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우크라 사이를 오가는 트럼프 미 대통령의 '셔틀 중재' 행보가 다시 시작됐다. 지난 주말,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연속으로 두 차례 전화 통화를 한 뒤, 토마호크 장거리 미사일의 대(對)우크라 제공 결정에 앞서 푸틴 대통령과 소통할 것이라고 여지를 둔 게 그 시발점이 된 것 같다. 그의 대화 의지를 확인한 크렘린이 전화 통화를 요청했고, 16일 푸틴-트럼프 대통령간 통화는 2시간 30분을 넘겼다.
트럼프 미 대통령의 전화통화/사진출처:페북@POTUS
양측의 발표는 듣지 않아도 짐작 가능하다. 대화가 유익하지 않았다고 할 리가 없다. 미 백악관과 크렘린은 두 정상이 내주 고위급 회의를 거쳐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만날 계획이라고 밝혔다. 알래스카에서 전격적으로 정상회담(8월 15일)을 가진 지 약 두달 만이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와 rbc 등 러시아 언론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16일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을 통해 "방금 푸틴 대통령과 전화 통화를 마쳤는데, 매우 생산적인 대화였다"며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난 뒤 진행될 양국 간의 교역 문제에 대해서도 상당한 시간을 들여 논의했다"고 말했다. 그는 "푸틴 대통령이 수 세기 동안의 염원이었던 중동에서의 위대한 평화 정착(팔레스타인 휴전 협정/편집자)에 대해 축하를 전했다"며 "나 역시 중동에서의 성공이 우크라이나 종전 협상에도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고 자신했다.
정상회담으로 가기 전에 거쳐야 할 단계가 양국간 고위급 (참모) 회의다. 정상회담에 앞선 사전 정지작업으로 보면 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고위급 회의에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이 미국측 대표단을 이끌 것이라고 설명했다. 회의 장소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푸틴 대통령과 통화한 데 이어 다음날(17일)에는 백악관에서 젤렌스키 대통령과 만날 예정이다. 그는 젤렌스키 대통령과의 회담 소식을 확인하며 "푸틴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가 큰 진전을 이뤘다고 생각하며, 그와 나눈 대화와 그 외 여러 가지 사항에 대해 젤렌스키 대통령과 논의하고자 한다"고 트루스 소셜에 썼다. 또 "통화에서 우크라이나의 신속한 평화 정착 필요성을 거듭 강조했으며, 전쟁 종식은 미-러 간 협력에 엄청난 가능성을 열어줄 것임을 확인해줬다"고 덧붙였다.
지난 8월의 미러 알래스카 정상회담/사진출처:크렘린.ru
그가 젤렌스키 대통령과 만나기 전 푸틴 대통령과 통화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바둑으로 치면 선수(先手)다. 푸틴 대통령이 토마호크 미사일의 우크라이나 지원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의중을 먼저 파악하기 위해 나섰다고 봐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러나 전화 통화에서 토마호크 미사일 제공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는지 여부는 공개하지 않았다.
유리 우샤코프 크렘린 외교담당 보좌관(대통령 외교 수석 격)은 이날 기자들에게 "러시아 측에서 주도한(통화를 요청한/편집자) 두 정상의 대화가 매우 실질적이고 매우 솔직했으며, 또 비밀스러웠다"고 브리핑했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이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만나자고 제안했고, 푸틴 대통령은 이에 동의했다"며 "두 정상간의 만남에 대한 준비를 즉시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다. 발표가 나오자 오르반 헝가리 총리는 "미·러 정상회담은 전 세계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매우 기쁜 소식"이라며 "우리는 준비가 되어 있다"고 환영했다.
두 정상의 대화 내용에 대해 우샤코프 보좌관은 "우크라이나 위기가 주로 논의됐고, 푸틴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현재 상황에 대한 평가를 자세히 전달했다"고 말했다. 그가 현 상황을 "러시아가 전략적 주도권을 쥐고 있고, 키예프(키이우) 정권은 테러 수단에 의존하고 있으며, 러시아는 이에 대응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 것으로 미뤄, 이같은 전황을 미국 측에 전달하고, "토마호크 미사일의 제공이 전황을 바꾸기는커녕 미러 관계와 우크라이나 사태 해결 노력에 악영향을 줄 것"이라고 설득한 것으로 보인다. 우샤코프 보좌관은 또 "트럼프 대통령이 내일(17일) 젤렌스키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우리(푸틴 대통령)가 전화 통화에서 제기한 모든 사항을 고려할 것"으로 기대했다.
