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雪糖과糖尿病
南아프리카共和國의 糖尿病 專門醫인 캠벨 博士의 記錄을 보자.
"이상하게도 히포크라테스는 糖尿病의 症例를 記述하지 않았다.
그토록 注意 깊은 臨床觀察者(임상관찰자)가 요란한 糖尿증세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가 없다.
단순한 症例이든 복합적인 症例이든 히포크라테스는 어느 것이나 상세히 묘사해
놓았기때문이다. 糖尿病은 分明 古代에는 드물었던 疾病이고, 아마도 산발적으로
發病했더라도 現代 農村에서의 發病率과 비슷한 水準이었을 것이다."
現代의 醫學界는 偏見을 뒷받침해야 할 때 그리스語에 依存하지만, 그럴 必要가 없
으면 그냥 넘어가 버린다.
"19世紀의 당뇨병 발병률이 옛날보다 증가했다."는 의학계의 의견을 한 번
보자. 하지만 19世紀以前의 당뇨병 발병률 통계치가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
인가? 초기 미국의 설탕 소비량과 관련한 당뇨병 사망자 수조차 집계되어 있
지 않은데 말이다. 덴마크 정부에는 관련 통계 수치가 있지만, 미국의 의학사
계는 결코 설탕과 당뇨병을 함께 언급하거나 관련성을 암시하지 않는다.
1880년 덴마크 시민 한 사람이 소비하는 정제 설탕 소비량은 연간 29파운드
(약 13kg)였고, 당시의 당뇨병 사망률은 10만 명당 1.8명이었다. 1911년에는
설탕 소비량이 두 배 이상 늘어나 1인당 82파운드(약 37kg)이상이 되었고, 그
해의 당뇨병 사망률은 10만 명당 8명이었다. 1934년에는 1인당 설탕 소비량
이 113파운드(약 51kg)정도였고, 당뇨병 사망률은 10만 명당 18.9명이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의 덴마크는 유럽의 어느 나라보다도 설탕을
많이 소비했다.(덴마크 빵이라는 뜻의 '대니시 페스트리'는 설탕 폭탄이나
마찬가지다). 덴마크 사람 다섯 명 중 한 명이 암에 걸렸다. 스웨덴의 1인당
설탕 소비량은 1880년의 12파운드에서 반세기 후인 1929년에는 120파운드
이상으로 급증했다. 스웨덴 사람 여섯 명 중 한 명은 암에 걸렸다. 스칸디나
비아 국가에는 설탕 소비량이 비교적 적을 때부터의 보건 통계 수치가 남아
있다. 미국에는 이런 자료가 없다. 다른 나라들이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처럼
통계 수치를 조사하지는 못했더라도 요점은 분명하다. 설탕 소비량이 엄청나
게 증가함에 따라 치명적 질병이 심각할 정도로 늘었다는 점이다.
의학은 늘 진보하고 발전해 간다. 세기적인 발견이 하나 출현하면, 그 후속
발견이 줄줄이 이어진다. 그러나 설탕과 관련된 질병과의 전투에서는 이런
발견이 드물었다. 1889년 러시아의 연구자인 민코프스키와 그의 동료인 메링
이 개의 췌장을 제거한 후 생존 가능 여부를 확인했던 실험이 이 분야에서
처음 보고된 세기적 발견이라 할 만하다. 실험이 거듭되면서 여러 마리의 개
가 죽었다. 개들은 죽기 전에 5~10퍼센트의 설탕을 함유한 소변을 대량 배설
했다고 한다. 원인이 분명 췌장 안에 있다는 실마리를 잡은 것이다.
1923년 캐나다의 밴팅은 인슐린 호르몬(정상인의 췌장에서 적정량 분비하는
)의 추출법을 발견하고, 인슐린이 이 소리 없는 살인자인 당뇨병의 비정상적
인 혈당치를 조절하고 있음을 발견하여 노벨상을 받았다.
