鳳岡書院
1958년 남평문씨(南平文氏),이곡(14세, 래(來)파 후손들의 집성촌인 군위군 우보면 달산리(고산) 현 터에 일가님들의 성금과 유림(儒林) 관여에는 박재(博在), 성재(性在), 병우(炳祐) 님 노력으로 신설인 경현사와 삼문, 강당과 상의문 등을 중수하여 봉강서원을 이루고 있다.
중수 재원은 고산 문중과 한학의 대가인 문병규(文炳奎) 님께서 소실된 서원재건이 소원이었던바 선친의 뜻을 받아 재력가 이자 사업가이신 셋째아들 홍재(洪在) 님께서 재건 비용을 마련했다. 후손으로 종록(鐘錄), 서울대학교 농학박사 종열(鐘烈), 등이 있다.
봉강서원(鳳岡書院) 문중에서는 목화를 전래한 고려 시대의 문신 문익점(文益漸). 문래를 고안한 문 래(文 來). 직조법을 발명한 문 영(文 英). 3현조봉안(三顯組奉安)하고 있다.
소유와 관리를 맡고 있으며 해마다 3월 중정일(中丁日)에 제례를 봉행한다.
봉강서원의 유래
1461년 삼우당(三優堂) 문익점(文益漸) 선생의 장손(長孫) 이며, 의성현령(義成縣令) 이던 문승노(文氶魯)는 선조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멀리 산청까지 갈 수가 없었기에 조부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의성군 금성면 대리리에 만천 동 ( 사람들이 “봉강서원”이라 불렸다고 전함)에 창건하여 봉안해 왔으나 난화(亂火)로 2차에 걸쳐 소실(燒失) 되었다.
문 래(來)의 후손들이 1861년 신유(辛酉)에 경북 군위군 우보면 달산리 포상(圃上)에 서원명(書院名)을 봉강서원(鳳岡書院)으로 하고 이건(移建)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毁撤)되었다.
그리고 삼우당 문 선생 유허 비 수(三憂堂文先生遺墟碑豎)을 1909년 숭정기원후오기유중추상한(崇禎紀元後五己酉仲秋上澣)에 현 위치에 세움.
비각건립(碑閣建立) 및 상량(上樑)은 1915년 숭정기원후(崇禎記元後) 을묘(乙卯)) 3월 20일 갑오(甲午) 준공.
선생의 유허비와 비각이 있는 현 터에 1958년 남평문씨 후손들이 경현사, 삼문. 상의문 등 5동을 중수했다. 그 후 남평문씨 문중에서는 매년 3월 중정일에 목화를 전래한 고려 시대의 문신 문익점 선생. 문래를 고안한 문 래. 직조법을 발명한 문 영. 선대 님에 대한 향사를 봉행해 오고 있다. -문익점(益店) 선생은 고려말 대 유학자로 성리학(性理學)을 창명(倡明)하고 원나라에 사신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최초로 목하 씨를 가지고 돌아와 장인 정천익과 함께 재배에 성공했다. 백성들의 의류 혁신과 생활에 크게 이바지했다. -문 래(來)는 선생의 손자로 벼슬은 좌찬성에 이르고 천문, 지리. 음양, 산수, 척도, 등에 밝았으며 물래를 만들었다. 물래란 말은 문 래 에서 유래된 것이다. 목면 이용에 크게 공헌했다. -문 영(英)은 선생의 손자요 문 래와는 형제지간이며 베틀을 만들어 목면포 즉 무명베를 최초로 짜게 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따서 문영베라 하였으나 이것이 변하여 무명베가 되었다.
1958년 6.25 사변 후 어려운 시기에 선대의 충절을 모시고자 하는 숭고한 뜻과 후학들의 교육을 위해서 십시일반 각출해 건립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일화가 있다. 일가님들은 터를 내어주고 산주는 벌목을 허락하고, 목수들을 집집이 돌아가면서 숙식과 참을 내어주었다. 노동력 제공과 타작 할 때는 기다렸다가 곡물을 받아 왔다니 눈물겨운 이야기들입니다.
이제는 서원의 순수한 뜻을 현세대의 고유자산으로 보존하고 유지해 후손들에게는 긍지를 심어 주고 지역민들께는 소공원 화해 충절의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향사 제례 과정을 정립해 충·효를 가꾸는 장이 될 것입니다. 지역에 오면 꼭 들러 보는 곳으로 만들겠습니다. 또 “어찌 화려함만이 문화유산이겠습니까” 서민의 애환과 선대의 얼이 서린 곳. 이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크나큰 문화유산입니다. 세월의 무게만큼이나 산업화로 외면과 무관심으로 어려움이 있지만 뜻있는 후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질곡의 삶과 민초의 혼이 깃든 곳 鳳岡書院.
2019년 군위군 지원사업으로 조경을 했습니다.
2024년 11월 29일
작성자 문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