쇼이구 러시아 안보회의 서기와 대화를 나누는 우샤코프 외교담당 보좌관/사진출처:크렘린.ru
푸틴 대통령의 특사로 활동하는 키릴 드미트리예프 직접투자기금 대표는 푸틴-트럼프 대통령의 이번 통화가 "전 세계에 중요하고 긍정적이며 생산적"이라고 평가하며, "다음 단계를 명확하게 제시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유럽의 강경세력이 평화 프로세스를 좌절시키려고 하지만, 미국과 러시아 간의 대화, 평화, 협력이 승리할 것"이라고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공개 내용만으로는 두 정상이 우크라이나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조건에 대해 공감을 이뤘는지, 토마호크 미사일의 제공 문제가 논의됐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스트라나.ua가 두 정상이 이번 통화로 전쟁 종식의 돌파구를 마련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분석한 이유다. 종전의 돌파구는 푸틴 대통령이 키예프가 받아들일 수 없었던 조건들을 철회하고, 즉각 휴전에 동의하든가, 트럼프 대통령이 푸틴식 전쟁 종식 방안을 젤렌스키 대통령이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데 동의하든가 둘 중의 하나다.
둘 중 어느 것도 이뤄지지 않았다면, 트럼프 대통령의 긍정적인 메시지는 전략적 혹은 심리적 압박용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급한 대로 토마호크의 우크라이나 제공 문제를 주요 관심사에서 제외해 미-러 간의 급격한 긴장 고조를 막을 수 있다. 러시아와의 협상 진전을 주장하며, 토마호크 미사일 제공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주장을 펴는 것이다. 최소한 토마호크 논의를 부다페스트 미-러 정상회담 이후로는 넘길 수 있는 명분을 확보했다고 볼 수 있다.
부다페스트 정상회담 계획이 우크라-유럽에 주는 심리적 압박도 상당하다. 오르반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과 가깝기도 하지만, 유럽의 대(對)러 강경 대세에 맞서 친러시아 성향을 보여왔다. 트럼프 대통령이 러시아쪽으로 기운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유엔 총회 기간에 뉴욕에서 만난 젤렌스키-트럼프 대통령/사진출처:우크라 대통령실
전날(15일)만 해도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트럼프 대통령은 젤렌스키 대통령과 예정된 17일 백악관 회담에 관해 브리핑하면서 "우크라이나의 공세(반격) 계획에 대해 논의할 것"이라며 "(우리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의 한 고위 관리는 미 인터넷 매체 폴리티코에 "우리(우크라이나)는 정말로 공세에 나설 수도 있다"며 "우리가 (미국으로부터) 어떤 무기를 확보하고 어떤 계획이 승인되었는지에 달려 있다"고 맞장구를 쳤다.
우크라이나군의 반격 계획에 대한 이야기는 그동안 전혀 없었다고 스트라나.ua는 지적했다. 스트라나.ua는 16일 하루를 정리하는 기획기사 중 '우크라이나군이 새로운 공세를 취할까?'(Пойдут ли ВСУ в новое наступление)라는 코너에서 우크라이나에 그러한 계획이 있었다면 쿠르스크 작전이나 그보다 앞선 하르코프(하르키우) 반격 작전처럼 극비로 유지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우크라이나군은 전쟁 첫해(2022년) 가을, 기습적으로 하르코프 탈환 작전을 펴 러시아가 장악한 광대한 땅을 수복하는데 성공했다. 작전을 극비로 추진한 게 성공한 주요 요인의 하나였다.
정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2023년 여름 우크라이나군의 대대적인 반격작전이 실패한 이유 중 하나는 공격 정보의 사전 유출이다. 우크라이나 당국도 자주 이 문제를 반격 작전이 실패한 이유로 제시한다. 당시 주요 서방 언론은 우크라이나군의 반격 작전 계획및 루트를 자세히 보도했고, 러시아는 이에 맞춰 사전에 3중, 4중 방어선을 구축한 것으로 전해진다.
우크라이나군 공세 작전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귀띔은 계획이 실제로 있다기보다는 러시아에 대한 압박용일 가능성이 높다. 시기적으로도 토마호크 미사일 제공 시점과 맞물린다.
미국은 이를 통해 러시아가 종전 조건을 완화하기를 원하는 것으로 보인다. 푸틴 대통령과의 16일 전화 통화에서 그 목적을 얼마나 달성했는지 궁금하다. 혹시나 미-러 고위급 회담에서 구체적인 안을 도출해내고, 부다페스트 정상회담에서 이를 확인하면서 종전의 돌파구를 찾아갈 수도 있다.
푸틴 대통령과의 전화통화→젤렌스키 대통령과의 정상회담→미러 고위급 회담→부다페스트 미러 정상회담→젤렌스키 대통령과의 담판 전화 등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셔틀 중재가 이어지면서 목표로 한 성과를 거두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