1880년 이후의 과도기를 살았던 당뇨병 환자들은 고문 같은 치료를 감내해
야 했다. 주기적으로 금식을 하거나 , 지방을 잔뜩 먹거나, 베이킹 소다 주사
를 맞아야 했고, 화학자들이 곡물을 단순히 '탄수화물'로 잘못 분류한 탓에
곡물이라면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발가락,발,사지를 절단하기도 했다. 그러
나 가장 슬픈 것은 의사들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환자들은 계속 죽어갔
다는 사실이다. 1911년 간행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보면, 인슐린이 알려
지기 전 당뇨병에 대한 세간의 이해 수준과 치료법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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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뇨병은 체내 물질 대사가 변화해서 생기는 질병이다. 유전성이 현저하고,
시골 촌락보다 현대적 도시생활을 하는 곳에서 당뇨병이 잘 걸린다. 또한
유대인들이 잘 걸린다. 병의 원인 중 하나로 설탕의 과용이 지목된다. 비만이
당뇨 발생을 부추긴다고 하지만.....모든 연령층에서 발생하긴 해도 50대에서
가장 잘 걸린다. 남자가 여자보다 두 배 정도 많이 걸리고, 백인이 흑인보다
잘 걸린다.........당뇨병은 매우 치명적인 질병이고,회복되는 예가 극히 드물
다..........치료 방법은 식이요법과 약물의 두 가지다. 주로 사카린과 전분으로
구성된 특정 식품이 병을 심하게 악화시키는 것으로 명백하게 입증된 만큼
식이요법이 제일 중요하다. 이런 요소를 가능한 한 식단에서 제거하는 것이
치료의 목표다. 개별 환자에 맞춰 시험을 해야 가장 좋은 식이요법을 찾아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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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슐린의 발견은 '질병으로 잇속을 챙기려는 세력'들이 이를 어떻게 악용할
지가 뻔히 보이는 근대 의학의 기적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인슐린의 생산
은 제약업계로서는 축복이다. 당뇨병 환자는 안정적인 시장을 형성한다.
1900년대 초반에는 그 수가 100만 명이었다. 1920년대 설탕 중독자가 급증
하면서 이런 수익성 좋은 시장이 해마다 팽창하리라는 확신을 주었다. 인슐
린 주사는 비싸지만 용이한 '증상완화제'일 뿐, 어떤 의미로든 빠르고 저렴한
'치료제'는 아니었다. 수백만 명에 이르는 당뇨병 환자들은 남은 일생 동안
인슐린에 의존해야 한다. 인슐린은 처방전 없이 주삿바늘 같은 소모품과 함
께 약국에서 패키지 포장으로 구매할 수 있었다.
이로써 백신이 만능이라는 생각과, 약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환상
을 심어주게 되었다. 도살장에 끌려온 동물의 췌장에서 추출한 인슐린을 주
사받으며 당뇨병 환자는 목숨을 이어갔다. 인슐린을 투여할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죽지 않고 살아남아 당뇨병에 취약한 자손을 낳았다. 당뇨병
의 변종이 늘어났다. 소변을 많이 배설하게 하는 '꿀로 인한 염증'이라는 의
미의 당뇨병이란 용어는, 증후를 중시하는 현대적 명칭인 '저인슐린혈증(인
슐린 생산 저하증)'에 그 자리를 넘긴다.
인슐린의 發見으로 노벨賞이 수여된 그 다음해인 1924年 한 의과대학 교수
가 低인슐린血症과 상보적 피드백 현상을 발견했다. 인슐린 발견 초기에
인슐린을 너무 적게 혹은 너무 많이 투여한 때문에 발견되었으리라. 인슐린
을 과용하면 이른바 인슐린 쇼크가 발생했다. 앨라배마 의과대학의 해리스
박사는 당뇨병 환자도 아니고 인슐린을 투여받지도 않은 사람들이 인슐린
쇼크를 겪는 것을 발견했다. 이들은 혈중 포도당 수치가 낮았고, 당뇨병 환자
는 반대로 포도당 수치가 높았다.
같은 해 해리스는 이 발견을 공식적으로 보고하면서, 血中 포도糖수치가
낮은 것은 인슐린이 過多하기때문이므로 이는 '高인슐린혈증'이라고 선언
했다. 그때까지 高인슐린血症 患者는 冠狀動脈血栓症이나 심장 질환, 뇌종양
,간질, 담낭질환, 충수돌기염, 히스테리, 천식, 알레르기, 궤양, 알코올 중독,
이외 다양한 정신 질환의 이름을 달고 치료받고 있었다.
그러나 해리스는 노벨賞을 받지 못했다. 그의 發見은 '疾病으로 잇속을 챙기
려는 세력'에게 祝福이 아닌 당황스러움을 선사했기 때문이다. 高인슐린혈증
이라! 저혈당증 치료법으로 그가 제시한 것은 패키지 포장으로 병에 넣어 약
국에서 팔 수 있는, 그래서 제약업계에 수억 달러를 벌어 줄 魅惑的인 奇跡의
신약이 아니었다.
해리스가 제안한 高인슐린血症(低血糖症)치료법은 너무나 간단하여 아무도
, 심지어는 의료人조차도 그것으로 돈을 벌 수 없었다. 몸을 스스로 다스리자
는 게 그의 치료법이었다. 혈당이 낮은 환자는 문제를 일으키는 정제 설탕과
캔디,커피,음료수를 끊으면 되었다. 病으로부터 스스로 방어할 수 있으므로
高인슐린혈증 환자는 평생 어느 누구에게도 의존할 필요가 없었다. 의사는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환자에게 교육하면 끝이었다. 高인슐린혈증은 스스로
치료할 수 있었다.
