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나들이
삼월 둘째 주 토요일이었다. 봄이 오는 길목 근교 산자락에 올라 숲속을 거닐어 보고 싶었다만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초등학교 여자 동기생의 아들이 결혼한다기에 하객으로 가야 했다. 신랑 일터는 창원공단인 것으로 아는데 부산에서 예식을 올렸다. 동기는 진주에 살고 있다만 새 식구를 맞는 며느리가 부산 사람인 모양이었다. 나는 창원에서 사는 다른 친구 차편에 동승하여 부산으로 갔다.
명서동에 사는 친구는 우리 아파트 앞으로 차를 몰아왔다. 평소는 넥타이를 매지 않은 경우가 많다만 이런 날은 정장을 차려 입었다. 나는 출퇴근 때 걸어 다니기에 구두를 신지 않고 운동화를 신는다만 모처럼 구두까지 꺼내 신었다. 나는 창원 친구 차에 동승하려고 약속 장소에 기다렸다. 친구는 정한 시각보다 십여 분 지난 후 차를 몰아왔다. 나는 인사를 나누고 운전석 곁 동반석에 앉았다.
성주동 사거리까지 소통이 원활했다. 창원터널 입구에서 차량들은 서서히 진행했다. 새로 뚫은 불모산터널은 차량이 한산하고 시원스레 달렸다. 우리는 시간 여유를 갖고 나섰기에 예식 시각에 쫓기지는 않았다. 터널 입구 차량 진행이 더딘 것은 갓길 공사 때문이었다. 터널을 빠져 나가 남해고속도로 지선을 달렸다. 장유에서 부산은 가까운 거리였다. 서부산에서 낙동강을 건너니 사상이었다.
사상은 올봄 총선에서 전국적으로 주목을 받는 선거구다. 올 연말 있을 대선에서 야권의 유력한 대통령후보감이 국회의원후보로 나선 곳이다. 여권에서는 무명의 이십대 처녀를 공천했다. 아버지는 트럭 운전수고 어머니는 보험설계사로 지역에서 초중고를 나와 대학만 서울에서 다녔고 다시 귀향한 사회초년생이다. 총선까지 불과 한 달 남짓 남았는데 민심의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자못 궁금하다.
시내 거리 담벼락 곳곳에는 총선에 나서려는 예비후보들이 내건 현수막들이 내걸렸다. 그들은 제각기 자신이 지역발전을 위한 진정한 대변자라고 홍보했다. 같은 부산이라도 서부권이 동부권보다 삶의 질이 낙후된 곳이다. 선량이 서민들의 고달픈 나날을 다독여주고 생활수준을 높여주었으면 했다.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에 차창 밖으로 보이는 여러 인물들의 현수막을 보면서 떠오른 생각이었다.
우리가 가는 예식장은 부산진 서면 근처 예식장이었다. 동기생 혼주는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하객을 맞고 있었다. 처음 보는 동기의 부군하고도 인사를 나누었다. 예식장에는 가족 말고도 고향 의령 동기생들이 많이 와 주었다. 비닐하우스에서 수박농사를 짓는 친구도 있고 읍내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친구도 있다. 모두들 바쁠 텐데 동기생의 아들 결혼식에 기꺼이 틈을 내어 부산까지 와 주었다.
부산이나 김해에 터 잡고 살고 있는 친구들도 더러 나왔다. 서울에 사는 동기생도 세 명이나 내려왔다. 주례가 연단에 오르자 신랑에 이어 친정아버지 손을 잡고 입장한 신부는 신랑과 나란히 들어섰다. 예식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초등학교 친구들은 점심 식사 자리를 찾았다. 우리는 혼주가 마련한 뷔페를 마다하고 바깥으로 나왔다. 모처럼 만났으니 해운대나 자갈치로 가자는 친구도 있었다.
동기생들 숫자가 많다보니 멀리 이동하기는 교통편이 복잡할 듯하였다. 누군가 인근 시장에 모두 앉을만한 식당이 있는지 알아보러 떠났다. 선발대로 간 친구가 시장골목에 있는 횟집을 정해 놓고 나머지 친구들을 불러 모았다. 함께 자리한 남녀 동기생은 스물여덟 명이었다. 한 방에 다 앉지 못하고 두 방에 나누어 들어갔다. 우리들은 생선회가 나오기 전 밑반찬으로 소주잔이 몇 순배 돌렸다.
남녀 동기생들은 잔을 채우고 비워가며 도란도란 나눌 얘기가 많았다. 부모님은 작고했지만 고향 마을 소식을 물어보고 어렸을 적 소 먹이던 시절로 돌아갔다. 새미꼬가 어디였고 딱박골이 어디였는가도 어슴푸레한 기억을 떠올렸다. 예식장 하객으로 와서 초등학교 임시 동창회를 열었던 셈이었다. 횟집에서 점심 자리를 끝내고 나오니 노래연습장을 찾는 친구들도 있었다만 나는 귀가를 서둘렀다. 12.0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