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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하늘 원문보기 글쓴이: 진란
[200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추운 바람을 신으로 모신 자들의 經典
이은규
어느 날부터 그들은
바람을 신으로 여기게 되었다
바람은 형상을 거부하므로 우상이 아니다
떠도는 피의 이름, 유목
그 이름에는 바람을 찢고 날아야 하는
새의 고단한 깃털 하나가 흩날리고 있을 것 같다
유목민이 되지 못한 그는
작은 침대를 초원으로 생각했는지 모른다
건기의 초원에 바람만이 자라고 있는 것처럼
그의 생은 건기를 맞아 바람 맞는 일이
혹은 바람을 동경하는 일이, 일이 될 참이었다
피가 흐른다는 것은
불구의 기억들이 몸 안의 길을 따라 떠돈다는 것
이미 유목의 피는 멈출 수 없다는 끝을 가진다
오늘밤도 베개를 베지 않고 잠이 든 그
유목민들은 멀리서의 말발굽 소리를 듣기 위해
잠을 잘 때도 땅에 귀를 댄 채로 잠이 든다지
생각난 듯 바람의 목소리만 길게 울린다지
말발굽 소리는 길 위에 잠시 머무는 집마저
허물고 말겠다는 불편한 소식을 싣고 온다지
그러나 침대위의 영혼에게 종종 닿는 소식이란
불편이 끝내 불구의 기억이 되었다는
몹쓸 예감의 확인일 때가 많았다
밤, 추운 바람을 신으로 모신 자들의 經典은
바람의 낮은 목소리만이 읊을 수 있다
동경하는 것을 닮아갈 때
피는 그 쪽으로 흐르고 그 쪽으로 떠돈다
地名을 잊는다, 한 점 바람
[당선소감]
최초의 시는 시의 몸으로 찾아오지 않았다. 시가 아닌 것에서 시의 속살을 만나다니, 새삼 逆(역)은 眞(진)이 아닐 수 없다.
열두 살의 아이는 어느 날 고분의 등잔 사진을 보게 된다. 복숭아모양의 등잔을 보는 순간 몸 안의 혈액들이 출렁, 그 후 어두운 무덤 내부가 등잔 빛에 환히 열리는 환영에 시달리며 혹시, 저것은 시가 아닐까 자문하는 날이 길었다. 시를 알기 전 시적인 것에 생의 운율이 출렁이다니.
영혼의 심지에 불을 놓았을 어느 손길. 불빛으로 한 생의 삶의 폭을 넓히겠다는 기원과, 한기에 영영 얼지 말라며 다독였을 시정(詩情)이 거기 있다. 마음속으로 간절한 주문을 외웠겠지. 그 주문은 언어이면서 언어의 배후. 침묵은 언어의 배후로 알맞지, 꽃의 배후가 허공인 것처럼.
누군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했지만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해야 하는 시는 무엇인가. 새삼 逆(역)은 眞(진)이 아닐 수 없다.
늘 존재 자체로 시이신 고재종 선생님과 광주대 문예창작과 교수님들, 객지에서의 새움을 틔우는데 도움을 주신 박해람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가족들과 바람으로라도 가닿고 싶은 정처(定處)에게 마음을 전한다. 끝으로 심사위원들 그리고 나의 나와 도약의 지점에 대한 약속을 맺는다. 머리맡에 시를 두고 자는 밤이 길 것이다. 그 밤들을 생이 함께 지새워줄 것.
이 은 규
△1978년 서울 출생
△광주대 문예창작과 및 동대학원 졸업
△2006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심사평]
예심을 통과한 15명 투고자들의 작품을 읽고 검토한 결과 두 명의 작품이 최종적으로 남게 되었다.
‘무릎’ 등 5편의 작품을 투고한 조율의 경우 일상적 삶의 구체성에 바탕을 둔 치밀한 관찰과 묘사가 눈길을 끌었다. 그의 시는 감상이나 과장을 멀리한 채 삶의 신산함과 남루함을 적절하게 포착해내고 있다. 그러나 이 투고자의 시적 발상이나 화법은 새롭다기보다는 기존의 유형화된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한계를 갖고 있었다. 또 시를 떠받치는 인식이 아무래도 소품 지향적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반면 ‘추운 바람을 신으로 모신 자들의 經典(경전)’ 등 5편을 투고한 이은규의 경우 일상에서 시를 출발시키기보다는 관념에서 시를 끌어오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추상적 경향을 띠고 있다. 그럼에도 그의 시는 작품을 관류하는 활달한 상상력 덕분에 요즘 시에서 보기 힘든 탁 트인 느낌과 더불어 세련된 이미지와 진술의 어울림이 주는 감흥을 맛볼 수 있었다. 잠언풍의 시는 자칫하면 시적 긴장을 이완시킬 수 있는데 그는 이런 함정을 잘 피해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두 선자는 이번 심사에서 일상의 세목에 대한 충실보다는 ‘바람을 동경하는’ ‘유목의 피’에 잠재된 가능성을 믿어보기로 했다. 당선자의 시가 한국시의 비좁은 영토를 열어젖히고 나아가는 언어의 모험으로 연결되기를 희망한다.
이시영(시인) 남진우(시인·문학평론가)
(예심 박형준 김선우)
2008 [한국일보 신춘문예]
차창밖, 풍경 빈곳
정은기
철길은 열려진 지퍼처럼 놓여있다, 양 옆으로
새벽마다 물안개를 뱉어내는 호수와
<시골밥상>이니 <대청마루>니 하는 간판의 가든촌이
연대가 다른 지층처럼 어긋나 있다
등 뒤로 떨어지는 태양이 그림자로 가리키는 북동의 방향으로
질주하는 춘천행 무궁화호 열차
지퍼를 채우듯 튿어진 자리를 꿰매며 달려가는 것은 열차의 속도였다
기차의 머리가 향하는 방향을 보여주는 것은 긴장을 잃고 곡선으로 휘어지는 구간에서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곳에 자리를 튼 마을이 호수에 기대어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 <가정식 백반>의 가정을 찾아 속도에 몸을 싣고 거꾸로 달린다
이곳에서는 두고 온 먼 곳의 시간을 추억하는 일도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풍경을 관람하기 위해 돈을 지불하고
박물관을 찾는 일만큼이나 자본주의적이다
직선의 끝에는 목적지가 있어
마을은 머지않아 먼지의 전시관이 될 것이다
곁길로 샐 수 없는 것이 슬프다는 것을 호수는 알고 있을까
튿어진 굴곡을 따라 살을 드러낸 풍경의 허리를 휘감고
돌아가는 기차, 가끔씩 창밖으로
활처럼 휘어지는 기차의 곡선을 본다면
퇴락을 거듭하는 호숫가 옆, 한 마을이 생각날 것이다
■ 인터뷰-"가만히 방향의 이정표되는 작품 쓰고 싶어"
정은기(28)씨의 시작(詩作)은 문학보단 여성에 대한 선망으로 시작됐다. 남자 중학교를 졸업하고 남녀공학 고등학교에 진학한 정씨는 여학생과 자연스레 어울릴 수 있을 것 같아 문예반에 가입했다.
착각이었다. 남자반은 여자 선배, 여자반은 남자 선배의 지도로 엄격한 합평회가 열렸다. 살가운 이성교제는 물 건너갔지만,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은 새록새록했다. “글 잘 쓴다는 칭찬에 매료됐다. ‘공부 잘한다’ 같은 칭찬과는 달랐다. 칭찬 받고 싶어 시를 썼다. 나아가 내가 쓴 작품을 남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이후 정씨에게 세계의 중심은 시(詩)가 됐다. 무슨 일을 선택하든 글을 쓰는 일과 연관지었다. 대학 전공은 어문학과를 택했고, 문학회, 독서토론회, 학보사 등 글쓰기와 관련된 동아리를 찾아 몸담았다. 처음 들어간 학교와 편입한 학교 모두에서 학보사 공모 문학상에 당선됐다.
대학원에 진학해선 ‘문예창작단’이란 이름의 정예 스터디 그룹에서 창작 공부에 매진해왔다. 비슷한 사람들끼리 어울리다보니 정씨의 일상은 문학으로 고취되고 독려받는 일의 연속이다. “시는 사람이 표현할 수 있는 문장의 정점”이라고 평한 그는 “시 쓰는 사람들이 종종 드러내는 오만하리만치 대단한 우월감은 부정적으로 볼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정씨는 최근 2, 3년간 가장 돋보이는 ‘예비 작가’였다. 신춘문예나 신인문학상 최종심 후보에 이름을 올린 것도 여러 차례. 그는 “등단 안해도 열심히 쓰면 된다고 하다가도 12월만 되면 (신춘문예 당선에) 집착하게 되는 마음을 다잡는 일이 쉽지 않았다”며 그간의 심적 부담을 토로했다. 아울러 문청이라면 누구나 희망하는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하게 돼 더없이 기쁘다고 말했다.
‘나만의 습작법’으로 정씨는 ‘연작시 쓰기’를 소개했다. 한 사물에 대해 구체적 묘사에서 추상적 의미화로 단계를 옮겨가며 연작시를 쓰는 것이다. 정씨는 상투적 의미가 많이 부여돼 있지 않은 소재를 찾아 100여 개의 시를 써보는 훈련이 필력을 키우는데 보탬이 됐다고 말했다. 휴대폰 녹음이나 문자 기능을 이용해 시상이 떠오를 때마다 메모해 둔다는 정씨는 “이쪽으로 가라고 외치기보단 가만히 서서 방향의 이정표가 될 수 있는, 그런 작품을 쓰고 싶다”고 말했다.
■ 당선소감
-"내속에 들끓었던 고민과 갈등에 위안"
오래전부터 책을 읽을 때면 나는 저자의 약력부터 살피는 습관이 있었다. 그리고 책의 가장 처음에서 남들과 다른 특별한 이력 한두 개쯤 발견하고 나면 어떤 특별함도 없는 나의 이력을 지리멸렬한 것으로 치부해버리곤 했다. 시의 문장은 어떤 비기와도 같은 천재성과 결부되어 있다고 믿었었고 조용히 우리 가족의 기원을 의심해보기도 했었다. 나는 왜 천재가 아닌가하는 치기어린 열등감이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부터 나는 가족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내가 받은 사랑을 나누는 방법을 배우지 못해 늘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 서툴렀다. 때문에 너무 쉽게 타인의 상처에 이름을 붙이고 긍정하려했고 뒷전에 물러나서는 슬플 것 없는 내 삶에 대해 불평하기도 했다. 매우 어리석었다.
계속되는 낙선의 고배를 마시는 동안 나에게 특별한 재능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시는 특별한 이력이나 천재성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배우게 되었다. 나는 오히려 평범한 내 삶과 무거운 엉덩이와 큰 머리, 굵은 손가락,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한 무대뽀식의 내 젊음을 사랑하게 되었다. 이제 한자리에 끝까지 앉아서 오랫동안 응시하고 무겁고 육중한 시를 쓰는 일이 내 체질에 어울린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당선소식을 전해 들었던 지난 밤, 아직은 설익은 작품으로 당선된 것에 대해 내 속에서 들끓었던 많은 고민과 갈등에 작은 위안을 삼고자 한다. 무엇보다 부족한 작품에서 가능성을 보아주신 심사위원분들께 꾸준하게 오래도록 쓰겠다는 다짐으로 감사드린다. 참된 삶으로 이끄는 시를 쓰도록 격려해주신 김재홍 교수님과 게으름과 나태에 끊임없이 죽비를 내려주시던 박주택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늘 애정을 가지고 시를 보아준 思詩美의 호남형, 학중형 그들보다 먼저 이름을 걸게 되어 미안하다. 경희문예창작단에서 함께 시를 쓰고 있는 재범형, 경섭이, 은지, 규진이 그리고 많은 선후배들, 사랑한다. 아직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 서툴지만 그들에게 하나둘 배우고 있어 매우 소중한 친구들이다.
그리고 당선 소식에 눈물로 축하해주신 우리 김복순 여사님과 아버지 정채용씨, 동생 다금이, 사랑합니다.
●정은기(鄭恩技)
-1979년 충북 괴산 출생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및 동대학원 석사과정
■ 심사평
-"언어적 감수성·말걸기의 새로움 번뜩"
시 부문 심사를 맡은 이문재, 정호승, 이숭원
시는 말 걸기다. 시적 대상에게 말 걸기. 하지만 여기에서 그친다면 아직 시가 아니다. 시적 대상에게 말을 건다는 것은 결국 독자에게 말을 건다는 것이다. 시는 대화다. 그러니 시적 대상과의 대화가 만족스럽지 않다면, 독자와의 대화는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수많은 응모작 가운데 한 작품, 즉 새로운 시인을 가려내는 과정은 곧 개성적인 대화 능력을 선별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심사위원들이 최종적으로 여섯 편의 응모작을 논의 대상으로 삼았다. 홍종화의 <투명한 돌밭>, 신희진의 <온난화>, 임재정의 <나를 겨누다>, 임경섭의 <자동판매 김대리>, 박은지의 <뿔의 냄새>, 정은기의 <차창 밖, 풍경의 빈 곳>. 이 가운데 먼저 네 편을 제외할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투명한 돌밭>은 비유와 묘사가 탁월했지만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지 못했고, <온난화>는 구성과 전개가 자연스러웠으나 결말이 어색했다. <나를 겨누다>는 단단한 기본기가 눈길을 끌었지만 애인과의 이별과 사과를 깎는 행위가 작위적으로 보였다. <자동판매 김대리> 역시 시적 주체의 행위가 개연성을 갖지 못했다.
남은 두 작품은 박은지의 <뿔의 냄새>와 정은기의 <차창 밖, 풍경의 빈 곳>. 삶을 바라보는 시선은 박은지의 작품이 성숙했지만, 표현의 차원에서는 정은기의 작품이 뛰어났다. 결말 처리는 박은지가 우수했고, 도입부는 정은기가 참신했다. 두 응모작은 상호 보완 관계에 있었다. 심사위원들은 고심 끝에 정은기의 언어적 감수성에 점수를 주기로 했다. 시적 대상에게 말을 거는 방식의 새로움이 독자와의 신선한 대화로 이어진 것이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내는 동시에 최종심에 오른 다섯 분들의 분발을 기대한다. 부디 출발 시점에 연연해하지 말고, 길게 보시기 바란다. 10년, 20년 뒤 누가 더 좋은 시를 쓸 것인지는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심사위원=정호승(시인) 이숭원(문학평론가ㆍ서울여대 교수), 이문재(시인)
<2008 문화일보 신춘문예-시>
하모니카 부는 오빠
문정
오빠의 자취방 앞에는 내 앞가슴처럼
부풀어 오른 사철나무가 한그루 있고
그 아래에는 평상이 있고 평상 위에서는 오빠가
가끔 혼자 하모니카를 불죠
나는 비행기의 창문들을 생각하죠, 하모니카의 구멍들마다에는
설레는 숨결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죠
이륙하듯 검붉은 입술로 오빠가 하모니카를 불면
내 심장은 빠개질 듯 붉어지죠
그때마다 나는 캄보디아를 생각하죠
양은 밥그릇처럼 쪼그라들었다 죽 펴지는 듯한
캄보디아 지도를 생각하죠, 멀어서 작고
붉은 사람들이 사는 나라, 오빠는 하모니카를 불다가
난기류에 발목 잡힌 비행기처럼 덜컹거리는 발음으로
말해주었지요, 태어난 고향에 대해,
그곳 야자수 잎사귀에 쌓이는 기다란 달빛에 대해,
스퉁트랭, 캄퐁참, 콩퐁솜 등 울퉁불퉁 돋아나는 지명에 대해,
오빠의 등에 삐뚤빼뚤 눈초리와 입술들을
붙여놓은 담장 안쪽 사람들은 모르죠
오빠의 하모니카 소리가 바람처럼
나를 훅 뚫고 지나간다는 것도 모르죠
검은 줄무늬 교복치마가 펄렁, 하고 젖혀지는 것도
영원히 나 혼자만 알죠
하모니카 소리가 새어나오는
그 구멍들 속으로 시집가고 싶은 별들이
밤이면 우리 집 평상 위에 뜨죠
오빠가 공장에서 철야작업 하는 동안
별들도 나처럼 자지 않고 그냥 철야를 하죠
<시 당선소감>
몇년 동안 안고 산 詩의 그늘 걷혀
짙은 안개 속으로 출근을 합니다. 햇살은 아직 산속에서 종종거리고 있습니다. 안개에 어둠이 잔뜩 물려 있습니다. 길이 보이지 않아 갑갑하기도 무섭기도 합니다. 나는 앞차의 엉덩이에 헤드라이트를 비추며 안개 속으로 점점 깊숙이 들어갑니다. 안개가 쉽게 걷힐 것 같지 않습니다.
3교시 수업 끝내고 쉬는 시간 불현듯 전화를 받습니다. 사방의 안개가 걷힙니다 몇 년 동안 꼭 안고 살아온 시의 그늘도 걷힙니다. 나는 벌판에 전신주처럼 서 있습니다. 이곳저곳으로 열심히 당선소식을 퍼 나릅니다. 흥성거리는 햇살이 벌판에 가득 차올라 있습니다.
금방 사연이 바짝 말라버립니다. 나는 홀로 두리번두리번, 꼼짝없이 벌판에 붙박여 있습니다. 알알이 드러난 내 몸뚱이를 내려다봅니다. 부끄럽습니다. 다시 어딘가로 숨고 싶습니다. 내일이면 밤이 제일 길다는 동지, 내 몸뚱이 가려줄 어둠 한 폭 정도는 여유가 있겠지요.
먼저 부족한 시를 선뜻 뽑아, 시의 꽁무니에 불을 붙여주신 오세영 선생님, 정호승 선생님 고맙습니다.
허락도 없이 시의 소재로 차용한 이 땅의 그늘 깊은 사람들께도 고마운 마음 전합니다. 땅만큼이나 따뜻한 마음으로 시를 채찍질해주던 여러 스승들과 친구들에게도, 고집불통 글쟁이 남편 때문에 내내 마음에 바람만 안고 살아가는 아내에게도, 올망졸망 예쁘고 순결한 내 어린 눈망울들에게도, 고마움 한 구절 이렇게 뽑아 올립니다.
