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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오디오와 컴퓨터 원문보기 글쓴이: 김인선
안토니 가우디
Antonio Gaudi y Cornet(1852~1926)
자연에서 건축으로
마리아 안토니에타 그리파 지음 / 이영주 옮김
마로니에북스 / TASCHEN
03-01 안토니 가우디
Antonio Gaudi(1852~1926)
1852년 안토니 가우디가 바르셀로나 인근의 레우스에서 태어났을 때, 카탈루냐는 사회적인 격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었다. 산업혁명은 전통적인 사회구조뿐만 아니라 도시계획 전반에 대한 개념을 바꿔놓았다. 중산계급이 주도한 산업 생산수단의 변화는 도시의 급속한 성장, 새로운 유형의 건물(특히 주거 및 상업용 건물)에 대한 수요, 기차와 증기선의 발명, 전통적인 농경 세계의 붕괴로 이어졌다. 카탈루냐에서 이러한 벽혁은 서유럽의 다른 지역과 미국보다는 늦었지만 이베리아 반도의 다른 곳보다는 훨씬 빨리 시작되었다. 무엇보다 이 지역 농촌 문화의 근간이 되는 가족의 단결은 변함없이 유지도고 있었지만, 카탈루냐는 여전히 작은 규모였던 수도 마드리드 관료적 침체와는 뚜렷이 대조되는 역동적이고 급격한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가우디가 태어나기 전 해인 1851년에 런던에서 제1회 세계 최고 산업 생산품 대박람회가 개최되었다. 박람회는 이 행사를 위해 건설한, 온실과 비슷해서 수정궁이라고 명명된 투명한 조립식 구조물에서 개최되었다. 조지프 팩스턴이 설계한 이 유리와 주철 구조물 안에 식민지와 전 세계에서 온 최고의 공예품과 최신 기술이 전시되었다.
그러나 혁신적 과학 기술 세계와 전통적 수공업 세계 사이에 후자를 희생시키려는 경향이 있는 불안정한 균형이 분명히 존재했다. 일상적인 용도의 기계와 대량 생산에 대한 열의가 점점 증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모두가 이런 진보와 그 결과에 찬성한 것은 아니다. 예술과 수세기 동안 전통적인 공예품 생산을 통해 보호하고 양성해온 숙련된 솜씨와 인간애를 옹호하는 깃발 아래 건센 저항이 일어났다.
새로운 생산수단이 의욕적이긴 했지만 합리적으로 사용된 것은 아닌 이 혁신의 시기에 수세기 동안 존재해온 생활양식 역시 아쉽게도 너무나 순식간에 무너졌다. 그러나 19세기 중엽 혁신자들과 전통주의자들은 모든 분야에서 때로는 격렬하고 몹시 논쟁적인 어졸 정면충돌했다. 동시에 많은 시골 농부들과 직인들이 가난한 산업 노동자가 되었으나 그들은 대체할 수 없는 자신만의 기술을 갖고 있지 않았다. 심지어는 그들의 문화와 종교적ㆍ시민적 양심조차 큰 타격을 입었다. 전통적인 사회 - 외부의 영향을 밪지 않고 사회적으로 안정되었으며 주로 전원적인 - 가 역동적이고 개방적이며 진보적인 사회로 대체되려는 참이었다.