당연히 의사들은 해리스에게 끊임없이 혹독한 공세를 퍼붓거나 그의 주장을
무시했다. 그의 발견이 혹시라도 주위에 알려지면 외과의나 정신분석의, 여
타 전문의들이 곤란을 겪을 터였다. 지금까지도 高인슐린혈증은 질병으로 잇
속을 챙기려는 세력들에게는 의붓자식이다. 미국의학협회가 해리스에게 메
달을 수여하는 데만도 25年이 걸렸다.
1929年 인슐린을 발견한 밴팅은 인슐린이 일시적 완화제일 뿐 치료제가 아
니며, 궁극적으로 糖尿病을 예방하려면 '위험한' 雪糖 탐닉을 자제해야 한다
는 사실을 홍보하려고 애썼다. 그의 경고를 들어 보자 : "미국의 糖尿病 발병
률은 1人當 雪糖 소비량의 변화에 비례하여 증가하고 있다. 天然 사탕수수를
가열, 재결정하는 과정에서 무언가 변화하여 정제물을 위험한 食品으로 만든
다."
인슐린으로는 糖尿病으로 인한 死亡을 다만 '지연' 시킬 수 있을 뿐임을 영
국의 통계는 보여 준다. 그게 전부다.
영국에 인슐린이 도입되기 전의 糖尿病 死亡率은
1920年 100만 名當 110名
1922年 100만 名當 119名
1925年100만 名當 112名이었고,
인슐린이 도입된 후의 糖尿病 死亡率은
1926年 100만 名當115名
1928年 100만 名當131名
1929年100만 名當 142名
1931年 100만 名當 145名이었다.
1930年代 美國의 明敏한 연구진들은 쌀을 主食으로 먹는 中國과 日本은 당
뇨병이 거의 發生하지 않는다는 것을 發見했다. 또한 여러 민족들 가운데 유
대人과 이탈리아人이 유독 糖尿病 발병률이 높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들은
東洋과 西洋의 정제 설탕 소비량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무시한 채,
유대인은 동물성 지방을 많이 먹고 이탈리아인은 올리브 오일을 지나치게 많
이 먹으므로 지방을 과용하는 사람들이 당뇨병에 잘 걸릴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미국의 다른 통계치에는 설탕을 배급받아야 했던 제 1차 세계대전 동안 당뇨
병 발병률이 급격히 감소했다고 나와 있다. 그러나 군에 입대한 젊은이들의
당뇨병 발병률은 (시민들은 설탕이 없었지만 군인들은 설탕을 충분히 공급
받았다.) 제 1차 세계대전에서 제2차 세계대전에 이르는 기간 동안 꾸준히
증가했다.
허버트 스펜서의 말을 빌자면, 지식이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는 많이 알면 알수록 혼란만 커질 뿐이다. 설탕으로 인한 질병에 대한 서구
의학의 답변은 온통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일본에 정제설탕이 도입된 것은 미국의 남북전쟁 후 일본에 파견된 기독교
선교사에 의해서다. 수백 년 전 아랍인과 페르시아인이 정제 설탕을 약으로
썼던 것처럼, 처음에는 일본인들도 설탕을 약으로 썼다. 설탕에 물린 세금은
수입 약에 물리는 세금처럼 아주 무거웠다. 1906년 일본 내 사탕수수 경작
규모가 4만 5천 에이커였으니, 쌀의 경작 규모인 700만 에이커와 비교해 보라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군의 군량 배급 방식이 1970년대 베트콩과 유사한
점이 참으로 흥미롭다. 그들은 제각기 3일 분량의 건조미를 지니고 다니며
젓갈과 건조 해조류, 우메보시를 곁들였다.
러시아와의 전투에서 승전을 거둔 후 일본인들은 점차 예전의 풍습을 버리
고 서양식 의학과 영양학,기술,종교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일본인들의 식
생활에 설탕이 점점 스며들면서 서양식 질병이 발생했다. 서양 의술을 배워
간호사가 된 한 일본인 조산원이 병이 나자, 그녀가 그토록 신봉하던 서양
의사들은 불치 선언을 해버렸다. 같은 병으로 이 조산원의 자식 셋이 죽었다
겨우 10대의 나이에 결핵과 궤양으로 죽게 될 거라고 의사가 예견했던 넷째,
니오티 사쿠라자와는 자신의 운명에 맞섰다. 일본은 근대화의 영향을 받아
전통 동양 의학을 불법으로 규정했지만, 그는 동양 의학을 공부했다. 사쿠라
자와는 유명한 일본 의사인 사겐 이시두카의 이단적 경력에 끌렸다. 이시두
카는 서양 의학에서 불치 판정을 받고 포기한 수천 명의 사람들을 전통적
먹을거리로 치료했다.
