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효과음악
김이듬 하루하루가 모여 일생이 될까 폭염 장맛비 열대야 하루하루 여름이 지워진다 지난여름은 잊혀도 무방한, 아무 의미 없는 귀속의 수단일 뿐이다* 기차역에서 한 사람이 손목시계를 봄 새하얀 와이셔츠가 바람에 펄럭임 뛰어오는 여유로운 점프슈트에 애리조나샌들 동성애 커플이라는 설정 시계와 슈즈는 소품 둘이서 다정하게 바캉스 떠날 예정인데 다툼이 없었는데 둘 중 하나 철로로 떨어져 달려오는 기차에 치일 뻔하는 사건이 벌어질 것이다 다정한 것들이 살아남는다는 메시지입니까? 컷 감독의 의도는 알 필요 없으니 네가 맡은 역할이나 열심히 하면 돼 위험한 스턴트 신을 배우가 대역 없이 찍겠다고 한다 대기하던 스턴트맨은 배우의 옷을 벗는다 그는 이제 잘린 거니? 잘나가는 배우만 자꾸 잘나가는 이유는 날씨 때문인가요? 우리는 타이밍을 기다린다 여름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 계절성은 모든 예술에 적용된다는 말씀인가요? 상쾌하게, 광장의 뜨겁고 속된 열기가 느껴지게끔, 리조트, 선베드, 호러, 스릴러…… 뭐, 이런 이미지가 필요하다는 거죠? 독창성 없는 아티스트, 머저리, 분위기 파악 못하는 것들은 죽어버려야 돼! 내 말을 듣던 감독은 나를 역겨워하며 소리쳤다 컷 공중화장실에서 메스꺼운 기분을 닦는다 전신이 흐늘거린다 나는 그의 요구에 맞춰 효과음을 넣었을 뿐인데 범죄 영화에나 어울리겠다고 하다니! 여름엔 흉악 범죄가 더더욱 기승이므로 내 작품에 현실을 반영했을 따름이잖아. 뭐라고? 팽팽한 이음줄 구간뿐만 아니라 전체를 폐기하라는 건 너무 수치스러운…… 피력하지 못한 작곡 의도를 거울에 대고 지껄인다 녹물을 튀기며 내 인생에 타이밍이 올 리 없지 친구의 영화 제작에 참여할 기회를 잡지 못했으므로 카디건을 벗다가 떨어뜨린 유리잔을 집어 다시 던질 뿐 벽이 무슨 잘못이라고 소품이 무슨 잘못이라고 눈을 감고 대사를 외운다 내가 다시 음악을 맡을게 만들지 못한 음이 평생 마음에 자리잡는 법이지 앞의 음과 부딪히지 않게 앞의 음이 퍼지다 사라지면 다음 음을 시작한다 어제의 일은 누군가 물을 내리지 않고 나간 공중화장실 변기 속을 응시하는 기분일지라도 오늘과 부딪혀 축적되는 현상을 발생시키지는 않으리라 그저께의 참상을 흡수하지도 않겠어 아, 메스껍다 소품만도 못한 인생 하루하루 돈을 모았지만 하루치 식비도 얼마 남지 않았어 하루하루가 사라져 하루가 된다
*올가토카르추크, 『방랑자들』 최성은 옮김, 민음사 2019. —계간 《문학동네》 2023년 가을호 ---------------------- 김이듬 / 2001년 계간 《포에지》를 통해 등단. 시집 『별 모양의 얼룩』『명랑하라 팜 파탈』『말할 수 없는 애인』『베를린, 딜렘의 노래』『히스테리아』『표류하는 흑발』『마르지 않은 티셔츠를 입고』 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