▲본명 문정희
▲1961년 전북 진안군 백운면 출생
▲전북대 국문과
▲전주 우석고 국어교사
<심사평>
고통을 긍정으로 극복하는 힘 돋보여
최종심까지 논의된 작품은 김강산의 ‘천렵’, 김연아의 ‘밤의 지평선 아래’, 김중곤의 ‘불알을 끼우며’, 문정의 ‘하모니카 부는 오빠’ 등 4편이었다.
이 중 ‘천렵’은 천렵의 의미가 은유화되지 못하고 지극히 식상하다는 점에서, ‘밤의 지평선 아래’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힘이 약하다는 점에서, ‘불알을 갈아 끼우며’는 해학적이라는 장점은 있으나 산문성이 강하다는 점에서 각각 제외되어 자연히 ‘하모니카 부는 오빠’가 당선작으로 결정되었다.
당선작 ‘하모니카 부는 오빠’는 현실적 고통을 고통스럽다고 말하지 않고도 고통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데에 큰 장점이 있는 시다. 그리고 그 고통을 아픔으로 느끼게 해주는 게 아니라 극복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나 힘 같은 것으로 느끼게 해주는 미덕이 있는 시다.
그래서 이 시는 전반적으로 화사하다. 그렇지만 그 화사함이 추하거나 가볍지 않고 따뜻하고 정답다. 진솔하고 꾸밈 또한 없다.
마치 한 소녀의 입을 통해 끊임없이 꿈과 희망의 속삭임을 듣는 것 같다. 현실 인식의 시들이 대체로 부정적이고 어두운 데 반해 이 시는 긍정적이고 밝다.
캄보디아에서 온 한 노동자의 삶을 이야기하면서도 그 삶 속에 있는 ‘킬링필드’의 고통조차도 모성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아름다운 부분이 있다. 앞으로 큰 시인으로 성장해나가길 기대해본다.
심사위원 오세영·정호승
[2008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유희경
1.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이 안은 비좁고 나는 당신을 모른다
식탁 위에 고지서가 몇 장 놓여 있다
어머니는 자신의 뒷모습을 설거지하고 있는 것이다
한 쪽 부엌 벽에는 내가 장식되어 있다
플라타너스 잎맥이 쪼그라드는 아침
나는 나로부터 날카롭다 서너 토막이 난다
이런 것을 너덜거린다고 말할 수 있을까
2.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면도를 하다가 그저께 벤 자리를 또 베었고
아무리 닦아도 몸에선 털이 자란다
타일은 오래되면 사람의 색을 닮는구나
베란다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삼촌은
두꺼운 국어사전을 닮았다
얇은 페이지가 빠르게 넘어간다
뒷문이 지워졌다 당신이 찾아올 곳이 없어졌다
3.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간 밤 당신 꿈을 꾼 덕분에
가슴 바깥으로 비죽하게 간판이 하나 걸려진다
때 절은 마룻바닥에선 못이 녹슨 머리를 박는 소리
아버지를 한 벌의 수저와 묻었다
내가 토닥토닥 두들기는 춥지 않은 당신의 무덤
먼지들의 하얀 뒤꿈치가 사각거린다
[당선소감 ]
모든 두근거림의 뿌리를 보고 싶었다
지금 손에 쥐어진 내 온도가 낯설다. 이것은 누구의 것일까. 모든 두근거림의 뿌리를 보고 싶었다. 왜 내가 사랑하는 것은 일찍 죽거나 죽으려 하는 것일까.
드디어 앰프가 터졌다 이제 음악 없는 서커스다. 어릿광대의 춤을 보고 있는 누구도 웃지 않는다. 박수도 없다. 침묵이 두꺼워질수록 광대는 더 빨리 춤을 추고, 그의 두 뺨은 겁에 질린 땀으로 번들거린다. 그러나 광대는 뛰쳐나가지 않는다. 공연이 끝나기 전에는 아무도 나갈 수 없다.
창 밖에서는 괴물이 숨쉬고 있다. 단단한 비늘이 있고 타오르는 거센 숨에 둘러싸인 괴물이 두껍고 튼튼한 발이 달리기 시작한다. 보라. 괴물은 제 몸집의 크기를 보인 적이 없다.
독과 고함과 친구들에게, 이름의 한 글자씩 빌려주신 연 선생님과 성 선생님께, 권 선생님과 J형께, 아해와 부모님께, 그밖에 모든 사람들과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특별한 감사를 전하고 싶다.
▲ 유희경
1980년 서울 출생.
2000년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한국예술종합학교 극작과 4년 재학중.
[심사평]
문정희(시인), 황지우(시인)
몰개성의 시대, 눈에 띄는 참신함
예심을 거친 20명의 응모작들 가운데 이연후씨의 ‘우니코르’, 이서씨의 ‘고래자리’, 최수연씨의 ‘누에의 잠’, 유희경씨의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정도가 최종심 대상작으로 언급할 만하다고 여겨진 작품들이다.
신춘문예 응모작들을 보면 한 시대의 사회적 징후가 집약된 듯한 목록들을 읽을 수가 있다. 그 목록들이란, 최근 수년 동안 뭉쳐져 있는 경향이어서 어지간해서 피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이번에도 역시 현저히 즉물적이다는 것, 다분히 자폐적이다는 것, 몰개성적이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특징들이 나쁘다, 좋다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요는 이런 특징들을 가지되 응모작들이 스스로를 한편의 시로 ‘성립’시키고 있는가를 가려내는 것이 우리 심사자들이 할 일이었다.
최소한 어떤 것이 시이기 위해서 갖는 조건, 즉 ‘시의 기본’을 모른 채 시 비슷하게 써서 시라고 우기는 것 같은 수많은 위조품들을 읽어야 하는 심사자의 고역은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즉물적이다는 것은 사물을 주절이 주절이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언어를 헤프게 낭비하는 것, 동어반복하는 것은 시에서는 범죄일 수 있다. 또 쓴 사람도 읽는 사람도 뭐가 뭔지 도통 알 수 없는 넌센스의 나열이나 실패한 은유들을 가지고 시의 특권이라고 오해하게 해서도 안 될 일이다. 무엇보다도 이 많은 투고작들이 어쩜 한 사람이 쓴 것 같은 느낌을 강하게 주었는데 이 개성의 표준화에 대해 뭐라 말해야 할까?
위의 네 편 최종심 대상작들도 이런 지적으로부터 멀리 벗어나 있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지점에서 스스로를 시로 성립시키는 힘이 있다고 여겨졌다. 최수연씨, 유희경씨의 두 작품을 놓고 고민하다가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를 당선작으로 결정하는 데 우리는 동의했다. 최수연씨가 시를 다루는 데 더 유연해 보이는 점이 있지만 유희경씨가 상대적으로 더 참신해 보인다는 것이 이유였다. 당선자는 앞으로 한 권의 시집으로 자신의 시인됨을 입증해야 할 것이다.
[2008년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구두 수선공
최일걸
그는 구두 밑창에 겹겹이 달라붙은 길들을
더듬는다 뒤엉킨 길들을 풀어놓으려는
그의 손마디가 저릿하다
시한폭탄을 해체할 때처럼 진땀나는 순간,
자칫 잘못 건드리면 길들이 한꺼번에 들고 일어서거나
뜀박질이 그의 심장을 짓밟고 지나갈 것이다
자꾸 엇박자를 놓는 길과 걸음이 구두를 망가뜨린다
구두란 길과 걸음의 교차점,
사사건건 대립각을 세우는 걸음과 길에서
절충점을 모색하기 전에 그는 먼저 숨을 고른다
쉼 없이 구두 뒷굽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길,
막바지로 구두를 몰아세우는 걸음걸음,
그를 여기까지 내몬 것은 길도 걸음도 아니었다
구두방 선반 위에서
번득이며 광휘를 뿜어내는 구두가
시치미를 떼고 돌아앉는다
그는 어긋난 길들을 구두에서 삭제하고는
도톰한 밑창으로 새로운 길을 포장한 다음
못을 박아 단단히 고정한다
고공행진을 거듭하는 세상에서
굽의 높이를 조정하는 일 또한 만만치 않다
못이 박힌 손으로 나달나달 떨어진 날들을 깁는
그는 차츰 지워지고 실밥이 그를 대신하여
툭툭 삐져나온다
보행을 손보는 일은 손님의 몫이지만
그는 시선을 곧게 펴서 손님의 종종걸음을 떠받친다
그의 뼈마디가 시큰거리다가 어긋난다
[심사평]
꼼꼼한 관찰·묘사 시적 가능성 충분
올해는 응모작이 줄어서인지 본심에 올라온 16명의 작품을 읽으며 전반적으로 수준이 다소 떨어진다는 인상이 들었다.
그 중에서 정영희, 김효준, 최일걸 등의 작품이 가장 마지막까지 남았다.
정영희의 시는 언어를 다루는 솜씨가 세련되고 날렵한 반면, 의미구조가 취약하거나 모호한 게 흠이었다.
구체적 언어와 추상적 언어를 교직하는 것이 일종의 낯설게하기 효과를 발휘할 수도 있지만, 정영희의 시에서는 그 연결이 순탄치 않거나 진술 사이의 간극이 너무 크게 느껴진다.
‘패닉의 바다’, ‘소나무역’처럼 유니크하고 일정한 스케일을 지닌 시를 결국 내려놓게 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시적인 새로움이란 표현의 참신함뿐 아니라 읽으면 읽을수록 확장되는 의미의 깊이에서 온다는 점을 말해두고 싶다.
그에 비해 김효준의 시는 다소 거칠지만 시상을 밀고 나가는 힘을 지니고 있다.
‘박쥐의 서곡’, ‘구름공장’, ‘닭’ 등 가족의 고단한 삶을 동화적 비유나 우화적 상상력으로 그려내고 있는 김효준의 시들은 간명하고 발랄한 대신 시적인 복합성이나 여백을 잃어버리기가 쉽다.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소재의 폭을 넓히고 상상력을 좀더 다채롭게 변주할 수 있다면 좋은 시인으로서의 자질은 충분히 있다고 여겨진다.
당선작으로 뽑은 최일걸의 시들은 강렬하지는 않아도 꼼꼼한 관찰과 묘사를 통해 대상을 인상적으로 각인해낸다.
묘사 중심의 시들이 지닌 답답함 같은 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 답답함을 극대화하는 것도 하나의 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당선작인 ‘구두 수선공’에서도 “구두 밑창에 겹겹이 달라붙은 길들”을 읽어내는 그의 시선은 작은 움직임을 통해 시간과 공간을 조금씩 넓혀가면서 “구두란 길과 걸음의 교차점”이라는 인식을 이끌어낸다.
그 외에도 정육점, 후미진 골목 등 변두리적 삶의 풍경들을 주로 보여주는 그의 시들은 조용하지만 단호한 칼날을 지니고 있다.
당선을 계기로 그 칼날이 더 예리하고 정확하게 삶의 어두운 환부를 베어낼 수 있기를 바란다.
/나희덕
▲연세대학원 국문학 박사 ▲1989년 ‘중앙문예’에 ‘뿌리에게’로 등단 ▲1998년 제17회 김수영문학상, 2001년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2003년 제48회 현대문학상, 2005년 제1회 일연문학상, 2007년 제22회 소월시문학상 수상 ▲‘뿌리에게’, ‘반통의 물’, ‘사라진 손바닥’ 등 작품집 다수.
/이문재
▲경희대 국문학과 졸 ▲1982년 ‘시운동’에 ‘우리 살던 옛집 지붕’으로 등단 ▲1995년 김달진문학상, 1999년 제4회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2002년 제17회 소월시문학상, 2005년 지훈문학상, 2007년 제7회 노작문학상 수상 ▲‘마음의 오지’, ‘산책시편’, ‘제국호텔’ 등 작품집 다수.
[2008 경향신문 신춘문예 - 시]
페루
이제니
빨강 초록 보라 분홍 파랑 검정 한 줄 띄우고 다홍 청록 주황 보라. 모두가 양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양은 없을 때만 있다. 양은 어떻게 웁니까. 메에 메에. 울음소리는 언제나 어리둥절하다. 머리를 두 줄로 가지런히 땋을 때마다 고산지대의 좁고 긴 들판이 떠오른다. 고산증. 희박한 공기. 깨어진 거울처럼 빛나는 라마의 두 눈. 나는 가만히 앉아서도 여행을 한다. 내 인식의 페이지는 언제나 나의 경험을 앞지른다. 페루 페루. 라마의 울음소리. 페루라고 입술을 달싹이면 내게 있었을지도 모를 고향이 생각난다. 고향이 생각날 때마다 페루가 떠오르지 않는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아침마다 언니는 내 머리를 땋아주었지. 머리카락은 땋아도 땋아도 끝이 없었지. 저주는 반복되는 실패에서 피어난다. 적어도 꽃은 아름답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간신히 생각하고 간신히 말한다. 하지만 나는 영영 스스로 머리를 땋지는 못할 거야. 당신은 페루 사람입니까. 아니오. 당신은 미국 사람입니까. 아니오. 당신은 한국 사람입니까. 아니오. 한국 사람은 아니지만 한국 사람입니다. 이상할 것도 없지만 역시 이상한 말이다. 히잉 히잉. 말이란 원래 그런 거지. 태초 이전부터 뜨거운 콧김을 내뿜으며 무의미하게 엉겨 붙어 버린 거지. 자신의 목을 끌어안고 미쳐버린 채로 죽는 거지. 그렇게 이미 죽은 채로 하염없이 미끄러지는 거지. 단 한번도 제대로 말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안심된다. 우리는 서로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하고 사랑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랑한다. 길게 길게 심호흡을 하고 노을이 지면 불을 피우자. 고기를 굽고 죽지 않을 정도로만 술을 마시자. 그렇게 얼마간만 좀 널브러져 있자. 고향에 대해 생각하는 자의 비애는 잠시 접어두자. 페루는 고향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스스로 머리를 땋을 수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양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말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비행기 없이도 갈 수 있다. 누구든 언제든 아무 의미 없이도 갈 수 있다.
<당선소감>
- 보들레르 무덤에서 否定의 산책자를 얘기하다 -
모국어가 들리지 않는 회색빛 거리에서 완전한 이방인으로 사라지던 순간의 두려움과 외로움을 기억한다. 그 시절 나는 몽파르나스의 보들레르 무덤 앞에 서 있었다. 그의 묘석 위엔 죽은 자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곳곳에서 날아온 사람들의 승차권과 편지가 놓여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아무런 할 말이 없었다. 불멸은 저주 받은 자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당신의 시집은 내가 돈을 주고 산 최초의 책이자 강물 위에 던져버린 첫번째 책이라고 말하자 보들레르는 내가 자신의 시집을 산 일보다 버린 일이 더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그는 내게 산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나는 산책 혹은 배회를 일삼는 자라고 말했다. 그는 자기도 산책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未知와 否定의 정신을 지닌 아름다운 산책자들에 대해 잠깐 얘기를 나눴다. 해가 지고 있었고 이제 정말 작별할 때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대답인 동시에 질문인 어떤 말을 했고 나 또한 질문인 동시에 대답인 어떤 말을 했고 나는 이 마지막 문장을 입 밖으로 내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말하지 않음은 존중의 한 방식이기도 하다. 그래서 오늘 내게 도착한 시인이! 라는 이름의 가시 면류관 앞에서 나는 도무지 할 말이 없다. 미래의 글쓰기에 대한 단언은 늘 그렇듯 부질없는 짓이다. 깨어 있는 정신으로 이 현재의 순간 순간에 머무르는 일조차도 쉽지 않다.
하지만 이 모호하고 불확실한 시공간 속을 산책하는 일은 오랜 버릇대로 지속될 것이며 그 길 위에서 낯설면서도 낯익은 방식으로 살며 사랑하며 죽어가는 사람과 사물들을 나만의 낯선 눈으로 포착할 것이다.
어머니, 낙담 속에서도 웃는 법을 가르쳐주셨지요. 아버지, 저의 글쓰기는 아버지로부터 타자기를 물려 받은 열 살 무렵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좋은 화가이자 내 유일한 독자인 쌍둥이 언니 에니야, 언제나 사려 깊고도 날카롭게 내 글을 읽어줘서 고마워. 앞으로도 손 잡고 함께 걸어가자. 내 동생 웅아 진아, 너희들이 자랑스럽다. 언어의 장엄함과 황폐함을 동시에 사랑할 수 있도록 해주신 내 어린 시절의 국어 선생님인 진대곤 선생님,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그대 그대들에게 사랑을 사랑을.
모국어가 들리지 않는 회색빛 거리에서 완전한 이방인으로 사라지던 순간의 두려움과 외로움을 기억한다. 그 시절 나는 몽파르나스의 보들레르 무덤 앞에 서 있었다. 그의 묘석 위엔 죽은 자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곳곳에서 날아온 사람들의 승차권과 편지가 놓여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아무런 할 말이 없었다. 불멸은 저주 받은 자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당신의 시집은 내가 돈을 주고 산 최초의 책이자 강물 위에 던져버린 첫번째 책이라고 말하자 보들레르는 내가 자신의 시집을 산 일보다 버린 일이 더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그는 내게 산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나는 산책 혹은 배회를 일삼는 자라고 말했다. 그는 자기도 산책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未知와 否定의 정신을 지닌 아름다운 산책자들에 대해 잠깐 얘기를 나눴다. 해가 지고 있었고 이제 정말 작별할 때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대답인 동시에 질문인 어떤 말을 했고 나 또한 질문인 동시에 대답인 어떤 말을 했고 나는 이 마지막 문장을 입 밖으로 내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말하지 않음은 존중의 한 방식이기도 하다. 그래서 오늘 내게 도착한 시인이! 라는 이름의 가시 면류관 앞에서 나는 도무지 할 말이 없다. 미래의 글쓰기에 대한 단언은 늘 그렇듯 부질없는 짓이다. 깨어 있는 정신으로 이 현재의 순간 순간에 머무르는 일조차도 쉽지 않다.
하지만 이 모호하고 불확실한 시공간 속을 산책하는 일은 오랜 버릇대로 지속될 것이며 그 길 위에서 낯설면서도 낯익은 방식으로 살며 사랑하며 죽어가는 사람과 사물들을 나만의 낯선 눈으로 포착할 것이다.
