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점] 흰옷(2)
다음날 아침에 요코는 혼자서 새빨간 빌로드 옷을 입고 있었다.
요코는 흰옷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집을 나섰다.
학교에 가는 도중에 도오루가 말했다.
“요코, 어떡하니. 빨간 옷이 부끄럽지 않아?”
도오루는 아침이 되자 다시 갑자기 요코의 일이 걱정되었다.
“이 빨간 오솓 예뻐. 학예회에 나가 열심히 춤출 거야.”
요코는 즐거운 듯이 말했다.
벨이 울리고 실내 운동장에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운동장 정면에 무대가 만들어져 있고 무대 옆에 빨간 융단을 깐 계단에 인형이 장식되어 있었다.
도오루는 요코가 걱정이 되어 1학년 쪽을 바라보았다. 1학년들은 무대 가까이 맨 앞줄에 앉아 있었다.
다시 벨이 울리자 교사와 학부형들이 줄지어 들어와서 자리에 앉았다.
‘엄마도 올까?’
도오루는 하다 못해 엄마가 구경하러 오기라도 한다면 요코도 반가워할 것이라고 생각되어 학부형석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나쓰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요코도 사실은 흰옷을 입고 싶었을 거야.’
도오루는 점점 슬퍼졌다.
‘엄마가 와야 할 텐데…..’
도오루는 하늘에라도 빌고 싶은 심정으로 나쓰에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 번째 벨이 울렸다. 박수가 터졌다. 검은 막이 오르자 무대 한복판에 1학년짜리 사내 아이가 혼자 서 있었다. 하얀 깃이 달린 푸른색 양복을 입은 아이는 양손을 쭉 뼏고 차려 자세로 서 있었다. 그 아이는 꾸벅 인사를 하고는 바지 위로 넓적다리 부근을 긁적이기 시작했다. 관객들이 와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 아이는 관객들이 무엇 때문에 웃는지도 모르고 막 옆에 있는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다시 모두들 와 하고 웃었다. 그 아이는 무엇을 해야 할지 잊어버리고 말없이 무대 한복판에 서 있었다. 그 아이는 개회사를 하려던 참이었던 것이다.
‘엄마는 아직도 안 오는 건가?’
요코가 무대에서 눈을 돌려 학부형석에 있을 엄마를 찾고 있었다.
요코가 등장하는 <눈아 눈아 내려라>와 <사이 좋게 오솔길을>은 프로그램의 세 번째에 들어 있었다.
‘요코 혼자만 빨간 옷이야.’
도오루 역시 그것이 마음에 걸렸다. 도오루는 일어나 요코의 담임인 와타나베 선생님에게로 갔다.
선생님 주위에는 같은 옷을 입은 여자아이들이 앉아 있었다.
“선생님.”
“아니, 넌 요코의 오빠로구나.”
선생님은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요코가 흰옷을 입고 오지 못해 …..죄송해요.”
이렇게 말하자마자 도오루는 눈물이 글썽거려 앞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도오루, 우는 거야? 선생님이 잘못했어. 괜찮아, 흰옷이 아니라도, 모두들 학예회에 새 옷을 지어 입는다기에 그렇다면 흰옷으로 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던 거야.”
선생님은 몇 번이나 사과하고 도오루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하지만……요코 혼자만……..”
도오루는 선생님의 상냥한 말씨가 어쩐지 서글퍼져서 더욱 흐느껴 울었다.
“오빠, 나 열심히 춤출 거야. 부끄럽지 않아.”
요코가 야무진 목소리로 말했다.
도오루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눈물을 닦았다.
드디어 요코가 등장할 차례가 되었다. 도오루는 입술을 깨물고 주먹을 꽉 쥔 채 아직 오르지 않은 막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자기 일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요코가 가엾어!’
벨이 울렸다. 막이 스스르 올랐다. 도오루는 자신도 모르게,
“아!”
하고 외쳤다.
새하얀 옷을 입은 다섯 명의 아이들 한가운데 서 있는 요코의 빨간 옷이 불타 오르는 듯이 눈부셨다.
“눈아 눈아 내려라. 바람아 불어라.”
음악이 울리자 요코가 혼자 눈 속에서 춤추는 것처럼 돋보였다. 요코 혼자 미리 빨간 옷을 입도록 약속되어 있는 무대처럼 생각되었다. 도오루는 씽긋 웃었다.
빨간 옷 때문인지 요코가 제일 잘하는 것 같았다. 요코가 손뼉을 치거나 목을 굽히는 몸짓도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귀엽게 보였다.
“저 빨간 옷 입은 애 예쁘다.”
“저 애가 도오루의 여동생이야.”
“야, 도오루보다 훨씬 괜찮은데.”
“공부도 사내애들보다 더 잘한데.”
도오루는 주위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고 우쭐해졌다.
