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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양 스크랩 승정원 일기에 대하여
심메마니 추천 0 조회 36 12.08.15 10:1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조상 중에서 제일 흠모하고 나와 내 집안의 자긍심을 길러주셨던 7대조 지평공 이종렬 할아버지의 흔적찾기를 계속한다.

20여 장의 '교지'와 몇 장의 토지 문서, 장례기록, 호구단자 등을 기초로 하여 시작된다.

자료는  전주이씨 조선조 급제자 정록, 가승보. 향교지에 실린 내용을 근거로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을 통해 실제 조정에서 맡은 역할과

소임 등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고 객관적인 연대를 추정하는 내 나름의 역사연구이자 전통의 얼 찾기 작업인 셈이다.

 

일찌기 중학교 일학년 때인가 2학년 때인가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문집 1권을 빌려오셨다. 무식이셨던 아버지는 집안의 할아버지에게

문집의 내용을 해석해 달라고 하셨는데 우연이었던지 아버지의 의도가 있었던지 어린 나도 그 자리에 있었다.

지금도 그 양동할아버지가 해석해 준 시귀 한 구절을 기억하는데

 " 잘 익은 누런 보리밭을 하늘에서 노란 구름이 땅 위에 뭉게뭉게 내려 앉았다" 라고 표현했던 구절이다.

 

그때부터 내가 고이 간직하게된 자랑스런 할아버지의 삶과 학문과 인격을 가늠해보며 흠모하게된 것이다.

군의 향교지에 실린 할아버지의 족적을 기초삼아 이리저리 추적해 가는 작업이다. 우선 공식적인 문건에서 발견되는 흔적을 찾고, 남아 있는 유물을 찾아내 보존하고 알리는 일이다.

 

그 문집을 내가 보관하게 된 것은 비록 40여년이지만 그 분의 직계후손으로 태어났다는 사실 만으로도 지금까지 뿌듯하고 자랑스러움 가득안고 살아왔다. 할아버지의 후손 중 현존하는 사람 가운데 내가 가장 애정과 애착을 가졌다는 자부심을 한켠에서 키우면서 말이다.

따라서 별다른 관심이나 흥미가 없는 작은집의 형이나 동생 그리고 내 친동생들에게는 은근한 자랑이기도 했다.

이제서야 훌륭한 조상의 유물에 대해 관심을 갖는 형님들에게는 부러움이 되기도 한 것이다.

 

 대부분의 조선시대 벼슬사시는 분들이 그러했듯이 할아버지는 당시 향리 사람들로부터 효행과 학식에 대해 대단한 추앙을 받았던 모양이다.

그런 전통이 이어져서 200년이 지나도록 후학들이 선생의 덕을 기리는 정통 유교식으로  매년 음력 3월 보름에 제향을 모셨왔다.

다음은 군 향교지인 원우지에 실린 할아버지에 관한 글이다.

 

 

六旺祠(육왕사)


純宗(순종) 後 乙酉(을유) (서기 1945년) 2월 一鄕儒林(일향유림)의 發論(발론)으로 소헌 李宗烈公의 孝友(효우)와 德行(덕행)을 追慕(추모)하여 元來(원래) 影堂(영당)으로 享祀(향사)해오던 것을 六旺祠(육왕사)라 改額(개액)하여 祭享(제향)하게 되었다.


李宗烈 (이종렬)

全州人(전주인). 자는 영숙(英叔(영숙)이요, 호는 疎軒(소헌)이라 한다.

讓度公(양도공) 天祐(천우)의 後이며 左承旨(좌승지) 性存(성존)의 曾孫(증손)이요, ?慶堂(아경당) 楔(설)의 子(자)로 英祖(영조) 15년 기미년(서기 1739년)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孝友(효우)가 出天(출천)하여 일찍 장난하고 뛰놀던 때에도 어버이 뜻을 거슬린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며 사소한 과일일지라도 먼저 입에 대는 일이 없었다. 때문에 鄕里(향리) 사람들은 모두 公(공)을 天生(천생)孝子(효자)라 불렀고, 6세시 初學(초학)에 聰明(총명)頓悟(돈오)하여 敎督(교독)에 번거로움 없이 日就月將(일취월장)하고  8세시 능히 詩文(시문)을 지었다. 공이 11세시 읊은 [송균영이충신절, 수중월광태극도] 라는 시는 당시 많은 선비들이 다투어 외우던 것이었다.

