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名家, 名富, 義富 진주의 허씨, 제봉 고경명가(4)
진주시 지수면의 5백 년 부잣집이었던 허씨 집안이 여기에 해당한다. 만석군이었던 허씨 문중에서는 돈을 모아 의장답(義莊畓)을 만들었다. 일종의 공익재단이다. 흉년에 배고픈 사람 먹여주고, 공공사업에 돈을 썼다.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 회사였던 백산상회를 출범시킬 때에도 허씨들은 경주 최부자와 함께 거금을 내놓았다. 오늘날 진주여고도 원래는 1930년대에 허씨들이 세운 학교였다. 해방 후에 공립으로 내놓았지만 몇 년 전에도 소리 안 내고 허씨들이 100억원을 다시 내놓았었다. 백정(白丁)들의 신분 해방운동인 '형평사 운동'에도 허씨들이 돈을 댔다. 이 집안 후손이 이번에 전경련 회장으로 취임한 GS의 허창수이다. 졸부가 아닌 의부 집안의 후손이 '만석군연합회'인 전경련을 맡았다는 점이 주목된다.
조선의 명문가는 삼부자 불천위 제사를 모시는 義富 제봉 고경명가 있다.
어떤 집안이 명문가인가? 조선시대에 명문가가 될 수 있는 자격요건 가운데 하나는 부조묘(不祧廟)였다. 부조묘는 불천위(不遷位) 제사의 대상이 되는 신주를 모신 사당을 일컫는다. 제사는 본래 4대 조상까지만 지내는 법이다. 4대봉사(四代奉祀)라고 부른다. 4대라고 하면 아버지, 조부, 증조부, 고조부까지 해당된다. 따라서 5대조의 제사는 지내지 않는다. 고조부 윗대 조상의 위패는 사당에서 더 이상 모시지 않고 옮겨서 본인의 무덤 앞에 묻는다. 땅에 묻는 것을 매위(埋位)라고 한다. 그러나 특별한 조상의 위패는 4대가 넘어가도 옮기지 않고, 즉 매위를 하지 않고 계속해서 제사를 지낸다. 4대가 넘어가도 ‘옮기지 않는 조상의 제사’가 바로 ‘불천위’이고, 이 불천위를 모신 사당이 ‘부조묘’인 것이다. 불천위를 모시고 있다는 것은 대단한 영광이었다. 주변사람들로부터 그 집안이 명문가로 대접을 받는 조건이기도 하였다. 불천위가 있어야 종가(宗家)도 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어떤 특별한 조상이 불천위에 해당되는가. 퇴계나 율곡같이 학문과 덕행이 널리 알려진 선비들도 있었지만, 상당수는 전쟁과 같은 국가적 위기에 자기를 희생한 인물들이 사후에 불천위로 모셔졌다. 대표적으로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닥쳤을 때 목숨을 바치고 재산을 바쳐 의병을 일으킨 사람들이다. 임진왜란 때 왜군과 싸우다가 삼부자가 모두 전사한 광주의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1533~1592) 집안이 이런 경우이다. 제봉은 당시 60세의 노인이었지만 호남의 의병 6000명을 이끌고 싸우다 금산전투에서 죽었고, 둘째아들 인후(因厚)도 아버지와 같이 전사하였다. 큰아들 종후(從厚)는 아버지와 동생이 죽는 것을 보고 얼마 있다가 2차 진주성 싸움에 뛰어들어 전사하였다. 임란이 끝난 후에 이들 삼부자를 국가에서 불천위로 지정하였다. 현재까지도 제봉 집안이 호남에서 명망을 유지하는 것은 이 불천위의 영향이 크다. 제봉 고경명은 임진 왜란시 의병장으로 전라도 의병장으로 금산전투 제봉 고경명과 그의 큰아들 준봉(▩峯) 종후(從厚)와 둘째 아들 학봉(鶴峯) 인후(因厚)가 함께 금산전투에서 전사하여 국불천위로 ‘삼부자 불천위’(三父子 不遷位)이다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1533~1592)을 비롯한 삼부자(三父子) 모두가 목숨을 바쳐 고씨 집안은 ‘삼부자 불천위’(三父子 不遷位)이다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 의병장으로 금산전투 제봉 고경명과 그의 큰아들 준봉(▩峯) 종후(從厚)와 둘째 아들 학봉(鶴峯) 인후(因厚)가 전사하였다.
