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제1회 '미주한인의 날' 기념
"미주한인의 날"이 제정된 그 시작은 미주한인이민100주년기념사업회 전국총회에서 이민선조들이 미국에 도착한 날을 영원히 기념하고 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하여 코리안아메리칸들이 독자적으로 결정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 2 백만이 넘는 인구로 성장한 미주한인사회가 미국에서 새역사를 창조하고 있음에 비추어 "미주한인의 날"을 미주류사회에서도 인정 받게 끔 격상시킬 것을 결정하고 이를 추진하기로 하였다. 뜻을 같이 하는 코리안아메리칸의 1.5세와 2세들이 미국 국회와 행정부를 상대로 여러 캠페인과 로비활동을 펴는 등 최일선에서 활약하였다. 드디어 3년 만에 그 열매가 맺히게 되었다. 미국의 상원과 하원이 "미주한인의 날"을 제정할 것을 만장일치로 결의한 후, 부시대통령이 2005년 12월에 이를 서명함으로 법으로 제정되어 첫 번째 "미주한인의 날"을 2006년에 기념하였다./Google 2005.1.13 - 미하원 '미주 한인의 날(Korean American Day)' 지정 결의
소수계 이민 첫 기념... 한인 기여 평가
미하원은 13일 첫 한국인 이민선이 미국에 도착한 1월 13일을 '미주 한인의 날(Korean-American Day)'로 지정하는 것을 지지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하원은 이날 저녁 "미국에 대한 미주 한인들의 헤아릴 수 없이 값진 기여"를 인정하는 결의안을 찬성 405 대 반대 0 으로 처리했다.
기념일 지정은 행정부가 하지만, 의회가 만장일치로 지지함에 따라 102년 전인 1903년 102명의 한국인을 태운 이민선 갤릭호가 하와이 호눌룰루항에 도착한 1월 13일이 미주 한인의 날로 지정될 것이 확실하며, 이 경우 미국에서 특정 소수계 이민을 위한 기념일이 지정되는 첫 사례가 된다.
하원은 이번 결의에서 모든 미국인이 미주 한인의 날 기념을 통해 미주 한인들의 미국에 대한 헤아릴 수 없이 값진 기여를 더 크게 평가하고, 첫 한인 이민자들의 미국 103 주년을 기리도록 촉구했다.
[2002년] 군번1번 예비역 대장 이형근(李亨根, 일본식 이름: 松山武雄)씨 별세
1950 공주 출생
대한민국 국군 군번 1번이자 초대 합동참모의장을 지낸 이형근(李亨根) 예비역 육군대장이 13일 밤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2세.
고 이형근 예비역 육군대장은 한국인에게 오만하게 구는 일본인을 누르겠다는 마음에서 부모 허락도 없이 일본 육사에 지원해 장교가 됐지만 ‘충성할 대상’이 없었다.
46년 한국군의 모체인 조선국방경비대가 창설되자 대위로 입대한 고인에게 당시 미 군정청은 군번 1번을 부여했다. 능력을 높이 샀기 때문이었다. 고인은 이후 사단장 군단장 합참의장 육군참모총장 등 군 요직을 두루 거쳤다.
고인은 49년 8사단장 시절 적(북한)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상황보고를 수 차례 올렸으나 육군본부가 이를 묵살하자 사표를 던졌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에는 제2사단장, 1950년 10월에는 제3군단장, 1951년 8월에는 교육총장을 맡았으며, 1951년 9월에 휴전회담 대표이었고 1952년 1월에는 제1군단장을 맡았다. 종전 후에는 1954년 2월 합참의장, 1956년 6월에는 참모총장이 되었다. 1959년 8월에 대장으로 예편하였다. 육군참모총장 시절엔 중상모략에 휘말려 대통령으로부터 사임 압력을 받았으나 끝까지 불응했다.
고인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던 사람들은 ‘큰일(쿠데타)낼 사람’이라는 뜻에서 ‘나폴레옹’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둘째아들 헌(憲·기산통신 대표·52)씨는 “정석대로 살다가 가신 분으로, 무엇보다 약속과 의리를 중시하셨다”고 말했다. 헌씨는 가요 ‘잘 있어요’ 등을 히트시켰던 가수. 유족으로는 장남 훈(勳·55·전 재향군인회 회장)씨 등 2남 4녀가 있다./동아
[2000년] 원로 연극인 강계식씨 별세 ← 팔순을 맞아 연극 `제국의 광대들`에 출연 중인 연극배우 강계식씨
원로 연극인 강계식씨가 2000년 1월 13일 별세했다. 강씨는 “나는 연기밖에는 재주가 없는 사람”이라며 무대를 집 삼아 60년 가까운 세월을 배우로 살았다. 만년엔 조역만을 맡다시피 했지만, 동네 노인역으로 무대를 잠깐 서성이는 것에 불과한 연기를 할 때도, 자신의 움직임이 어떤 모양새로 연극을 받쳐주는가를 고민했던 배우였다.
1980년대 초반 건강이 나빠지자 우황청심환을 입에 털어 넣으며 연극을 계속했다. 현대인들은 조연배우로 그를 기억하지만 1940~50년대 강계식은 숱한 작품의 주연으로 이름을 날렸다. 1940년대 유치진 작 ‘춘향전’에서 그의 이도령 연기는 유치진으로부터 “내 살아생전 본 춘향전 중 최고”라는 칭찬을 얻었다.
충청도 양반의 기품이 몸에 밴 그는 장년 이후 ‘성웅 이순신’등 사극에서 양반 대감역을 주로 맡았다. 노년의 강계식은 연극, TV에서 인생을 관조하는 노련미의 인물, 인자하나 꼿꼿한 할아버지, 방황하는 지성인 등 다양한 얼굴을 보여줬다. ‘햄릿’ ‘맹진사댁 경사’ 등 그의 출연작은 일일이 꼽기조차 어렵다.