예술가들 역시 이러한 변화가 가져온 사회적, 문화적 요소에 영향을 받았다. 19세기 말에 이미 전통적인 표현ㆍ주제ㆍ기법의 대변동을 이끌어낸 전위파 운동의 무대가 마련되었다. 즉시 효과적으로 재생할 수 있고 많은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새로운 세계를 위한 새로운 매체인 사진과 영화의 발명이 이 발전을 촉진했다. 잠재된 예술적 갈등은 1855년 파리에서 열린 제2회 만국박람회 동안 처음으로 격렬하게 폭발했다. 예술가들 사이에 불화가 있었으며 그들은 근본적으로 상이한 두 가지 태도를 반영하는 별개의 두 전시실에서 그림을 전시하기로 결정했다. 앵그르는 공식 전시실에서 들라크루아와 테오도르 루소는 아카데미 당국에 거부당했다고 느낀 사람들의 전시실인 낙선자 전시회에서 그림을 전시했다. 겨우 몇 년 후인 1861년에 에두아르 마네는 유명한 그림 《풀밭 위의 식사》로 미술계를 분개하게 했다. 더 의미 있는 주관적 진실을 추구하기 위해서 이 화가들이 기존의 미학 규범을 부정하고 기득권 세력에 반항한 일이, 다른 예술가 집단으로 하여금 전통적인 작업 관습과 종교적인 감정을 되찾으려는 욕구를 불러일으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공예 세계와 중세 예술 작품에 내재된 인간적 특성이 이에 대한 귀감이 되었다. 미술계에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와 다른 화가들이 창시한 라파엘 전파 같은 화가들의 공동체가 생겨났다. 건축에서는 전반적으로 절충 양식을 띠는 새로운 설계의 이론적 근거 대한 명료한 도덕적 해석과 함께 보존이나 복원 중인 중세 성당들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1849년에 출판된 『건축의 7등(燈)』에서 영국의 비평가 존 러스킨은 시골에서 도시로 매우 빠른 속도로 일어난 대규모의 인구 이동 때문에 발생한 사회적ㆍ인간적ㆍ미학적 붕괴에 저항하라고 동시대인들에게 요청했다. 1854년에는 프랑스의 건축가이자 건축사가인 비올레 르 뒤크의 『11~16세기 프랑스 건축에 대한 이론사전』이 출판되었다. 이 백과사전적인 저서는 성당 건설업자들의 경험에 근거한 대담하고 합리적인 행동에 깊이 매료되었음을 보여준다. 비올레 르 뒤크는 이 거대한 건물들의 구조상의 특징과 건축적인 기초 구조를 분석했다. 그는 시간의 경과에 따른 변화를 고찰하고 그 보존 방법과 동일한 양식으로 그것들을 완성하는 방법도 제안했다. 그는 건설 원리와 자재의 특성, 구조의 정적(靜的)인 성질을 면밀히 연구해 독자들이 중세 건설업자들의 심미안을 통찰할 수 있게 해주었다. 또한 이를 통해 19세기에 더욱 발전하게 될 예술적이고 구성적인 방법의 놀리에 독자들이 몰입하게 했다. 다른 글에서 비올레 르 뒤크는 학교와 공회당 같은 최신 건물에 새로운 자재, 무엇보다도 주철을 사용할 것도 제안했다. 이것은 성당에서 그가 주목했던 것과 같은 개념의 건물 논리에 따른 것이다.
러스킨과 비올레 드 뒤크의 저서는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빠르게 퍼져 당시 새로운 주택과 도시에 대한 욕구를 해결할 방법을 찾고 있던 젊은 건축가와 건설업자들을 위한 지침서가 되었다.
국가적 차원의 격렬한 경쟁이 빚어낸 혼란 속에서, 카탈루냐에서는 마드리드로부터의 정치적ㆍ지식인ㆍ카톨릭 단체의 구성원들이 이것을 장려했다. 젊은 전문가들에게 이것은 일과 출세를 위한 좋은 기회였다. 역사를 기념하고 동시대의 문화를 풍요롭게 할 것을 권유받은 그들은 문화적 소속감을 불러일으키는 데 기여했다.
1869년 젊은 안토니 가우디가 의학을 공부하려는 형 프란세스크와 함께 바르셀로나로 갔을 때 이 도시는 이미 앞에서 간략히 설명한대로 산업 발달, 사회 변화, 문화 및 예술적 논쟁에 휘말려 있었다. 그해 9월 스페인은 사회주의자와 공화주의자의 폭동으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 이 폭동은 이사벨라 2세의 왕정이 붕괴하는 것으로 끝났다. 두 형제는 돋 아버지와 합류했다. 아버지는 그들을 돌보았으며, 학비를 대기 위해서 갖고 있던 토지를 꽤 많이 팔았다. 그들 세 사람은 레우스 출신이었는데 그곳에는 특유의 문화적 활력이 있었다. 가우디의 부친은 친가와 처가와 마찬가지로 구리 세공인이었다. 가우디는 유년기와 청소년기에 가족 작업장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잦았다. 그는 냄비의 충실한 입체감과 증류기의 섬세한 형태에 감탄했다. 그는 이러한 물건의 공간적인 기능에 크게 감명 받았고 이것은 3차원적인 입체감과 구조를 지각하고 정신적으로 표현하는 비범한 능력을 형성시켰다. 어릴 적에 류머티즘이 발병함으로써 한층 두드러지게 된 그의 신중하고 사려 깊은 기질 역시 그를 자연과, 나무와 꽃, 동물의 형태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자로 만들었다. 어린 시절 공부하는 동안 그는 소묘와 건축에 대한 흥미도 키워나갔다.