무대에 선 요코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힘차게 춤을 추고 있었다.
‘잘됐어, 요코.’
도오루는 무엇 때문에 울고 불고 했나 하는 생각이 들어 자신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어쩌면 저렇게 예쁠까?”
“예쁘면 네 색시 삼으렴.”
“이 자식.”
아이들의 까불어대는 소리도 도오루에게는 즐겁게 들렸다.
“저 빨간 옷 입은 애, 얻어온 애래.”
같은 6학년 여자아이의 나직한 소리가 들렸다. 도오루는 깜짝 놀라 귀를 쫑긋 세웠다.
“아니 정말?”
“우리 엄마가 그랬어. 쓰지구치 병원의 딸아이는 아빠도 엄마도 닮지 않았으니 얻더온 애임에 틀림없다고.”
나직하게 소곤거리는 소리가 도오루에게는 무척이나 크게 들렸다.
‘정말 그럴까?’
무대 위의 여자아이들이 얌전한 인사하는 모습을 도오루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도오루는 교문에서 요코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눈이 밝은 햇살을 받아 빙수처럼 녹고 있었다. 도오루는 갑자기 어제 다친 무릎이 더욱 아파오는 듯 맥빠진 표정이었다.
‘요코가 얻어온 아이이기 때문에 엄마는 옷을 만들어 주지 않았을까? 다케다 씨 가게 점원이 잊어버리다니 그럴 리가 없어. 엄마가 거짓말을 한 거야. 그래서 오늘도 학예회 구경하러 오지 않은 거야. 하지만 엄마는 요코를 무척 귀여워했는데.’
도오루는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아빠는 요코를 귀여워하지 않았어. 역시 얻어온 아이일지도 몰라. 하지만 얻어온 아이라도 귀여워하는 사람이 있는데. 정말 요코가 얻어온 아이라면 너무 가엾어.’
요코가 자신의 진짜 여동생이 아니라는 것은 도오루에게는 매우 쓸쓸한 일이었다.
‘그런 예쁜 여동생은 어디에도 없는데.’
“오빠.”
요코가 현관에서 뛰어나왔다.
“오빠, 기다리고 있었어?”
“응, 요코가 제일 잘했어.”
“그래? 아이 좋아.”
“빨간 옷이 무척 예뻤어.”
도오루는 ‘무척’이라는 말에 힘을 주어 말했다.
두 아이는 눈이 질척한 길을 걷고 있었다.
“예뻤어? 잘했어?”
요코는 천진난만하게 기뻐했다.
“엄마도 구경하러 왔었어?”
“엄마?”
도오루는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망설였다. 구경하러 오지 않았다고 말하기가 어려웠다. 요코가 가엾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구경 온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엄마가 왔는지 어쩐지 알 수 없었어.”
“그래?”
요코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고 있는 것처럼,
“저 봐, 솔개가 날고 있어.”
하고 손가락으로 숲 쪽 하늘을 가리켰다.
“응.”
도오루는 학예회를 구경하러 오지 않은 엄마가 마음에 걸렸다.
“어떻게 된거야? 아직 다리가 아파?”
“응.”
“내가 업어 줄까?”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네가 어떻게 나를 업어?”
도오루는 웃었다.
길모퉁이쯤 왔을 때였다.
“한참 기다리고 있었단다.”
잔뜩 쌓아 놓은 목재 그늘에서 검은 빌로드 코트를 입은 다쓰코가 불쑥 나타났다.
“아줌마…….”
도오루와 요코가 동시에 소리쳤다.
“요코, 정말 잘하던데?”
“아줌마, 봤어요?”
도오루와 요코는 다쓰코의 양쪽 팔에 매달렸다.
“물론 봤지.”
다쓰코는 요코의 손을 힘차게 흔들고 나서 다시 손을 꼭 잡은 채 걷기 시작했다.
“요코가 학예회에 나가는 거 알고 있었어요?”
도오루가 물었다.
“그럼 알고 있었지.”
“어떻게요?”
“아줌마는 천리안인걸.”
“천리안이 뭔데요?”
요코가 물었다.
“천리 밖까지 보이는 거야.”
“와, 정말 굉장한 아줌마야.”
도오루는 다시 시무룩해져서 뭔가 생각하고 있었다.
“도오루, 왜 그래?”
“아니에요.”
“걷는 게 좀 이상한걸. 다리가 아프니?”
“그보다도 재미가 없어요.”
“왜 재미가 없니?”
“내가 멋지게 춤을 추는 것을 보았는데도 재미가 없어?”
“그건 재미있었지만…..”
“그럼 뭐가 재미없니?”
“네, 그저 재미없어요.”
“욕심쟁이구나. 세상이란 기쁜 일이 하나만 있어도 대단한 거야. 그런데 아줌마는 언제나 재미있는 날의 연속이야.”
“흥.”