이시두카는 나트륨(陽(양))과 칼륨(陰(음))의 상보적 길항 관계를 밝혀 고대
의 독특한 음양 개념이 생화학적 유효성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했다. 당시 청
년이었던 사쿠라자와는 이시두카에게 배움을 얻었고, 스승의 사후에는 스승
보다 더 발전했다. 그는 고대 인도 의학과 한의학 , 침술을 익히며 고대 문명
이 남긴 비밀스러운 서적을 읽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그는 파리에서
소르본대학과 파스퇴르연구소를 다녔다. 생계를 위해 1920년에는 파리에 사
설 침술원을 개업했다. 이후 프랑스 의사인 드 모랑과 공동으로 유럽어(프랑
스어)로 된 최초의 침술 서적을 저술했다. 드 모랑은 인도차이나에서 군인으
로 복무하면서 침술에 눈을 뜬 인물이었다고 한다. 사쿠라자와의 이 책은 독
일어판과 영어판 <황제내경>의 각주에도 등장한다. 지금도 이 책은 미국 의
과 대학에서 역사적 가치를 지닌 문헌으로 취급된다.
사쿠라자와는 마침내 동양의 철학과 예방의학 사상이 담긴 책을 일본어와
프랑스어로 여러 권 펴냈다. 알렉시 카렐의 고전인 <인간, 미지의 세계>를
번역하여 일본에 소개하기도 했다. 동양과 서양을 개인적으로 두루 경험한
후 그는 "설탕 소비와 질병과의 연관성을 소리 내어 경고함에 있어 서양 의학
은 수십 년이나 뒤처져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당신들은 모두 삼백안
이다>라는 책에 "먼 훗날 서양 의학은 동양이 오랜 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을
받아들일 것이다. 설탕은 근대 산업 문명이 극동과 아프리카 국가에 가져다
준 최대의 악이다"라고 적었다.
사쿠라자와는 모든 질병을 치유하고 예방하기 위한 자기 통제 방법에 대해
설명했다. 해리스가 강조한 것은 고인슐린혈증뿐이었다. 당연히 국내와 해
외의 질병 관련자들의 비웃음만 샀다. 무시받지 않으면 조롱당했다. 설탕으
로 인해 생기는 병에 대한 그의 분석은 단순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음식을 먹고 소화가 되면 음식은 당(음성인 단순 당)으로 전환된다. 당은
혈류를 타고 췌장에 도달한다. 췌장은 혈당치가 높아지면 인슐린(陽(양))의
생산을 자극하는 곳이다. 인슐린은 혈류를 타고 간에 도착한다. 간에서 과다
한 당이 글리코겐(양성인 복합 당)으로 전환된 후 간에 저장된다.
즉 혈당이 감소하면 부신피질 호르몬과 뇌하수체 호르몬(이런 부신피질자극
호르몬은 음성이다)의 분비가 자극되어 간에 저장된 글리코겐을 포도당으로
전환시킴으로써 혈당치를 높인다. 건강한 신체의 혈당치는 인슐린(陽(양))과
부신피질 호르몬(陰(음))의 상호작용으로 유지된다.
그러나 기능성이 떨어진 신체는 혈당치의 기복이 아주 커진다. 만일 췌장에
서 인슐린이 너무 많이 분비되면, 너무 많은 당이 글리코겐으로 전환되며 혈
당치가 떨어져 계속 낮은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이것이 고인슐린혈증 즉 저
혈당증이며, 슈거 블루스의 초기 단계다. 이렇게 췌장이 지나치게 자극받는
현상은 정제 설탕과 꿀, 과일 등의 단순 당을 다량 섭취하거나 간접적인 약물
자극(마리화나를 포함한)이 있을 때 발생한다.
달리 말해, 인슐린 공급이 부적절하면 간이 효율적으로 과다한 당을 글리코
겐으로 전환시키지 못한다. 이것이 당뇨병이다. 췌장에서 인슐린 생산이 느
려지거나 중단되면 단순 당과 꿀, 과일,약물과 같은 고도의 음성 식품을 중성
화하지 못하고, 과다한 당은 혈류에 쌓이기 시작하며, 일단 혈당치가 높아지
면 계속 높은 상태로 유지된다. 단순 당과 꿀,과일의 과다 섭취는 고인슐린혈
증을 야기한 후 슈거 블루스의 다음 단계인 (혈당치가 높은) 당뇨병을 부른다
윌리스가 '糖尿病(당뇨병)'이라고 불렀던 '高血糖(고혈당) 증세'는 초기에
쉽게 발견된다. 왜냐하면 당뇨병을 알아차리는데에는 소변 표본과 특이한
향취만 있으면 되기 때문이다. 의학 기술의 발전으로 슈거 블루스의 초기
단계인 低血糖(저혈당)을 감지한 것은 20세기부터다.
