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순아, 안녕.
지난 5월, 그동안 타던 승용차를 폐차시켰습니다.
그런데, 차를 페차 시키는데 어째서 그런 느낌이 드는 거죠?
동물이나 식물처럼 생명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차는 철· 플라스틱· 유리· 고무로 만들어진 광물이잖아요.
그런데도 그것도 작별이라고 가슴이 찡~ 하더라니까요. 참...
한 20여 년 전, 밥을 먹으려고 어느 식당엘 들어갔는데
창가 쪽 식탁에 여성 두 사람이 마주 앉아서 밥을 먹고 있었고
그중 한 여성의 얼굴과 몸의 자태가 내 눈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냥 예쁜 여자는 많잖아요.
그냥 야하기만 한 여자도 많잖아요.
키나 몸매가 중심이 잘 잡힌 여자도 많잖아요.
하지만, 예쁘고, 야하고, 몸매가 멋있는 데다가
교양과 지성과 양심과 수줍음까지 겸비한 여자는 흔치 않은데
그 여성의 모습이 그러하였습니다.
얼굴 표정, 말하는 모습, 고요하게 간직하던 몸을 조금씩 움직일 때 번져나는 그 화사함!
그녀의 직업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대학교수· 시인· 소설가· 검사· 판사· 의사· 성직자· 예술가는 아닌 것이 확실해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한국의 지식인 중엔 저렇게 고결한 사람이 있을 수가 없거든요.
나는 밥보다는 그녀를 감상하느라고 바빴고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몰래 훔쳐보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간간이 나누는 대화를 엿듣고는 싶었지만 거리가 좀 있었는 데다가,
그들이 목소리를 너무 작게 해서 속삭이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무슨 내용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도 한 가지 큰 소득은 그녀의 이름!
그들이 서로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미루어 아마도 학교 동창이 아닌가 싶었는데요,
마주 앉은 친구는 그 여성에게 길... 무엇이라고 부르는 것 같았습니다.
이름의 첫자가 『길』인 것은 확실하지만
그다음이 『순』인지『숙』인지『선』인지가 확실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 맘대로, 그녀의 이름을
『길순』이라고 확정 지었습니다.
그 후로도 길순의 얼굴은 내 마음과 꿈속에 수시로 나타났고
하늘과 바람과 구름과 별과 꽃과 시냇물의 모습과도 자주 겹쳐져 보였습니다.
그녀의 허락도 없이 나는 그녀의 얼굴을 닳도록 떠올렸고
그럴 때마다 많은 위안을 받았습니다.
내가 이렇게 그녀를 생각하니
그녀의 꿈속에 나도 가끔 나타날까?
2011년, 예정에 없던 승용차를 한 대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연식이 오래된 낡은 경차였습니다.
내가 승용차를 사게 될 줄을 전혀 몰랐다는 건
나에게 차가 필요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이전까지 나는 오토바이를 탔는데, 불만이나 불편한 게 전혀 없었고
승용차 타는 사람이 부러워본 적도 없었습니다.
『이번 인생을 나는 오토바이로 끝내야지!』그렇게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자꾸 오토바이를 훔쳐가는 것이었습니다.
충주에 이사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오토바이를 두 대나 도둑맞았고, 그래서 오토바이에 정나미가 떨어져서
중고차를 구입하게 된 것입니다.
내 인생의 첫 차인 그 마티즈 2에
나는 그녀의 이름을 붙였습니다.
『길순』이라고!
길순은 오래된 아주 낡은 차였는데도
고장이 없었습니다.
처음 몇 달은 잔고장이 서너 번 있었지만
나하고 정이 들고, 나에게 길이 들면서 길순은 단 한번도
고장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가난하던 나에게 그런 길순은 여간 고마운 게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이름을 그렇게 붙이니, 자연히 자주 부르게 되더라구요.
운행을 마치고 시동을 끄면서『길순아, 고맙다!』『고생했다, 길순아!』
『길순아! 아저씨는 너를 타고 가는 느낌이 엄청 황홀한데,
너는 아저씨 태우고 가는 느낌이 어떠냐?』
『길순아! 네가 아무리 낡아도 이 아저씨가 너를 끝까지 버리지 않을게!』.....
18대 대통령 선거 직전, 열일을 제쳐두고
『전 국민 투표 거부 운동』에 올인하다가 낭패를 보고 크게 실망한 나머지
길순이를 몰고 강릉 경포 앞바다와 포항으로, 목포에서 다시 광주로.
그렇게 다니면서 아픈 마음을 달래던 때가 엊그제 같고,
보일러에 기름 넣을 돈이 없어 2년 겨울을 길순이 품에서 지내던 때도 생각납니다.
새벽에 눈을 떠서 추위에 떨다가 해가 떠오르면
길순이를 몰고 바로 옆 중앙탑 공원 주차장으로 가서 해를 마주 보고 주차를 한 뒤
길순이 뒷좌석에 앉아 책도 읽고, 음악도 듣고, 카페에 올릴 글도 쓰고는 했습니다.
가끔 내 차를 얻어타던 다른 사람들은 길순이를 보면서
이렇게 낡은 차를 타는 것이 기분 나빴을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대통령도 길순이에게 태운다는 것이 아까웠습니다.
그래서 웬만해서는 다른 사람을 태우지 않으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사실 길순이는 2년 전 정기검사에서 이미 폐차 판정을 받았었습니다.
그런 것을 내가 이리저리 손을 써서 가까스로 통과했던 것인데
이번 검사에서는 백방으로 손을 써도 안되더라구요.
폐차하는 날 아침,
길순이를 그대로 보내는 것이 안됐어서 안팎으로 깨끗이 세차를 하는데
그냥 가슴이 뭉클! 하면서 눈시울이 뜨겁더라구요.
폐차장에 갈 때, 길순이를 폐차장에 두고 돌아설 때,
고철덩어리에서 그런 느낌을 받게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사실은 길순이의 번호판을 좀 가져오고 싶었지만 법적으로 불가능 했고
다른 걸 가져올까 하다가, 그만두었습니다.
길순아! 그동안 고마웠다.
안녕!
2018년. 7월. 7일.
민중혁명이 온다. 강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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