어머니, 낙담 속에서도 웃는 법을 가르쳐주셨지요. 아버지, 저의 글쓰기는 아버지로부터 타자기를 물려 받은 열 살 무렵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좋은 화가이자 내 유일한 독자인 쌍둥이 언니 에니야, 언제나 사려 깊고도 날카롭게 내 글을 읽어줘서 고마워. 앞으로도 손 잡고 함께 걸어가자. 내 동생 웅아 진아, 너희들이 자랑스럽다. 언어의 장엄함과 황폐함을 동시에 사랑할 수 있도록 해주신 내 어린 시절의 국어 선생님인 진대곤 선생님,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그대 그대들에게 사랑을 사랑을.
<심사평>
뛰고 달리는 말이 불러일으키는 쾌감
모두 열두 분의 시가 본심에 올랐다. 그 가운데 김란 씨의 ‘자벌레’ 외 4편과 이제니 씨의 ‘검버섯’ 외 5편이 마지막으로 논의됐다.
김란 씨는 시를 안정감 있게 지을 줄 아는 사람이다. 그의 문체는 단정하고 간결하다. 쓸 데 없는 수사가 없다. 그런데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이 약하다. 그래서 독자의 머리와 마음에 흔적을 남기지 않고 그저 무난히 스쳐간다. “생식기도 성기도 아닌/ 비뇨기만 남았다던”(‘골똘한 화장’에서) 같은 재미있는 표현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활달함이랄지 생기랄지가 모자라 보인다. 관념어의 잦은 사용과 리듬감 없이 늘어진 문장은 생동감의 걸림돌이다.
당선작으로 이제니 씨의 ‘페루’를 뽑는 데 망설임이 없었던 건, 거기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말의 재미를 십분 즐기는 듯한 자유로운 형상화 능력도 젊음의 싱싱함과 미래의 가능성을 드러낸다.
“고향에 대해 생각하는 자의 비애는 잠시 접어두자. 페루는 고향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스스로 머리를 땋을 수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양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말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비행기 없이도 갈 수 있다. 누구든 언제든 아무 의미 없이도 갈 수 있다.”(‘페루’에서)
그의 시들은 대개 행갈이를 하지 않고 문장을 잇대어 쓴 산문시다. 그런데도 그 시들은 리듬감이 뛰어나고, 진술에 역동성이 있다. 생동하는 말맛의 맛깔스러움이 피처럼 출렁거리며 줄글 속을 달린다. 달리는 말의 리드미컬한 속도감이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의 빈 공간을 메워, 시의 풍경이 활동사진처럼 단절감 없이 펼쳐진다. ‘누구든 언제든 아무 의미 없이도 갈 수 있’는 페루처럼 그 이미지를 논리적으로 따라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말 자체의 속도감이 쾌감을 준다. 이 발랄한 시인의 행보가 더욱더 힘차길 기대한다.
심사위원 황인숙·최승호
[2008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예의
조연미
손바닥으로 찬찬히 방을 쓸어본다
어머니가 자식의 찬 바닥을 염려하듯
옆집 여자가 울던 새벽
고르지 못한
그녀의 마음자리에
귀 대고 바닥에 눕는다
누군가는 화장실 물을 내리고
누군가는 목이 마른지 방문을 연다
무심무심 조용하지만
숨길 수 없는 것들을
예의처럼 모르는 척 하는 일상
아니다, 아니다 그러나
아니더라도 어쩔 수 없다
몸의 뜨거움으로
어느 귀퉁이의 빙하가 녹는지
창 너머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또 잊혀지는 것들이 생기는 것이다
뻔하고 흔한
세상의 신파들 사이를 질주하며
이번에는 흥청망청 살고 싶어요 소리치며
눈은 내리고
가지런히 슬픔을 조율하며 우는
벽 너머의 당신
찬 바닥에 기대어
누군가의 슬픔 하나로
데워지는 맨몸을 가만 안아본다
[심사평]
상투형 벗어난 신선한 가능성
황동규 시인/ 박태일 경남대 교수/ 최영철 시인
뽑는이들의 손에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은 김중곤의 '소금밭의 기억', 조연미의 '예의' 두 편이다. '소금밭의 기억'은 녹록지 않은 시력으로 다져진 단단한 틀거지를 지녔다. 바닷물이 소금으로 변화해 가는 과정이라는 다소 낯익은 글감에 대한 흔치 않은 상상적 투사가 돋보인다. 그러나 작품 세부까지 충분한 제어력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열아홉 줄에 걸친 한 편 시 속에서 '하얀'이라는 수식어를 다섯 번이나 거듭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 무엇인가를 응모자는 곰곰 헤아려 보아야 할 일이다.
조연미의 '예의'는 '소금밭의 기억'에 견주어 단연 신선하다. 함께 보내온 작품들이 지닌 역량도 만만찮다. 사소한 일상을 결코 범상하지 않게 다듬어 내는 솜씨가 고르다. '예의'는 나와 타자의 만남이라는 주제를 따뜻하면서도 곡진하게 끌어 안은 작품이다. '창'과 '벽'으로 표현되고 있는 경계를 축으로 그 너머 세계와 합일을 꿈꾸는 상상적 줄거리는 가벼운 반어적 기슭까지 닿아 있다. 아직도 시가 우리 둘레에서 위안의 장소가 될 수 있음을 잘 보여주는 본보기가 됨직한 작품이다. 게다가 '몸의 뜨거움으로/어느 귀퉁이의 빙하가 녹는지/창 너머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와 같은 빛나는 깨달음까지 얻고 있음에랴. 뽑는이들은 상투형을 벗어난 '예의'의 신선한 가능성에 훨씬 높은 점수를 주어 당선작으로 민다. 모름지기 오래 기억될 시인으로 거듭나기 바란다.
뽑는이들의 눈을 한참 머물게 했던 작품을 보내준 세 사람, 예컨대 '아버지의 침대'의 박금숙, '벽'의 박해술, 그리고 '102번을 타고'의 조해점과 같은 이에게도 격려를 보낸다. 머지않아 제 목소리를 내는 신인으로 즐겁게 만날 수 있으리라.
[당선소감]
꿈꾸고 원한다면 결국 다다를 것
조 연 미
당신의 이름은 은주…, 최은주(崔恩主). 내가 당신을 만날 수 있을까요. 언니의 가난한 끼니를 챙기며 자신의 젖을 짜 내밀던 스물 셋의 어미, 쌀가마니 쌓인 곳간을 보고 배 굶지 않아도 되겠다 싶어 시집간 스물의 처녀, 쌀 사오라는 심부름으로 책가방을 사 쫓겨난 맹랑하던 고아 계집아이. 당신과 나의 심장이 하나로 포개져, 그 심장의 두근거림이 멀리까지 징검다리를 놓던 시절, 당신이 도곤도곤 울려 주던 심장의 장단에 맞춰 세상으로 나아갈 걸음을 놓던 조그마하던 아이가 당신을 불러도 될까요.
시인들의 시를 따라 적던 굳은살 하나면 족하다, 했던 나날들. 늘 열정을 열망하면서도 먹기 위해서 잠자릴 위해서 다른 곳에 있어야 해도, 늘 그것만 생각하고, 꿈꾸고, 원한다면, 한 줄의 글은 당신의 심장소리를 따라 놓이던 징검다리처럼 나를 다다르게 할 거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나의 구원은 당신의 이름을 불러 보는 것으로 족하기도 했습니다. 살아있는 발화로 나는 다른 얼굴을 가진 무수한 당신을 만날 수 있을까요. 그리운 나의… 은주 씨.
부족한 작품을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부산일보에 감사드리며, 강형철 교수님, 박상률 교수님, 또한 강연호 교수님께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1981년 서울 출생. 원광대학교 문예창작과 대학원 휴학 중.
[200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파문
이장근
결혼을 코앞에 두고
여자는 한강에 투신했다
이유를 묻지 않았다, 물은
여자를 결과로만 받아들였다
파문을 일으키며 열리고 닫히는 문
물은 떨어진 곳에 과녁을 만든다
어디에 떨어져도 적중이고 무엇이 떨어져도 적중이다
투신한 죽음도 다시 떠오른 삶도
물은 과녁을 만들어 적중을 알렸다
적중을 알리며 너는 왔다
온몸에 파문처럼 돋던 소름
빗나간 너의 말도 떨어지는 족족 적중했다
사랑처럼 민감한 것이 또 있으랴
이유 없이 떠나도 결과는 적중이었다
이유 없이 너는 가고
나는 안개 같은 거짓말로 너를
미워했다, 그리워했다, 지웠다, 썼다
사랑처럼 가벼운 것이 또 있으랴
구름이 되어 제멋대로 문장을 만들다
지치면 낱글자가 되어 떨어졌다
지금도 비가 온다 몸에 소름이 돋는다
네가 오고 있는 것이다
이 밤 이 세상에는 또 얼마나 많은
사랑이 투신할 것인가, 투신하는 족족
파문을 일으키며 적중할 것인가
[당선소감]
어쩔 수 없는 유혹
시가 떠오르면 어쩔 수가 없었다. 일도 손에 잡히지 않고 하루 종일 2% 부족한 사람으로 살아야 했다. 시는 나를 2% 부족한 사람으로 살게 한다. 아니면 2% 부족한 나였기 때문에 시를 쓰며 사는지도 모르겠다.
돌이켜 보니 완벽한 것은 나를 유혹하지 못했다. 2%의 여백, 살랑살랑 여운을 남기며 가는 꼬리를 따라다녔다. 하늘도 어둠의 2%를 열어놓기 위하여 별을 띄웠으리라.
별이 빛나는 한, 지상에는 2%의 갈증을 느끼는 시인들이 노래를 부르리라. 부족하지만 나도 함께 노래를 부르고 싶다.
지하철 1호선을 타고 동대문운동장으로 가는 길에 당선통보를 받았다. 전화기를 들고 허둥지둥하는 나를 보고 있는 아내의 눈빛도 요란하게 떨렸다. 한나절이 지났지만 아직도 얼떨떨하다.
부족한 시를 뽑아주신 매일신문사와 심사위원님들께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낳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의 은혜, 옆에서 묵묵히 지켜봐 준 아내와 아들딸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그리고 시의 스승인 아모르파티님들과 어젯밤에 쓴 시를 오늘 아침에 들어주었던 제자들을 위해 붉은 마음을 펴서 장미꽃 한 송이를 접는 중이다.
[이장근]
▷1971년 경북 의성 출생 ▷한남대학교(대전) 국어교육과 졸업
▷세일중학교(서울) 교사(국어)
[심사평]
예심을 거쳐 올라온 서른 분의 작품을 다시 검토해 본 결과 남은 작품은 ‘황소’(서은교), ‘아가리 마을’(이규), ‘가야동 계곡’(김순자), ‘아스팔트 칸트’(기우연), ‘입이 없는 비평’(최문희), ‘나무별똥’(문성록), ‘불안의 거처’(김지고), ‘일획’(정수원), ‘마네킹’(박정수), ‘소금밭의 기억’(김중곤), ‘바늘’(김명희), ‘파문’(이장근), ‘토마토’(하숙욱), ‘등피를 닦으며’(박선영) 등이었다.
매번 느끼는 일이지만 신춘문예의 특성상 새로운 것에 천착한 나머지 일부러 문장을 비틀고 기발한 착상에 몰두해 난삽한 기교의 과잉에 의한 억지가 많았다.
비튼 문장이나 발상이 독특한 감각으로 살아나 신선한 감동을 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새로운 감수성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표현하기까지의 데생의 기초가 우선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냥 시단의 한 흐름을 따르고 있는 난해한 아류의 것들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이런 점에서 새로움도 있고 표현의 신선함을 주는 작품으로 ‘일획’ ‘마네팅’ ‘소금밭의 기억’ ‘바늘’ ‘파문’ ‘등피를 닦으며’ 등을 들 수 있었다. 작품 하나 하나 놓고 볼 때 모두 독특한 포즈을 지니고 있어 오래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투고한 작품이 모두 고르다는 점에서 이장근의 ‘파문’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파문’은 자칫 통속적으로 떨어질 평이한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독특한 시적 비전에 의해 삶의 진지성과 감동을 주는 데 효과를 이루고 있다. 그것은 이 시인이 지닌 삶에 대한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된다. 앞으로 더 깊은 비전에 천착해 좋은 작품을 생산하길 바란다.
[심사위원 : 권기호(시인·경북대 명예교수) 정호승(시인)]
2008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바람의 일
공인숙
오랫동안 바람을 사랑했습니다
바람만큼 외롭고 쓸쓸한 건 이 지상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들녘에서, 포구에서, 노을 비껴가는 강가에서도
언제나 안녕하며 내 마음을 쓸어줍니다
바람은 아무 것도 남기지 않습니다
다만, 살구꽃이 눈부신 날
할머니 무릎베개에 옛 이야기 듣는
아이의 눈꺼풀을 힘겹게 하는 것도,
깊은 우물 속 맑은 물 위에
꽃잎의 연서를 날리는 것도
산 그림자가 마을로 내려오게 하는 것도
다 바람의 일이지요
또한 종아리가 유난히 예쁜 산골 계집아이의
상고머리를 산당화의 향기로 흔들어 주는 것도
바람의 일이고요
길섶에 피어난 쑥부쟁이의 꽃대를
한두 번 흔들어 보기도 하다가 그저 슬몃...
오늘은 비가 내렸습니다
이 빗물을 바다로 보내
파도를 보며 영혼을 키우는 누군가에게
한 점 살이 되게 하는 것도
바람의 일일겁니다
수 없는 바람이 수 많은 별이 될때까지
바람을 사랑하겠습니다
심사평
이기반씨
"자연친화 인간생활 생동감있게 표현"
신춘문예가 지향하는 목표는 역량있는 신인 작가를 발굴, 육성하여 문단의 발전에 기어코자 함에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권위와 등단의 화려함이 자랑스럽기까지 하다 하겠다.
그 만큼 신춘문예의 인기도(人氣度)는 높으면서 어려운 것이 되어 있다. 따라서 신춘문예에 도전하는 연령층도 중년층을 비롯 노년층까지 다양하다. 심지어는 60대를 넘어 70대들도 있으니까 말이다.
이번에 예심을 거쳐 올라온 작품들은 그 수준이 겨우 평년작 수준에 이르고 있는 것 같다. 신춘문예의 특성도 고려할 필요가 있어야 하지만, 작품 속의 시인의식이나 언어의 선택과 표현이 더 신선했으면 좋은 시가 되었을 것이 아닌가 싶다. 아쉬움을 금치 못하면서 살펴 본 결과 최종까지 남은 작품은 <패총(貝塚)>(전흥미:서울), <바람의 일>(공인숙:전주), <홍도>(신미선:부산) 등 3편이었다. <패총>은 어떤 사물을 대상으로 관찰하며 사고하는 침착성이 정연하게 작품화되어 있다. <바람의 일>은 바람을 의인화하여 그가 수행하는 다양한 기능을 일상의 자연환경친화 인간생활과 연관지어 생동감 있게 표현하였다. <홍도>는 참신한 언어감각으로 상징적 이미지를 구사하였다. 그로하여 신선한 정서적 감동을 준다.
이와 같이 저마다의 특성을 발휘하면서 시 창작에 정열을 쏟고 있음은 매우 바람직스럽다.
이 3편중에서 <바람의 일>을 당선작으로 뽑았다. 작품을 보는 눈은 상대적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런 관계로 남의 작품을 심사한다는 것은 여간 조심스런 게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응모자 여러분의 각별한 이해가 있어 주시기 바란다.
열심히 창작활동을 거듭하면 언젠가는 좋은 작품이 얻어 질 수 있을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시고 정진하기 바란다.
새 해에 복 많이 받으시길 빌며...
당선소감
- 공인숙씨
"전통성과 현대성 갖춘 시 써나갈 것"
처마 밑에서 소나기를 피하고 있었다.
비 그치기를 기다릴까. 옷이 젖더라도 집까지 그냥 뛰어가 볼까 마음속 갈등을 결정하지 못하고 새벽녘 잠에서 깨어났다.
무언가 개운함을 풀지 못한 채 출근했는데 그것을 일순간 날려버리게 할 당선 소식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그때서야 묵은 체증을 내린듯 긴 한숨을 토해낼 수 있었다.
신문사 공모라는 도전이 내겐 매우 두렵고 높은 벽이라는 생각에 엄두조차 못냈는데 어린시절 명절날, 장롱속 깊이 넣어 두었던 때때옷을 꺼내 입듯 조심스레 떨리는 마음으로 감히 내놓았다.
꿈같은 영광이 내게 왔던 것이다.
다른 사람의 얘기를 전달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느낌이었다.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때문이리라.
시는 언어예술이라 생각한다. 감정만으로는 되지 않음을 이제야 알았다.
언어 개개의 세포적 기능을 해부하여 추구할 때 그 언어는 시인을 만나서 비로소 혈행과 호흡과 체온을 얻어서 생명력을 갖춘 그리하여서 우리 모두가 함께 느끼고 생활하게 되는 진정한 예술이 되리라 본다.
더불어, 아직은 미약한 언어이고 시작에 불과하지만 내안에 끓어 오르는 것들을 언어예술로 승화하여 나의 “쏟아냄”에 사람들이 공감한다면 그것이 나에게는 쓰는 자로서의 희망이고 책임일거라 생각한다.
여러 색깔중에 개인적으로는 현대성과 전통성을 함께 갖춘 시를 쓰는 시인이기를 소망한다.
