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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을 몸담았던 정든 직장을 그만 두려고 결심한 가장의 심정은 몹시도 착잡하고 한 동안은 심한 우울증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 까지 나를 신뢰한 제자들에게 실망을 주지 않으려면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 봄방학 때 사표를 내는 것이 교사로서의 도리였다.
그래도 우리가족은 94년의 봄방학을 맞이하여 드넓은 바다를 보기 위해 수난의 섬 강화도를 향하고 있었다. 바다를 보고 싶어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듯이 방학 때면 나도 으레이 가족을 데리고 서울에서 가장 근거리에 있는 강화도로 달려가 바다를 초연히 바라보며 지나간 날들의 앙금을 씻어 버리고 희망찬 앞날을 설계한 후 다시 돌아오곤 하였다. 두 명의 자녀를 두어 어깨가 무거운 가장으로서 이제 며칠 뒤면 교직에 사표를 던지고 미지의 세계로 전환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니 그 절박함이 어찌나 가슴을 짓누르는지 경험해 보지 아니한 사람은 그 아픔을 아마도 실감하지 못할 일이다.
그래서 누구는 이렇게 말하지 아니했나 너가 내가 아니고 내가 너가 아니기에 너는 나에 대한 슬픔과 고뇌를 모른다. 설사 내가 너에게 나에 대한 아픔과 고통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너는 내가 느끼고 절망하는 것에 10분의 1이 아니 100분의 1도 이해할 수 없기에 우린 영원히 스쳐 가는 타인일 수밖에 없노라고 하여 나를 더욱 외로움 속에 젖어 들게 하였다.
94년의 봄방학은 나에게 있어서 삭풍이 부는 겨울의 벌판보다 더 춥고 견디기 힘겨웠다. 몇 번이나 강화도를 다녀오는 도중에 들리려다가 시간이 여의치 않아 오르지 못하고 되돌아서야 했던 아쉬움의 여운이 함께 한 애기봉이었다. 그 봉우리의 팻말이 불현듯 눈가를 스쳐 그 순간 급하게 핸들을 돌렸고 그래서 북녘 하늘을 가장 근접거리에서 관람할 수 있는 기회를 접할 수 있었다. 내일이라도 당장 사표를 던질 것 같은 비감에 사로잡힌 나로서는 분단된 조국의 산봉우리에서 깊은 상념에 젖은 서글픈 눈망울로 북녘 하늘을 향해 그늘진 시선을 띄울 수밖에 없었다. 가족과 더불어 봉우리 주위를 둘러보던 중 아침 햇살에 빛나는 시비가 있어 무심히 바라보니 “조강물이 남북을 꽤뚫어 민족의 한을 껴안고 띠같이 흐르며 여기 한강을 가로질러 선 없는 금을 그어놓았다. 누구의 짓이냐 피는 강물보다 진하다. 민족은 하나요 둘이 아니다. 여기 애기봉을 보라. 사랑하는 이를 잃고 일편단심 북녘 하늘을 바라보다 통곡하다 죽었네. 병자호란 때 일이다.
오늘날 온 겨레의 상심과 같다 라며 끝나는 시를 읽은 순간 둔탁한 도구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울컥 가슴이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 나는 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하였는가. ROTC 16기로 국방부 장학금을 받아 육군 대위로 제대를 하였지만 과연 목숨을 다하여 군복무를 했던가, 아쉬움을 남긴 채 제대를 한 후 어렵사리 교사가 되었지만 내 자신이 과연 혼신의 힘으로 제자들을 가르쳤는가를 깊이 반성해 보았을 때 그렇치 않았음을 쉽게 깨달을 수 있었다.
다른 한편 지난날을 신중히 생각해 보니 삶의 무게가 힘겨워 조국과 제자를 등 뒤로하고 자신의 영달과 안락을 위해 교직을 떠나 피안의 세계로 도피하려 하는 나를 발견하고는 그 비굴한 나의 행동에 가슴을 쳐야했다.