사쿠라자와는 당뇨병은 음성 질환이므로 양성적인 치료를 받으라고 권고
한다. 극도의 음성도 양성도 아닌 균형잡힌 식사가 필요하다. 사쿠라자와는
현미와 일본 팥, 훗카이도 호박(호박은 어느 것이든 좋다)으로 구성된 식이
요법을 제안했다. 그는 벨기에와 프랑스에서 처음 경작하는 품종의 쌀과 일
본 팥, 훗카이도 호박을 재배하도록 하여 천연 탄수화물 경작법을 소개했다
1920년대 미국에는 저렴한 식물성 단백질의 공급원으로 大豆(대두:동양의
소고기라 불리는)가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대두는 미국에 들불처럼 번져 나
갔다. 현미, 일본 팥, 호박, 그리고 된장, 두부, 간장 같은 전통적인 대두 식품
은 쉬 인기를 끌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앞으로 변화할 것이라 예언했다. 그
리고 실제로 변했다. 식량과 에너지 위기가 거듭되면 계속하여 변할 것이다
당연히 서양 의학의 권위자들은 사쿠라자와를 엉터리에 돌팔이라고 비난
했다. 미국과 중국이 수교하기 전인데다 미국의 유수 의과대학 학위 소지자
도 아닌 그가 침술 이상의 치료법을 시행한다는 것은 일각에서 그를 불신하
기에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었다. 혈당이 높은 당뇨병 환자들에게 고탄수화
물 식이를 권장하는 것은, 서양 의학의 눈에는 그가 미친 증거로 보였다. 탄
수화물이 소화되면 단순 당으로 분해되므로 혈당이 위험 수치까지 높아지게
된다는 것이 당시의 상식이었기 때문이다.
사쿠라자와는 설탕업계와 그 의붓자식인 인슐린 생산 업계에 위협적인 존재
였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이것을 찬사로 생각했다. 1960년대에 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인슐린이 발견된 지 30년이 지났지만 당뇨병을 치료하는 서양 의사
는 아무도 없다. 의사들은 계속하여 인슐린을 처방하고, 당뇨병 환자들은 평
생 인슐린에 의존해야 한다는 운명을 받아들인다. 인슐린 발견 25주년만에
인슐린은 당뇨병 치료제가 아니라는 사실이 공개적으로 인정되었다. 그 와중
에 수백만 명이 넘는 당뇨병 환자들이 미국에서, 그리고 전 세계에서 엄청난
돈을 들여 효과도 없는 치료를 받는다. 당뇨병 환자들은 매일같이 늘어난다.
인슐린의 투여는 평생 의사와 제약업체의 돈주머니를 불려 주겠다는 서약을
하는 셈이다.----------------------
사쿠라자와는 서양의 이른바 탄수화물 식품을 당뇨병 환자들에게 먹이지 않
는 식이요법은 위험하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는 서구의 영양학자들이 단순
히 탄수화물이라 분류하는 식품들을 이제 질적으로 구분하라고 요구했다. 정
제하지 않은 통곡물을 공급원인 감자와 흰빵, 정제 곡물, 백설탕을 똑같이 취
급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미국 의학계가 설탕에 의한 질병에 대해 겪었던 혼란을 입증하는 방법이 있
다. 환자는 고사하고 자기 자신도 치료할 수 없었던 의사(그들의 아내 역시)
의 수를 세어 보자. 플로리다 주 탬퍼 시에 살았던 의사, 절랜드가 전형적인
사례다. 그는 무수한 육체적, 정신적 증세를 겪고 있었다. 집중력과 기억력
이 감퇴하고, 힘이 빠지고 어지러우며, 갑자기 가슴이 두근두근 뛰고, 이유
없는 불안과 振顫(진전)증세에 시달렸다. 자기가 아는 가장 저명한 전문의를
찾아갔지만, 신경성이라는 진단을 받고 의사 생활을 그만두라는 권고를 받
았다. 다른 답을 얻고자 병원을 전전한 그는 모두 열네 명의 의사와 가장 유
명하다는 진단 클리닉 세 곳을 찾아다녔다.
"의사는 모름지기 환자의 질병에 이름을 부여하면 큰 임무를 완수한 것처럼
느낀다"고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말했다. 절랜드의 병명은 참으로 다양했
다. 신경증, 뇌종양, 당뇨병, 대뇌동맥경화증 등등, 결국 몸은 낫지 않고, 아파
서 일도 못하고, 의사들의 모순된 횡설수설에 시달리면서 돈만 많이 쓴 셈이
었다. 1924년 <미국의학협회저널>에 실린 해리스의 논문을 우연히 발견했을
때는 거의 희망을 포기할 참이었다.
그는 5시간 포도당 견딤검사를 받은 끝에 저혈당증 즉 슈거 블루스에 걸렸다
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해리스의 처방에 따라 정제 설탕과 흰 밀가루를 배제
한 단순한 식사를 했다. 불안증, 진전, 현기증, 신경증, 대뇌동맥경화증이 사
라졌다. 병에서 헤어난 그는, 진단은 정확했지만 잘못된 처방을 내렸던 의사
를 기억해 냈다. 그 의사는 '저혈당증'으로 진단한 후 캔디 바를 먹어 혈당을
높이라고 처방했던 것이다! 이런 처방은 불에 기름을 붓는 것처럼 절랜드의
증세를 악화시켰다.