70세 이전까지 강계식에게는 단 한 개의 연극상도 주어지지 않았다. 70세 때 받은 동아연극상 특별공로상을 시발로, 1987년 백상연극상 특별상, 그리고 1992년 문화훈장 옥관장이 뒤늦게 그를 격려했다./조선
[1990년] 고르바초프, 소련에 다당제 도입 선언
구소련시절 1990년 2월의 당중앙위에서 공산당의 1당독재를 포기하고 당의 권한을 축소하면서 복수정당제가 처음으로 채택되었다. 1990년 3월의 헌법개정으로 입법, 사법, 행정의 3권을 통괄하는 최고직으로 대통령직이 신설되면서 구소련은 공산당은 유지하되 당과 국가가 분리되는 새로운 국가체제를 만든 것이다. 이에 따라 러시아가 독자적인 공산당을 만들기시작하였으며, 구소련연방을 묶어주던 각 공화국들도 각자의 당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naver
[1964년]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씨 별세 ← 가인 김병로 선생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을 역임한 가인 김병로 선생이 1964년 1월 13일 숙환인 간장염으로 사망했다. 향년 78세였다. 1887년 전북 순창에서 출생해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최익현이 이끄는 의병에 가담, 70여명의 의병과 함께 순창읍 일인보좌청을 습격하는 등 항일투쟁에 몸을 던졌다.
민족이 살 길은 신학문을 통한 ‘민족자강’뿐이라는 신념으로 1910년 3월에 도일, 일본 메이지(明治)대를 거쳐 14년 일본 중앙대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귀국했다. 경성법전과 보성전문에서 형법 소송법 등을 강의하던 그는 1919년 부산지법 판사로 취임하지만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재판을 거부, 1년도 못돼 사임했다. ‘민족변호사’로서의 그의 활동은 이듬해 경성지법 소속 변호사로 개업하면서부터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이후 광복 때까지 무료변론만 무려 1백여 건이었다.
가인은 미 군정청과 남조선과도정부의 사법부장을 거쳐 1948년 초대 대법원장에 피임됐다. 이후 그는 반독재와 민권보호,사법권 독립 등 소신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1957년 12월 ‘법조인의 사표’라는 찬사속에 대법원장을 정년퇴임했다.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발표
1962년 오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발표됐다.
1962년부터 1966년까지 시행하는 1차 경제개발계획의 목표는 연평균 경제 성장률 7.1%를 달성하고 GNP를 40% 높이겠다는 것.
정부는 이를 위해 전력과 석탄생산 등 에너지자원 확보를 선결 과제로 꼽았다.
농업부문의 생산력 강화와 사회간접자본의 확충, 국토개발도 함께 추진하기로 했다. 소요예산 3조2천억원은 정부와 민간부분이 56대 44로 분담한다고 밝혔다. /YTN
[1958년] 조봉암 간첩혐의로 구속
1958년 1월 13일 위원장 조봉암을 비롯한 진보당의 전 간부들이 북한의 간첩들과 접선하고 북한의 통일방안을 주장한 혐의로 구속되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였던 조봉암은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했지만 광범위한 지지를 바탕으로 혁신정당인 진보당을 창당했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집권 연장을 위해 발췌개헌과 사사오입개헌을 주도함으로써 국민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진보당이 진보적 민주주의 세력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지지 기반을 넓혀나가자 이승만과 자유당은 큰 위협을 느꼈다. 결국 검찰은 진보당 위원장인 조봉암을 간첩혐의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진보당 간부들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했다. 진보당의 강령 중 평화통일론 부분이 문제가 되어 진보당은 등록을 취소당했고, 조봉암은 사형을 선고받아 교수대에서 숨을 거두었다. 진보당사건은 이승만이 자신의 정적 조봉암을 제거하기 위해 조작한 사건으로, 이 사건을 계기로 평화통일론 등 통일정책에 대한 공개적인 논의가 동결되었으며 혁신정당의 활동이 위축되었다.
[1958년] 세계저명과학자들 핵실험 정지 청원서를 유엔에 제출
노벨화학상(1954)을 받은 미국의 물리화학자 라이너스 폴링(Pauling, Linus, 1901~1994)은 1950년대를 통해 반전 반핵 평화운동에 적극 참여해 왔고, 특히 전 세계 과학자들을 대상으로 핵실험을 제한하자는 청원운동을 벌였다. 이런 노력은 1963년 8월 5일 모스크바에서 '부분핵실험 금지 조약'이 체결되는 성과를 나타냈다.
노르웨이의 노벨 평화상 위원회는 그 공로를 인정해 1962년 그에게 평화상을 주었다. 하지만 미국인들은 폴링의 행동이 자국의 이익을 침해한다고 생각했다. 폴링은 결코 당시 미국인들이 보았던 것처럼 반미국적, 비애국적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히틀러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나치와의 전쟁에 자발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학생들에게 호소했던 사람이다. 또한 캘리포니아 공대 화학 및 화학공학부 부장으로서 과학연구발전국과 전쟁 관련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했고, 나중에는 이때의 업적에 의해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
다만 폴링은 당시 저명한 과학자들이 대부분 참여했던 원자탄 개발계획인 맨하탄 프로젝트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오펜하이머(Oppenheimer, J. Robert, 1904~1967)는 폴링이 프로젝트의 화학부분 책임자를 맡아주기를 원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거절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일은 폴링의 인생에 중요한 전환의 계기가 됐다. 자신이 원자탄 개발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의 수단으로 사용된 과학과 과학자들을 비난할 수 있었다. 또한 원자탄 계획에 대한 비밀을 강조한 연방 정부의 구속으로부터도 상대적으로 자유로워 원자탄에 대한 공개적인 논의와 비판을 할 수 있었다.