그런 나의 고뇌를 모르는 아내와 애들은 신선한 봄바람에 젖어 마냥 즐거워하고 있었지만 나는 애기봉에서 분단된 나의 조국을 생각하며 굳은 결심을 하게 되었다. 어차피 죽어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야 할 인간의 기구한 운명적 삶이라면 그래도 대의명분을 갖고 조국적 차원에서 헌신하다가 찬란한 불꽃처럼 사라지는 것이 인간 된 도리라고 나의 생각을 굳혔다.
애기봉을 내려와 강화도로 가기 위해 다시 차에 오른 후 모처럼 창 밖 풍경에 사로잡힌 아내에게 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한마디를 건넸다. 개학이 며칠 안 남았는데 나에게도 할 일이 있고 하니 당신이 나를 한 시간만 더 일찍 출근을 시켜 주었으면 하노라고 말을 하자 아내는 예기치 못한 말에 충격을 받았는지 한가하게 창 밖을 주시하던 시선을 나에게 돌리며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되묻는 것이었다. 더 이상 이유는 묻지 말고 나는 그렇게만 해주면 고맙게 생각하겠노라 했다.
어느 시인은 조국을 어머니라 불렀다는데 그렇다면 나의 조국 나의 어머니는 40 여 년 전 불의에 사고로 허리를 심하게 다쳐 반신불수의 비참한 모습으로 신음하며 누웠거늘 불쌍한 나의 어머니가 중병에 걸려 이웃에게 조롱 당하고 있었는데도 그래도 명색이 아들인 내가 어머니를 위해 무슨 일을 제대로 하였는가. 생명을 걸고 서라도 약을 구해 다 드렸어야 아들의 도리 아닌가. 사표를 던져야 할 그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었겠지만 어찌 나는 나의 조국 나의 어머니를 외면하기 위해 교직을 떠나려하였는가.
역사적 차원에서 교육은 백년대계라 하여 한 알의 밀알이 흙에 묻혀 처절히 썩어져야만 수많은 알곡을 거두어들이지 않던가. 지난날 내 자신이 교사로서 어린 영혼들을 위하여 혼신의 힘으로 가르치고 보살피지 못한 회한들이 나를 못 견디게 하였다. 먼 훗날 나의 삶을 정리했을 때 후회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 정신을 가다듬어야 했다.
애기봉을 내려온 이후 줄 곳 수심이 잠긴 나는 강화도 외곽 한적한 바닷가에 차를 세워놓고 가족과 떨어져 쓸쓸히 모래밭을 거닐며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고 수없이 다짐을 했다.
94년 3월 어김없이 개학은 다가왔고 내 자신과 애기봉에서 약속한대로 1시간 일찍 출근해 보니 몇 분의 선생님이 이미 나오셔서 업무를 보고 계셨다. 그 중에 어떤 분이 가장 먼저 나오시나 하고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더니 교감 선생님께서 7시에 나오셔서 손수 샷타를 올리시고 교무실 창문을 열어 밤사이 밀폐된 공간에 환기를 시킨 후 난로마다 불을 지피시는데 이순을 눈앞에 둔 교감 선생님이 일찍 나오셔서 학교를 위해 지금까지 헌신하셨다면 젊은 교사인 나로서는 부끄러운 일이며 이제 그 일은 나의 몫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6시 30분에 출근해 보니 현관 앞에 여러 명의 학생들이 들어가지 못하고 서성이고 있어 그 이유를 물어보니 열쇠가 없어 문밖에 서서 있다고들 하였다. 나는 열쇠가 수위실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곳으로 달려가 열쇠를 찾아 문을 열고 들어갈 수가 있었다. 그제 서야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인식하여 학교에 학생 한 명이라도 등교해 있다면 교사 한 사람도 필히 출근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교무수첩 첫 장에 내가 나의 조국을 위해 한시간 더 일하는 것이 억울하다고 하면 나는 내 자신에게 더 이상 할말이 없다라는 각오의 글을 써놓고 신념이 흐려질 때마다 들여다보곤 하였다. 이제 단 한 명의 학생이라도 일찍 와서 추위에 몸을 움츠리고 애타게 선생님을 기다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을 하니 나의 출근시간은 6시로 해야만 했다.