 

 15세로부터 數歲 동안에 經史(경사)와 諸家(제가) 등에 博涉(박섭)하여 모두 그 奧義(오의)에 通하고 12세세 즉, 英祖(영조) 35년 己卯(기묘)(서기 1759년) 生員試(생원시)에 合格(합격)하여 同 44년 戊子 (서기1768년) 上庠에 올랐으나 과거에 뜻이 없다가 父命(부명)으로 동 50년 甲午(갑오)(서기1774년) 增廣試(증광시) 文科(문과)에 及第(급제)하였다.

 

 公(공)은 원래 榮進(영진)에 뜻을 두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때에 兩親(양친)이 이미 年老(연로)한데다가 身病(신병)이 겹쳐 있었으므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아니하고 잠시도 兩親(양친) 곁을 떠난바 없이 看病(간병)에 전력을 기울였다. 正祖(정조) 元年(서기 1777년) 內艱喪(내간상), 또한 5년 후 辛丑(신축)에 外艱喪(외간상)을 당하자 새앙과 肉桂(육계) 따위를 입에 대지 아니한 채  寒暑(한서)風雨(풍우)를 무릅쓰고 省墓(성묘)하기를 6년, 그동안을 꼭 하루와 같이 하였다. 정조 10년 병오(서기 1786년) 曹郞(조랑)을 拜(배)하고 監營(감영)에 나아가 從事(종사)하다가 監事(감사)의 뜻에 맞지 아니하여 이듬해 사직하고 돌아와 著述(저술)에 着手(착수)하였다.

 

 泰山(태산) 서쪽에 別堂(별당)을 짓고 以來 15년간 進取의 뜻을 버린 채 山林(산림)에서 宗老(종로)할 計策(계책)을 세워 疎軒製記(소헌제기)와 內外十景詩(내외십경시)를 지었다. 때에 四方學者(사방학자)들은 公(공)을 더욱 높이 받들게 되었고 隣近住民(인근주민)들이 혹 訟事(송사)가 있을 때에는 모두 公(공)을 찾아가 말하기를 “가까운 곳을 두고  어찌 먼 官家(관가)에까지 나가겠습니까?” 하였다고 한다. 純祖(순조) 2년 壬戌(임술)(서기 1802년) 司憲府(사헌부) 持平(지평)에 除授(제수)되고 같은 해 吏曹(이조)正郞(정랑) 이듬해 再次 持平(지평)에 任命(임명)되었으나 또한 就任(취임)하지 않았다가 同 6년 丙寅(병인)(서기 1806년)成歡道(성환도) 察訪(찰방)으로 내려갔다. 그

 

  그러나 얼마 후 다시 그만두고 귀향하니 監事(감사) 정만석이 挽留(만류)하였지만 끝내 不應(불응)하고 同 40년 甲戌(갑술)(서기 1814년) 司諫院(사간원) 正言(정언), 이어 掌令(장령)이 除授(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아니하다 [正卒伍(정졸오) 減OO  ,損戶口(손호구), 平災結(평재결), 筠海稅(균해세), 嚴科試(엄과시)] 등 6條의 소를 올리려 상경 도중 전주에서 遞職(체직)되었다는 報(보)를 듣고 돌아와 純祖(순조) 17년 丁丑(정축)(서기1817년)  79세로 卒(졸)하였다.    祭享日(제향일)  每年 3월 15일   (靈光 院宇誌)  靈光郡 鄕校誌 院祀宇編     

 

[主壁(주벽)]: ②여러 사람을 좌우(左右)쪽 양 옆으로 앉히고, 그 가운데를 차지하여 앉는 주장(主張)되는 자리, 또는 그 자리에 앉은 사람 ③사당(祠堂)이나 사원(祠院)에 모신 여러 위패(位牌) 중(中)에서 주장(主張)이되는 위패(位牌)


'영사당' 이라고 우리가 어려서 불렀던 할아버지의 사당 '六旺祀 '에서  불과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고을의 유생들이 선생의 학식을 추모하는 행사를 매 년 해왔던 것이다. 하지만 향교에 출입하시던 넷째 집안의 할아버지(영字신字)가 돌아가시고 자손들도 관심이 없자 옛날 일이 되어 버린 안타까운 세태다.   