1946년부터 폴링은 아인슈타인, 유레이 등이 주도하는 원자과학자비상위원회에 참여했다. 당시 오펜하이머는 수소폭탄의 개발을 반대하다 소련의 첩자로 몰렸지만 폴링은 아랑곳하지 않고 수소폭탄의 개발을 반대하면서 오펜하이머를 지지했다.
1950년대 초반 미국은 메카시즘의 선풍이 불고 있었다. 당시 미국 사회에서는 모두가 상대방이 공산주의자가 아닌가 의심하고 또 자신이 의심받을까 두려워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폴링을 더 힘들게 했다. 그는 1952년 영국 왕립학회가 주관하는 DNA 관련 심포지엄의 연사로 초청받았으나 국무부는 여권 발급을 거부했다. 만일 폴링이 이 심포지엄에 참석해 왓슨과 크릭처럼 럿셀과 프랭클린이 제출한 DNA의 X-선 사진을 보았다면 그는 또 한번 노벨상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1990년의 한 인터뷰에서 폴링은 왓슨과 크릭이 DNA구조를 해명한 방법이 오래 전에 자신이 단백질의 알파 나선형 구조를 밝힐 때 사용한 바로 그 방법이었다는 점을 강조했듯이 폴링 자신도 이를 애석히 여겼을 것이다. 이후 폴링은 2년 이상 국제학회에 참석하지 못했다. 심지어 1954년 폴링이 노벨 화학상 수상자로 결정됐을 때도 국무부는 폴링을 수상식에 참석토록 허락할 것인지를 두고 논란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어려운 상황이 폴링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오히려 폴링은 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평화운동에 참여했다. 1957년부터 폴링은 아내와 함께 대기중 핵실험 금지를 위한 서명작업을 시작했다. 또한 강연을 통해 대기중 핵실험이 수백만의 생명을 방사능에 노출시킨다며 대중을 설득해 나갔다. 이 운동으로 49개국 1만 1천여명의 과학자가 서명한 청원서가 만들어졌으며, 폴링은 이것을 유엔 사무총장에게 제출했다.
폴링은 그의 책 'No More War'에서 과학이 어떤 과정을 통해 전쟁의 시녀로 전락해 갔는지를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과학이 전쟁에 봉사할 것이 아니라 평화의 시녀가 돼야 함을 역설했다. /Google
[1957년] 유도회(儒道會) 분규 격화 ← 김창숙 위원장
5백년 전통을 지켜온 전국 70만 유림의 중심체인 유도회(儒道會)가 1956년 대통령선거를 전후해 분규에 휩싸였다. 1956년 5·15 대통령선거 때 자유당 선거운동을 공공연히 벌였던 유도회 비주류파는 이승만 대통령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1957년 1월 13일 농업은행 3층에서 유도회 전국대회를 개최, 김창숙 위원장을 비롯한 정통파를 축출했다.
김창숙 위원장도 이에 맞서 전국대회를 동시에 소집하려 했으나 집회허가를 얻지 못했다. 급기야는 유도회 사무실 점거를 둘러싼 정통파와 비정통파간의 몸싸움으로 김창숙 위원장이 부상당해 병원에 입원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정통파는 5월 17일 서울지법에 가처분 소송을 제기, 최찬익과 이범승을 유도회 집행부 대리인으로 지명, 7월 10일 유도회 전국대회를 소집했으나 이들 법정대리인들조차 오히려 자파세력을 규합하여 김창숙 위원장에게 도의적 책임을 물어 다시 축출키로 결의했다. 그리고 새 위원장에 구자혁, 부위원회장에 이범승, 성균관장에 최찬익을 선출했다.
김창숙파는 그 후에도 두차례나 법적으로는 승소했으나 관권의 비호를 받는 유도회 집행부에 대항하지 못하다가 4·19혁명 이후 다시 집행부를 장악할 수 있었다./조선
[1941년] 아일랜드의 소설가, 시인 조이스(Joyce, James) 사망 ← James Joyce, ca. 1918
1882. 2. 2 ~ 1941. 1. 13
'율리시즈'의 작가 제임스 조이스가 1941년 1월 13일 위궤양 수술의 후유증으로 스위스 취리히에서 사망했다. 1882년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난 조이스는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예비학교에서 수학했으나 타고난 언어 감각으로 문학을 평생의 소명으로 받아들였다.
그의 문학적 경력은 1900년 4월 그가 나름의 미학이론으로 입센을 해석한 '입센의 새로운 드라마'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본격화됐다. 조이스의 첫 소설인 '더블린 사람들'은 1904년 더블린의 한 신문에 연재됐으나, 작품의 외설성과 더블린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 영국 왕을 모욕하는 듯한 내용 등으로 책을 출판하겠다고 선뜻 나서는 출판사가 없어 그는 8년 안이나 책 출간을 위해 안간힘을 써야했다. 결국 1912년 책 출간을 포기하고 아일랜드를 등진 그는 죽을 때까지 평생 조국을 찾지 않았다.
1916년 뉴욕에서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 출판되고 1918년부터 미국의 한 잡지에 '율리시즈'가 연재되기 시작했다. '율리시즈'는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미국에서 한 동안 연재와 출판을 금지당하는 바람에 1922년 파리에서 초판을 출판했다. 그가 당시 세계문학의 수도였던 파리로 이주한 것은 1920년이었다. 그의 천재성을 높이 평가한 미국 시인 에즈라 파운드의 권유에 의해서였다. 세계 문학의 큰 별로 군림하던 그가 파리를 떠난 것은 파리가 2차대전으로 독일에 함락된 1940년이었다. 가족과 함께 스위스로 이주했으나 결국 이날 사망했다.
