 극형에 처했다고 한다. <연산군일기>에는 이와 같이 적혀있다. "도성 사방에 100리를 한계로 모두 금표를 세워 그 안에 있는 주현과 군읍을 폐지하고 주민을 철거시킨 다음 사냥터로 삼음으로써 기전(畿甸) 수백 리를 풀밭으로 만들어 금수(禽獸)를 기르는 마당으로 삼았고, 여기에 들어가는 자는 목을 베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에 대한 의문을 품고, 중종반정을 일으킨 주체세력들이 연산군의 포악스러운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위해 만들었다고 했으나, 1995년 경기도 고양시에 이것이 발견되어 현재 경기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비 내용은 禁標內犯入者 論棄毁制書律(금표 안으로 들어온 자는 삼족멸족이 가능한 기훼제서율(한글을 사용한 사람을 처벌했던 방법)으로 다스린다.)
대간들이 "사람이 사는 집을 헐면, 민가들의 원망이 심해질 것"이라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사냥과 놀음을 위해 허는 것을 정당화했다. 그뿐이 아니라, 궁궐의 인가들도 헐게 했으니, 그것은 백성들이 감히 임금의 사생활을 훔쳐볼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었다. 그는 조선의 근간인 성리학을 철저하게 거부했다. 자기의 할머니인 인수대비 한씨가 죽자, 이일역월제라 하여, 3년상을 일주일로 바꾸어, 상복을 일주일 만에 벗어버렸고, 성균관의 유생을 내쫓고, 공자의 신위가 모셔진 대성전을 놀이터로 삼았다. 그뿐이 아니라, 불교의 원각사, 흥천사 모두 주색장으로 변해버렸다. 그런가 하면, 후궁들이 나이가 들어 은퇴하여 머무는 정업원에 가서, 놀러가곤 했다.
그뿐이 아니라, 경연을 폐지하고, 사간원, 홍문관을 없애는 가하면, 간언을 하는자를 활로 쏘아 죽였다. 한글로 연산군의 폭정이 알려지자, 한글을 쓰지 못하도록 명하였다. 만약 연산군이 어떤 사상을 가져서, 진보적인 정책을 펴기 위해 탈유교적 행위를 했다면, 지금의 역사 평가는 달라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한낱 놀음을 위해 이런 행위를 했기 때문에 그는 폭군이란 명칭을 벗어나기 힘든 것이며, 그는 폭군의 전형적인 모습을 벗어나지 못한 임금일뿐이었다.
이런 연산군의 폭정도 곧 날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자신의 누이가 연산군에게 희롱당하여, 죽은 것을 애석하게 생각한 박원종은 곧 반정을 계획했고, 성희안 등과 모의하여, 성종의 두 번째 아들 진성대군을 왕위에 올릴 것을 구상한다. 연산군은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되었고, 왕비 신씨는 쫓겨났고, 총애받던 장숙용(장희빈)은 사사된다. 연산군은 1년도 못되어, 교동에서 죽었는데, 일설로는 반정세력에 의해 독살된 것으로 알려진다.
첫댓글 즐감
한 번에 읽어보는 조선사[18]에 연산군에 대한 조명을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