1870년에 설립되어 1875년에 공식적으로 인가받은 바로셀로나 대학의 건축합부에 들어가기 위해서 그는 자연과학 학부 예비 과정에 등록했다. 그가 건축학도가 된 해인 1873년에 마드리드에서 제1공화국이 건립되었다. 그러나 공화국은 1874년에 군주제를 부활시킨 파비아 장군이 일으킨 쿠데타로 무너졌다. 가우디 또한 자신을 가르친 교수들이 취하는 태도를 통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관찰했다. 1878년에 이 학교는 최초로 10명의 카탈루냐 건축가를 배출했다. 그 다음 해에 또 4명이 졸업했는데 그중 한 명이 안토니 가우디였다. 1854년에 도시의 벽들이 헐렸으며 1859년에 바르셀로나에서는 공학자 일데폰스 세르다가 입안한 에익삼플레라고 명명된 새로운 도시화 계획이 진행되고 있었다. 1860년에 시작된 도시화 계획은 어떠한 경계도 규정하지 않은 채 도시 성장의 합리성, 공평성, 현대적 효율성의 원칙을 바탕으로 입안되었다. 그것은 망상(網狀) 구조의 도시화를 추구했으며 인구통계학의 추세와 교통, 1ㆍ2차 서비스의 규제에 관한 연구에 기초했다.
건설 현장 전문가나 예술학교의 구적인 건축가들과 전혀 다른 새로운 전문인을 길러내기 위해서 젊은 건축가들에게는 여러 교과 - 기술적ㆍ과학적ㆍ예술적ㆍ역사적ㆍ고고학적인 -를 가르쳤다. 카탈루냐의 정체성을 다시 일깨우는 데 구체적으로 기여하고, 성당과 수도원과 고궁을 복원하며, 카탈루냐를 대표할 장엄한 기념물이 될 인상적인 공공건물로 급속히 팽창하는 도시를 꾸미는 데 그들이 필요했다. 우디가 학생 때 설계한 층계참의 돌출부, 카탈루냐 광장의 기념 분수, 대학 회관을 위한 습작들이 이러한 사실을 잘 반영다.
이 형성기에 가우디는 당시 세련된 집단 내에서 널리 퍼져 있던 파리에 대한 관심에 휩싸였다. 카탈루냐의 시민들은 파리의 매우 합리적인 성향 외에도 여타 유럽 지역에 비해 굳건한 파리의 예술적 탁월함에 감탄했다. 그러나 바르셀로나 시민들은 또한 대서양 건너편에서 오는 영향에도 노출되어 있었다. 스페인 왕정은 18세기 말에야 아메리칼 이주하는 것을 허락했지만 그 당시 식민지로의 집단 이주는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으며 선호되는 목적지는 쿠바였다. 그들 중 몇몇은 훗날 새로이 획득한 부와 쿠바인들로부터 흡수한 활력을 갖고 되돌아왔다. 사람들은 “파리는 의식하고 있는 이상으로, 하바나는의식하지 못하는 모범으로”생각했다고 에두아르도 멘도사는 썼다.
바르셀로나의 복합적인 현대화는 이처럼 서로 다른 두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이를 통해 현대화를 선도한 주역들은 패기와 삶에 대한 기쁨으로 넘치는 솔직함, 예술에 대한 관심, 자신들은 문화적으로 마드리드와 다르다는 의식을 고취했다. 19세기 후반 이 두 문화의 혼합이 국내 여러 시장을 독점한 기업가 가운데 활발한 후원 활동을 행한 정력적이고 문화적인 인물들을 낳았다. 이들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이 에우세비 구엘 이 바시칼루피이다. 그는 가우디가 전문 직업인으로 첫발을 내딛을 무렵 이 바르셀로나 최고의 건축가와 만났다. 1888년 만국박람회를 통해 바르셀로나가 세계 무대에 등장했을 때 구엘과 가우디는 정치적ㆍ사회적 이념을 공유했다.
1888년 구도심(舊都心)의 심장부에 있는 가우디의 첫 건물인 구엘 궁전의 준공식이 열렸다. 이 무렵 가우디는 기반을 잘 닦아 중상류층에게 매우 인기가 있었다. 그리고 1883년 이래로 성가족 교회 공사를 담당했기 때문에 그는 또한 스페인의 가장 저명한 성직자들과도 접촉했다. 초기에 보잘것없는 출신과 사회 정의에 대한 의식이 그를 노동자들의 협동조합 쪽으로 이끌었다면 에우세비 구엘과 교류는 그 후 개인적으로나 직업적인 측면에서 카탈루냐의 정체성, 전통과 현대적인 것 모두에 대한 긍정과 밀접하게 관련된 행로로 그를 인도했다.