[1938년] 장편만화영화 ‘백설공주’ 첫방영
1937년 미국의 월트 디즈니 프로덕션에서 그림동화에 수록된 설화를 원작으로 하여 제작한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가 1937년 오늘, 미국의 만화영화 제작자 월트 디즈니에 의해 장편 만화영화 '백설공주'를 선보였다.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라는 제목으로도 상영되었으며, 감독은 데이비드 핸드(David Hand), 제작은 월트 디즈니(Walt Disney), 각본은 도로시 A. 블랭크(Dorothy Ann Blank)가 맡았다. 1937년 아카데미상 특별상을 수상했다.
제작 기간은 약 3년이 걸렸으며, 멀티플레인 촬영기법을 도입하여 사실성 있는 영상을 선보였다. 멀티플레인이란 동화를 그린 셀지를 앞에 놓고 그 뒤쪽에 배경을 그린 여러 장의 투명 유리를 거리를 두고 겹친 다음 맨 앞의 셀지에 초점을 맞춰 촬영을 하는 기법을 말한다. 2001년에는 디지털의 기술로 색과 음향을 복원하여 2장의 DVD로도 제작되었다.
월트 디즈니는 1966년 84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정글북과 보물섬 등의 작품으로 만화영화의 제왕으로 군림했다.
[1903년] 최초의 한인 이민선 ‘갤릭호’ 하와이 호놀룰루 도착, 한인 미주이민 시작 ← 1903년 1월 13일, 한국 이민 102명을 태우고 호놀룰루항으로 향하는 갤릭(Gaelic)호.
최초의 한인 이민선 ‘갤릭(Gaelic)호’가 102명의 한인 이민들을 태우고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이로써 미주를 향한 한인 이민이 시작됐다.
일본의 제지로 이민이 중단된 1905년까지 총 7226명의 한인들이 하와이로 갔고, 그 사이 이민선 132편이 태평양을 오갔다. 하와이 이민의 배경은 조선 왕조 말기의 혼란과, 1901년 함경도 지역을 휩쓴 가뭄과 홍수였다. 많은 사람들이 식량과 일거리를 찾아 멀리 시베리아나 만주로, 또는 서울 인천 원산 등 대도시로 이주했다. 마침 1830년대부터 노동집약적 사탕수수 농업을 시작한 하와이에서도 이 무렵 값싼 노동력이 필요해졌다.
이미 받아들인 중국인·일본인 노동자들의 규모가 커지고 노동쟁의가 발생하자, 그 해결책으로 한국·필리핀·포르투갈에서 노동자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하와이 이민을 첫 이민으로 간주하는 것은, 대한제국이 ‘수민원(綬民院)’이란 담당기관을 설립해 처음 추진한 공식 인력송출이기 때문이다. 초기 이민자 중 84%가 20대 남자였고, 이들의 결혼 문제가 큰 현안이었다. 결국 사진 교환을 통해 결혼하는 ‘사진 신부’들이 1910년부터 하와이로 이민가게 된다. 1924년 미국 이민법에 의해 모든 형태의 한인 이민이 금지되기까지 총 1000명의 신부들이 하와이로 떠났다.
이들 첫 이민자들 가운데 생존자들을 대상으로 1978년에 실시된 조사에서 파악된 이민 동기(動機)들은 참으로 다양했다. 하와이에 가면 빗자루로 땅을 쓸기만 해도 돈이 생긴다기에 그 돈으로 친정 식구들을 살리려고, 서자라고 설움받아서, 예수쟁이라고 놀림받는 것이 싫어서, 남자들 횡포 때문에, 시부모를 안 모실 것 같아서, 일본인의 압박을 참을 수 없어서, 자손들을 좋은 나라에서 훌륭하게 교육시키고 싶어서 등으로 다양했다. 이렇게 시작된 한인의 미주이민이 2003년을 기해 100주년을 맞았다.
[1898년] 독립운동가 이민화(李敏華) 출생
1898. 1. 13 충남 아산~1923. 9. 13.
1917년 간도로 망명한 뒤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교관으로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1919년 김좌진(金佐鎭)·서일(徐一) 등이 조직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에 가입해 교성대(敎成隊) 소대장으로 김훈(金勳)·이탁(李鐸)·남익(南益) 등과 함께 항일무장투쟁을 했다. 1920년 10월 종군장교로 청산리전투에 참여해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다. 일본군의 계속된 추격을 피해 노령(露領)으로 이동하던 중 밀산(密山)에서 대한독립군단이 조직되자 박영(朴榮)과 함께 군정서 대표로 참가했다. 노령 자유시에서 고려혁명군 장교가 되었으나, 자유시참변을 겪고 만주로 돌아오던 중 밀산에서 중국의 토병(土兵)과 교전하다가 전사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1898년]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하는 에밀 졸라의 기고문 ‘나는 규탄한다...’가 신문 ‘여명’에 게재
파리의 '오롤(L'Aurore, 여명)'이라는 조간신문 1면에 1898년 1월 13일 에밀 졸라(Zola, Emile, 1840~1902)의 "나는 고발한다...!(J'Accuse...!)"는 6단짜리 기고문이 실려, 잊혀져 가던 ‘드레퓌스 사건’이 다시 세인의 관심속으로 등장했다. 1894년 4월 드레퓌스(Dreyfus, Alfred, 1859~1935) 대위는 대독 간첩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은 뒤 무죄를 주장하는 상황에서 남미 기아나 군도의 ‘암사’섬에 종신수로 추방됐다.
당시 작품활동에 몰두하던 졸라는 상징주의 시인 베르나르 라자르의 방문을 받고 여러 사람을 접촉한 결과, 드레퓌스의 무죄를 확신하게 됐다. 졸라는 1898년 1월 12일 재판에서 범인인 에스테라지에게 각본대로 무죄판결이 내려지자 분격, 조르쥬 클레망소(후에 총리가 됨)가 편집국장으로 있던 ‘오롤(여명)’ 13일자에 육필원고 39장에 이르는 ‘펠릭스 포르씨에게 보내는 편지’를 게재한 것이다.
