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 22:31~40)
<본문 요약>
발람이 잠시 유혹에 빠져 행동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이 눈을 밝히시자 거기에 순종한다.
오고 가는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맡기는데,
하나님은 발락에게 가라고 하셔서 순종하고
발락에게 가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만 할 수 있다고 전한다.
<적용점>
1. “잠시 유혹 안에 있어도 돌이키면 된다.”
온전하고 견고하면 최상이지만 죄악된 인간이 그러기란
현실에서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실존에서는 최상을
망쳤다고 해서 ‘포기’해서는 안 된다. 심각한 교만이다.
그때는 차선을 부여잡아야 한다.
(물론 최상의 자리를 그리워하고 회개하며 걸어가는 긴장감은
있어야 한다.) 그것이 분투이다.
물론 고의적이고 과도하게 반복되는 최상의 포기를 제외하곤 말이다.
그렇다면 ‘차선은 새로운 최선이다!’
발람의 돌이킴은 그래서 안도감을 준다.
2. “발람의 눈을 여셨다는 것은 무엇일까?”
여기서 사람으로는 측정이 불가능한 하나님의 은혜를 느낀다.
사람의 노력이나 결정의 수준이 넘는.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까?
아무튼 당연하지만,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되는 하나님의 지경을
조금이나마 맛보게 되는 대목이다. 나의 선택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영험하고 깊은 그 지경, 하나님의 은혜에 강하게 설득된다.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순간,
말은 곧 침묵으로 이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말이 닿을 수 없는 분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지점은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경외감 속에서 받아들여져야 할 자리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인식 너머에서
조용히 역사하고, 깊이 설득한다.”
“이해가 아니라 머무름의 주제”
3. “나귀 등 타자 또는 주변의 역할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내가 ‘직면’해야 할 부분이 결정적이라해서
타자가 나에게 미치는 영향, 내가 타자에게 미치는 영향을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된다. 나귀의 행동이 분명 중요한 역할을 했다.
불쏘시개처럼 역사의 발단이 되었다. 그 힘을 소중하고 중대하게
여기는 것이 맞다. 그렇기 때문에(또는 그래야만) 타자를 향한 우리의 사랑과
봉사, 헌신이 매우 의미 있으며 우리가 세상에 존재하는
중대한 이유가 된다.
4. “발락과 같은 세상의 세속적 친절에 주의”
발락이 매우 친절한 모습과 태도이며 융숭한 대접을 한다.
세상과 세속은 항상 이렇다. 대접받는 이는 발람이지만
실제는 자기 자신을 향한 행동이다. 그리고 그 행위는 기만이다.
결코 발람을 위한 행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깨어있지 않으면
그런 trick에 얼토당토하지 않게 빠져드는 것이 약한 인간이다.
(모든 친절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님. 분별이 필요하다. 영적 민감성으로)
<적용>
요즘 인간의 자유, 결정권, 선택권에 집중해서 사유하고 있지만
분명 그런 것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존재함을 명심하자.
내가 설명 불가능한 영험한 하나님의 개입이 분명 있다. 나의 선택권,
자유가 의미를 가지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설명 못한 초월적 은혜가
우주에서 나에게 작용함으로써 나는 돌이킬 수 있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게 된다는 점을 명심하자.
자꾸 넘어지고 죄를 저지른다. 고의적 / 상투적인 것은 다른 문제이지만
기본적으로 그런 나에게 너무 심한 질책으로 낙망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않고 그 상황에서의 최선을 다하도록 하자. 지금은 나의 상습적
죄성이 문제인데,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조금이라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어떤 행동이라도 하자.
나의 작은 행동이 타자 누군가에게는 복음에 순응하는 큰 역할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하고 타자를 위한 복음적 사랑을 전파하는 일을 지속하자.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이생에서의 지상명령이다.
<오늘의 명언>
주님의 능력을 체험한 사람은 이전의 가치를 좇아 동일한 죄 가운데 거해서는
안 된다. -엘리자베스 악트마이어-
“하나님, 어제와 오늘 학교에서의 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진리이신 하나님의 뜻을 제 생각과 삶에 반영하는 것이
이렇게 더딜 수가 없습니다. 제 알량한 마음의 중심을 보는 것 같아
죄송하고 또 죄송스럽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 포기하거나 하는 일이
저에게 절대 없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주님만 의지하겠습니다.
포기하는 것은 교만의 극치입니다. 타자를, 이웃을... 그것의 집단인
공동체를 하나님의 마음으로 품을 수 있게 하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