“도오루는 평생 재미없어하면서 살아갈 모양이구나.”
“하지만 재미없을 땐 할 수 없잖아요.”
“그래? 만일 백 엔을 잃어버리면 도오루는 어떻게 생각할 거야?”
“그야 손해 봤다고 생각하겠지요.”
“요코는 어떻게 생각할 거야?”
“백 엔을 잃어버려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전에 십 엔을 잃어버린 적은 있어요.”
“그때 어떻게 생각했지?”
“누가 주우면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누가 주워서 기뻐하면 싫어?”
“누가 주우면 기뻐요. 거지가 주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잃어버리면 손해야. 난 조금도 기쁘지 않아.”
“도오루, 십 엔을 떨어뜨렸으면 정말 십 엔을 잃어버린 것이니까 그만큼 손해를 본 거야. 그런데 손해 봤다 손해 봤다 하고 생각하면 더욱 손해 보는 게 아닐까?”
“아, 그렇구나.”
“백 엔을 잃어버렸으면 백 엔만큼 즐거운 생각을 하는 거야. 2백 엔을 잃어버리지 않고 백 엔만 잃어버려서 다행이라고 생각해도 좋고 또 백 엔을 주운 사람은 배고파 죽을 지경이었는데 그 백 엔 덕택에 살아났을 거라고 생각해도 좋아. 그리고 자꾸 좋은 일만 일어난다고 생각해도 무방해. 백 엔을 잃어버리고 손해를 봤다고 끙끙 앓으면 더욱 손해야.”
“음, 그럼 다리를 다쳤으면 손은 다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거예요?”
“그렇지.”
“그럼 만일, 만일 말이에요, 제가 얻어온 아이라면 어떻게 생각해야 하지요?”
다쓰코는 도오루의 말에 걸음을 멈추었다.
“만일, 만일 말이에요, 제가 얻어온 아이라면 어떻게 생각해야 하지요?”
하는 도오루의 물음에는 한쪽 귀로 흘려 버릴 수 없는 무엇이 있었다.
“도오루는 얻어온 아이가 아니니까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아도 되잖아?”
‘이 애는 벌써 알고 있구나. 십 엔이나 백 엔을 잃어버린 정도의 손해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문제에 부딪히고 있다.’
“그러니까 만일 그렇다면 말이에요.”
“글쎄, 정말 딱하거나 슬픈 일이 일어난다면……”
다쓰코는 요코가 하늘을 나는 솔개를 눈으로 쫓느라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지 않을 것 같아 마음을 놓으면서 말을 이었다.
“……..정말로 딱한 일은 말이야, 그런 어려운 일에 부딪히게 되면 잘 생각해 봐야지.”
“혼자서 생각하는 거예요?”
도오루는 어떤지 불안해져서 물었다.
“아무래도 그런 큰 일이라면 부모님이나 선생님과 의논하는 게 좋겠지. 그러나 어른이 될수록 누구에게도 의논할 수 없는 일에 부딪히게 될지도 몰라.”
다쓰코는 자신이 몹시 경박하게 여겨졌다. 지금까지 자신은 깊이가 없는 단순한 처세술을 휘두르며 살아온 것처럼 생각되었다. 이 세상에는 좀더 깊은 예지라는 것이 있을 것 같았다. 언젠가 요코가 찾아왔을 때,
“언제나 잘해 주다가 한 번만 잘못 대해 주면 곧 싫어지는 거야.”
하고 요코에게 가르쳐 준 것도 일종의 처세술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는 사실 그 ‘잘못 대해 주는’일에도 여러 가지 질이 있다는 것을 자신은 미처 깨닫지 못했다고 반성했다.
“만일 말이에요.”
하고 조심스럽게 전제를 하고 나서,
“제가 얻어온 아이라면…….”
하고 말을 꺼낸 도오루의 말에 다쓰코는 짐짓 놀랐다.
도오루의 말에서 지금 쓰지구치 집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다쓰코는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나쓰에가 학예회에 나타나지 않은 것도 도오루의 말을 듣기 전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
생각해 보니 저녁에 요코가 집을 나오고 이튿날 나쓰에가 몹시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도 결코 예삿일이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다정한 부부와 귀여운 아이들이 있는 행복한 가정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쓰코는 새삼스럽게 쓰지구치 집안에 도사리고 있는 위기를 눈치챘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에 흔히 있는 비극적인 가정 불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녀는 생각하고 있었다. 요코가 사이시의 딸이라는 것은 다쓰코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 솔개가 그만 숲 저쪽으로 날아가 버렸어.”
요코가 다쓰코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때까지 뭔가 생각에 잠겨 있던 도오루가 말했다.
“사람에게 의논할 수 없을 때는 누구에게 의논해야 하죠? 하나님? 하지만 하나님은 어디 있는지 본 적도 없는 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