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 중에서 제일 흠모하고 나와 내 집안의 자긍심을 길러주셨던 7대조 지평공 이종렬 할아버지의 흔적찾기를 계속한다. 20여 장의 '교지'와 몇 장의 토지 문서, 장례기록, 호구단자 등을 기초로 하여 시작된다. 자료는 전주이씨 조선조 급제자 정록, 가승보. 향교지에 실린 내용을 근거로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을 통해 실제 조정에서 맡은 역할과 소임 등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고 객관적인 연대를 추정하는 내 나름의 역사연구이자 전통의 얼 찾기 작업인 셈이다.
일찌기 중학교 일학년 때인가 2학년 때인가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문집 1권을 빌려오셨다. 무식이셨던 아버지는 집안의 할아버지에게 문집의 내용을 해석해 달라고 하셨는데 우연이었던지 아버지의 의도가 있었던지 어린 나도 그 자리에 있었다. 지금도 그 양동할아버지가 해석해 준 시귀 한 구절을 기억하는데 " 잘 익은 누런 보리밭을 하늘에서 노란 구름이 땅 위에 뭉게뭉게 내려 앉았다" 라고 표현했던 구절이다.
그때부터 내가 고이 간직하게된 자랑스런 할아버지의 삶과 학문과 인격을 가늠해보며 흠모하게된 것이다. 군의 향교지에 실린 할아버지의 족적을 기초삼아 이리저리 추적해 가는 작업이다. 우선 공식적인 문건에서 발견되는 흔적을 찾고, 남아 있는 유물을 찾아내 보존하고 알리는 일이다.
그 문집을 내가 보관하게 된 것은 비록 40여년이지만 그 분의 직계후손으로 태어났다는 사실 만으로도 지금까지 뿌듯하고 자랑스러움 가득안고 살아왔다. 할아버지의 후손 중 현존하는 사람 가운데 내가 가장 애정과 애착을 가졌다는 자부심을 한켠에서 키우면서 말이다. 따라서 별다른 관심이나 흥미가 없는 작은집의 형이나 동생 그리고 내 친동생들에게는 은근한 자랑이기도 했다. 이제서야 훌륭한 조상의 유물에 대해 관심을 갖는 형님들에게는 부러움이 되기도 한 것이다.
대부분의 조선시대 벼슬사시는 분들이 그러했듯이 할아버지는 당시 향리 사람들로부터 효행과 학식에 대해 대단한 추앙을 받았던 모양이다. 그런 전통이 이어져서 200년이 지나도록 후학들이 선생의 덕을 기리는 정통 유교식으로 매년 음력 3월 보름에 제향을 모셨왔다. 다음은 군 향교지인 원우지에 실린 할아버지에 관한 글이다.
六旺祠(육왕사) 純宗(순종) 後 乙酉(을유) (서기 1945년) 2월 一鄕儒林(일향유림)의 發論(발론)으로 소헌 李宗烈公의 孝友(효우)와 德行(덕행)을 追慕(추모)하여 元來(원래) 影堂(영당)으로 享祀(향사)해오던 것을 六旺祠(육왕사)라 改額(개액)하여 祭享(제향)하게 되었다. 李宗烈 (이종렬) 全州人(전주인). 자는 영숙(英叔(영숙)이요, 호는 疎軒(소헌)이라 한다. 讓度公(양도공) 天祐(천우)의 後이며 左承旨(좌승지) 性存(성존)의 曾孫(증손)이요, ?慶堂(아경당) 楔(설)의 子(자)로 英祖(영조) 15년 기미년(서기 1739년)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孝友(효우)가 出天(출천)하여 일찍 장난하고 뛰놀던 때에도 어버이 뜻을 거슬린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며 사소한 과일일지라도 먼저 입에 대는 일이 없었다. 때문에 鄕里(향리) 사람들은 모두 公(공)을 天生(천생)孝子(효자)라 불렀고, 6세시 初學(초학)에 聰明(총명)頓悟(돈오)하여 敎督(교독)에 번거로움 없이 日就月將(일취월장)하고 8세시 능히 詩文(시문)을 지었다. 공이 11세시 읊은 [송균영이충신절, 수중월광태극도] 라는 시는 당시 많은 선비들이 다투어 외우던 것이었다.
15세로부터 數歲 동안에 經史(경사)와 諸家(제가) 등에 博涉(박섭)하여 모두 그 奧義(오의)에 通하고 12세세 즉, 英祖(영조) 35년 己卯(기묘)(서기 1759년) 生員試(생원시)에 合格(합격)하여 同 44년 戊子 (서기1768년) 上庠에 올랐으나 과거에 뜻이 없다가 父命(부명)으로 동 50년 甲午(갑오)(서기1774년) 增廣試(증광시) 文科(문과)에 及第(급제)하였다.