물론 나나 다른 사람들도 그렇겠지만, 당신이 의학적으로 이런 황당한 일을
겪는다면 약간은 강렬한 소명 의식이 생길 것이다. 절랜드 역시 비장한 논조
로 <미국의학협회저널>에 편지를 보내 해리스의 개척적 연구를 경시하고 무
시한 동료 의사들을 비판했다. 힘겹게 교훈을 얻은 그는 슈거 블루스로 고통
받는 사람들(특히 병의 원인인 정제 설탕을 되레 처방받는 비극에 처한 사람
들)의 진단과 치료를 돕기로 맹세했다.
이로써 절랜드는 자신의 말의 파급 효과를 입증한다. 그와 같은 증세의 사람
들 중 600명이 넘는 환자들이 그의 치료를 받았다. 그는 환자를 어떻게 진단
했고, 증세는 어떠했으며, 정제 탄수화물(주로 설탕과 흰 밀가루)을 엄격히
제한하면서 시작한 치료에 그들의 반응은 어떠했는지를 상세하게 적은 논문
을 저술했다. 미국의학협회를 귀찮게 한 끝에 마침내 학회에서 논문을 발표
하게 되었다. 그리고 <미국의학협회저널>에 그 논문이 수록되기를 초조히 기
다렸으나 끝내 실리지는 않았다. 이는 미국의학협회가 회원들에게 표준 이학
적 검사인 포도당견딤검사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데 얼마나 勞心焦思(노심초
사)했는지를 보여준다.(포도당견딤검사는 세 가지가 있고 각각 소요 시간이
다르다) 절랜드의 이 중요한 논문은 마침내 브라질의 의학저널에 포르투갈어
로 실렸다.
절랜드가 슈거 블루스로 인한 우울증과 현기증을 겪으면서 전문의들을 전전
하며 고생하고 있을 때, 하버드와 MIT에서 공부한 과학저술가인 페제도 동일
한 궤적을 밟고 있었다. 페제 역시 수많은 진찰실을 헤매며 다른 의사들의 수
많은 誤診(오진)과 잘못된 치료법에서 살아남은 사람이었다. 의사가 그의 증
세를 정확히 찾아내 포도당견딤검사로 확진하고 설탕 섭취를 금지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10년이었다. 증세가 사라지고 난 후 그는 주치의인 에이브럼슨
박사에게 곤란한 질문을 던졌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다양한 증세로 이렇게 고통받는데 왜 의사들은 아무
것도 모르는 건가요? 진단과 원인 제거가 이렇게 간단한데, 의학 교육에 문
제가 있는 것 아닙니까?"
그의 아내도 같은 증세를 겪다가 설탕을 끊고 회복된 이후 페제의 使命感
(사명감)은 더욱 깊어졌다. 그 결과 페제와 에이브럼슨은 하나의 里程標(이
정표)가 되는 <몸,정신,설탕 (Body,Mind, and Sugar)>라는 책을 공동 저술
했다. 1951년 초판이 발행되었다. 이 책이 하드커버로만 20만부가 넘게 팔렸
다는 것은 대중의 관심이 뜨거웠다는 증거다. 이 책은 해리스에게 헌정되었
고, 해리스와 절랜드의 논문처럼 의학저널에 수록되기를 기다리는 대신, 미
국의학협회의 고위층을 건너뛰어 오랫동안 오진과 고통을 받아 온 대중에게
곧장 날아갔다. 환자들은 의사들에게 포도당 견딤검사를 요청했고, 저혈당
증이라는 말이 유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나중에 발행된 페이퍼백
편집본은 "혈당치가 낮고(low blood sugar)", "설탕에 주린(sugar starved)"
이라는 표현을 채용하여 독자들을 조금은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이럴 경우
캔디바를 간식으로 먹으면 낫는다고 말하는 잘못된 의사들의 소견을 사람들
이 다시 믿게 되기 때문이다.
1969년 영양학자인 프레더릭스는 굿맨과 공동으로 대중을 위해 <저혈당과
당신(Low Blood Sugar and YOU)>이라는 책을 저술했다. 이런 대중 의학서
와 저술에도 불구하고, 미국의학협회는 자신들이 설탕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고 미국인들을 안심시켰다. 1973년에 간행된 <미국의학협회저널>에서는 다
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최근 발행된 인기 도서들은 대중에게 저혈당증이 미국에 널리 퍼져 있
는 것으로 믿게 하지만, 미국인들이 앓는 증세의 다수가 이 질병으로 야기된
다고는 할 수 없다. 이런 주장들은 의학적인 증거가 없다. .... 저혈당증은 혈
당치가 낮다는 뜻이다. 혈당이 떨어지면 발한과 떨림, 불안, 심장 박동 수의
증가, 두통, 허기, 몸이 다소 쇠약해진 느낌이 생기며, 때로는 간질 발작과
혼수상태에도 이른다. 그러나 이런 증세를 지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혈당
증 환자가 아니다.---------
이들이 맹세코 분명히 아니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도대체 이 말의
요지가 무엇인가? 저혈당증이 '소수(대략 미국인의 49.2%)'에 불과하다는 것
인가?