한 해의 끝자락을 기쁨으로 마무리할수 있게 해주신 분께 감사의 기도를 올리며 특히, 엄마의, 아내의 글쓰는 일에 음양으로 무던히 참아준 성현, 민지 그리고 남편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더욱이 심사위원님들께는 머리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2008 한라일보 신춘문예]
오월의 잠
김은실
황사를 빠져나오자 나의 행방은 나무들의 습성을 닮아간다
뒤를 돌아보면 오롯이 되살아나는 잎새들의 발자국
기린처럼 도시를 넘겨보거나 하루의 마지막 햇살들을
꿈인듯 곱씹어간다
사막이 될 사랑과 목마름 하나로 건너야 할 기억의 행방을
찾아내는 것
나무들의 소문이 심상치 않다
뿌리째 뒤적여도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 해묵은 반란들,
나이테들의 구석에 처박혀 잠이 들거나 이루어지지 않을
불면의 등성이들을 오르내린다
숨이 가빠지고 발목이 푸르러진다
누군가 적어놓은 유서들의 단서를 찾는 동안
문맹의 슬픔이 불어온다
심장의 한 켠에 푸른 병조각이 들어차고
이 도시에선 어떤 나무이든 술의 날들을 깨뜨리지 않으면
조금씩의 간격도 좁혀지지 않는 것이다
황사를 빠져나오자 나의 의문들은 나무들의 틈바구니에 묶인다
어제의 위치와 잎들의 수런거림이 나를 가둔 채
숲 저쪽으로 사라진다
오후의 통화와 몇개의 망각이 푸른 위궤양을 앓는다
기린처럼 목을 늘려도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 오월의 잠들,
계단을 타고 오르는 몇개의 잎새들을 상상하면서
나는 누군가 녹이다 만 박하사탕같은 사랑을 되짚어간다
[시 가작]
김은실씨-섬 안 이야기들 새로이 풀어낼 것
실로 오랫만의 시인이다.
구름을 쫓거나 들꽃들의 길목을 지키는 동안에도 목마름은 그치지 않았고 섬, 꿈으로부터 망명하듯 달려온 것이 또다른 문제였다.
섬의 곳곳은 잃어버린 시의 시간들이 되어갔고 때로 파도들의 끝에 이르러서는 시에 대한 멀미는 더욱 가까운 맥박소리처럼 깨어났다.
서울은 점점 아득해졌고 기억의 시침들은 몇 계절의 힘으로도 힘없이 휘어졌으리라.
굴절된 시간의 페이지를 넘기는 사이 섬 안의 새벽과 노을이 조금씩 밀물과 썰물로 뒤바뀌는 질서를 배우게 되었고 겨울산과 낯선 말들의 골짜기를 헤매는 사이 가슴 한 켠에 묻어나는 푸른 반점의 비표, 그게 시였으리라. 서울을 떠나며 영영 헤어질거라 단정했던 시가 나보다 더 깊은 섬을 헤매고 있었음을….
이제 꿈을 꾼다는 건 또다른 종류의 부채감이다. 자유롭던 공상, 무수한 밤들이 부려준 섬 안의 이야기들도 새로운 등잔 새로운 불면 속에서 밝혀내야 하리라.
인연이란 참 오래된 전생같다. 까풀까풀 희미해지던 가슴 속 오두막 하나 그리움의 더듬이로 찾게 해준 차령문학의 박경원 선생님. 이젠 좀 더 제 몫의 방식으로 깨있는 법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늘 이면의 표정 속에서 낯선 행장과 밀행하던 나를 알아 보신 강화문학회와 최 회장님, 차소담 박은혜선배 문지수 황인호후배 그리고 그동안 함께 했던 몇몇 분들…. 내 안의 분신인 훈, 혁과 함께 기쁨을 나누며 뽑아주신 선생님들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1963년 서울출생 ▷차령문학회 회원 ▷강화문학회 회원
[시 심사평]
한줄기 사랑 놓지않으려는 당당함
시(詩)가 말(言)의 사원(寺)이라고 할 때, 그것은 사유와 언어의 적절한 긴장을 담보하는 의미일 것이다. 시가 다른 글쓰기보다 얼마간 힘들고 신중하게 여겨지는 것도 바로 그 긴장의 밀도가 유다른 데서 연유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좋은 시란 그 숨 막히는 긴장을 잘 견뎌낸 결과물에 다름 아니다.
2008 한라신춘문예 시부문은 1백50명이 넘는 많은 분들이 응모하여 풍성한 말의 성찬을 이루었고, 나름대로 각각의 솜씨들을 뽐내고 있었으나 아쉽게도 언어와 사유의 긴장을 잘 견뎌내고 있는 작품은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어느 정도 가능성이 보이는 작품들은 김경애, 김은실, 김일호, 명순이, 송정애, 이언지, 정두섭 제씨의 것들이었다. 이분들은 시적 구성이나 언어를 다루는 기술에서 일정한 성취를 보여주고 있었지만, 반면에 사유를 끌어가는 힘과 긴장의 밀도 면에서 각기 일정한 한계를 갖고 있었다.
그 중 사유의 깊이와 언어의 긴장에서 김은실씨의 '오월의 잠'이 조금 더 돋보였다. '오월의 잠'은 권태와 절망의 팍팍한 삶 속에서도 한 줄기 사랑을 놓지 않으려는 자아의 의지를 담담하게 그린 작품으로써 구성의 탄탄함과 신선한 비유가 뛰어났지만 부분적으로 모호한 진술과 맥락의 불분명함 때문에, 그리고 다른 작품들의 완성도가 부족한 점도 고려하여 아쉽지만 가작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심사자가 인색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후일을 위한 격려 차원임을 이해하여 정진을 바란다.
<김승립·시인>
[2008 세계일보 신춘문예]
너와집
박미산
갈비뼈가 하나씩 부서져 내리네요
아침마다 바삭해진 창틀을 만져보아요
지난 계절보다 쇄골 뼈가 툭 불거졌네요
어느새 처마 끝에 빈틈이 생기기 시작했나 봐요
칠만 삼천 일을 기다리고 나서야
내 몸속에 살갑게 뿌리 내렸지요, 당신은
문풍지 사이로 흘러나오던
따뜻한 온기가 사라지고
푸른 송진 냄새
가시기 전에 떠났어요, 당신은
눅눅한 시간이 마루에 쌓여있어요
웃자란 바람이, 안개가, 구름이
허물어진 담장과 내 몸을 골라 밟네요
하얀 달이 자라는 언덕에서
무작정 기다리지는 않을 거예요, 나는
화티에 불씨를 다시 묻어놓고
단단하게 잠근 쇠빗장부터 열겁니다
나와 누워 자던 솔향기 가득한
한 시절, 당신
그립지 않은가요?
<당선소감>
느리게 공부하는 내게 격려·질책해 준 선생님께 감사
나는 무언가를 시작할 때라든가 막막한 나날이 계속될 때마다 산을 탔다. 바싹 마른 말이 먼지를 피우며 스르르 무너지려 할 때 지리산을 완주했고, 봄 여름 가을 겨울 설악과 북한산에 다니면서 내 몸을 다져 밟았다.
잘근잘근 밟혀 돌아오면 후줄근한 내 몸에서 말들이 피어나왔다. 허기진 가슴에서 바람이, 구름이, 안개가 시로 피어났고 때로는 미처 피어나지 못한 말들은 나도 모르게 곳곳에 쌓여 갔다.
찰랑찰랑 의심하던 사랑을, 요절을, 시를 여름 계곡에 떠나보내고 푸른빛이 사라져 이슥해진 나의 겨울 계곡은 은빛의 물 뿌리가 드러났다. 바닥이 다 드러난 나는 솔솔 내리는 눈발에 목을 축이고 사모하는 긴 혀를 따라 구불구불 의심했던 길을 다시 갔다.
피어나지 못했던 말은 부패되지 않은 채 골짜기로 흐르고 있었으며 이리저리 부딪치며 새 물길을 터뜨리기도 했다.
지난밤 나는 가장 예쁜 꿈을 꾸었다. 눈 쌓인 계곡에 차가운 바람을 얼굴에 맞으면서도 지천으로 피어나던 꽃살문들이 활짝 웃고 있었다.
내가 존경했던 선생님께서 철없는 나에게 ‘늦게 피는 꽃’이라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새롭게 떠오른다.
지진아처럼 느리게 공부하는 나에게 격려와 질책을 아낌없이 해주신 최동호 선생님과 시 합평회를 할 때마다 묵사발을 만들어준 수요시창작팀, 유안진 선생님, 장만호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치매로 고생하시는 시어머님과 구십이 넘도록 식당일을 하시는 친정어머니, 묵묵히 나를 지켜준 남편과 사랑하는 두 딸 단비와 차래에게도 고마움을 보낸다. 십년을 함께 땀 흘린 택견패들에게도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고, 무엇보다도 유종호 선생님과 신경림 선생님 두 분 심사위원께 감사드린다.
오랜 세월 흐르는 동안 유연해지고 너그러워진 말로 살냄새 나는 시를 쓰고 싶다. 나는 우리들의 삶을 감싸 안는 따뜻함이 묻어나는 시를 씀으로써 두 분 심사위원께 두고두고 은혜를 갚을 참이다.
박미산(본명: 박명옥)
▲1954년 인천 출생
▲방송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방송대 강사
심사평
- 신경림·유종호
신선하고 맛깔스럽게 쓴 아주 따뜻한 시
예심을 거쳐 올라온 작품들이 수준이나 내용이 비슷비슷했다.
특별히 개성 있는 시가 별로 눈에 띄지 않았고, 재미있게 읽히는 시도 많지 않았다. 하지만 ‘실직’(이재근), ‘나비의 꿈’(문계현), ‘너와집’(박미산) 같은 작품들은 신춘문예라는 관문을 통과할 수준은 넉넉히 되었다.
먼저 ‘실직’은 삶에 뿌리박은 정서의 시로서 호소력을 갖는다. 한데 무언가 신선한 맛이 덜하고, 죽음의 이미지가 시를 무겁게 만든다. 게다가 너무 건조하다.
같은 작자의 ‘얼굴’은 읽는 재미는 ‘실직’보다 낫겠는데, 산만하고 장황한 것이 흠이다.
‘나비의 꿈’은 장애인 부부의 외식 나들이가 소재가 된 시로서, 그 의도는 충분히 이해가 되는데 비유가 좀 억지스럽고 관념적이다. 외국인 근로자가 화자가 되고 있는 ‘붉고 둥그스름한 다라이’는 정리가 더 돼야 할 소재 같다.
하지만 남과 같지 않은 상상력은 그의 앞날에 기대를 가지게 만든다.
마지막으로 ‘너와집’은 아주 따듯한 시여서 일단 호감이 간다.
물론 ‘너와집’은 실제의 너와집이기보다 ‘당신’과 ‘내’가 만든 사랑의 집일 터, 그 비유가 호소력이 있어 아름답기까지 하다.
말이나 감각도 신선하고 맛깔스럽다. ‘문둥이가 사는 마을, 이랑진 무덤들 사이에도’는 열두 살 여름의 추억을 소재로 하고 있는 시로서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재미있게 읽힌다.
이렇게 해서 우리 두 심사위원은 최종적으로 박미산의 ‘너와집’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2008 신춘문예 영남일보]
나무는 나뭇잎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조혜정
처음 찍은 발자국이 길이 되는 때
말의 반죽은 말랑말랑 할 것이다
나무는 나뭇잎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쏙독새는 온몸으로 쏙독새일 것이다
아랫도리를 겨우 가린 여자와 남자가 신석기의 한 화덕에 처음 올려놓았던 말. 발가벗은 말. 얼굴을 가린 말. 빵처럼 향기롭게 부풀어 오른 말. 넘치고 끓어오르는 말. 버캐 앉는 말. 빗살무늬 허공에 암각된 말.
처음 만난 노을을 허리띠처럼 차고 만 년 전 바람이 만 년 전 숲에서 불어온다 뒤돌아보는 여자의 열린 치맛단 아래 한번도 씻지 않은 말의 비린내 훅 끼쳐온다 여자가 후후 부풀린 불씨가 쏙독새 울음소리에 옮겨 붙는다 화덕 앞에 쪼그린 아이들 뜨겁게 반죽한새소리를 공깃돌처럼 굴리며 논다 진흙 같은 노을 속에 층층 켜켜 찍히는 손가락 자국들,
귀먹은 아이는 자꾸 흩어지는 소리를 뭉치고 굴린다
깊고 먼 어둠을 길어 올려 둥글게 반죽한다
천 개의 나뭇잎들이 천 개의 귀를 붙잡고
흔드는 소리, 목구멍 속에서 쏙독새 울음소리가
허공을 물고 터져나온다
바람이 석류나무 아래서 거친 숨결을 고르자
처음부터 거기 살고 있는, 아직도 증발하지 않은
침묵의 긁힌 알몸이 보인다
나무는 나뭇잎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쏙독새는 온몸으로 쏙독새인
그 길이 보인다
[당선소감]
사라진 세상의 소리를 만난듯…
안팎으로 열리는 문만을 열어본 사람은 구름의 손잡이를 찾을 수 없다. 손잡이 없는 구름은 줄곧 나를 따라다녔다. 시(詩)는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었다. 누군가 길을 가르쳐주었지만 그가 말해준 빛나는 것들을 찾을 수 없었다. 목탁을 두드리는 것 같은 도마소리가 집집의 문밖으로 새어나오는 저녁이었다. 꿈에서 울다 깬 한밤중이면 이미 끝장난 세상의 다음날, 고요까지 다 사라졌는데 홀로 남아 소리를 애타게 기다리는 귀 같았다. 詩는 사라진 세상의 소리들을 하나씩 되살려 기억하는 꿈이었다.
나는 세상의 모든 나무들이, 바람들이, 돌멩이들이 한순간의 기억만으로영원을 견딘다고 믿는다. 구름의 손잡이를 잠시 잡았다 놓친 것 같은 이 느낌만으로 시를 놓지 않고 길의 끝까지 갈 수 있길 바란다. 시와 반시 문예대학 강현국·구석본 선생님, 가르침을 주신 모든 선생님들과 시를 쓰며 만난 소중한 친구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그리고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과 영남일보에 감사드린다. 부모님과 내 가족, 꿈에서 울다 깬 '한밤중'에게도 감사를 전한다.
◇작가약력
△1963년 충남 당진
△목원대 국어교육학과 졸업
△2007년 11월 시와반시 하반기 신인상
[심사평]
"작품 장점 찾으려 후속작까지 정독"
예심을 거쳐 넘어온 작품들의 수준은 비슷비슷했다. 거듭 읽어도 두드러진 작품이 보이지 않아 두 심사위원은 당선작을 결정하지 못한 채 숙고를 거듭했다.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은 '메타세콰이어' '유클리드 연대기' '구름 위의 문장들' '두부의 힘' '주왕산' '천 개의 붉은 방' '나무는 나뭇잎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등이었다.
이 작품들은 나름대로의 장점을 지니고 있었으나 그것으로 한 시인의 개성화에 이르기에는 부족한, 군데군데의 흠을 지니고 있었다. 심사위원들은 이 작품들의 장점을 발견하는데 주력하며 후속 작품들까지 정독했다.
'메타세콰이어'는 발상이 신선하고 마지막 연이 진한 여운을 던진다는 미덕이 있으나 전체의 시가 지니는 언어들의 긴장감이 떨어지며 후속 작품들의 수준이 이 시를 받쳐주지 못한다는 결함이 지적되었다. '유클리드 연대기'는 일종, 이야기 시의 재미를 느끼게 한다. 최근에 유행하는 시의 흐름을 띠고 있다. 그러나 이야기 시는 편안하게 읽히기는 하나 언어의 긴장미가 떨어진다는 결함이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시 안에 탈자(脫字)가 있음도 주의를 요한다. '구름 위의 문장들'은 '붉은 호수'와 함께 최근 유행하는 시들을 많이 읽었거나 그런 습작의 훈련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시가 일상성에서 일탈한 신선한 감수성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이 결함으로 지적되었다. '주왕산'은 섬세한 감각의 미덕을 보이고 있다. 흔하지 않은 새 이름, 꽃 이름들이 불러일으키는 시적 아름다움도 돋보인다. 그러나 이런 류의 시가 갖는 공통적인 흠인 전달력과 무게의 약화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두부의 힘'은 부드럽고 유려한 언어의 감각을 지니고 있어 음미할수록 시의 맛이 우러나는 작품이고 부분 부분 좋은 구절들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전반부가 서술적이고 긴장미가 떨어져 독자를 견인할 힘이 약하다.
마지막으로 남은 작품은 '천개의 붉은 방'과 '나무는 나뭇잎 속으로…'였다. '천 개의 붉은 방'은 강렬한 이미지와 생동하는 어휘들을 동원하고 있음이 장점이다. 형태상으로도 완성도가 높아 오랫동안 심사위원들을 숙고케 한 작품이다. 하지만 허두 부분의 신선함에 비해 중간 부분이 흐려져 있다. 거기 비해 '나무는 나뭇잎 속으로…'는 허두부터 언어의 세련미가 돋보이고 참신한 상상력의 자장을 띠고 있다. 글을 쓰기 위한 정련의 과정을 말한 시인데 읽을수록 새로운 맛이 솟아난다. 그러나 후반부가 흐리고 기성 시인의 냄새를 풍기며 행을 좀더 압축할 필요가 있다. 심사위원은 이상의 작품들이 갖는 결함에서 조금이나마 자유로운 작품으로 보이는 '나무는 나뭇잎 속으로…'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응모자 여러분의 문운을 빈다.
◇ 심사위원 이기철(시인·영남대 교수), 최동호(시인·고려대 교수)
[2008 경남신문 신춘문예]
대추나무
김일호
대추가 댕강거린다
부르터 울기 전에 내려놓으라는 말씀
사다리에 올라 볼이 탱탱한 편종에다
탐스런 눈을 맞춘다
햇살 살점에다 손을 대자
여름 내내 소리를 키운 종루가 먼저 부르르 떤다
뙤약볕과 별들이 촘촘히 박아 넣은
경전을 하나씩 받아 적으며
휘어진 하늘, 초록 귀때기 한 가지를 잡아 당겨
아직 새파란 소리 한 번
울려 보려는데
종일 텅 빈 가을을 들고 있던 바지랑대
들고 나오신, 가는 귀 먹은 어머니
너 그래 갖고 무슨 소린들 들리겠냐는 듯
꼬부라진 허리 곧추 세워 타종을 한다
한꺼번에 쏟아져 골목 흥건한
어머니 귀 뚫고 나온 저 소리
소쿠리 가득 담겨 들어간 대추
처마 끝 물구나무 서서
풍경 소리 댕강댕강
한 철을 날아간다
■ 당선소감
부지러한 날갯짓으로 보답
새의 꼬리가 까맣게 점이 될 때까지 바라봤다. 바람이 데리고 가는 낙엽의 신발 끄는 소리에 귀를 세우고 잠 못 드는 밤이 오랜 습관이 되었다.