가우디의 개인사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으며 건축가로서 그는 자신의 작품에 거의 완전히 흡수된 것처럼 보인다. 유일하게 주목할 만한 일화는 1893년 41세 때 너무나 철저히 사순절 단식을 지킨 나머지 생명이 위독해진 일로 그것은 그의 인생에서 종교적인 위기 또는 어쩌면 성숙의 순간이었다.
습작들을 완성하자마자 가우디는 바르셀로나의 산트 자우메 광장에 작업장을 열었다. 그가 처음 받은 중요한 의뢰는 1878년에 스페인의 종업원 지주제도에 의한 최초의 공장인 라 오브레라 미타로넨세라는 직물제조 협동조합으로부터 들어왔다. 또 다른 중요한 작업 - 그 도시 자본가 계급의 주목을 받았기 때문에 - 은 구엘 가의 친척인 후안 길베르트 이 살레르로부터 1879년에 그라시아 거리의 약국을 재단장해 달라는 의뢰를 받고 설계를 한 것이다 숙련된 제도가인 가우디는 성당과 수도원 예배당의 실내장식도 부탁받았다. 같은 이유로 그는 곧 공공 단체의 상담을 받는 일도 시작했다. 1880년에 그는 친구인 엔지니어 호세 사라말레라와 함께 바르셀로나에 있는 호안(護岸)을 따라 난 산책로에 설치될 가로등을 설계했다.
아직은 어떤 주요한 공사도 맡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은사였던 후안 마르토렐 이 몬테스의 조수로도 일했다. 가우디는 1882년 그를 위해 신고딕 양식으로 쿠에바스 데 알만소라(알메리아)에 성령 수도회의 성당을, 바르셀로나에 살레시우스 수도회의 성당과 예수회의 성당을 설계했다. 그는 또한 비록 시공되지는 않았지만 바르셀로나 성당 파사드를 신고딕 양식으로 설계하기도 했다. 같은 해에 그는 에우세비 구엘 백작을 위해 지중해 연안의 엘 가라프에 사냥막을 설계해달라는 중요한 의뢰를 받았다. 구엘은 1878년에 파리의 만국박람회에서 가죽 제품 진열장을 본 후 즉시 가우디의 재능을 알아봤다.
졸합한 지 겨우 5년 만인 1883년에 가우디는 3건의 중요한 의뢰를 받았다. 이것을 계기로 가우디는 카탈루냐의 지도적인 건축가 집단에 입성했다. 그해에 그는 두 주거 전용부지, 즉 바르셀로나의 비센스 저택과 코미야스(산탄데르)의 엘 카프리초 별장 공자를 시작했으며 성가족 교회의 수석 건축가로 임명되었다. 그 전 해에 막 시작되어 주춧돌만 놓인 상태인 이 공사는 ‘성 요셉 영성회’의 희망으로 착수된 보속(補贖)사원으로 제1회 바티칸 공의회 기간인 1868~1870년에 성 요셉이 가톨릭 성당의 수호성인으로 공표된 후 카탈루냐 노동계급이 가톨릭 사회 이론을 지지하기 위해 건설한 것이다. 시작은 출판업자 호세프 마리아 보카베야가 후원했다. 그는 도시 외곽에 광대한 지구의 땅을 구입하고 그 건축을 감독할 위원회(‘함께 성전을 건설하는 사람’)를 만들었다.
구엘 공원(Parque Güell Pabellón de Portería)
바르셀로나 대학 건축학부의 학장이자 예술 아카데미 회원인 건축가 프란세스크 데파울라 비야르 이 로사노가 야심 찬 신고전주의 양식의 설계를 무상으로 제공했다. 함께 성전 건설에 참여한 마르토렐과 심한 불화로 비야르가 사임하자, 마르토렐은 대신 31세였던 자신의 조수를 천거했다. 가우디는 1883년 11월 3일 지명되고 곧 이어 1884년 4월 첫 공사 서류에 서명했다. 오늘날까지 존경받고 있는 이 공사의 발기인들은 성 요셉 영성회가 거둔 기부금만으로 건설 자금을 충당하고자 했다. 처음 얼마 동안 가우디는 비야르의 설계대로 작업을 해야 했다. 그러는 동안 에수세비 구엘이 1883년에 구엘 별장의 개조를 맡겼다. 오늘날에는 이 건물에 가우디 왕립학교가 들어서 있다. 이 건물은 카탈루냐의 성직자 하신트 베르다게르가 서사시 『이상향』에서 찬양한 헤스페리데스의 동산을 은유한 단철(鍛鐵)로 된 용 모양 출입문으로 유명하다.