그는 기고문에서 비열한 책임자들을 거명하며 "나는 ~를 고발한다!, 나는 ~를 고발한다!"는 표현을 10번이나 반복했다. 클레망소는 이에 착안,"나는 고발한다...!(J'Accuse...!)"를 이 글의 제목으로 달았다. 결국 필화를 자초한 셈인 졸라는 그해 2월 징역 1년형에 벌금 3천프랑을 선고 받고 우여곡절 끝에 망명길을 떠났다. /조선
[1888년] 미국지리학회 창립 ← 미국지리학회의 2대 회장이자 전화기를 발명한 벨
1888년 1월 13일 미국지리학회가 창립되었다. 미국지리학회는 북극과 남극 탐험, 고대 유적 발굴, 인류학 탐사, 문화재 발굴을 지원하는 등 탐험과 연구 분야에서 많은 활동을 벌여왔다. 로버트 E. 피어리, 리처드 E. 버드, 폴 A. 사이플의 극지 탐험을 도왔으며, 다른 단체들과 공동후원으로 화산폭발, 지진 등에 대한 연구를 지원해왔다. 지리학회의 또 다른 활동은 학교교육을 위한 것으로서, 교육자·사서·학생들을 위해 주간회보를 발간하고 뉴스를 제공하며, 과학서적이나 지도책의 발행 및 교육방송의 제작·운영 등을 맡고 있다. 미국지리학회에서 발행하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은 수준 높은 내용을 바탕으로 세계적인 잡지가 되었다. 1980년대 중반에는 국제회원수가 무려 1,070만 명을 넘어 세계 최대의 과학·교육 단체로 성장했다. 미국지리학회는 인류의 활동영역을 넓히고 잊혀진 역사를 복원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1884년] 승려·독립운동가 이종욱(李鍾郁, 창씨명 廣田種郁) 출생
1884. 1. 13 강원 평창~1969. 11. 3.
아명은 윤응(潤應). 호는 지암(智庵). 13세에 출가하여 강원도 평창군 월정사 승려로 있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운동에 참가했으며, 3월 3일 이탁(李鐸) 등과 27결사대의 일원으로 을사오적 등 매국노를 암살하려다 실패했다. 4월 2일 인천 월미도에서 열린 국민대회에 불교계 대표로 참석했으며, 이승만을 집정관으로 하는 임시정부인 한성정부(漢城政府)를 조직했다. 이후 상하이[上海]로 가서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했으며, 대한적십자회를 조직하고 상해임시정부 국내특파원으로 서울에 파견되었다. 안재홍(安在鴻)·송세호(宋世浩) 등과 함께 상해임시정부의 외교활동 지원을 위한 청년단체인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을 조직하고, 상하이로 건너가 동 단체의 건의서를 안창호(安昌浩)에게 전달했다. 8월 다시 국내로 파견되어 국민회(國民會)를 조직했으며, 그해 10월 대동단(大同團) 단장인 김가진(金嘉鎭)의 상하이 망명을 도와주었다. 12월 상해임시정부 내무부 참사(參事)에 임명되었으며, 1920년 3월 연통제(聯通制)를 조직하기 위해 다시 국내에 들어와 이를 추진하고 아울러 정보수집·군자금모집 등을 했다. 1920년 6월 대구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1923년 3월 의열단원 김상옥(金相玉)의 종로경찰서 폭파사건에 관련되어 함흥감옥에서 3년 동안 복역했다. 출옥 후 월정사에서 승려생활을 하면서 송세호와 함께 연통제조직을 지휘했다.
해외로 망명까지 했던 독립 운동가에서 친일파로 전향하게 된 계기와 정확한 시기는 분명치 않다. 어쨌든 그는 1923년에는 상하이에서 국내로 돌아와 월정사에 복귀해 있었고, 1930년 조선총독부의 임명을 받는 월정사의 주지가 되었으며 그해 불교계 대표격인 종회(宗會)의 의장으로도 선출되었다.
이종욱이 일제에 겉으로 드러나도록 협조한 것은 1936년 미나미 지로 총독의 부임 때 불교계를 대표하여 미나미 환영식에 참가한 무렵부터이다. 1937년 31개 본산의 주지들이 모여 총본산(조계종)을 설립하기로 했을 때 총본산건설위원회 대표가 되었는데, 당시 이처럼 불교계의 수장으로 인정 받을 수 있게 되기까지는 조선총독부의 후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중일 전쟁 이후에는 일본군을 위한 기원법회나 시국강연회를 열어서 적극적으로 일본이 일으킨 전쟁에 협력했다. 《신불교》 등의 잡지에 친일 논설을 싣기도 했다. 전쟁 지원을 위한 친일 단체 국민총력조선연맹, 임전대책협의회, 조선임전보국단에도 빠짐없이 가담했다. 이처럼 적극적인 친일 승려로 오래 활동했기에 광복 이틀 후에는 1941년부터 맡아온 종무총장 직에서 사퇴해야 했으며, 승권 정지의 징계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종욱은 이후 우익 정치인으로 변신하여 반탁 운동에 뛰어들면서 다시 불교계의 원로로 복귀했다. 1950년 고향인 평창에서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1951년 동국대학교 재단이사장, 1952년 불교계 대표인 중앙총무원장 자리로 돌아왔다. 이종욱이 동국대학교 이사장으로 있을 때는 친일 승려로 유명한 권상로가 총장으로 기용되기도 했다.
이종욱은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으나, 1993년 대한민국 국가보훈처가 친일 경력이 있는 독립유공자들을 대상으로 재심을 할 때 재심 대상자 8명 중의 하나로 명단에 올랐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선정되었다.