그랬다. 무엇이랄 것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 생각에 골몰했던 나에게 답을 건네준 것은 쉰이 넘어서였다.
새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바람이 감나무 잎에 무엇을 쓰고 가는지 누군가 가르쳐 주었고 서투르게 받아 적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새가 나와 닮았다는 생각이 미칠 때쯤 새와 한 몸이 되지 못해 괴로워하는 내 미흡한 시에 낙점을 찍어주신 심사위원님께 엎드려 감사드린다. 더욱 열심히 노력하여 좋은 시로 보답하라는 말씀으로 새기고 부지런히 날갯짓을 하겠다는 다짐을 드린다. 까막눈이었던 내게 시라는 영혼의 씨앗을 심어주신 이근식 선생님, 내가 나아가야 할 시의 지평이 얼마나 넓고 깊은지 손목 잡고 이끌어 주시는 경주대학교 손진은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항상 곁에서 격려하며 함께 공부하고 있는 아내 김광희 시인과 시가 뭔지는 모르지만 노환에 힘드신 부모님께 기쁨을 드릴 수 있어 우선 좋다. 또 자기 일인 듯 기뻐해주며 함께 시밭을 일궈온 문우들 모두와 기쁨을 같이하고 싶다.
△1953년 경주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졸업 △2006년 근로자 문학상 수상 △경주대학교 사회교육원 문예창작반 재학 중
[시 심사평]
청각적 은유 산뜻
우리나라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등단 제도인 신춘문예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있는 숱한 문학 지망생들의 땀과 열정이 배어 있는 소중한 원고를 정성을 들여가면서 하나씩 검토했다.
최종심에 올려진 작품은 모두 다섯 편이었다. ‘순장 소년’과 ‘하포· 1’은 우선 독특한 글감이어서 눈길이 갔다. 호흡이나 짜임새, 또한 조사법(措辭法)에 있어서도 안정감과 신뢰를 담보하고 있었다. 하지만 말의 흐름이 느리고, 표현의 긴장감은 부족하고, 사유의 내적 깊이도 적어 보였다. ‘입관’은 삶과 죽음의 화해로운 인간미를 다사롭게 제시하고 있지만 귀하지 아니한 시적 정조 속에 매몰되어 있는 감이 있다. 기저가 되는 듯한 정서의 세계인 ‘그리움’이란 시어가 세 차례 되풀이되고 있는 것도 그것을 도리어 희석시키고 있다.
마지막으로 ‘물 위의 지은 집’과 ‘대추나무’가 남았다. ‘물 위의 지은 집’은 작자의 역량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호흡의 길고 짧음을 서로 어울리게 잘 다루고 있다. 뭔가 새로움을 환기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행간에 감추어진 감수성도 있다. 그러나 모호하거나 진부한 어휘 선택, 눈을 거슬리게 하는 외래어들이 문제로 지적되었다. 더욱이 마지막 행이 결정적인 결함이라는 데 심사위원 모두가 동의했다.
‘대추나무’는 수작의 절대 조건에 적합하다기보다 결함이 비교적 적다는 점에서 일찌감치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몇몇의 사소한 결함을 수정한다면 신춘문예 당선시로서 손색이 없어 보였다. 시의 공력(功力)을 짐작케 하는 긴축적인 느낌도 당선작으로 미는 데 일조했다. 대추를 편종으로 은유한 것은 작위적인 것의 소산인 동시에, 사물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제시한 청각적인 은유의 가능성이라고도 볼 수 있다. 가능성이 점쳐지는 것이 당선작이 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런 귀결이다. 당선자의 정진과 건필을 빌면서, 더 혹독한 자기 수련이 있기를 기대한다.
-심사위원 : 이광석(시인)·박태일(시인·경남대 교수)·송희복(평론가·진주교대 교수)
[2008 전남일보 신춘문예]
대동여지도
조다윗
1.
내 영혼이 어느 산천 물줄기의 방점이라면 그 더딘 물소리가 끝없는 방물장수의 노래여도 좋겠다. 까마득한 옛 생각, 지도 하나를 그리는 밤, 고요의 헤진 발자국을 따라 걷다보면 어찌,들이고 산이고 섬인지 헤아릴 수 있을 까마는 능선과 능선이 만나는 무등산엔 소리그림자 짙다. 평야와 평야가 나란히 도사리는 푸른 꿈도 젖는다. 지칠 줄 모르고 다가갈 것만 같은 어지간히 어지러운 삶 예견이라도 하는 듯이, 휘감고 되돌아가야 할 그 길 꼭 잊지 말란 듯이 그래도 살별처럼 떨고 있는 간이역을 처연(凄然)의 뒤안길에서 기다리고 있다.
2.
'그 끝이 어느 경계 하나 끊고 살았으면 참 좋겠다.'라고, 생각하던 밤은 이토록 깊은 적막이다. 마치, 어머니의 가랑이처럼 길고 긴 포옹이다. 내 시의 근원지를 아직 잘 알지 못하겠으나, 늘 부려먹고 싶었던 어머니의 이름 대신 할미 가슴에 텃밭 한 평 가꾸던 이유가 옛 지도의 성지처럼 신성함을 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주 잠시 내 마음 속에도 초록의 활기가 꽃을 피우던 날, '모든 길은 다시 하나의 길로 마주본다.'고 여우비가 산자와 죽은 자와 떠나간 자의 갈림길에서 등고선을 깊게 새겨두었다.
[심사평]
핵심 파고드는 패기있는 도전의식
예심을 거친 작품들을 읽어가는 동안 선자의 눈길을 끈 작품들은 아래 다섯 분의 시편들이었다.
'월세 방 있습니다'(김기훈) 외 6편의 작품들은 시상의 전개가 자연스러웠고 한 장 한 장 찍어 올린 언어의 정교함이 미려해 보였다. 반면 삶을 바라보는 치열한 인식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한 신인의 탄생이란 안정과 조화보다는 세계에 대한 신선한 꿈과 패기에 찬 도전의식 쪽에 보다 강한 의미 부여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모란꽃 마차' (박성진) 외 2편의 작품들은 전통적인 한국 서정시의 계보를 생각게 하는 작품이었다. 서정이 사라진 시대에 감정의 선율을 자연 속의 풍경들과 견주어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것은 미덕이지만 이 작품 역시 신인이 지녀야 할 꿈과 패기의 차원에는 아쉬움이 있었다.
무늬들 (박시원)외 2편의 작품들은 꼼꼼하게 교직된 언어의 조각보를 바라보는 느낌이 있었다. 전통적인 여성 수공업의 세계에 현실의 삶을 투영하려는 노력은 소중하지만 보다 현대적이고 세련된 이미지를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선자의 최종적인 관심을 끈 작품은 '선운사 해우소 옆 홍매화' (정도전)외 3편과 '대동여지도' (조다윗) 외 5편이었다. 두 분의 작품들은 각각의 개성들이 차분하게 살아 숨쉬는 장점들을 지니고 있었다.
정도전의 '선운사 해우소 옆 홍매화'는 갓 핀 홍매화의 선선한 모습을 붙박이장의 문틈을 비집고 나오는 외투 깃과 자연스런 연결로 표현하고 있다. 꽃의 개화 속에서 낡은 외투. 삶의 개화를 꿈꾸는 시인의 눈길이 비범하지 않은 것이다.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모든 것들을 꽃으로 바라보고 싶은 시인의 마음은 긍정적인 힘으로 세계의 진보에 기여를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다윗의 '대동여지도'는 언어를 다루는 시인의 힘이 우직하게 느껴졌다. 세계의 핵심에 정공법으로 접근하려는 이러한 정직한 힘은 언어의 충돌이나 지적인 교란에 전념하는 요즘의 신인들의 작품들에 비해서 상대적인 신뢰감을 주는 것이었다. 향후 그가 보다 따뜻한 시선으로 삶을 응시하고 세계의 순정한 꿈을 위한 서정성의 확보에 노력한다면 그가 한 신예작가로서 충분한 자기 목소리를 지닐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응모한 시편들이 일정한 수준을 균등하게 유지하고 있는 점을 상대적 우위로 여겨 최종 당선작을 '대동여지도'로 결정하였다. 한국 현대시를 위한 웅장하고 섬세한 소리결을 지닌 귀한 범종으로 거듭 태어나길 바란다.
곽재구 <시인ㆍ순천대학 문예창작과 교수>
[당선소감]
"더 좋은 시로 보답하고파"
먼저 이 모든 영광 주님의 것으로부터 주님께 돌립니다.
참으로 슬픈 소식들로 제 고향 일대는 지금 비통한 시간을 견디고 있습니다. 이제 막 여수에 내려와 어찌해야 할지 모르고 참담한 심정에 휩싸인 저는, 환한 자리에서 소감문을 쓰기가 이토록 두렵고 송구합니다. 오늘만큼이라도 이 삶에 대한 공동체적 책임과 의무를 통감하고자 합니다.
작품을 선해주신 전남일보사와 심사위원 분들께 경이와 감사를 표합니다. 또한 썩고 장애 입은 시절 저를 끌어안아주신 감당치 못할 스승님들과 사이좋은 이웃이 있었음도 여기 기록해 둡니다. 수수밭 전별기, 적멸을 꿈꾸며, 제비꽃 여인숙, 말향고래 시인님들, 잊지 않겠습니다. (이 못난 제자와 아들을 용서하십시오, 詩부모님들) 그분들의 기도와 가르침 앞에 우뚝 서서 훗날 좋은 시로 보답하고자 합니다. 늘 참시인과 참제자로 거듭날 수 있도록 소망하고 있사오니, 더욱 정진하여 부끄러운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항상 최선을 다해 살도록 하겠습니다. 저를 길러주시는 할머니 사랑합니다. 우즈베크에 계신 강회진 교수님!, 학교에서 꼭 다시 만나요. 제 든든한 강상대 주임교수님 외 단국대, 한서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님께도 감사합니다. 광주ㆍ전남 민족문학작가회의 박혜강 회장님, 귀한 술과 말씀 깊이 새겨둡니다. 김준태 선생님, 어린아이의 목소리로 힘차게 다시 보고 싶습니다. 시누리와 문우들을 위하여. 광덕고, 안양예술고교 문창과여 영원하라. 장경동 목사님, 파이팅 하세요.
마지막으로,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이를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 아멘. (고린도전서 9:16~17)
올 신춘의 시작과 끝을 저는 다만 이와 같이 뿌리고 맺었습니다.
<약력>
조다윗
- 1983년 여수 출생
- 광주 화정초/광덕중 졸업
- 안양예술고등학교 졸업
- 현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 휴학 중
[2008 신춘문예 무등일보]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박문혁
아버지가 다리미 하나 들고 세상 한 가운데 섰다. 비록 세상이 알 굵은 사포처럼 거칠다 해도 창가에서 응원가를 불러주는 벽돌만한 금성 라디오 벗 삼아 묵묵히 하루를 다렸다. 산더미처럼 쌓인 일감은 손목이 아리도록 다림질을 강요했지만, 세상을 배우는 수업료라 여겨 한번 숙인 고개를 좀체 들지 않았다. 그리하여 점점 달인이 되어가던 아버지.
아버지는 다리미로 세상의 모든 근심을 다렸다. 장마 끝으로 축축해진 무등산 호랑이 가죽도 다리고, 학동과 지원동을 돌며 바다를 파는 목포댁의 생선 비린내도 다리고, 매번 귀가할 때마다 술에 취해 흥얼거리는 막노동꾼 김씨의 흘러간 노래도 다리고, 거리에서 붕어빵을 구워 파는 박씨의 희망도, 지하철에서 구걸하는 시각장애인 송씨의 하얀 지팡이도, 등록금 마련을 위해 연탄배달을 하는 대학생의 굵은 땀방울도 스팀을 다려 먹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유방암까지 다릴 수는 없었다.
이제 그 아버지가 3평 좁은 공간에서 홀로 늙어간다. 지금껏 구겨지고 이맛살 찌푸린 것들, 매끈하게 다려 모두 손님에게 돌려주고 마지막 남은 것이라곤 고작 몸에 걸친 한 벌 외로움 뿐. 하지만 중이 제 머리 못 깎듯 아버지는 자신의 외로움을 다리지 못한다. 늦은 밤 나는 아버지가 벗어놓은 외로움을 빳빳하게 다려서 어머니 영정 옆에 쓸쩍 걸어놓는다.
미사일처럼 세워놓은 다리미가 어둠을 다림질하며 하늘로 솟아오를 듯.
[심사평]
-이은봉(시인·광주대 문창과 교수)
좋은 시는 참신한 발상과 세련된 말맛의 활용에서 온다. 참신한 발상은 전복적 상상력, 역발상, 반상합도 등의 언표로 요약되는 새로운 상상력을 뜻하고, 세련된 말맛의 활용은 활기 있고, 윤기 있고, 기품 있는 언어의 활용을 뜻한다. 물론 이런 뜻을 갖는 시를 쓰기는 쉽지 않다. 그것 자체로 한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전체의 진전된 심미적 의식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이것이 무등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한 1천500편이 넘는 시를 읽은 기본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일차 예심에 통과된 작품은 모두 10편이었다. 박문혁의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박월출의 '눈은 내리고 나는 걷고 걸어', 천순덕의 '가슴앓이', 김석윤의 '고비를 횡단하다', 박석준의 '은행 앞, 은행잎 뒹구는 여름날', 홍경화의 '허브향을 맡으면 속이 쓰리다', 박명남의 '떠나야 할 때', 김화정의 '코스모스와 여자', 장화숙의 '구절초 제국', 최영희의 '알흔섬'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 작품 중 최영희, 장화숙, 김화정, 박명남의 시는 정서의 범주가 크고 굵지 못하다는 점에서 맨 먼저 제외됐다. 이어 박석준의 시와 홍경화의 시도 감각이 새롭고 언어가 활달하다는 점에서는 관심을 끌었지만 그것 이상이 없다는 점에서 제외됐다. 곧바로 김석윤의 시도 제외시켰는데, 이 시 지니고 있는 건강한 노동의식을 나머지 시들이 받쳐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천순덕, 박월출, 박문혁의 시를 놓고 장고에 들어갔는데, 최종 당선작으로 선택된 작품은 박문혁의 시였다.
천순덕의 시가 제외된 까닭은 작품의 스케일이 작지도 했지만 발상이나 언어의 운용 면에서 좀더 기다려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박월출의 시는 지속적으로 공부를 하며 자신의 의식과 언어를 닦아온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심사를 맡은 사람을 주저하게 했다. 맨 끝까지 남은 박문혁의 시도 모든 면에서 다 흡족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선작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는 장중한 정서를 바탕으로 건강한 노동의식 및 아버지로 대표되는 시간적 동일성을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두루 주목이 되었다.
당선자에게는 축하를 보내고 낙선자에게는 내일의 영광을 빈다.
-이은봉(시인·광주대 문창과 교수)
[당선소감]
언젠가 모 잡지에서 '에디슨'이 8톤트럭으로 10대 분량이나 되는 공책을 유품으로 남겼다는 사실을 접하면서, 그가 인류의 발전에 공헌하는 수많은 발명품을 남길 수 있었던 결정적 이유는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력의 산물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후 저는 문학계의 '에디슨'이 되겠다는 꿈을 안고 홀로 고독한 언어의 칼을 벼려왔습니다. 그리하여 2년 전에는 불교신문과 경향신문에 단편소설이 최종심까지 오르기도 했습니다. 앞으로도 북망산 초입에서 유언장을 쓰는 각오로 시와 소설을 쓸 것입니다.
이름 석자를 떠올리면 금세 톱밥난로가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시를 논할 때마다 늘 용가리가 되어 불을 뿜는 한상원 선생님과 장승에 혼을 불어넣는 김진문 시인, 내가 힘들 때마다 격려를 적립해 주시는 국립나주병원 위성광 씨, 그리고 청포도문학 동인 여러분에게 신의 가피가 함께 하기를….
아울러 아직 혀가 덜 풀린 저의 음어에 따뜻한 오리털 눈길을 보내주신 생면부지의 심사위원님과 이 행사와 관련해 수고하신 분들, 문화부 기자님, 무등일보사에 잠수정처럼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박문혁
1961년 담양 출생, 본명 박재근
산림청·산림조합중앙회 주최
산림문화작품 공모 일반부 시 부문 대상
청포도문학 동인
[2008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꽃신
김소연
달이 붓는다
가지가 휜다
일터에서 돌아온 어머니
발 매만지면
굳은살 갈라진 발바닥에서
바스락,
낙엽 밟는 소리 들린다
어머니 얼굴에
꽃 지고
단풍마저 떨어져
잔가지들만
힘없이 흘러내린다
새벽녘
새근대는 어머니의
숨소리에서
낙엽 쓸어내는 소리 들린다
숨죽이면
눈발이 날린다
어머니가 벗어놓은
구겨진 신발 위로
새순 같은
새하얀 눈꽃이 핀다
눈부신 꽃신이 된다
비
김소연
빗방울이 소년의 얼굴을 때린다
자전거 바퀴가 천천히 구르고 어깨를 움츠린
소년의 등 뒤 비닐 덮힌 신문지 위로
빗방울이 쌓인다
새벽의 푸른 발등을 한 바퀴 돌아
소년이 반지하 구들장 위에 신발을 얹으면
늘 기침하는 어머니 갈라진 숨소리, 소년을 마중한다
살가죽만 늘어진 마른 젖가슴에 얼굴을 묻으면
어머니 가슴까지 축축이 멍들이는 시퍼런 빗물
소년은 엊저녁 남은 찬밥을 물에 말아
후루룩 마신후 다시
흥건히 젖은 신발에 발을 담근다
우산도 없이 뛰는 소년의 등 뒤에서
책가방이 자꾸만 넘어질 듯 소년을 떠민다
빗방울은 사정없이 소년의 얼굴을 밟는다
<약 력>
김소연
- 1973년 7월 7일 생
-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 현재는 프리랜서로 출판사에서 교정 일을 맡고 있음
<당선소감>
달이 밝고 자연 경관이 빼어난 곳에서 가을을 보내고, 겨울을 맞았다. 처음으로 오래도록 집을 떠나 자연과 가까워지는 시간을 가졌다. 처음 출발은 그런 의도가 아니었지만 결론적으로는 글을 쓰기 위한 것이 되었다. 집을 떠나지 못하고 도심 속에 있을 때는 내 삶의 힘든 것만 보였다. 그래서 시도 힘들었다.