 

 원래 우리 집안은 7대조 지평공 할아버지의 첫째 아드님의 둘째 아들이셨던 5대조께서, 지평공할아버지의 둘째아드님이 손이 없자 양자를 가셨다 한다. 그래서 쭉 둘째집안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종손이셨던 지증뫼(덕字신字)할아버지로부터 그 문집을 빌려 오셨던 모양이다. 

작년에는 그 종손으로부터 할아버지가 받으셨던 20여 장의 교지와 호패,낙관 호구단자. 그리고 전남대박물관에 보관해 놓은 박물관장의 보관증. 전남대 박물관에서 발간한 고문서를 원문 그대로 인쇄화한 책자 (당시 호구단자 수 십 장)를 내가 구하게 된 것이다. 보관된 품목 중에는 유명한 이조판서 이만수의 상소문도 있다 하는데 맡길 때 가명(예명)으로 맡겨 박물관 측에서 본인확인 등의 이유로 반환을 미루는 것 같다.

 

문(文)의 나라 조선은 조선왕조실록에 이어 또 하나의 세계적인 역사기록을 배출했습니다. 이번에 보게 될 승정원일기(이하 일기)가 그것입니다. 실록이 세계 최대의 단일왕조 역사서라면 일기는 세계 최대의 역사기록물입니다. 글자 수가 2억4천여 만 자라고 하니까 실록의 4배가 됩니다. 그래서 세계 최대의 역사서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책은 실록처럼 활자로 찍은 것이 아니라 손으로 쓴 것입니다. 그래서 양이 많아질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승정원 일기의 표지. 승정원 일기는 세계 최대 규모의 역사기록물로 인정받고 있으며
조선왕조실록과 함께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출처: 문화재청>

 

 

동북아시아의 근세사에 대한 훌륭한 기록

일기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보기 전에 승정원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알아야겠습니다. 승정원은 왕의 비서실로, 소개글을 보면 보통 ‘왕명의 출납을 담당했다’고 쓰여 있습니다. 이것은 왕과 각 부서들 사이에서 소통 역할을 했다는 뜻입니다. 각 부서에서 올라오는 서류를 정리해 왕에게 전하고 왕의 명령을 여러 부서에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지요. 사극을 보면 왕이 ‘도승지는 들라’는 말을 하는 모습을 가끔 볼 수 있는데 도승지란 오늘날로 하면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말합니다. 승정원 일기는 바로 이 비서실에서 왕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해 적은 기록입니다. 실록이 나라 전반에 관한 기록을 남긴 것에 비해 일기는 왕 개인에 초점을 맞추어 적은 것입니다. 왕의 동태나 기분까지도 상세하게 적었습니다. 그래서 일기의 기록을 읽고 있으면 마치 현장에 있는 느낌을 받는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영조가 일이 많은 것을 한탄하며 ‘이렇게 일 때문에 골치를 썩는 것은 내 팔자’라고 했던 넋두리까지 적고 있으니 그런 느낌을 가질 수 있겠습니다. 이런 개인적인 기록은 실록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실록과 관계해서 이런 의문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같은 왕조의 역사 기록물이 두 개씩이나 세계유산이 될 수 있었는지 말입니다. 일기는 특히 동북아시아의 근세사에 대한 훌륭한 기록으로 인정받아 세계유산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조선 왕실을 중심으로 중국과 일본, 그리고 서양 각국들이 각축하던 모습들이 아주 잘 기록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일기는 실록처럼 전체 분량이 다 남아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실록의 경우에는 지방 사고(전주 사고)에 있던 것이 보존되어 임란 전 것도 남아 있지만 일기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일기는 경복궁 안에만 있었기 때문에 임란 때 타버리게 됩니다. 임란 후의 것도 다 보존된 것이 아니라 이괄의 난 때 다시 한 번 화재를 입어 그 이후의 것만 남아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인조 대부터 순종 대까지 288년의 기록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세계 최대역사서이니 만일 전체가 다 남아 있었다면 얼마나 거대한 역사서가 되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꼼꼼하고 상세한 기록으로 되살아나는 역사

 

 

일기의 기록정신 역시 대단합니다. 이에 관한 예는 매우 많기 때문에 아주 대표적인 것만 골라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것처럼 조선에는 선비들이 상소문을 올려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했습니다. 실록은 이 많은 상소문을 요약해서 기록합니다. 그에 비해 일기는 전문을 전부 다시 써서 보관했다고 합니다. 이 가운데 압권인 것은 정조 때 영남의 유생 만여 명이 올린 만인소(萬人疏)입니다. 이 상소문은 단종을 복권시키라는 내용이었는데 사안이 중대하다 보니 1만 명 이상이 참여했습니다. 이에 대해 일기는 상소문 전문을 다 적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1만여 명의 이름까지 모두 적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지금도 1만 명의 이름을 타자로 치려면 쉽지 않은 일이거늘, 붓으로 그 많은 이름을 적으려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조선의 기록정신은 이리도 대단했습니다.