현 조계종을 사실상 창설한 인물인 그를 겨냥한 끊임 없는 친일파 논란은 불교계에서 적지 않은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이를 반박하기 위한 연구도 진행되었다. 예를 들어 동국대에서 석사학위 논문으로 제출된 박희승의 《지암 이종욱 연구》(동국대 불교대학원, 2000) 는 이종욱의 대동단 가담이나 김구와의 만남 등에 대해 서술하면서 항일 투사로 평가하고 있고, 친일 행위 자체가 고도의 위장전술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1879년] 독립운동가·대종교인 신규식(申圭植) 출생
1879년 1월 13일 태어남 / 1922년 9월 25일 죽음 "마음이 죽어 버린 것보다 더 큰 슬픔이 없는 것이어니 우리나라가 망한 것은 사람들의 마음이 죽은 때문이다. (중략) 힘쓸지어다. 동포들이여, 다 함께 대혼을 보배롭게 여겨 꺼지지 말도록 하며 먼저 사람마다의 그 마음을 구해내어 죽지 않도록 하라." - 신규식, <한국혼>
신규식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이끌면서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독립운동가이자, 대종교 지도자이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당시 의병을 일으키려다 실패하자 음독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1910년 한일합병 소식을 듣고 다시 음독을 꾀했다가 대종교 종사(宗師) 나철(羅喆)에게 구명되었다. 이듬해에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한 후 1912년 비밀결사로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해 박은식·김규식·홍명희·신채호·조소앙·문일평·여운형·장건상 등과 교민들의 독립운동을 지도했다. 또한 그는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과 협력해 파리 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는 등 국제사회에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고자 노력했다. 1919년 9월 여운형·선우혁(鮮于赫) 등과 함께 임시정부의 수립에 참여했으며, 이후 임시정부의 법무총장·국무총리 대리·외무총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한국혼 韓國魂>과 시집 <아목루 兒目淚>가 있고,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1850년] 미국 최초의 흑인여성변호사, 교사 레이(Ray, Charlotte E.) 출생
결혼 후의 성은 Fraim.
1850. 1. 13 미국 뉴욕 시~1911. 1. 4 뉴욕 우드사이드.
레이는 워싱턴 D. C.에 소재한 유색인종청소년교육협회에서 수학했으며, 1869년에는 하워드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그곳에서 법학을 공부하여 1872년에 학위를 받았다. 그해에 컬럼비아 특별구에서 변호사 자격을 취득함으로써 그녀는 컬럼비아 특별구에서 변호사 개업이 허용된 최초의 여성이자 미국 최초의 흑인여성변호사가 되었다. 레이는 워싱턴 D. C.에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으나 인종적 편견이 극심하여 적극적 활동을 계속할 만한 실무를 쌓을 수 없었다. 그래서 1879년에 뉴욕 시로 돌아왔으며 그곳의 공립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했다. 1880년대말에 프레임이라는 성을 가진 남자와 결혼했는데 그녀의 말년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1864년] 미국의 작곡가 포스터(Foster, Stephen Collins) 사망
1826. 7. 4 ~ 1864. 1. 13
‘오, 수재너’ ‘켄터키 옛집’ ‘스와니강’ 등 우리에게 친숙한 많은 노래를 작곡한 ‘미국 민요의 아버지’ 스티븐 콜린스 포스터가 1864년 1월 13일, 38세로 뉴욕에서 사망했다. 흑인들의 애환이 짙게 배어있는 그의 노래들이 남부 백인들로부터 기피당하고, 결혼생활의 파탄까지 겹쳐 그는 생전에 가난과 고독에 시달려야 했다.
소년 시절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여 14살 때 처녀작 ‘티오가 왈츠’를 작곡했다. 음악교사 쿠퍼의 영향을 받아 1841년부터 가곡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1848년 ‘오 수재너’가 100달러에 팔린 것에 자신을 얻어 그때부터 본격적인 가곡 작곡가의 길을 택했다. 풍부한 시정을 짙은 애수에 담아 단순하고 명료한 아름다움으로 승화됐다는 평을 받고 있는 그의 노래들은 전세계에서 가장 널리 불려지고 있다.
사후 2개월 만에 펴낸 유작 ‘꿈꾸는 가인(佳人)’에는 모두 188곡의 작품이 실려있다. 1939년에 포스터의 삶을 소재로 한 전기영화 ‘그리운 스와니’가 제작되기도 했다. /조선
대표작으로는 <캠프타운 경마 Camptown Races〉·〈넬리 블라이 Nelly Bly〉·〈켄터키 옛집 My Old Kentucky Home〉·〈Massa's in de Cold, Cold Ground〉·〈늙은 개 트레이 Old Dog Tray〉·〈올드 블랙 조 Old Black Joe〉·〈금발의 제니 Jeanie with the Light Brown Hair〉·〈아름다운 꿈 Beautiful Dreamer〉 등이 있다.
[1861년] 프랑스의 앙리 무어(Henri Mouhot), 앙코르 톰과 앙코르 와트 재발견
1855년 프랑스의 탐험가이며 생물학자인 앙리 무어 박사가 우연히 옛날 책 한 권을 손에 넣었다. ‘진랍 풍토기’라는 제목으로 중국 사람이 쓴 인도차이나반도의 역사책이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캄보디아는 2,000년 전 세워진 나라로서 899년에 나라가 크게 부흥했었다. 그때의 나라 이름은 ‘진랍’이었고, 크메르족이 나라를 다스렸다. 진랍 왕국은 타일랜드·버마·라오스 등 인도차이나반도 거의 모두를 다스린 큰 나라였다. 도읍을 왕국의 한가운데 언덕인 앙코르에 세우고 앙코르 톰이라고 불렀다. 그 도시의 뒤편에 어마어마한 절을 지었으니 그 이름을 앙코르(城) 와트(절)라고 한다. 진랍 왕국은 원나라와 어깨를 겨룰 만큼 강했으며 문화 또한 매우 눈부셨다. 그러나 이 왕국은 13세기부터 쇠퇴하기 시작하여 15세기에 아주 없어져 버렸다.”