하지만 자연은 나에게 삶을 다르게 바라보는 법을 깨우쳐 주었다. 석 달 가까이 자연의 신비한 기운을 받으며 낮에는 산길을 걷고, 밤이면 달빛에 젖으며 밤이 새도록 만물의 창조주께 내 살 속 깊은 곳에서 곪고 부르튼 상처들을 들춰 보였다. 사람에게는 보일 수 없는 은밀한 것들조차도 자연의 침묵과 그 신비로움 앞에서는 아무것도 감출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나에게 주어진 형벌 같은 이 삶의 고단함과 쓸쓸함까지 감사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연으로부터 들려오는 시의 소리는 삶이 너무 아프기 때문에 시를 쓸 수밖에 없는 그 고통에서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나에게 시인의 정신과 삶을 일깨워 준 스승의 가르침을 되새겨 본다. "눈을 뜬 사람은 반딧불만 보아도 '빛난다'고 할 수 있지만, 눈을 뜨지 못한 자는 태양이 떠도 '어둡다'고 한다. 그러니 너는 눈을 뜨라"고 했다. 눈을 떠야 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고, 그 생활 속에서 시가 온다는 것을, 시의 흐름에는 나의 생활의 흐름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깊은 시는 내가 삶 속에서 그물을 깊이 던져 그것을 있는 힘을 다해 건져 내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끝까지 열심히 할 것이다. 조금 더 수고를 하고 조금 더 애를 쓰면서. 마지막 최고까지 몸부림을 치며 정말 그만두고 싶은 순간에도 목숨을 내걸고 조금 더 올라가고 올라가면 더 엄청난 깊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끝끝내 내 앞에 쌓아 놓은 종이가 바닥이 날 때까지 더 이상 할 수 없을 때까지 그렇게 시를 쓸 것이다.
고기를 몰아야 이미 쳐 놓은 그물망에 고기가 걸리듯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진 고달픈 인생이 시를 쓰겠다는 간절한 소망을 그물망에 몰았을 때 신춘문예 당선이라는 커다란 기쁨이 걸려들었다. 그리하여 나에게 삶에 대한 위로와 더불어 커다란 용기를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진심어린 감사를 드린다. 또한, 나의 소망되시는 하나님과 내가 시를 쓸 수 있도록 늘 사랑으로 가르쳐 주신 나의 스승께도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심사평>
'경제'라는 말의 위력에 비해 '양심'이라는 말의 힘은 너무도 미약해 보이는 것이 오늘날의 상황이다. 경제가 아량을 베풀어 셋방이라도 살게 해줘야 양심이 깃들 곳이 있게 된 세상이다. 하지만 경제는 아무리 먹고 마셔도 배고픈 신화 속의 괴물처럼 만족을 모른다. 그 괴물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미약하나마 양심의 힘이 절실히 필요하다.
시다운 시의 징표 가운데 하나는 얼마나 시에 양심이 살아 있느냐이다. 시 쓰기 자체가 살아가는 의미 찾기와 깊이 연관되는 것이라면 그 의미 찾기의 진실성 여부가 양심의 문제로 나타난다. 그것이 돈이 지배하는 한국사회에서 돈벌이와 무관하게 시를 읽고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무튼 이 땅에 시가 살아 있는 한 희망은 있고 신춘문예의 수많은 투고작 또한 희망의 한 모습이다.
모두 200여 명의 투고자 가운데 마지막까지 검토의 대상이 된 시를 보낸 이는 이문 신지영 심명수 김기훈 김소연씨 등이다. 이문의 '리딩 로드'는 발랄하면서도 생동감 있는 언어구사가 돋보였는데 시상의 초점이 잘 모이지 않는 것이 흠이었다. '그래서 어떻다는 것이야?'라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주제 구현에 좀더 심혈을 기울일 필요가 있겠다. 신지영의 '열섬'은 시적 형상을 구축하는 저력이 배어 있는 시이다. 하지만 투고작 세 편만으로는 시인으로서의 역량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심명수의 '내 책상 위의 포도 한 알 구를 때'는 상상 자체가 신선하고 재미있는 시이다. 사소한 소재로도 얼마든지 좋은 시를 쓸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시이기도 하다. 하지만 함께 투고한 시들이 이 시를 받쳐주지 못하였다.
김기훈의 '월세 방 있습니다'는 가난에 찌들지 않고 그것을 일종의 동화적 상상력으로 날려버리는 시이다. 무거움에 대해 가벼움으로 대응하는 발상이 신선한 시이다. 한편 김소연의 '꽃신'과 '비'도 가난한 삶의 체험을 우려낸 시인데 소박한 언어 속에 속 깊은 마음이 녹아들어 있다. 마지막 두 사람의 시에 심사에 임한 두 사람은 오래 눈길을 주었는데 결국 '소박한 언어 속의 속 깊은 마음'으로 저울추가 기울었다. 잔뜩 화장한 시가 유행하는 풍조에 견주어 중요한 미덕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당선을 축하하며 정진을 빈다.
<심사위원 장석주 최두석>
[2008 강원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소라의 집
김정임
외포리 뻘밭 소라의 집을 보셨나요
굵은 밧줄 한 개씩 기둥처럼 세워서
수 백 개 다닥다닥 붙은 소라의 빈 집들
지금은 선홍빛 노을만 그물질하고 있어요
빈집의 적막이 굴뚝의 연기처럼 피어올라
밀물대신 갯내 나는 뻘밭을 메워가고 있어요
소라의 그물망을 드넓은 바다 어장에 던져두면
호기심 많은 쭈꾸미가 소라의 빈 집으로 스며든다 지요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능소화빛으로 색칠한 대문을 열고
미로같이 꾸불꾸불한 계단을 내려갔을 테지요
발자국 소리가 메아리 되어 울리는
아득하고 속이 깊은 방으로 스며들어
제 꿈을 익히곤 했을 소라의 집
간간이 파도 소리는 열어 둔 창으로 들어 왔다가
꿈의 한 가운데를 현처럼 긋고 나가곤 했겠지요
누군가를 기다리듯 대문 활짝 열어놓은
소라의 빈 집이 나를 자꾸만 끌어 당겨요
제 몸을 던져 꿈을 익혀가던 쭈꾸미처럼,
꿈은 꿈꿀 때 가장 빛나는 순간이 아니던가요
[심사평]
-진정성으로 정제된 단아한 멋
예심을 거쳐 본심으로 올라온 열일곱 분의 응모작 가운데 마지막까지 논의의 대상이 된 것은 권혁찬씨의 ‘노트북’ 외4편과 김정임씨의 ‘소라의집’ 외 4편이었다.
권혁찬씨의 작품들은 일정한 문학적 수준을 유지한다. 주제를 형상화하는 능력이 있고 언어의 선택과 배치에 공을 들인 문체에서 만만치 않은 문학적 역량이 느껴진다.
선이 굵고 리듬에도 탄력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볼 때 산문적으로 읽힌다.
시는 확산의 문법이 아니라 응축의 문법이고 생략의 문법이면서 여백의 문법이다.
언어를 최소화하는 과정 뒤에 남는 광채나는 보석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시들이 좀더 정제되고 표현의 광채를 획득하기 바란다.??
김정임씨의 시는 단아하다 절제에서 우러나오는 응축의 힘이 있고 활달한 어조는 아니지만 작품에서 진정성이 느껴진다. 감정의 과장없이 조심스럽게 망설이듯 전개되는 그의 시들은 자연스럽다. 그리고 깊이 각인되는 예리한 이미지들은 그의 시의 독특함이자 매력이다.
당선작 ‘소라의집’에서 확인 되듯이 노련한 장인의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신인에게 요구되는 패기나 대담함 출렁거림이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그의 당선을 축하하면서 그의 정진을 기대해 본다.
이영춘 최승호, 예심 : 김창균(시인)
[당선소감]
빛을 얻은 언어의 새벽
오늘은 시가 내 안의 어둠을 말끔히 털어내며 내가 소망하는 경이로운 당선소식을 가지고 왔다.
갑자기 울컥 목구멍을 타고 치밀어 오르는 한 덩어리의 붉은 슬픔.
아마 중간 중간 너무 멀게 느껴져 무릎을 꺾으며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고 싶었을 때의,
참담한 기억 때문일 것이다.
예고 없이 경쾌하게 날아든 당선소식에 한없이 기쁘고 행복하다.
내 안에 깊숙이 숨겨진 상처와 어떻게 화해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며 아직 흰 종이에 담아내지
못한 언어들이 탄력을 받게 될 것 같다.
용기와 힘을 얻었으니 채찍으로 알고 더 열심히 써 나가겠다.
부족한 글을 택해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깊이 감사드리며 좋은 작품으로 보답하겠다.
시의 아름다운 문장에 처음 눈뜨게 해 주신 문효치 선생님, 시의 삶을 직접 실천하며 보여주신
박제천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지금 이 시간에도 시를 고민하는 나의 문우들과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다.
<약력>
김정임
- 1953 대구출생
- 경북대 의대 간호학과 졸업
- 2002 ‘미네르바’ 신인상
- 2006 공무원문예대전 행자부장관상 수상
- 서울 평화초 교사
[2008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오리떼의 겨울
이지현
강 위에 오리가 머리를 숙였다 올린다
노란 부리로 쪼아낸 물방울은 베틀을 돌리지 않았는데도
모퉁이에서 가운데로 물결을 만들어간다
물결이 엉키지 않도록
휘휘 발 저어 옮기는 오리들,
혼자서는 저 넓은 강을 물고 날아오를 수 없다고
함께 강을 담아갈 보자기를 짜고 있는 것이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서로의 날갯소리를 엮을 수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코와 코를 매듭지을 수 있다는 것을
결국 삶의 보자기는 혼자 짜낼 수 없다는 것을
오리떼가 함께 날아 오를 때 알았다
살얼음이 발목을 조여와도
강의 끝자락을 팽팽히 잡아당기는 오리떼,
놓고 가는 건 없는지 막바지 점검을 끝낸 후
세상 바깥으로 일제히 날아 오른다
세상 안쪽으로 폭설이 쏟아진다
[당선소감]
"열심히 새로운 짐을 꾸려야죠"
막상 짐을 꾸리는 데는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지만 옮길 것들을 머릿속으로 가늠하면서 하루 해를 다 보내버리기도 했습니다. 보자기는 펼쳤는데 어디서부터 손을 봐야 할 지 몰라 우왕좌왕 했죠. 당선 소식을 듣고 반가움에 앞서 그 짐꾸리던 일들이 퍼뜩 떠오릅니다.
이제 또 짐을 꾸려야 될 것 같은데 너무 무거워서 그 무게를 제대로 가늠하기가 어렵습니다. 제게 새로운 짐을 꾸리는 일은 기쁨에 앞서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는 일은 없어야 겠죠. 묵은 먼지도 열 손가락 마디마디에 묻혀보고 구석에 숨어 있는 동전들도 하나씩 챙기면서 열심히 저만의 짐을 꾸리겠습니다.
제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 우석대 문창과 선생님들, 이용범 선생님, 누구보다 저를 아끼고 사랑하시는 부모님께 이 기쁨을 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 고맙습니다.”
<약력>
이지현
1987년 전북 부안 출생
현재 우석대 문창과 재학중
[심사평]
시문학의 양산, 빈곤한 시대의 역설
시대는 참으로 수상하다. 사람됨의 가치와 삶의 의미가 물질의 위력과 현실 의제에 밀려나는 형국이니 어찌 수상타 하지 않으리오. 사람됨의 최소한의 덕목들이 정신의 가치로 승화되지 못하는 시대는 암울하다. 정신·문화적 가치가 황폐한 시대일수록 이를 안타까워하고 이를 정신력으로 복원시켜야 한다는 욕구는 더 뜨거워지는 것인가?
올해 신춘문예 시부문 응모작품 수가 모두 1351편에 이르렀다. 양적인 수확에서 기록적이며, 각 작품들이 드러내고자 하는 시정신의 치열성에서도 기대에 값하였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작품은 모두 10여분의 응모자들이 투고한 30여 편이었다. 이희정의 ‘기억의 성지’는 시적 완결성에서는 일정한 구성력을 확보하고 있으나 세계를 보는 안목에서 당선작으로 밀기에는 미흡하다는 데서, 원창훈의 ‘FTA’는 현실을 조응해 내고 이를 시적 어법으로 형상화하는 시력은 확인할 수 있으나 전체적인 시적 긴장도가 처진다는 데서, 이혜숙의 ‘빌딩’은 소재가 주는 비인간성의 측면을 예리하게 잡아내고 있으나 시정신의 참신함을 드러내지 못했다는 데서 심사자들의 선택을 망설이게 했다.
마지막까지 남은 이지현의 ‘오리떼의 겨울’은 일단 정통적인 시수업의 흔적을 느끼게 했다는 데서 안정감을 주었다. 삶의 진정성을 담아내기 위해 구축해 내는 이미지들이 여타 응모작들에 비해서 참신하였으며, 소재를 응시하는 서정으로 시의 의미 맥락을 담아내는 솜씨를 인정하면서 최종 당선작으로 삼았다. ‘함께 강을 담아갈 보자기를 짜고 있는 것이다’나 ‘강의 끝자락을 팽팽히 잡아당기는’ 등의 아름다운 의미나 참신한 표현은 시 수업을 희망하는 이들의 귀감이 될 만하였다. 더욱 분발하여 더 큰 시업의 성취를 기대한다.
사족 하나. 응모자들이 서너 편의 응모작 중에서 대표작으로 올린 시보다 그 다음 장의 시들에 호감이 가는 시가 많았다. 야구선수가 어깨에 힘이 들어가면 홈런이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시도 그럴 것이다.
정양(시인, 우석대 명예교수), 이동희(시인)
[2008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가벼운 산
이선애
태풍 나리가 지나간 뒤, 아름드리 굴참나무
등산로를 막고 누워 있다.
오만상 찌푸리며 어두운 땅속을 누비던 뿌리
그만 하늘 향해 들려져 있다.
이젠 좀 웃어 보라며
햇살이 셔터를 누른다.
어정쩡한 포즈로 쓰러져 있는 나무는 바쁘다.
지하 단칸방 개미며 굼벵이
어린 식구들 불러 모아
한 됫박씩 햇살 들려 이주를 시킨다.
서어나무, 당단풍나무, 노각나무 사이로 기울어진 채
한 잎 두 잎 진창으로
꿈을 박고 있는 굴참나무
제 뼈를 깎고 피를 말려 숲을 짓기 시작한다.
생살이 찢겨 있는 굴참나무,
그에게서는 고통의 향기가 난다.
살가죽의 요철이
전 재산을 장학금으로 기탁한
밥장수 할머니의 손등만 같다.
끝내 허리를 펴지 못하는
굴참나무가 세로로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은 편견이다.
굴참나무가 쓰러진 것은 태풍 나리 때문이 아니다.
나무는 지금 저 스스로
살신성인하는 중이다, 하늘 가까이 뿌리를 심기 위해.
[당선 소감]
“비로소 내가 나를 낳은 엄마라는 느낌 들어”
매년 이맘때면 문학을 좋아하는 엄마들끼리 모여서 자그마한 ‘여성문학지’를 만든다. 아이를 낳아 본 적이 있는 엄마들의 곱고 섬세한 손길로 엮은 이 책은 지역사회의 정서를 순화시키고 책 읽는 습관, 문학의 저변확대를 꾀하고자 함이다. 어언 여섯 번째 세상에 나올 우리들의 아기를 기대하면서 출판사 편집실에서 최종교정을 마치고 OK 사인을 내던 찰나에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당선소식이다. 떨리는 손끝과 가슴에 또 하나의 산통이 스친다. 몸속 아기가 앉았던 자리에 시를 앉히고 자신을 낳기 위해 주저하지 않았던 시간이 있었다. 지금 수많은 언어들이 시간의 벽을 허물며 웅웅 메아리친다. 이제 비로소 내가 나를 낳은 엄마란 느낌이 든다. 세상에 갓 던져진 갓난아기인 나를 위하여 막중한 책임이 주어진 엄마가 된 것이다.
당장 배고픈 나를 위하여 옥타비오파스의 말을 빌린다.
“시는 앎이고 구원이며 힘이고 포기다. 시의 기능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며 시적 행위는 본래 혁명적이지만 정신의 수련으로서 내면적 자기 해방의 방법이기도 하다.”
시시각각 파고드는 죽음 앞에서도 아르테미르 여신처럼 즐겁게 시를 낳는 풍요와 다산의 힘을 기르고 싶다.
시를 쓰기 위하여 늦은 나이에 진학한 광주대학교 문창과 대학원이 고맙다. 열심히 지도해주신 이은봉, 신덕룡 교수님, 외에도 문예창작과 교수님들 모두에게 깊은 감사드린다. 그리고 아내이기보다는 공주이기를 소망한 나를 탓하지 않고 묵묵한 눈길로 지켜봐 주신 남편과 함께 공부한 지선, 성희, 인드라망 문학모임 식구들과 이 기쁨 함께 나누고 싶다. 예기치 않은 기쁜 소식 주신 서울신문사와 부족한 작품을 뽑아주신 고려대 최동호 교수님을 비롯한 여러 심사위원님들께도 큰 절을 올린다. 좋은 시로 갚아야 할 너무 큰 빚이다. 앞으로 더욱 열심히 치열하게 시를 낳는 엄마가 되기를 자청해본다.