 

일기는 제일 먼저 날짜를 기록하고 날씨를 적습니다. 그리고 근무 상황에 대해 적는데, 이 부분도 아주 세밀하게 적습니다. 지각을 했는지 조퇴를 했는지 등등에 관해 정확하게 적어놓고 있더군요. 날씨는 더 합니다. 아침저녁으로 100 여 가지의 방법으로 날씨에 대해 적습니다. 예를 들어 오전에 맑았다 저녁 때 비가 오면 조청석우(朝晴夕雨)라고 적는 것이 그것입니다. 비도 그냥 비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약 8가지로 분류해 적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구분이 아주 세분화되어 있어 놀랍습니다. 예를 들어 한자로 ‘보슬비’와 ‘부슬비’와 ‘가랑비’를 다 구분해 적고 있는데 이 비들을 어떻게 구분했는지 놀랍기만 합니다. 비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영조 46(1770)년부터는 강우량까지 정확하게 적게 됩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바로 이 해에 측우기를 복원했기 때문입니다. 관계 학자들에 따르면 전근대 사회에서 한 곳에서 이렇게 날씨와 강우량을 오랫동안 적은 예는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난 300백 년간의 동북아 기상을 연구하려면 일기의 기록이 필수적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천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일기를 썼던 사람들은 밤에도 잠을 자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저녁 8시부터 다음 날 새벽 5시까지 별의 움직임을 자세하게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하늘의 움직임과 인간계의 움직임이 연결되어 있다고 믿어 특히 별을 꼼꼼하게 관찰했습니다. 예를 들어 유성이 떨어지면 어떤 방향에 어떤 크기로 떨어졌는지에 대해 아주 정확하게 적습니다. 1~2초라는 순식간에 일어나는 천문현상을 주시하고 있다가 정확하게 기록에 남기는 것이 참으로 대단합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일기에는 이런 기록도 있습니다. 영조 때 큰 번개와 천둥이 친 모양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조사해보니 양주의 한 여인이 강간당한 뒤 피살되었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이것을 두고 조선의 조정은 패륜적인 사건이 생겨 하늘이 노했다고 해석했습니다. 이에 영조는 자신이 정치를 잘못했다고 생각해 수라상에 올라오는 반찬의 수를 줄이라 명합니다. 이 이야기도 일기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상세한 기록을 통해 조선조 동안 얼마나 높은 정치가 이루어졌는지 알 수 있습니다.


천계2년(1622)3, 4, 5월 일기의 속지. <출처: 문화재청>

 

 

아직도 끝나지 않은 번역

 

 

 

그런데 실록이 모두 번역되어 있는 것에 비해 이 일기는 양이 하도 많아 번역이 많이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실록은 활자로 인쇄되어 처음부터 읽기에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만, 일기는 가장 흘린 체인 초서체로 되어 있어 이것을 읽기 편한 해서체로 바꾸는 데에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2억 개가 넘는 글자를 판독해 해서체로 바꾸는 작업이 쉬울 리 없겠지요. 번역은 고종 대의 것이 진작 끝났고 현재는 인조 대를 거쳐 영조 대의 것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다 번역하려면 수십 년의 세월이 필요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 안에는 앞으로 쓰일 수 있는 내용이 무궁무진하다고 하는데 특히 국사 연구에 지각변동이 있을 거라는 예측이 있더군요. 이렇게 중요한 우리의 고전이 번역되면 활용할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분야에서 생기게 될 터이니 여간 기대되는 게 아닙니다.

 

 

? 융희원년(1907) 12월 일기(왼쪽)와 천계2년 3, 4, 5월 일기(오른쪽).
현재 승정원 일기 전문에 대한 번역과 디지털화 작업이 진행 중에 있다. <출처: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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