책을 읽은 무어는 답답했다. 크메르족이 어디에서 온 민족인지, 그렇게 강대했던 진랍 왕국이 왜 멸망했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았다. 문득 그의 머리에 짚이는 것이 있었다. 5년 전 화제를 모은 뷰오 신부의 ‘밀림 속 도시’ 이야기.
‘신부의 말은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곳이 앙코르 톰이 아닐까?’
무어 박사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토록 강성했던 왕국에 대한 이야기가 캄보디아 역사책에 왜 한 줄도 남아 있지 않을까?’ 그는 끝내 마음을 다졌다. 밀림 속 도시를 찾아 캄보디아 왕국의 역사를 밝히기로.
1861년 1월9일 무어는 탐험대를 이끌고 밀림으로 들어갔다. 메콩 강의 샛강을 거슬러 올라가 톤레사프 호수를 건넌 뒤 한 마을에서 물으니 ‘창’이라고 하는 젊은이가 숲속의 도시에 얽힌 미신을 얘기해 주었다. ‘대가리 일곱 달린 뱀이 밀림을 다스리고 있을 때 거인들이 그 성을 세웠다. 그들은 커다란 돌로 산 같은 성벽을 쌓고, 온 세상을 내려다볼 탑들을 수없이 세웠다. 그러나 거인들이 너무 잘난 체 뽐내자, 하느님이 그들을 잠재우고 성에 저주를 내려 숲으로 뒤덮었다. 거인들은 유령이 되어 밀림 속을 떠돌아다니고 있다.’
무어가 밀림 속 도시를 찾아간다고 하자 창이 말렸다.
“숲속에는 안개 코끼리를 탄 왕자와 울고 있는 여왕의 유령이 있고, 수십만이나 되는 남녀 유령이 돌아다니고 있어요. 거기에는 수 백년 동안 신의 저주가 내려져 있습니다. 제발 가지 마십시오. 우리 할아버지도 그곳에 다녀온 다음날 돌아가셨습니다.”
창의 말은 고마웠지만 무어는 겁내지 않고 밀림으로 들어갔다. 1861년 1월13일. 탐험대는 빈 도시에 이르렀다. 무어 박사의 눈앞에는 허깨비가 아닌 진짜 도시가 펼쳐져 있었다. 그는 한 발짝 한 발짝 그 안으로 들어섰다.
무어가 써보낸 ‘문명 세계에 보내는 미개지 탐험 보고서’가 프랑스 잡지에 실리자 탐험대가 줄을 이어 앙코르 와트를 찾았다. 얼마 안 지나 밀림 속에서 작은 도시 몇 군데가 더 발견되었다. 그러나 정작 무어는 몇 달 뒤 말라리아에 걸려 세상을 뜨고 말았다.
(1850년 6월 프랑스인 가톨릭 신부 뷰오와 원주민 신자 4명이 밀림 속에서 앙코르 톰을 처음 발견)
[1572년] 조선 중기의 학자 퇴계 이황(李滉) 사망 ← 이황 동상, 서울 남산공원
1501 ~ 1570
본관 진성(眞城). 초명 서홍(瑞鴻). 자 경호(景浩). 초자 계호(季浩). 호 퇴계(退溪)·도옹(陶翁)·퇴도(退陶)·청량산인(淸凉山人). 시호 문순(文純). 경상북도 예안(禮安) 출생. 12세 때 숙부 이우(李?)에게서 학문을 배우다가 1523년(중종 18) 성균관(成均館)에 입학, 1528년 진사가 되고 153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부정자(副正子)·박사(博士)·호조좌랑(戶曹佐郞) 등을 거쳐 1539년 수찬(修撰)·정언(正言) 등을 거쳐 형조좌랑으로서 승문원교리(承文院校理)를 겸직하였다.
1542년 검상(檢詳)으로 충청도 암행어사로 나갔다가 사인(舍人)으로 문학(文學)·교감(校勘) 등을 겸직, 장령(掌令)을 거쳐 이듬해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이기(李?)에 의해 삭직되었다가 이어 사복시정(司僕寺正)이 되고 응교(應敎) 등의 벼슬을 거쳐 1552년 대사성에 재임, 1554년 형조·병조의 참의에 이어 1556년 부제학, 2년 후 공조참판이 되었다. 1566년 공조판서에 오르고 이어 예조판서, 1568년(선조 1) 우찬성을 거쳐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을 지내고 이듬해 고향에 은퇴, 학문과 교육에 전심하였다.
이언적(李彦迪)의 주리설(主理說)을 계승, 주자(朱子)의 주장을 따라 우주의 현상을 이(理)·기(氣) 이원(二元)으로 설명, 이와 기는 서로 다르면서 동시에 상호 의존관계에 있어서, 이는 기를 움직이게 하는 근본 법칙을 의미하고 기는 형질을 갖춘 형이하적(形而下的) 존재로서 이의 법칙을 따라 구상화(具象化)되는 것이라고 하여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하면서도 이를 보다 근원적으로 보아 주자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발전시켰다.
그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사상의 핵심으로 하는데, 즉 이가 발하여 기가 이에 따르는 것은 4단(端)이며 기가 발하여 이가 기를 타[乘]는 것은 7정(情)이라고 주장하였다. 사단칠정(四端七情)을 주제로 한 기대승(奇大升)과의 8년에 걸친 논쟁은 사칠분이기여부론(四七分理氣與否論)의 발단이 되었고 인간의 존재와 본질도 행동적인 면에서보다는 이념적인 면에서 추구하며, 인간의 순수이성(純粹理性)은 절대선(絶對善)이며 여기에 따른 것을 최고의 덕(德)으로 보았다.