■ 이선애 약력
-1955년 전남 여수 출생
-2006년 방송대 국문과 졸업
-광주대 대학원 문예창작과 재학
[심사평]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 돋보여
예선을 거쳐 본선에 올라 온 시편들을 정밀하게 읽고 이에 대해 논의한 다음 다시 최종심의 대상을 다섯 편으로 압축하였다.‘낡은 피아노에는 빗소리가 난다´(송인덕)는 자연스러운 시상의 전개가,‘난초와 칼´(이연후)은 이미지의 선명성이,‘양치하는 노파´(한세정)는 시적 함축성이,‘바닷가 떡집´(김영진)은 진득한 삶의 감각이,‘가벼운 산´(이선애)은 시적 발상 전환이 돋보였으나 각각 그 나름의 약점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의 시편을 놓고 좀 더 범위를 좁힌 결과 세 편의 시가 남게 되었다.‘난초와 칼´은 이미지의 선명성은 두드러지지만 대립구도가 너무 단순하고,‘가벼운 산´은 시적 발상 전환이 참신했으나 설명적인 부분이 시적 밀도를 약화시켰으며,‘낡은 피아노에는 빗소리가 난다´는 자연스러운 시적 전개가 강점이지만 상식의 틀을 크게 넘어서지 못했다는 점이 아쉬웠다.
엇비슷한 수준의 작품을 놓고 논의를 거듭한 끝에 심사위원들은 ‘가벼운 산´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는데 이는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의 참신성과 더불어 그 속에 담긴 삶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특히 전 재산을 장학금으로 기탁한 밥장수 노파의 손등에서 고통의 향기를 관찰한 시인의 시선은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솜씨와 더불어 눈여겨볼 만한 점이라고 하겠다. 삶을 바라보는 독자적인 시선이 시적 구도 속에서 빛날 때 남다른 작품이 탄생한다는 사실을 신춘문예 응모자들은 다시금 되새겨 주기 바란다.
오세영·최동호
[2008년 국제신문 시 당선작]
마농꽃*이 걸어서 우체국에 간다
이언지
가을, 입질이 시작되었다
만물이 보내는 연서가 속속 배달 중이다
온몸이 간지럽다
배롱나무 붉은 글씨는 화사체라고 하자
작살나무가 왜 작살났는지
내야수는 내야에만 있어야 하는지
계집들의 질문이 쏟아진다
작살나게 이쁜 열매가 미끼였다고
의혹은 무조건 부인하고 보는 거야
경자년이 정해년에게 속삭인다
낮은 음들이 질러대는 괴성에 밥숟갈을 놓친 귀들
은해사 자두가 맛있었다고 추억하는
입술을 덮친다
누가 빠앙 클랙슨을 누른다
-당신의 유방이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테이프을 갈아끼우는 사이
농염의 판타지가 물컹 섞인다
비탈 진 무대에서 마지막 스텝을 밟는다
끼어들고 싶다 소리와 소리 사이
스텝과 스텝 사이, 소문과 소문 사이
납작하게 드러눕고 싶다
내 것도 아니고 네 것도 아닌
죽은 나에게 말 걸고 싶다
거시기, 잠깐 뜸들이고 싶다
마농꽃이 걸어서 우체국에 간다
노랑 소인이 찍힌 연서는
하룻밤만 지나면 사라질 것이다
사라져 도착할 것이다
소멸을 윙크하는 가을 프로젝트
데카당스도 이쯤이면 클래식이다
*마농꽃 : 달래의 제주 방언, 샤프란
[심사평]
-탁월한 언어 솜씨와 거침없는 상상력의 힘
그러나 시의 경향은 전반적으로 전통 서정시의 큰 흐름을 넘어서는 실험적 시도가 크400여 명의 시 1800편을 읽으면서, 여전히 한국시의 지층은 흔들리지 않고 있음을 확인했다. 시인도 많지만 아직도 시인 지망생도 많음을 새삼 확인하는 자리였다.
게 보이지 않았다.
시의 수준은 상당히 평준화 되어가고 있는 모습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만큼 패기만만하면서도 신인으로서의 놀라운 역량을 엿보게 하는 발군의 작품들이 많지는 않았다.
그런 중에도 김진의 '달, 멈추다', 김미혜의 '몽유', 김정의 '숨 쉬는 고서점', 이언지의 '마농꽃이 걸어서 우체국에 간다' 등은 최종 논의 대상 작품으로서 시를 읽는 즐거움을 맛보게 했다.
'달, 멈추다'는 설화적 이미지를 현재화하는 발상 자체는 살만 했지만, 그 현재화를 통해 보여주고자 한 이미지화가 선명하게 부각되지 못한 한계가 보였다. 시는 세계에 대한 시인의 새로운 해석이란 점을 새삼 환기시켜 주었다.
'몽유'는 예민한 감각을 통한 이미지화나 새벽의 분위기를 형상화하는 시선은 좋으나, 시어 선택에서 아직은 개성적인 자기 언어를 창출하는 힘이 모자랐다.
시인은 일상어를 자기 언어로 새롭게 전환시켜가는 힘을 스스로 내장하고 있어야 한다.
'숨 쉬는 고서점'은 활달한 시적 상상력의 전개라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나, 그 상상력을 밑받침해줄 수 있는 이미지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한계가 지적되었다.
이에 비해 '마농꽃이 걸어서 우체국에 간다'는 우선 언어를 다루는 솜씨가 언어유희에 가까울 정도로 능수능란함을 보여주고 있다.
또 인간의 내밀한 욕망을 드러낼 듯하면서 감추며, 감출 듯하면서 드러내는 암시적이며 은유적인 시적 전개와 거침없이 펼쳐가는 상상력의 힘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이와 함께 다른 작품들이 보여주는 시적 수준도 앞으로의 가능성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역량을 보여주었기에 심사위원 전원은 '마농꽃이 걸어서 우체국에 간다'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정진을 빈다.
본심 심사위원 - 문정희· 남송우·정일근
[당선소감]
-시 쓰기란 마음의 불순물을 제거하는 행위
이언지
잔뜩 찌푸린 하늘을 바라보며 태안 바닷가에서 방제 봉사를 하고 있는 아들녀석을 생각하고 있을 때 빗방울처럼 당선 축하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이 다정히 만나는 시를 쓰고 싶었다.
깊어질 수만 있다면 기꺼이 아프고 싶었다.
내 행복은 고통 속에 있다는 걸 알기까지 참 많은 가을을 낭비했다.
자명한 인식이 상상력을 끌어당기는 바로 그 지점에 내 시가 있어야 함을 어렴풋이 안다.
묵묵히 바다의 얼굴을 닦고 있을 아이의 분주한 손길처럼 시쓰기란 마음의 불순물을 제거하는 행위일 것이다. 끝없이 밀려드는 세상의 때를 닦아내는 일일 것이다.
하얀 흡착포에 묻어나던 시의 분비물을 빗방울이 와서 태워버린다.
늘 바깥보다 안이 추웠다. 그럴수록 시의 손발은 더욱 뜨거웠다.
눈만 높아 시집 못 간 노처녀같은 시에 면사포를 씌워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의 절을 올린다.
시를 익힐 무렵부터 기꺼이 시의 동료로 대해 주셨던 유병근 선생님, 늘 푸른 나무처럼 곁을 지켜주시는 부모님, 시인이 되기 전부터 시인으로 불러주었던 믿음직스러운 내 아들 혁, 흐린 날 함께 달을 찾아 다니던 당신, 당선 소식에 자신의 일처럼 기뻐해주시던 시의 동료들, 모두 모두 따뜻하고 고마운 인연들이다.
<약력>
본명 이선숙
▷1961년 부산 출생
▷국제문예아카데미 수료
▷한때 구성작가로 활동
[2008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책장애벌레
이종섶
낡은 책장은 망치로 부수는 것보다
드라이버를 사용하는 것이 더 간단하다
나무의 이음새마다 박혀있는 나사못
숨쉬기 위해 열어놓은 십자정수리를 비틀면
내장까지 한꺼번에 또르르 딸려 올라오고
허물처럼 남아있는 벌레의 집에
어두운 그림자가 밀려들었다
안간힘을 다해 붙어있는 것들을
대여섯 마리씩 잡을 때마다
하나 둘 떨어져나가는 책장의 근육들
바닥에 납작 주저앉을 무렵엔
한 줌 넘게 모인 애벌레가 제법 묵직했다
가지와 가지 사이를 물고
깊은 잠을 자야했던 동면기가 끝나면
훨훨 나비가 되어 숲속으로 돌아갈 줄 알았는데
책장이 늙어버린 탓에
애벌레만 집을 잃고 말았다
꼼지락거리는 것들 땅바닥에 던져버리려다
회오리돌기가 마디마디 살아있어
공구함에 보관해둔다
상처도 없고 눈물도 없으니 언젠가는
다시 나무속에 들어가 살게 될지도 모른다
밤만 되면 꾸물꾸물 기어 다니는 소리
나무의 빈 젖을 물고 싶어 오물거리는 소리
고아원의 밤이 깊어간다
[심사평]
“독특한 상상력… 개성 돋보여”
결심에 오른 작품들의 수준은 작년보다 높았다. 언어를 다루는 능력이나 깊이 있는 주제를 다루려고 노력한 점 등에서 대부분의 작품이 일정 수준에 올라 있었다. 그러나, 신춘문예 투고작들이 종종 그렇듯이 요설로 인해 불필요하게 글이 길어진 작품이 많다는 점, 그리고 개성적인 작품이 드물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이 중에서 다섯 사람의 작품이 거론되었다. ‘흑백필름’은 착상의 신선함에서, ‘털과 향로’는 섬세한 언어구사에서, ‘졸참나무 숲’은 주제를 추구하는 힘에서 좋은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이 작품들은 약간씩의 결점도 가지고 있어 당선작으로 밀기에는 미진하였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집’과 ‘책장애벌레’를 놓고 꽤 오랜 시간 숙의하였다. 나름대로의 장점을 갖추고 있어 우열을 가리기가 어려웠던 때문이다.
‘그녀의 집’의 지은이는 상상력이 풍부하고 다양한 시어를 자유롭게 엮어가는 솜씨가 돋보인다. 특히 이 작품은 장애를 가진 몸으로 아이를 길러내는 여인을 토마토 나무와 연결하여 건강성을 추구한 짜임새 있는 전개가 좋았다.
‘책장애벌레’는 독특한 상상력을 보여준다. 낡은 책장을 부수는 과정을 담은 이 시는, 해체된 책장 자체보다 책장을 지탱하였던 나사들에 주목하였다. 나무를 물려 책장을 구성했다가 할 일을 잃은 나사들에게 연민과 애정을 표현한 이 시는, 이 시대에 자기 자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상실감을 우회적으로 전달한다.
숙고 끝에 심사위원들은 시적 표현의 세련미보다는 개성 쪽의 손을 들어주기로 했다. ‘책장애벌레’는 생생하고 힘이 있어 감동을 창출하는 데 좀 더 강했다. ‘그녀의 집’도 당선작이 될 만한 역량을 가지고 있었기에 아쉬움이 남는다. 좌절하지 말고 좋은 시를 쓰기를 기대한다.
심사위원: 김명인, 양애경
(예심 심사위원: 이정록, 박형준)
[당선소감]
“시는 진실한 나의 평생친구”
시를 습작하기 시작했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시와 함께 걸어온 듯 했으나 실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시는 날마다 나의 위로와 기도가 되었으나 나는 돌아서면 시를 잊어버렸다. 시는 나에게 기꺼이 친구가 되어주었으나 나는 결코 시의 친구가 되어주지 못했다. 시가 나에게 찾아와 조용히 말을 걸 때마다 나는 귀 기울여 들어주지 못했고 내 길을 가기에만 바빴던 것이다.
그러다 본격적으로 시 쓰기를 한 이후는 오히려 내가 시를 붙잡으려고 무던히 애를 썼고, 동시에 시를 절망하고 원망하는 일이 많았었다. 뒤늦게 다시 손을 벌리는 내가 친구에게 해서는 안 될 행동이었다. 그렇게 지내는 동안 친구와 함께 계속 한 길을 걸어갈 수 있을까 또다시 저울질 하곤 했었는데, 바로 그 순간 시가 슬며시 내게로 와서 내 손을 꼭 잡아주었다. 오랜 친구와의 반가운 해후가 이루어진 순간이었다. 이제 서로의 마음을 깊이 알고 이해하는 사이가 되었으니, 그동안 시가 나를 친구로 대해주며 나를 지켜주었던 것처럼 나도 시를 내 진실한 친구로 대하며 살고 싶다. 친구 이야기를 잘 듣고 잘 전하며 살고 싶은 것이다.
이 친구를 내게 보내주신 하나님께 제일 먼저 감사드린다. 가족과 함께 몇몇 이름도 부르고 싶다. 사랑하는 아내 선미와 두 딸 가을과 하늘, 시를 쓸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주었던 최영환 조수일 백미경 시인, 시의 깊이를 위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박은영 시인, 함께 동행하고 싶은 최은묵 시인.
무엇보다 심사위원들께 머리 숙여 깊이 감사드린다. 부족한 시를 뽑아주신 그 뜻을 알고 더욱 정진할 것을 약속드린다. ‘18일에 본심이 끝났으나 성탄선물을 드리려고 24일에 전화했다’는 대전일보사에도 가슴 벅찬 감사를 드린다.
이종섶
1964년 경남 하동 출생
한양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 졸업
2007년 기독교타임즈문학상 시 당선
2008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전북중앙신춘문예 시 가작
경건한 설거지
노 기 민
닦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세안을 하고, 커피를 마시고
방 안 홀로 앉아
눈을 감고 나서야 나는,
온전히 나의 찌꺼기를
바라 볼 수 있었다.
굳게 두 손을 맞잡고, 결을 따라
일(日)을 문지르고, 시(時)를 문지르고
분(分)을 문지른다
거품이 나고 후회가 들고
씻겨나가고 결심을 해도
그래도, 닦이지 않는 얼룩.
아, 나에게도 세척기가 있다면!
일정한 습도와 온도에서
나는 젖어졌다가도 금세 물기 없이
말라지고, 오랜 시간 물에 담겨져
불려 지지는 않을 테니.
아니다
제 스스로도 닦을 수 없다면
그것이 온전한 마음이라고
말할 수 없으리라
닦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시 당선 소감
노기민
먼저 제게 과분한 선물을 준비해주신 주님께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글이 너무도 쓰고 싶었습니다. 집안 형편이 넉넉지 못하는데 고집을 부려 올해 예술 고등학교로 전학을 왔습니다. 부모님의 허리를 더 휘게 하면서까지 제가 걸어가야 할 ‘행복한 길’ 이었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과 뜻대로 시는 써지지 않았습니다. 머리를 쥐어 뜯어가며 아침을 맞이하는 날이 잦아지기만 합니다. 이제는 거짓이 아닌 더 나은 진실된 글을 쓰고 싶습니다.
12월이 되자 수험생이라는 부담이 저를 짓눌렀던 솔직한 심정도 남깁니다. 창작과 진학 그리고 온 집안의 갈등 속에서 제가 뻔뻔해지지 않으면 고개 들 곳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말라며 선생님께서 신춘문예를 권유해 주셨습니다.
제가 감히 어떻게, 어떻게, 하던 마음이 설마, 설마 하면서 투고한 신춘문예, 사실은 당선 소식을 통보 받게된 크리스마스이브에도 저는 제 의지보다 써지지 않는 시를 또 부여잡고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작으로 입선이 되다니….
와우, 정말 꿈만 같은 일이었습니다. 부모님과 선생님께 어느 선물보다도 값진 선물을 가져다 드릴 수 있어서 너무나 기뻤습니다.
많이 모자라고 부족한 제게 이렇게 큰 상을 주신 심사위원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무 말 없이 아들과 손자를 믿고 계시는 부모님과 조부님께 큰 감사드립니다. 저를 바른 길로 이끌어 주시는 안명옥 선생님, 배용제 선생님, 김기혁 선생님, 전학을 다짐받고자 했을 때 반드시 그 꿈을 이루라고 말씀해 주셨던 정현호 선생님, 어느 누구보다 저를 아껴주시고 저를 위해 기도 해주시는 조다윗 선생님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까마득히 멀기만 한 글쓰기, 발바닥이 시라 여기며 충실한 삶을 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고양예술고 문예창작과 동기, 후배들에게도 추운 날 군고구마 하나씩 까서 내밀 듯 고맙다는 말 전하고 싶습니다.
함께 의지하고 있는 혈열(血熱) 문우들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기쁘기도 합니다. 부끄러움보다 더욱 두렵기도 합니다. 이를 견뎌내듯 시와 함께 저도 그 사랑을 글로 보답하고자 합니다. 오늘의 감사함을 무게로 달고, 열심히 뛰겠습니다. 정진하겠습니다.
※노기민
·1990년 서울생
·고양 예술고 2년
시/시조 신춘심사평
운문분야에 응모한 작품은 200여 편이다. 작년의 편수에 비해 현격하게 줄어든 숫자이다. 투고자들의 호응도가 낮은 반면에 응모작의 예술적 성숙도는 작년에 비해 진전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양식의 구분 없이 일정한 수준에 도달한 네 사람의 투고 작품을 본선 심사대상으로 삼았다. 고선례의 ‘낙타 등’ 외 2편, 김지고의 ‘명함’ 외 2편, 노기민의 ‘경건한 설거지’ 외 4편, 임해야(필명)의 ‘앵무새의 꿈’ 외 4편이 그것이다.
각자 투고한 3~5편의 작품들을 대상으로 숙고를 거듭한 결과 결선대상을 두 명의 응모작으로 압축했다. 그 기준은 다음과 같다. 첫째 개인별 투고 작품의 전체 수준, 둘째 이미지의 활용과 상상력의 전개 등 예술적 형상화 능력, 셋째 신인으로서의 도전정신과 참신성 등이다. 노기민과 김지고의 작품들이 임해야와 고선례의 그것들보다 상대적인 우위성을 확보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명함’ 외 2편은 소재를 다루는 솜씨나 그것에 대한 시적 발상에서 독특한 감각과 개성을 보여주고 있다. ‘경건한 설거지’ 외 4편은 메시지의 전달에서 호소력 있게 다가온 점이 인상적이었다. 노기민은 ‘설거지’라는 소재를 통하여 ‘수신(修身)’이라는 인간사(人間事)의 중요한 문제에 접근해 간다. 그것은 세척기에 그릇을 씻는 것처럼 “닦는다는 것”이 쉽지 않은 ‘마음’과 관련된 일이다.
사소한 생활 속의 소재에서 의미심장한 삶의 어떤 측면을 관찰하여 그것을 형상화하는 작업이 쉽지 않다. 그러나 “생(生)을 낳기에 아직 많이 어린”(‘탄생’) 노기민의 작시법은 기성 문인의 그것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신인으로서의 자기스타일과 도전정신이 필요하다. 김지고의 작품은 사변적(思辨的)이거나 관념적인 경향을 띄고 있다. 이러한 작품은 시적 의미를 포착하기가 어렵다.
