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에 있었던 시시한 일상 이야기”
오늘 서울 종로 인사동에 볼일이 있어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잠시 대한예수교 장로회 승동교회에 들렸다. 거대한 도심의 빌딩 속에 갇혀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한국 교회사적으로도 유명한 교회다. 1893년에 창립되었으니 올해로 130년이 된단다.
“승동교회” 하면 반드시 따라오는 이름이 “연동교회”다. 1959년에 대한예수교 장로회 44차 총회는 WCC 문제로 시끄러웠는데, WCC와의 유대관계를 계속하자는 파는 연동교회에서 모였기에 “연동 측”이라 불렸고, WCC와의 단절을 주장하는 NAE(National Assembly of Evangelist)를 지지하는 보수파는 승동교회에서 모였기에 “승동 측”이라 불렀다. 후에 연동 측은 “통합 교단”이 되었고, 승동 측은 “합동 교단”이 되었다. 신학교로 말하자면 통합 교단의 장신대와 합동 교단의 총신대가 있다.
서로 자기들이 대한예수교 장로교단의 적자(嫡子)라고 주장한다. 게다가 서로가 장자 교단이라고 한다. 도대체 누구 말이 맞는지 모르겠다. 한때 일반 교인들은 영락교회(한경직 목사) 측 교회냐 충현교회(김창인 목사) 측 교회냐로 교단을 구분하기도 했다. 통합과 합동 이야기는 찰스 디킨슨의 유명한 소설 제목(A Tale of Two Cities)이 떠오른다.
대한예수교 장로교의 분열 역사를 생각하니 갑자기 네덜란드에서 공부할 때 일화가 떠오른다. 네덜란드에 캄펀(Kampen)이라는 거룩한 도시(?)가 있다. 그곳엔 캄펀 신학교가 두 개 있는데 이름이 똑같다(Theologische Universiteit Kampen van de Gereformeerde Kerken). 그러니 처음 찾아갔을 때 무지 헷갈렸다. 구분하는 방식은 거리 이름으로였다. 하나는 아우드스트라트(Oudestraat, 옛길) 신학교, 다른 하나는 부르더벡(Broederweg, 형제길) 신학교라 불렀다. 전자는 총회 측(시노달)이었고, 후자는 해방파(프라이흐마크트)였다. 마치 통합과 합동과의 관계 같았다.
어느 날 캄펀 신학교 구약학 교수(Johannes C. de Moor)를 만나서 이야기하다가 내가 물었다. “캄펀에 가서 보니 두 신학교의 이름이 똑같아서 헷갈렸습니다. 당신은 도대체 어느 쪽 캄펀이요?” 그러자 그 교수님이 재미있게 답변했다. “미안하네요. 아시다시피 캄펀은 네덜란드의 예루살렘입니다. 이 사실은 모두가 동의하는 바입니다. 두 신학교에서도 동의합니다. 근데 아직 두 진영에서 합의하지 못하는 문제가 하나 남아있습니다.” “그게 뭔데요?” “깜펀이 네덜란드의 예루살렘이긴 한데, 하나님의 보좌(언약궤)가 어디에 있는지는 아직 결정되지 못했습니다.” “왜요?” “두 신학교가 서로 자기네 학교 채플에 하나님의 보좌가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유머러스한 대답이었다. 한국의 장로교 교단 목사들아, 저 정도는 배워야지 않겠어요!
한 가지 이야기하고픈 것이 있다. 오늘 날씨가 추웠지만 바로 집으로 오는 대신에 승동교회에 들렸다. 기념으로 사진 한 장을 찍는데 중년의 한 분이 내 뒤에 서 계셨다. 아마 교회 관리 집사님이신 듯했다. 교회당에 대해 이런저런 말씀을 해주신다. 사실은 승동교회에 관한 역사는 내가 그분보다 좀 더 알고 있었지만, 그것보다 궁금한 것을 물었다. 한때는 합동 측 교단의 대표성이 있던 “큰 교회”였는데 지금은 도심지 한가운데 파묻혀서 어떻게 지내느냐고 물었다. 그분 말씀에 젊은이들은 드물고 주로 노인들이 대부분이 되었습니다. 지역상 차를 가지고 도심지 한가운데로 오기도 불편하고, 노인들을 젊은 시절부터 다녔으니 교회에 충성도가 높아요. 한때는 2,500명이 모이는 큰 교회였는데 지금은 많이 줄어 오륙백 명 정도가 모입니다. 말씀에 힘이 없어 보였다. 도심지 한가운데 있는 전통적 교회는 피치 못하게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엄연한 사실 앞에 고개를 떨구었다.
지상의 지역교회에는 생로병사라는 게 있다고 나는 믿는다. 언젠가 교회당이 텅 비거나 매각해야 할지도 모른다. 인구이동, 도시개발, 신앙 패턴의 변화 등등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 같다. 그러나 한 가지는 변치 않는다고 생각한다. 지역교회(당)는 생로병사를 겪다가 사라질 수 있어도, 뿌려진 복음은 어디선가 새롭게 싹이 나고 자라 또 다른 교회가 태어날 것이라는 사실 말이다. 따라서 교회는, 목사는, 설교자는 부지런히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뿌려야 하지 않겠는가! 시시한 일상 이야기였습니다.
첫 번째 사진은 아우드스트라트(Oudestraat) 신학교, 두 번째 사진은 부르더벡(Broederweg) 신학교
첫댓글 시시한 일상 이야기가 아니라 새겨보아야 할 말씀으로 여겨집니다. 지역교회에 생로병사가 있다는 것은 이미 현실이 되었지요. 유럽의 교회들은 레스토랑이나 미술관 심지어 서커스공연장으로 매각되는 현실이지요. 그런 면에서 보자면 한국교회도 통합인지 합동의 차이가 그리 의미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 차이를 전 최근에야 알았고 지금도 말해 보라 하면 자신없습니다.ㅜ(저의 무지를 용서하세요). 중요한건 복음의 씨앗이 어디로 떨어지고 어떤 열매를 맺는가에 관심을 두는게 아닐까 합니다.
부지런히 복음을 전하고~♡
시시한 일상이 일생이 되고~^^
도심지 깊숙히 파묻혀 있는 승동교회에 몇 번 가본 적이 있습니다. 130년의 기나긴 역사가 느껴지더군요.
지역교회에 생로병사가 있는 현실이 안타깝지만 시대에 따라 교회의 규모와 역할,
그 기능에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이 땅에 바른 복음의 씨앗이 끊임없이 뿌려지고 성령의 열매 또한 끊임없이 맺혀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