그의 학풍은 뒤에 그의 문하생인 유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정구(鄭逑) 등에게 계승되어 영남학파(嶺南學派)를 이루었고, 이이(李珥)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기호학파(畿湖學派)와 대립, 동서 당쟁은 이 두 학파의 대립과도 관련되었으며 그의 학설은 임진왜란 후 일본에 소개되어 그곳 유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스스로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창설, 후진양성과 학문연구에 힘썼고 현실생활과 학문의 세계를 구분하여 끝까지 학자의 태도로 일관했다. 중종·명종·선조의 지극한 존경을 받았으며 시문은 물론 글씨에도 뛰어났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 및 선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단양(丹陽)의 단암서원(丹巖書院), 괴산의 화암서원(華巖書院), 예안의 도산서원 등 전국의 수십 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퇴계전서(退溪全書):修正天命圖說·聖學十圖·自省錄·朱書記疑·心經釋疑·宋季之明理學通錄·古鏡重磨方·朱子書節要·理學通錄·啓蒙傳疑·經書釋義·喪禮問答·戊辰封事·退溪書節要·四七續編》이 있고 작품으로는 시조에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글씨에 《퇴계필적(退溪筆迹)》이 있다. /naver
[ 771년] 경주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 완성 ← 성덕대왕신종(771), 국보 제29호, 높이 333cm, 입지름 227cm,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높이 333cm, 입지름 227cm. 봉덕사종 또는 에밀레종이라고도 한다. 원래 경주 봉덕사(奉德寺)에 있던 것을 영묘사(靈妙寺)로 옮겼다가, 1915년 8월 경주박물관으로 이전하여 전시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종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며 완전하게 한국종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종의 몸체에 새겨진 긴 명문에 의하면 신라 경덕왕이 아버지인 성덕왕의 공덕을 찬양하기 위하여 동(銅) 12만 근으로 주조를 시작했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자 아들인 혜공왕이 뜻을 받들어 771년(혜공왕 7)에 완성했다고 한다. 종의 꼭대기에 있는 용뉴(龍鈕)의 용은 사실적인 형태로 조각되었고 그 옆에 붙어 있는 음통(音筒)에는 화려한 보상화무늬가 3단으로 장식되어 있다. 어깨와 구연부에는 보상당초무늬가 장식된 문양대가 돌려졌고, 구연부의 끝부분이 모서리로 이루어졌는데 각 모서리마다 연꽃 한 송이씩을 배치하여 변화를 주고 있다. 어깨 밑에는 보상당초문양대가 장식된 유곽(乳廓)이 4곳에 배치되어 있고 그 안에는 연꽃 모양의 유두(乳頭)가 9개씩 조각되어 있다. 유곽 아래로는 서로 마주보고 있는 4구의 비천상과 연화 당좌(幢座) 2개를 교대로 배치했다. 비천상은 연화좌 위에 무릎을 꿇은 자세로 손에 향로를 들고 있으며 천의 자락과 보상화가 구름무늬처럼 생동감있게 표현되어 마치 천상의 세계를 나타내고 있는 것 같다. 이 종은 강원도 오대산 상원사동종(725)과 함께 통일신라시대 동종을 대표하며 8세기경 금속공예의 높은 수준을 알려주는 예이다. 원래 봉덕사에 걸었던 것을 1460년 영묘사에 옮겼다가 홍수로 절이 떠내려가고 종만 남았다고 한다. 1915년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고 1962년 국보 제29호로 지정됐다.
그밖에
2006년 서양화가 故 오지호화백 차남 오승윤 화백 투신자살
2006년 대원군 별장 63억, 유형문화재 26호 '석파정' 경매 통해 새 주인 맞아
2001년 엘살바도르 리히터 규모 7.6의 강진으로 1700여명 사망-실종
2000년 박태준 제32대 국무총리 취임
1994년 중동평화협정을 중재한 홀스트 노르웨이 외무장관 사망
1993년 화학무기의 전면금지를 위한 국제협정 조인식(파리)
1990년 윌더, 미국 역사상 첫번째 흑인 주지사로 취임
1986년 대입논술고사 첫 실시
1984년 문교부, 로마자 표기를 25년 만에 정자법에서 표음주의표기법으로 통일
1983년 동아건설, 원효대교 서울시에 헌납
1982년 미국 여객기 워싱턴포토맥강에 추락, 대참사
1981년 월탄 박종화 별세
1978년 미국의 제38대 부통령(1965-69) 험프리 사망
1971년 대구고등법원 판사들 자체정화운동
1969년 서독특별사절단 내한. 동백림 사건을 둘러싼 양국관계 협의
1969년 故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 삼성전자의 모태인 삼성전자공업주식회사 설립
1967년 토고 군부 무혈쿠데타, 육군참모총장 정권 장악
1964년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씨 별세
1964년 제3공화국 대법원장에 조진만씨 선출
1963년 토고 군사쿠데타, 올림피오대통령 피살
1962년 미국, 쿠바가 소련과 단교하지 않으면 국교와 통상을 단절하도록 중남미 제국에 제안 각서
1962년 문맹퇴치운동 실시
1958년 진보당 사건
1957년 유엔총회에서 통일한국 미국 결의안 가결
1957년 영국 맥밀런 내각 성립
1950년 유엔안전보장이사회, 자유중국 제명의 소련안 부결
1930년 영국의 전기공학자 페란티 사망
1929년 원산 부두노동자 총파업
1926년 영국과 이라크 우호조약 성립
1916년 멕시코 대통령을 지낸 독재자 빅토리아노 우에르타 사망
1915년 이탈리아 아베자노 대지진으로 3만명 사망
1910년 대한협회 등에서 국민대회연설회 개최, 합방반대 재천명
1908년 청나라,영국,독일,프랑스로부터 진포철도 차관 도입
1888년 미국지리학회 창립
1874년 러시아 군제개혁 후 징병제 실시
1627년 후금, 3만명의 병력으로 조선 침입 (정묘호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