새벽의 찬 공기를 가르며 북한산 기슭을 넘어 의정부로 향할 때 나는 비열한 하이에나보다는 산정높이 올라가 차라리 굶어서 얼어죽어야 하는 눈 덮인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연상하며 의지가 꺾일까봐 불끈 주먹을 쥐고 학교로 달려가야만 했다.
바쁜 꿀벌은 슬픔을 생각할 여유도 허락 치 않는다는 말처럼 그땐 정말 힘이 드는지 조차도 모르게 하루를 시작하고 저녁 노을을 맞이해야 했다.
인간은 마음을 어떻게 갖느냐에 따라 가치가 변화하듯이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행동은 초인간적인 힘을 발휘한다고 본다. 그 당시 나의 일과는 새벽 5시에 기상하여 식사를 마친 후 30분 이내에 집에서 출발해야 6시까지 학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수위실에서 열쇠를 받아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창문들을 열어 환기를 시킨 후 난로에 불을 지펴 따뜻하게 실내온도를 유지하고 선생님들이 종일 드셔야 할 물을 떠왔다. 그 다음 등교하는 학생들의 복장과 실내화를 점검하다가 7시40분이 되면 1,2학년 자율학습을 지도한 후 8시40분쯤 교무실로 내려와 직원조회에 참석하는 것이 나의 아침일과였다. 그 가운데 교사로서 해야할 일을 찾아보니 어려움에 처한 학생들이 눈에 띄었고 결손가정의 욕구 불만으로 하여 문제아가 된 학생들을 돌보아줘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렵사리 돌보아 준 학생들이 졸업을 해서 나에게 고맙다며 쓴 한 통의 편지를 받아들었을 때 교사로서 가장 기쁜 보람이라 여겨진다.
3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먼지 자욱한 복도에서 1시간이상 서서 자율학습을 지도하려니 피가 아래로 몰려 다리가 붓고 아프기까지 했다. 지금도 나는 아직까지 부기가 가시지 않은 다리를 어루만지며 지난날을 아련히 생각하며 회상해본다. 간혹 선생님이 곤경에 처했을 때 나의 정직한 처신으로 하여 행동의 제재를 받아 곤욕스러웠으며 조직으로부터 소외되는 서러움이 가장 서글펏다.
교사는 교사다워야 하며 정직을 가장 우선해야 한다고 단언하고 싶다. 아직도 학부형을 등치는 교사가 있다면 그는 양심에 손을 얹고 스스로 교직을 떠날 것을 경고한다. 조국이라는 이름 하나만으로 그렇듯 헌신하다가 사립인 의정부 경민 중학교를 떠나 공립이 고양시 화정 중학교로 전출을 명 받아 왔다. 이곳에서도 분명 조국을 위해 할 일이 있으리라 믿어보며 아직도 낯설지만 적응하려 애를 쓰고 있다.
3년 전 봄방학 때 우연히 애기봉에 오른 것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어 오늘도 교사로서 최선을 다해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만약 그때 무모하게 사표를 던졌다면 지금 나는 무슨 일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기 그지없다.
잊혀진 교육학을 애써 떠올리면 군자에게 3가지의 즐거움이 있는데 천하의 영재를 얻어 가르치고 키우는 일이 그 하나라 하지 않았는가.
이제 글을 마치며 앞으로 어떠한 갈등과 좌절이 찾아온다 하더라도 나의 영토를 철저히 지킬 것이며 조국을 위하여 가장 먼저 출근하여 봉사하는 교사로 남고 싶다.
아울러 헌신적으로 사랑하는 정직한 교사가 될 것을 염원하며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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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도 따뜻한 하루...^_^
인간이 태어나 인생의 여로에서 강도를 만나 상처 입은 사람의 진정한 친구... 사마리아인이 한번 쯤은 되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젊은 날 폭풍우도 두려워 하지 않던 적토마가 소낙비에 기겁을 하는 늙은 노새가 되었습니다... 늘 고맙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