이제까지 언급한 가우디의 작품 중 그 어느 것도 당시의 바르셀로나 시 경계 안에 있지 않았다. 이것은 이미 일부가 건설되었으며 1889년 ‘예수으 성 테레사 모임’의 설립자 엔리크 도소 이 세르베요 신부가 의뢰한 성 테레사 수녀원 학교를 비롯한 다음 몇 작품도 마찬가지이다. 그 건물은 인근의 산 게르바시 자치체에 있었다. 같은 시기의 다른 두 작품, 그가 1889년에서 1893년까지 감독한 아스토르가의 감독교회 주교관과 레온의 페르난데스 안드레스 저택 또는 보티네스 저택(1892~1894) 역시 바르셀로나 외곽에 위치하고 있다.
구도심의 심장부에 구엘 궁전이 완성됨과 동시에 가우디의 작품을 열렬히 지지하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사람들 간의 논쟁이 1888년에서 1890년 사이에 일어났다. 1888년 바르셀로나에서 만국박람회가 열렸을 때 문예부흥 운동에 참여한 건축가들이 전시관 건설에 기여했으며 자신들의 건축 설계도도 전시했다. 전시관과 공사를 감독한 사람은 바르셀로나 대학의 엘리에스 로헨트 교수였다. 시작은 가우디에게 시청사의 살로 데 센트와 명예의 계단을 장식하는 일로 의뢰했다. 이 일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그는 만국박람회 건축분야에 자신의 건축 설계도를 전시했으며 코미야스 후작의 의뢰로 트란사틀난티카 사(社)를 위해 해운 분야 전시관을 설계했다.
1888년은 절충주의자였던 가우디가 좀 더 자유로운 모더니스트로 변한 시기이자 처음으로 카탈루냐 모더니즘에 독창적인 기여를 하기 시작한 기념비적인 해이다. 이것은 19세기 마지막 몇십 년과 20세기 초에 활발하게 일어난 운동의 변형이었다. 그것은 서양의 다른 운동과 비슷해 보였지만 아르누보, 유겐슈틸, 꽃의 양식, 빈 분리파 등과 여러 면에서 구별되었다.
확고한 인생관과 상류 및 중류 계급의 열망, 공공장소의 전형적인 특징을 세상에 알린 카탈루냐의 모더니즘은 공공 및 개인 기념 건축물에서 풍부한 형태와 색채로 표현되었다. 이것은 다양한 전통주의자의 영향과 기술과 건설상의 혁식을 받아들여 도공, 대장장이, 흑단 세공사들이 만든 공예품의 지위를 끌어올렸다. 이 운동의 지도적인 건축가로는 엔리크 사그니에르(1858~1931), 호세프 도메네크 이 에스타파(1858~1917), 페레 팔케스 이 우르피(1850~1916), 보나벤투라 바세고다 이 아미고(1862~1940), 세사르 마르티넬 이 브루네트(1888~1973), 호세프 마리아 후졸(1879~1949) 등의 인물이 있다.
가우디는 자연에 주목하고 기하학적인 형태를 중시한 점에서 다른 건축가들과 구별되었다. 이런 차이가 그를 더욱더 내성적으로 만들었다. 그는 아주 친한 친구들과만 관계를 유지했고 젊은 시절 매료되었던 상류사회로부터 점차 멀어졌다. 1890년에 1914년 사이에 그는 학자들이 일반적으로 그의 걸작으로 간주하는 건물과 정원을 창작했다. 신바로크 양식이 살짝 가미된 칼베트 저택(1898~1900), 바르셀로나 파세이그 데 그라시아에 있는 화려한 색채의 바트요 저택(1904~1906)과 한 덩어리로 이루어진 조형적인 밀라 저택(1906~1910), 역사적으로 중요한 도시 변경에 있는 빌라 베예스구아르드 별장(1900~1905), 곧 공원이 된 매우 기묘한 도시정원인 구엘 공원(1900~1914), 팔마 데 마요르카 성당의 개조(1903~1914), 산타 콜로마 데 세르베요의 노동자 마을에 있는 구엘 성지 성당의 지하성당(1898~1915), 성가족 교회 부속학교(1909) 등을 이 시기에 건축했다.