이 문제를 연구한 사람들 중에 저혈당증협회의 부신-대사연구팀 실무 감독
으로 일하는 매럴린 라이트가 있었다(그녀도 절랜드와 같은 악몽을 겪었다).
협회의 연구 목록에 따르면, 슈거 블루스로 진단받지 않은 일반 환자들이 평
균적으로 스무 명의 의사와 네 명의 심리학자들을 거친 후 저혈당증의 가능
성(나중에 포도당견딤검사로 확진한다)을 발견하게 된다고 한다.
라이트는 보건교육복지부(HEW)에 미국의 저혈당증 발생률 통계수치를 알려
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녀가 받은 답변을 여기에 적는다 : "...회계 연도 19
66~1967년에 가정 방문 조사를 통해 얻어진 미출간 보건 자료에 따르면, 약
6만 6천 건이 보고되었다......인터뷰 대상은 13만 4천 명이었고 이 중 저혈당
증은 6만 6천 명이었다. 그러므로 인터뷰 대상의 49.2%에 이르는 수였다."
49.2%에 불과하니 다수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인가? 관계 기관에 추가 질문을
하여 그녀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아냈다.
1. 미국 정부는 동일한 인터뷰 대상을 이용하여 모든 건강 문제의 데이터와
흐름을 수립한다.
2. 인터뷰 대상자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답변을 유도하지 않는다. 답변자들
에게 제공한 만성 증세 체크 항목에는 저혈당증이라는 말이 등장하지 않는다
3. 질문자는 답변자에게 포괄적인 질문만을 던진다. "다른 증세는 없나요"
와 같은 질문을 통해서만 답변을 얻을 수 있다.
4. 답변자는 자신의 몸 상태와 그 증세를 어떻게 부르는 지 알고 있어야 하며
질문자가 독촉하기 전에 자발적으로 답변해야 한다.
5. 49.2%라는 수치는 이미 10년 전 것이므로, 이는 슈거 블루스가 현재 광범
위하게 퍼져 있다는 주요한 경고다. 보건교육복지부는 조사 체크 항목에 저
혈당증을 부수적으로 덧붙이지 않았고, "가까운 앞날에 포함할 계획도 없다"
고 말했다.
보건교육복지부와 미국의학협회가 암이나 심장병이 다수에게 퍼져 있지 않
고, 그 수가 49.2%에 불과하다는 이유로 이에 대한 모금과 홍보 활동을 취소
한다는 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는가?
암은 치료에 돈이 많이 드는 질병이고, 슈거 블루스는 치료비가 저렴하다는
차이점이 결정적이다. 오늘날의 정통 항암 치료는 가공할 정도 비싸다. 환자
는 파산하는 반면, 의사는 요트를 산다. 그러나 슈거 블루스 즉 저혈당증은
스스로 치료할 수 있다. 정제 설탕을 끊고 나서 의사와 치료비 청구서에 안녕
을 고하기만 하면 되니까. 하지만 의사들은 이렇게 해서는 아내에게 밍크코
트를 사주고 버뮤다의 햇살 아래서 세미나를 개최할 돈을 짜낼 수 없다.
1970년대의 슬로건은 예방의학이었다. 그러나 질병으로 잇속을 챙기려는
세력들이 예방의학이라는 말을 통해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의사와 병원을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값비싼 검사에 돈을 쓰고 흡연과 콜레스테롤에 대한
공짜 설교를 들으라는 것이다. 만약 의사가 자신의 올챙이배를 의사 가운 속
에 숨기고 그 설교를 하는 동안 담배를 참을 수 있다면 말이다. 이런 식의 예
방의학은 암과 심장병의 공포에 떠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돈을 우려낼 수 있
다. 슈거 블루스와 저혈당증, 당뇨병 전단계를 예방하는 효과 있는 해법은
단 하나다. 설탕을 그만 먹도록 하자, 부신에 탈이 나기 전에 끊도록 하자,
슈거 블루스, 저혈당증, 당뇨병 전단계, 아니면 뭐라고 부르든지 간에 증세가
나타나기 전에 끊자는 말이다.
