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쿠보 和子씨를 추억함
(湘南편지 261호, 2026.7)
반나이 무네오(坂內宗男)
1. 우리는 조후(調布)시의 물레회 동지였다. 그녀가 지난 6월 86세로 영면에 들었다.
2. 물레회는 1979년 11월에 결성한 모임이었다. 첫 번째 문화사업으로 창립 한 달 후, 12월 5일에 도쿄 조후시의 한 시설을 빌려 시내에 살고 있는, 고대사 연구자이신 이진희(李進熙) 선생을 모시고 기념강연회를 열었다. "고대의 조선과 일본 - 국가 형성의 시기를 둘러싼 문제"라는 주제였다. 그때 아직 유아였던 아들을 데리고 참가하였던 和子 씨를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강연회가 끝나고, 입회를 권유했더니 선선히 가입해 주었다. 이후, 물레회가 2020년 3월 해산하기까지 40여 년을 함께 희노애락을 같이한 동지로 지냈다.
3. 물레회는 재일 조선인의 인권 지킴이로써의 역할을 하고자 했다. 일본인, 재일 조선인, 재일 한국인이 모두 동등한 생활권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을 해 왔다.
4. 이 인권문제에는 역사적 갈등이 그 근본 원인이었다. 오래전 1910년, 일본 점령 아래 있었던 조선을 힘으로 병합했던 역사이다.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사람들을 일본인(내지인)에 비해 하위 국민으로 차별하였고, 전쟁터에 나간 일본 남성의 노동력를 보충하기 위해, 많은 조선인을 일본으로 무차별 강제 연행을 단행, 탄광이나 댐 건설 등 가혹한 육체노동에 몰아넣었다. 우리가 패전하던 때에는 그 인원이 거의 200만에 달했다고 한다.
그런데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 조국이 남북으로 분단되는 바람에 귀국하지 못한 사람들과 남북한 사상적 분열로 인해 귀국을 포기한 사람들이 조선인 부락를 이루어 살았다. 하지만 그들은 무수한 차별을 견뎌야 했다. 일본인이 하지 않는 하등 일자리로 생활을 겨우겨우 꾸려나가는 형편이었다.
우리는 그들 45만의 정착생활과 후손의 인권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한 것이다.
5. 그들은 주로 관서지방, 오사카에 거주하였는데, 제주도 출신이 중심이었다. 관동지방에서는 가장 인원이 많았던 곳이 조후(調布)시였다. 조후시의 조선사람들은 관동대지진의 피해를 재건하기 위해 다마천의 모래를 채취하는 등 힘든 노동을 견디며 가족을 지킨 사람들이었다. 물레회가 활동하던 80년대부터는 인권의식 성장, 생활수준 향상 등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물레회 활동은 내 인생에 아주 큰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인권에 대한 진보적 생각을 키워주었다.
6. 오랜 동지였던 和子 씨의 가족에게 애도의 마음을 표하고 싶다.(신주쿠집회 소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