公(공)은 원래 榮進(영진)에 뜻을 두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때에 兩親(양친)이 이미 年老(연로)한데다가 身病(신병)이 겹쳐 있었으므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아니하고 잠시도 兩親(양친) 곁을 떠난바 없이 看病(간병)에 전력을 기울였다. 正祖(정조) 元年(서기 1777년) 內艱喪(내간상), 또한 5년 후 辛丑(신축)에 外艱喪(외간상)을 당하자 새앙과 肉桂(육계) 따위를 입에 대지 아니한 채 寒暑(한서)風雨(풍우)를 무릅쓰고 省墓(성묘)하기를 6년, 그동안을 꼭 하루와 같이 하였다. 정조 10년 병오(서기 1786년) 曹郞(조랑)을 拜(배)하고 監營(감영)에 나아가 從事(종사)하다가 監事(감사)의 뜻에 맞지 아니하여 이듬해 사직하고 돌아와 著述(저술)에 着手(착수)하였다.
泰山(태산) 서쪽에 別堂(별당)을 짓고 以來 15년간 進取의 뜻을 버린 채 山林(산림)에서 宗老(종로)할 計策(계책)을 세워 疎軒製記(소헌제기)와 內外十景詩(내외십경시)를 지었다. 때에 四方學者(사방학자)들은 公(공)을 더욱 높이 받들게 되었고 隣近住民(인근주민)들이 혹 訟事(송사)가 있을 때에는 모두 公(공)을 찾아가 말하기를 “가까운 곳을 두고 어찌 먼 官家(관가)에까지 나가겠습니까?” 하였다고 한다. 純祖(순조) 2년 壬戌(임술)(서기 1802년) 司憲府(사헌부) 持平(지평)에 除授(제수)되고 같은 해 吏曹(이조)正郞(정랑) 이듬해 再次 持平(지평)에 任命(임명)되었으나 또한 就任(취임)하지 않았다가 同 6년 丙寅(병인)(서기 1806년)成歡道(성환도) 察訪(찰방)으로 내려갔다. 그
그러나 얼마 후 다시 그만두고 귀향하니 監事(감사) 정만석이 挽留(만류)하였지만 끝내 不應(불응)하고 同 40년 甲戌(갑술)(서기 1814년) 司諫院(사간원) 正言(정언), 이어 掌令(장령)이 除授(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아니하다 [正卒伍(정졸오) 減OO ,損戶口(손호구), 平災結(평재결), 筠海稅(균해세), 嚴科試(엄과시)] 등 6條의 소를 올리려 상경 도중 전주에서 遞職(체직)되었다는 報(보)를 듣고 돌아와 純祖(순조) 17년 丁丑(정축)(서기1817년) 79세로 卒(졸)하였다. 祭享日(제향일) 每年 3월 15일 (靈光 院宇誌) 靈光郡 鄕校誌 院祀宇編
[主壁(주벽)]: ②여러 사람을 좌우(左右)쪽 양 옆으로 앉히고, 그 가운데를 차지하여 앉는 주장(主張)되는 자리, 또는 그 자리에 앉은 사람 ③사당(祠堂)이나 사원(祠院)에 모신 여러 위패(位牌) 중(中)에서 주장(主張)이되는 위패(位牌) '영사당' 이라고 우리가 어려서 불렀던 할아버지의 사당 '六旺祀 '에서 불과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고을의 유생들이 선생의 학식을 추모하는 행사를 매 년 해왔던 것이다. 하지만 향교에 출입하시던 넷째 집안의 할아버지(영字신字)가 돌아가시고 자손들도 관심이 없자 옛날 일이 되어 버린 안타까운 세태다.
원래 우리 집안은 7대조 지평공 할아버지의 첫째 아드님의 둘째 아들이셨던 5대조께서, 지평공할아버지의 둘째아드님이 손이 없자 양자를 가셨다 한다. 그래서 쭉 둘째집안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종손이셨던 지증뫼(덕字신字)할아버지로부터 그 문집을 빌려 오셨던 모양이다. 작년에는 그 종손으로부터 할아버지가 받으셨던 20여 장의 교지와 호패,낙관 호구단자. 그리고 전남대박물관에 보관해 놓은 박물관장의 보관증. 전남대 박물관에서 발간한 고문서를 원문 그대로 인쇄화한 책자 (당시 호구단자 수 십 장)를 내가 구하게 된 것이다. 보관된 품목 중에는 유명한 이조판서 이만수의 상소문도 있다 하는데 맡길 때 가명(예명)으로 맡겨 박물관 측에서 본인확인 등의 이유로 반환을 미루는 것 같다.
동북아시아의 근세사에 대한 훌륭한 기록
꼼꼼하고 상세한 기록으로 되살아나는 역사
아직도 끝나지 않은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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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낮은 산 아래 원문보기 글쓴이: 低山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