어느 누가 이런 간단한 충고를 해주고 돈을 받을 수 있겠는가? 1967년의 슈
거 블루스에 관한 보건교육부의 데이터는 발표되지 않았다. 출간되지 않은
관계로 미국의학협회는 몰랐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그래서 1973년이 되자,
이들은 진지한 얼굴로 미국에 광범위하게 퍼진 저혈당증에 대해 "의학적
증거를 댈 수 없다"고 미국인들에게 선포했던 것이다. 결국 그 증거란 것도
단지 보건교육복지부의 유행병에 관한 통계란 것이었다. 증거를 제시한 것
은 그동안 오진받고 부당하게 치료받았던 환자들이지 그 의사들이 아니므로
, 이 증거들은 '의학적 증거'가 아니란 것이다. 꽤나 명쾌한 주장이다.
그런 의학적 증거는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통계 조사에 참가한
6만 6천 명의 의견을 뒷받침할 만한 의학 검사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이들
에게는 의학 검사 기록이 있을 수 없었다. 그것은 당시의 대부분의 의사와
병원이 환자들에게 진단 차트와 검사 결과를 복사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의학협회에 대한 '信賴(신뢰)'는 우리의 '無知(무지)'에 기초하고 있다.
'증거'와 '과학적 증거'의 차이, 혹은 '사실'과 '과학적 사실'의 차이를 이해
할 수 없다면 이 설명을 들어 보자. 내가 머리가 아프거나 열이 오른다면 , 이
는 내게만 '사실'이다. 의사에게 말하면 , 같은 '사실'이 그들이 말하는 '逸話
性(일화성)증거' 혹은 '臨床(임상)적 증거'라는 것이 된다. 의사가 내 체온을
재고 차트에 기입하면, 그때 두통은 '의학적 증거'가 된다. 다른 의사가 같은
진단을 내리면 이것은 '과학적 사실'이 된다. 내가 지난 화요일에 38.5도까지
열이 올랐다는 증거가 필요하며 의사에게 차트를 보여달라고 해봤자 소용이
없다. 평범한 사실의 다른 측면들은 이제 '과학적 사실'들이 되고, 이 정보는
의사들만이 공유한다. 만약 나의 예전 증세에 관한 과학적 증례를 알려주지
않는다고 의사에게 불만을 토로하면, 이것은 다시 '일화성 증거'가 된다. 내가
시작한 바로 그 지점으로 다시 순환하게 되는 것이다.
30年동안 저탄수화물 식이요법을 종교로 만든 후, 근대 의학은 또 다른 발견
을 두고 혼란에 빠진다. 1971年 초반, 에드윈 버만을 책임자로 한 과학자 팀은
<뉴잉글랜드의학저널(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에 輕微한 糖尿病
患者와 正常人이 高炭水化物 食餌療法을 따르면 실제로 혈당치를 낮출 수
있다고 보고했다. 버만의 말이다. "고탄수화물 식사로 혈당치가 높아지지는
않는다. 지난 30년 동안 대부분의 의사들은 잘못된 개념을 믿어 왔다."
이제 美國糖尿病協會(The American Diabetes Association)는 방향을 완전
히 돌려 당뇨병 환자들이 건강한 사람들과 비슷하게, 혹은 더 많이 탄수화물
을 섭취하게 하라고 의료인들을 종용했다. 이 사실은 인슐린과 다른 증후성
치료가 광범위하게 사용된 이래 많은 당뇨병 환자들이 동맥경화증과 심장마
비, 중풍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에서 잘 反映(반영)된다. 이런 질병들의 원인은
의사들이 당뇨병 환자들에게 권했던 불균형한 고지방 식이요법 때문으로 보
인다.
인슐린이 발견된 지 50年이 지났지만, 당뇨병 환자의 수는 엄청나게 늘고 있
다. 제 1차 세계대전에서 베트남전에 이르는 동안 18세 이상 징병자들의 신체
검사 결과는, 당뇨병 환자로 진단받아 면제받은 사람들이 꾸준히 늘고 있음
을 보여 준다. 1970年代 糖尿病으로 인한 군면제율은 12%에 달했다. 당뇨병
은 失明(실명)의 원인이 되는 동시에 , 심장병과 신장 질환으로 신체에 장애
를 가져오고 사망에 이르게 하는 주된 원인이 된다. 미국의 당뇨병 환자들을
집계하면 400만에서 1,200萬名이 된다고 한다. 당뇨병 전단계 즉 저혈당증
혹은 고인슐린혈증 - 相補(상보)적 拮抗(길항) 관계이며 앞으로 당뇨병의 前
驅(전구) 증세가 되는 - 은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설탕이 일으킨 병을 스스로 고치자는 호소는, 막대한 연방기금을 지원받아
기적적으로 질병을 정복하는 물약과 알약, 주사, 보험 처리되는 췌장 조절
전자 장비를 찾아내겠다는 아우성 속에 溺死(익사)해버리고 만다.
그야말로 건강을 지키고 싶지만, 同時에 설탕 범벅의 케이크도 먹고 싶다는
말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