제봉 고경명의 동생이었던 경신(敬身)은 전투에 필요한 말을 구하러 제주도에 갔다 오다가 풍랑을 만나 익사했고, 또 다른 동생인 경형(敬兄)은 1593년 진주성 싸움에서 전사했다. 당시 32세였던 고경명의 둘째아들 인후는 아버지와 함께 금산 전투에서 죽었고, 40세였던 큰아들 종후는 1년 뒤 진주성 싸움에서 숙부인 경형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했다. 전사한 두 아들 모두 대과 급제를 한 수재들이었다. 살아남은 것은 당시 16세였던 막내아들 청사(晴沙) 용후(用厚)다. 용후가 따라 나서려 하자 제봉은 ‘너는 나이도 어리고, 집안에 남아서 할 일이 있다’고 타이른다. 임란이 끝난 후에 대과에 급제한 용후가 아버지와 형님들을 비롯한 집안의 모든 기록들을 정리하여 세상에 남겼다.
전라도 의병장 제봉 고경명 식솔들이 경북 안동으로 피난 와서 학봉 김성일의 부인이 임진왜란 때 전라도 고경명 장군 3부자가 금산전투에서 전사한 뒤 막내아들과 어머니 등 집안사람 50여 명이 안동에 왔을 때 4년반 동안 숙식을 제공하였다. 당시 집안 사정이 넉넉하지 않았을 터인데 가문의 명예를 걸고 그렇게 하였다.
둘째아들 학봉 고인후(因厚)의 후손들이 창평에 많이 살았던 탓으로, 흔히 ‘창평 고씨’라고도 부른다. 갑오경장(1894)이후로 진행되던 일제의 침략이 이루어지자 학봉의 후손들은 강경파와 온건파의 두 갈래로 나뉘어 대응한 것 같다. 강경파의 방법은 의병활동이었다. 강경파를 대표하는 인물은 학봉의 11대 후손인 녹천(鹿川) 고광순(高光洵:1848~1907)과 청봉(晴峰) 고광수(高光秀:1875~1945)이다. 고광순은 학봉의 종손이면서 호남 의병장의 중심이었다. 선대의 명성을 당당히 계승한 것이다. 당시 60세의 나이였던 고광순은 1907년 10월 구례 연곡사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연곡사에서 같이 전사한 12명의 동지들도 대부분 고씨 집안 사람들 이었다고 전해진다. 구례 사람인 매천 황현은 고광순의 행적을 ‘매천야록’에 기록하면서 그의 인물됨을 높이 평가하였다. 근래의 노산 이은상도 ‘섬진강’에서 고광순의 충절을 노래한바 있다.
의병장 고광순을 도와 일체의 경비를 댄 사람이 천석꾼 고광수이다. 고광수 역시 ‘창평 고씨’라는 자존심 때문에 의병대의 선봉장으로 활약했을뿐만 아니라 의병활동에 소요되는 일체의 비용을 담당했다. 그리하여 천석의 재산을 모두 의병활동에 바쳤고, 그가 살던 남원 효기리 응령에 있던 고래 등 같던 기와집은 일본군에 의하여 불타버렸다. 해방되기까지 금강산 일대로 숨어 다녀야만 했다.
학봉 고인후의 10대 후손인 고정주(高鼎柱:1863~1934)였다. 그는 구한말 규장각을 통솔하는 직각(直閣) 벼슬을 지냈다고 해서 보통 ‘고직각’으로 불리운다. 그는 1905년 을사보호 조약이 맺어지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인 창평에 돌아와 창흥의숙(昌興義塾)을 세운다. 호남 최초의 근대 학교였다. 창흥의숙에서 개설한 과목은 한문, 국사, 영어, 일어, 산술 등 당시로서는 신학문들이었다. 교사들의 월급과 학생들의 공부에 필요한 일체의 비용은 만석꾼이었던 고정주가 되었다. 창흥의숙은 후일 창평 보통학교로 커졌고, 현재에는 창평초등학교로 변해 있다. 창흥의숙에서 배출된 인물이 고하 송진우, 인촌 김성수, 가인 김병노 등이다. 동아일보 사장을 지낸 고재욱(高在旭)은 고직각의 손자로, 학봉의 12대 후손이다. 70년대에 보건사회부 장관을 지낸 고재필(高在珌), 대법관을 지낸 고재호(高在鎬)등이 모두 在(재) 字 항렬이다. 재자 항렬 다음에는 錫(석) 字 항렬이다. 서울대 부총장을 지낸 고윤석(高允錫), 헌법재판소 판사를 지낸 고중석(高重錫), ‘무등양말’ 창업자 고일석(高馹錫)이 여기에 해당한다. 고일석은 선대의 인재양성 전통을 이어서 창평고등학교와 창평중학교를 설립하였다.
불천위이시고, 임진왜란의 의병장인 고경명은 의부로 후손들이 국가가 위기에 처할 때 마다 의병으로 활동을 하게 된 명문 의부가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