“검버섯꽃 환하게 펼쳐든 불안(佛顔)”([불안의 거처])이나 초강력 점착제인 ‘쥐포수’를 소재를 삼은 작품들이 그렇다. ‘쥐포수’나 ‘불안의 거처’에 의미가 부재(不在)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중심주제가 모호하거나 분산되는 것은 메시지의 전달이나 독자의 호소력을 불러일으키는데 장애 요인이 된다. 이러한 점에서 김지고는 노기민과 대조되는 개성과 창작스타일을 보여준다. 노기민은 ‘비밀’이나 ‘땀’의 경우처럼 패기가 부족하고 기성문단의 조류에 편승하는 경향이 있다.
김지고는 자기 스타일을 추구하려는 도전정신이 충일하다. 그의 작품 또한 참신한 느낌을 준다. “생의 가장자리”에 어릿거리는 “노오란 풍경”을 떠올리게 만든 ‘명함’이 그러한 예이다. 시예술의 과녁을 겨냥하여 언어를 날렸던 무수한 인고의 세월이 ‘명함’처럼 건네진 ‘가을낙엽의 이미지’에 각인되어 있다.
‘명함’과 ‘경건한 설거지’ 중 어느 한 작품을 탈락시키기가 난감하다. 각각의 작품이 지닌 미덕과 단점이 뚜렷이 대비된다. 당선작 없는 가작으로 두 작품을 결정했다. 노기민과 김지고 당선자들에게 정진의 자세를 당부하면서 축하의 말을 전한다.
<전정구 전북대 교수>
2008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가족
조성식
집에 들어서면 대문 옆에 헛간이 서고처럼 서 있는데 처마 끝에 도서 대여목록 카드처럼 여섯 자루의 호미가 꽂혀 있다. 아버지 호미는 장시간 반납하지 않은 책처럼 한번 들고 나가면 며칠씩 밤새고 돌아온다. 산비탈을 다듬는지 자갈밭을 일구는지 듬성듬성 이가 빠져 자루만 조금 길면 삽에 가까운 호미, 그 옆에 어머니 호미는 가장 많이 빌려 보는 연애소설 같다. 테이프 여러 번 붙인 표지에서 파스 냄새가 난다. 빛나는 손잡이에 밥주걱의 둥근 날을 가진 넉넉한 호미, 땅을 파는 일보다 아버지가 파 놓은 흙을 다시 훑어보는 돋보기 알 같은 눈 밝은 호미, 나란히 서 있는 아내와 내 호미는 주말이나 가끔 들고 나가는 장식용 백과사전, 철물점 쇳내도 가시지 않은 두 자루 쇳덩어리, 제대로 땅 한 번 파지 못하고 마늘이나 고구마 살점만 물어뜯는 날선 칼날, 그 옆에 장난처럼 걸려 있는 아이들의 호미가 있는데 할아버지 할머니 밭에 나가실 때 말동무로 따라 나서는 동화책같이 착한 호미가 한집에 산다.
〈심사평〉
문효치·신규호·손해일
호미와 도서관 카드 결합한 발상 참신
본심에 올라온 응모작들이 비교적 고른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시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다시 살아나고 있는 것 같아 흐뭇하다.
세상을 바라보는 고정된 시각을 버리고 어떻게 세상을 새롭게 보는가에 심사의 초점을 맞췄다. 시의 값은 세상과 사물의 내면에 숨어 있는 비의(秘意)를 캐내는 데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풍경〉은 시를 다루는 솜씨가 퍽 세련돼 있다. 삶의 갈피에 품은 신비성과 아픔 등이 거슬림 없이 흐르고 있다. 그러나 소재의 진부성과 새로운 시각이 부족하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2007 몽유도원도〉는 비교적 새로운 구성법과 다양한 상상력을 거느리고 있으나 다소 산만한 느낌이 들어 최종선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가족〉을 당선작으로 뽑기로 했다. 도서관의 카드목록과 농기구인 호미를 결합해 시를 구성한 발상이 매우 참신했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가지의 사물을 매우 절묘하게 합성함으로써 읽는 이에게 새로움과 감동을 느낄 수 있게 했다. 가족의 분열 현상으로 따뜻함을 잃어가는 현대의 을씨년스러움을 극복하고 가족 각자의 기능과 역할을 통해 가정의 포근함을 회복하려는 숨은 메시지도 이 시대에 매우 뜻 깊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작품도 구성의 단순성이 지적되었다. 좀더 많은 사유와 상상적 세계를 구축하는 힘을 기른다면 매우 좋은 시인이 될 것으로 심사위원들은 믿는다.
당선소감
-조성식
호미 손잡이 빛낸 부모·이웃이 스승
호미가 시의 선생님입니다. 호미의 손잡이를 빛나게 하는 아버지 어머니, 함께 땅을 파는 이웃들의 갈라진 손금이 시의 스승입니다. 시는 쓰는 게 아니라 그려야 한다고, 팔순의 어머니 눈에 선하게 읽혀지는 시. 그 밑그림에 색만 덧칠하는 것이 저의 몫입니다.
시와 꽤 오랫동안 함께 걸었습니다. 내가 먼저 불평을 했고 이별을 고한 적도 있었습니다. 시는 아무 말 없이 그림자처럼 제 뒤를 따라왔습니다. 무거운 제 몸에 시가 날개를 선물합니다. 이제 내가 시를 등에 업고 이웃들에게 날아갑니다. 무디고 날카로운 세상의 일을 다 받아주는 땅으로 시의 뿌리를 내리고 싶습니다. 당선 소식이 늦게까지 잠 못 이루게 합니다. 소주잔에 기쁨 반 두려움 반을 따라 마십니다.
부족한 작품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비무장지대 동인들과 시의 라이벌 은기찬 형, 시 쓰기에 늘 격려해주신 이정록 형과 밤늦도록 술잔을 비우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조준희 조은진, 아빠가 오늘처럼 행복할 때가 또 있을까.
△1967년 충남 예산 출생 △순천향대 국문학과 졸업 △1998년 충청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비무장지대 동인 △현 예산농협 근무
2008 불교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그 흰 빛
박 지 선
장롱 맨 아래
한지에 곱게 싸여 있는 한 필의 모시
철이 바뀌어도
결코 위아래 섞이는 일 없다.
깊은 禪定에 든 석불 같다.
하나의 풀씨가
한 필의 베로 태어나기까진
잿물로 살과 피를 녹이는 고통이 필요하다.
흐르는 시냇물 속에서도
물살 거스르지 않고 버티다가
올곧은 백발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쪼개지고 비벼지고
다시 수많은 시간을
모닥불로 담금질을 당하는 동안에도
모시의 生은
동그랗게 이어져간다.
마냥 엉클어져 있다가도
북이 오가고 딱딱 바디 오르내리며 장단이 울리면
모시는 그것이
죽비의 깨우침이란 것을 안다
죽비가 어깨를 내려칠 때마다
몸을 낮게 낮추던
씨줄과 날줄이
서로 손 내밀며 정갈하게 일어선다
달구어진 여름 내내 매미의 울음소리
지천으로 흐르다가
겨우 엷어질 즈음
비로소 그 흰 빛 모시는 긴 터널을 빠져 나온다.
한번 흘러간 것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오래 견뎌야만 하는 것을 알았을까.
풀기 빠진 가슴을 서로 맞잡은
모시의 손이 따뜻하다
장롱의 어둠 속에서 홀로 깨여있는
그 흰 빛.
아직도 긴 겨울밤 잠 못 드는 어머니다.
당선 소감
박 지 선
“기쁘다 삼보전에 참배 가야겠다”
만선의 깃발을 날리며 포구에 들어서는 아버지의 불콰한 얼굴은 우리 육남매의 풍요로운 삶을 제공하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유년은 늘 행복했고 영원히 지속되리라 믿었었다. 풍족함으로 출렁이던 바다는 하루 아침에 소금기로 반들거리는 성에에 조금씩 절룩거리기 시작했다. 정부의 산업개발로 호남정유공장이 세워지고 나의 유년의 꿈이 뿌리내린 터전을 제칠 비료공장은 먹어버렸다. 비료공장은 소화불량으로 쉼 없이 방귀를 뀐다. 지독한 유황냄새를. 그 냄새에 산천은 중독되어 해골처럼 청 푸르던 소나무 꼬챙이가 되어버렸다.
봄이면 꽃피고 가을이면 튼실한 감이 물결치던 나의 집 도토리 같은 육남매가 골목을 지날 때면 애기씨 라는 호칭이 내 앞에서 허리를 굽혀오곤 하던 고향 그 골목 굽혔던 허리들이 빳빳하게 펴지면서 더 이상 애기씨는 없었다.
내 앞에 옹벽처럼 서있던 이웃들 세상엔 영원으로 이어지는 것은 불성 뿐이라는 걸 그때는 몰랐었다 ‘소유(所有)’는 ‘비소유(非所有)’라는 걸.
나의 내륙에 짠물이 차오르고 어머니는 길쌈을 하기 시작했다. 베틀 밑에서 자고 밥을 먹고 학교를 다녔다. 바디소리에 잠을 깨고 나는 그 바디소리가 끔찍이도 싫었었다. 낮이나 밤이나 베틀에 앉아있는 어머니는 왜 그리 싫었을까?
그렇게도 혐오스럽던 베가 나의 혼수품이 되었다. 어머니는 명주, 삼베, 모시, 무명베 한 필씩을 주셨다. 명주 베는 지인들 머플러로 나누어주고 삼베는 홑이불이 되어 어머니 말씀대로 아이들을 고슬고슬하게 키웠다. 촘촘히 짜 내려간 어머니의 삶이….
혹여나 하면서 기다리던 소식 너무나 기쁘다. 삼보전에 참배를 가야겠다. 108배는 해야 할 것 같다. 지금부터 나는 뭍에 매여 땔감밖에 되지 못했던 아버지의 배 세척을 내안의 시의 바다에 띄우고 파도 보다 사나운 언어들로 어머니의 베를 한 올 한 올 직조 하련다. 그리고 늘 시 공부 한다고 늦도록 불을 끄지 않아 방 밖을 서성거렸던 남편과 사랑하는 아들, 딸, 늘 함께했던 시의 도반 박성희님 이선애님과 이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다.
시.시조 심사평
정 완 영 시인
“멸치떼 빛깔처럼 반짝인 작품”
내가 불교신문 신춘문예 응모자와 한자리 앉아보기는 참 오랜만이다. 아무러나 ‘재회’라는 것은 어떤 의미로거나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도 60년 세월을 그 둘레에서 방황해 온 문학도로서 하나의 도반의식에서 더더욱 반갑기도 하다. 선자의 손에 넘어 온 작품이 무려 천 3백 여 편, 시와 시조가 예심도 거치지 않고 한 타래로 묶여져 있다.
한 작품에 한 번씩만 눈길을 돌리자해도 사나흘이 걸렸다. 고역이 아닐 수 없다.
그 보다 더 큰 고역은 운문도 산문도 채 아닌 불성실한 작품이 너무 많았다는 사실이다.
이 거품을 걷어내는 초선을 거쳐 선자의 손에 쥐어진 작품은 20여 편, 재심에서 10여 편을 줄이고, 종심까지 온 작품이 6편이다.
‘그 흰 빛’(박지선), ‘돌의 幻 ’(김자성), ‘치자 향’(임형신), ‘ 華嚴의 꽃’(이우식), ‘산소에 앉아’(김종빈), ‘동자꽃 필무렵’(김용채), 자유시가 3편, 시조가 3 수이다.
‘돌의 幻’과 ‘치자 향’도 좋은 작품이기는 하나, 장롱 속에 갈무려 둔 한 필의 명주, 그 잔잔한 심층의식이 과장 없이 결 고운 호흡을 하고있어 마치 ‘어느 아침바다에서 건져 올린 멸치 떼 그 빛나는 비늘들을 보는 것 같아’ ‘그 흰 빛’ 에게 자리를 내 주기로 했다.
나머지 3수는 시조인데, 시조는 자유시에 비해 절제와 응축, 관조와 직관 , 그리고 그 지절을 세우는데 있어서 자유시보다 더 앞서가야 한다는 것을 말해 두고 싶다.
2008 경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여자의 풍선
오지영
내 몸에 알록달록 풍선이 살고 있어요
풍선 속을 가득 채운 심장 모양의 푸른 바람을
나는 ‘그’라고 부르며
가끔 등에 태우고 둥둥 떠다니기도 하지요
둘의 호흡이 달처럼 둥글게 부풀어 올랐던
절정의 꼭대기에서
싱싱한 나무가 급사하는 것을 목격한 후
내 고운 풍선들도 그 비슷한 소멸, 아니면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어요
팽창의 한계점에서 존재를 확인하는 순간, 펑
새벽이 어둠을 밀쳐내고 또다시
거대한 풍선을 안아 올릴 때까지
웅크린 내 몸 구석구석에서 새는 바람 소리
편두통처럼 아리게 들려왔어요
즐거운 나의 집
왁자지껄한 일상에 매달려 아찔하게 흔들릴 때도
아이들은 손뼉 치며 환호성을 질러댔고
개 발자국에 밟혀 사라진 보랏빛 환상이며
애당초 불량으로 태어나 버림받은 회색빛 가슴까지
몸 가득 알슬기했던 팽팽한 풍선은
손 뻗어 꺼내기도 전에 사라져가고 있었어요
허공에서 발버둥치는 텅 빈 무게
알알한 합성고무냄새가 집안 가득 차기 시작했어요
물렁물렁하게 잡히는 비닐거죽, 바람도 느낄 수 없어
단단하고 선명한 시간이 사그라지고 있어요
알록달록 풍선을 몇 봉지 더 사왔지요
내 배란주기보다 짧게 살다가는 생을 위하여
몸 가득 오색바람 채우고 날아오르기 위하여
당선소감
눈부시게 떠오른 해를 감당할 수 없어 등산복을 차려입고 문을 나선다. 아파트를 둘러치고 있는 천마산 가는 길로 발걸음을 옮긴다. 땅위에수북히 쌓인 죽음의 조각들이 땅속에 숨은 생명의 겉자락과 만날 때마다 숨소리가 들렸다. 바람을 앞질러가는 거친 숨소리, 아마 두어 시간 한 걸음 한 걸음 정상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얼마 전 김남조 선생님께서 열여섯번째 시집 ‘귀중한 오늘’ 출판기념 인터뷰에서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시인은 처음부터 지혜로우면서 열정을 가지는 것은 아니고 되려고 노력하고 되려고 하는 방향을 인식한다.”
평생 시를 위해 살아오신 시인의 모습이 잘 드러난다. 원로시인이지만 아직껏 시를 위해 노력하고, 살아계신 동안 끊임없이 노력하려는 시인의 삶이 시금석처럼 내 마음에 남아있다.
그렇다. 산을 오르면서 겪게 되는 숨가뿜과 고난이 있는가하면 숲에 살아가는 나무들과 생명, 내딛는 발걸음에서 느끼는 존재감 등의 귀한 것들도 가득한 것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방향을 올바르게 인식하여 끊임없이 노력하는 삶은 반드시 정상을 만날 수 있다고 본다. 시에 대한 열정도 이와 같지 않을까? 저 멀리 내가 서야할 봉우리가 보인다. 너무 기쁘다. 어린 아이처럼 마구 소리치며 날아가고 싶다.
이곳까지 올 수 있게 늘 채근하고 이끌어주신 문학회 동인들, 스승님과 선배님들, 지친 일상 가운데 여유로운 웃음을 건네주던 직장 동료들,감사하고 또 사랑합니다. 부족한 시에 꿈을 불어넣어주신 경남일보, 심사위원님들께도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진솔한 나의 독자가 되어주던 남편과 가족들, 아들, 딸에게도 사랑한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경기도 남양주시 호평동
심사평
여자의 욕망과 소멸에 대한 시
신춘문예 응모작들이 대개 의미없는 심각함, 과잉의 포즈, 근거없는 무의식 등으로 드러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금년에는 그런 현상들이 후경으로 물러난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번 시부문 응모작들 가운데서 두 선자는 이종섶씨의 ‘꽃의 무게’ 김시온씨의 ‘회귀’오자영씨의 ‘여자의 풍선’을 최종심에 올렸다. ‘꽃의 무게’는 꽃의 낙화에 관한 시로서 감각이 있어 보였다. 가지와 꽃, 바람 사이의 관계에 관한 시인데 언어의 절제가 눈에 띄었다. 그러면서도 "바람을 휘갈겨 쓴/가지들의 초서체" "누워 있는 꽃들에게 읽어 주는 꽃을 위한 조사" 등의 구절에서 낱말 선택의 재치와 감각이 드러나 보였다. 그러나 시에서의 어떤 무게랄까, 완결도랄까 하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떨어진다는 느낌을 갖게 했다.
김시온씨의 ‘회귀’는 '그'와 '마을 사람들'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시인데 언어와 이미지와 '잡히지 않는 어떤 것'과의 연결에서 에너지가 일어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속에 흐르는 끈이 조여있지 않거나 조였다 하더라도 별 의미가 없는 것으로 읽혔다. 시에서의 주조음을 이미지나 의미의 전개에 풀어넣는 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자영씨의 ‘여자의 풍선’은 여자의 욕망과 그 소멸에 대한 작품으로 눈에 띄었다. 결국 인간의 존재 문제인데 그것은 슬프게도 사멸을 전제로 한 존재이다. 욕망(바람)은 번번히 짧은 절정에서 끝나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바람이므로 쉬지 않고 불어오는 속성이 있다는 것이다. 허무이면서도 허무를 느끼지 못하는 인간 부조리를 드러내 보인 점이 인상적이었다.
우리 두 선자는 세 편 중에서 ‘여자의 풍선’을 당선작으로 삼는 데 시간을 길게 쓰지 않았다. ‘꽃의 무게’‘회귀’를 쓴 두 분은 더 분발해 주기를 바란다.
/강희근(시인 경상대 교수) 이상옥(시인 창신대 교수)
첫댓글 신춘문예 당선 시 잘 읽고 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