이 작품에서 그리고 성가족 교회 현장에서도 그의 모더니즘 낙인은 동시대의 서구 문화에서는 필적하는 것이 없는 독창적인 유기체로 반전했다. 가우디는 건물의 형태와 구조에 이 유기적 자연주의 방침을 반영했고 전통적인 카탈루냐 건축 기술의 표현 가능성에 의존했다. 이것은 또한 가우디가 전에는 건축에서 사용되지 않았으나 자연 속에 널리 존재하는 기하학적인 형태를 탐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늘 사전에 모의실험을 하기 위해 천, 석고와 나무, 철사, 평형추에로 삼차원적인 모형을 만든 후 설계를 했다. 모형은 그의 발상을 발전시키는 중요한 도구였다. 도면 역시 그에게 중요했으나 그가 제자들에게 말했듯이 그는 공간 속에서 직접 형태를 상상했다.
오랜 활동 기산 내내 그는 또한 매우 독창적으로 두 가지 연구에 몰두했다. 첫째 그는 기하학에 대한 지식을 점차 심화해 나갔다. 젊었을 때 그는 사슬 모양 곡선의 역학적인 장점을 기술한 공학과 건축학 논문을 보며 대학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 곡선은 그때까지 토목기사들이 현수교를 설계하는 데만 사용되었다. 심미적인 결함을 극복하고 그는 그것을 타원이나 쌍곡선과 함께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했다. 이 곡선의 윤곽을 살리기 위해 그는 마지막 작품의 기둥을 기울어지게 세웠다.
그는 곧 평면적인 형태로부터 공간적이고 기하학적인 형태로 옮겨갔다. 그는 수학자들에게 직선 보간 곡선으로 알려진, 직선만의 구성된 공간의 표면이 이루는 윤곽에 따라 건축 형태를 정했다. 첫 시도를 한 후 작품으로 구성된 공간의 표면이 이루는 윤곽에 따라 건축 형태를 정했다. 첫 시도를 한 후 작품의 형태가 더욱 복잡해졌다. 또한 그는 다루기 까다롭지 않고 값에 비해 품질이 좋은 전통적인 건축 방법과 자재들 - 무엇보다 벽돌과 회반죽을 사용해 공사를 하는 방법 -을 찾아냈다. 전통적인 기술 중에서 그가 가장 유명하게 만든 것은 작고 매우 견고한 타일을 석회반죽으로 붙여서 층층이 겹쳐 쌓아 만든 둥근 천장 지붕 보베다 타비카다였다.
성가족 교회 현장의 감독 역할은 그가 축적해온 예술적이고 기술적인 문화의 모든 양상에 대한 고찰하여 이 교회의 건축적 주제에 반영하도록 그를 자극했다. 그는 곧 자신의 임무에 사욕이 없이 헌신하게 되었다. 1914년 작업을 중지해야만 했던 경제적 위기가 닥쳤을 때는 몸소 기부금을 구하러 나서기까지 했다. 말년에 그는 다른 모든 전문적인 공사를 사양하고 소박하고 고립된 생활을 영위했다. 그의 목적은 석고 모형고 도면을 만들어 그가 약 200년 후에야 완공될 것으로 예견한 이 교회의 합리적인 증축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그는 한 무리의 젊은 건축가들과 함께 해안 산책로를 따라 걷곤 했던 일요일 아침을 제외하고는 모든 시간을 현장에서 보냈다. 그들은 질문을 하고 그가 자연과 지중해, 카탈루냐의 정치적ㆍ사회적 실상, 예술과 자신의 건축 작품과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든 것을 성실하게 받아 적었다. 이 기록은 나중에 다시 정리된 후 꼼꼼히 분류되었다.
가우디는 전차에 치이고 나서 3일 후인 1926년 6월 10일, 7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가우디의 장례식에는 엄청난 인파의 카탈루냐인들이 참석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가장 위해한 건축가에게 작별을 고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가우디는 건축에서 심오한 생태학적 의미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는 전통주의자인 동시에 혁신가였다. 그는 건축물에서 정적인 구조와 건축학적인 형태 간에, 공간적인 형태와 장식 간에 체계적이고 항구적인 결속을 고취하는 일을 실현했다. 그의 공헌에는 개별 건물의 건축 양식 조경 건축 양식이 망라된다. 그의 작품에는 상징적 특징과 소통의 중요성을 잘 살린 매우 세속적인 신성함이 배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