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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의 모든 것] (10) 참회 예식
미사를 시작하며 잘못 뉘우치고 주님께로 돌아서다
나처음: 미사에 참여할 때 무엇보다 자신의 허물을 살펴 하느님께 고백하고 이웃과 화해하는 회심의 마음을 갖추어야 한다고 신부님께서 말씀하시는데 이런 말씀이 신자들에게 얼마나 부담을 주는지 아세요. 세례받은 지 얼마 안 된 제 친구도 주일 미사 몇 번 빠지더니 고해성사하기 부담스럽다며 성당에 나가지를 않더라고요.
조언해: 맞아요. 저도 주일 미사에 빠질 때가 있는데 또 고해성사를 해야 하나 부담스러울 때가 많아요. 아마도 많은 신자가 그럴걸요.
라파엘 신부: 나도 신자들로부터 누구누구가 미사를 궐한 후 고해성사 부담 때문에 냉담한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너무 안타깝단다. 신자들이 미사 참여를 부담스러워하는 것은 미사의 중요성과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복음서에서도 우리처럼 성체성사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이 공동체에 분열을 일으키며 주님을 떠나려고 한 사건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지 않니.
나처음: 아! 그래요. 재미있겠는데요. 들려주세요. 신부님!
라파엘 신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에서 5000명을 먹이시는 빵의 기적을 행하신 다음 제자들을 데리고 호수 건너편 카파르나움 회당으로 가시어 ‘생명의 빵’에 관한 가르침을 주셨단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라고 말씀하셨지. 그러자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어. 이 광경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 53-56)고 말씀하셨지. 그러자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요한 6,60)라며 투덜거리며 예수님을 떠나갔지.
이처럼 ‘성체’와 ‘십자가’는 예수님의 제자들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끊임없이 분열을 일으키는 걸림돌이지. 지금도 예수님께서 이때 사도들에게 하신 말씀, 곧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요한 6,67)는 질문은 오랜 세월을 통해 울려 퍼지고 있지.
조언해: 예수님의 이 말씀은 주님께서 주시는 성체성사의 선물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곧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뜻이겠네요.
라파엘 신부: 주님께서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하신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이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말씀을 듣고 함께 빵을 나눈 후 마음이 타올랐듯이 우리도 미사 안에서 주님의 말씀과 성체성사로 마음을 열고 뜨거워져야 해.
나처음: 그럼 우리가 미사에 참여하는 이유는 주님께서 당신 살과 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때문이겠네요.
라파엘 신부: 그렇지. 신자가 아닌 네가 이렇게 답하니 정말 기쁘구나. 그래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미사에 합당하게 참여하기 위해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회심하고 마음의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야. 미사의 의미를 이처럼 제대로 이해하면 모든 이들이 단순히 죄 고백의 부담 때문에 미사에 참여하기를 주저하려 하지 않을 거야.
조언해: 미사가 참회 예식으로 시작하는 것이 이러한 이유 때문이겠군요.
라파엘 신부: 맞아, 주례 사제는 “형제 여러분, 구원의 신비를 합당하게 거행하기 위하여 우리 죄를 반성합시다”라며 신자들에게 참회하도록 권고하지. 미사에 참여한 회중들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하느님과 모든 형제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해요. 이 참회의 시간은 정말 중요한 순간이야. 아직도 자기 죄에 묶여 있거나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회개하지도 않는 사람은 주님의 파스카 잔치에 합당하게 참여할 수 없고 주님의 몸과 피인 성체성사를 받을 수도 없기 때문이야.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 5,23-24)고 하셨지.
이렇게 미사를 시작하면서 먼저 우리 자신의 잘못과 죄를 뉘우치고 고백함으로써 우리는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되고 하느님과 다시 원만한 관계에 놓이게 되는 거란다.
나처음: 대부분 종교는 예식을 시작하기 전이나 예식 중에 모든 이들이 경건하고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참여할 수 있게끔 정화 예식을 하지 않나요. 그런데 참회 예식은 미사 중 어느 부분을 말하는 건가요.
조언해: “전능하신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고백하오니 생각과 말과 행위로 죄를 많이 지었으며 자주 의무를 소홀히 하였나이다. 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저의 큰 탓이옵니다. 그러므로 간절히 바라오니 평생 동정이신 성모 마리아와 모든 천사와 성인과 형제들은 저를 위하여 하느님께 빌어주소서”라고 고백 기도를 바치는 부분이야.
라파엘 신부: 이 참회 예식은 교회가 현대 사회에 적응하고 쇄신하기 위해 열렸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 이후에 새로 생겨난 것이란다. 이전에는 ‘제단 앞 기도’라 해서 주례 사제가 복사와 둘이서 고백의 기도를 바치기는 했으나 미사에 참여한 회중과는 별로 상관없는 예식이었단다. 처음이 말처럼 대부분 종교가 정화 예식을 두고 있지만, 미사는 주님을 모시고 하느님의 구원 사업을 기념하는 가장 거룩한 잔치이자 제사이기에 그 어느 종교의 예식보다도 더욱더 맑고 깨끗한 마음을 요구한단다.
미사 통상문에는 세 가지 양식의 참회 예식을 선택할 수 있도록 제공하고 있는데, 이 양식들은 죄를 고백하도록 이끄는 사제의 초대문으로 시작해 잠시 마음을 모을 수 있는 침묵의 시간을 가진 후 고백의 기도를 바치고 사제의 용서 간청으로 끝맺고 있지. 참회 예식은 공동 고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하느님뿐 아니라 형제들에게도 우리의 죄를 고백하지. 이 고백은 우리가 이웃에게 부당하게 한 많은 잘못과 사랑을 거스른 것뿐 아니라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 잘못을 통회하는 것이란다. 따라서 이 고백의 기도는 개인뿐 아니라 사회적 의미도 담고 있지. 또 고백의 기도를 성모님과 모든 천사와 성인, 형제들이 나를 위해 하느님께 전구해 주시기를 청하는 것으로 끝맺는 것은 “여러분 가운데 고통을 겪는 사람이 있으면 그를 위해 기도하라”(야고 5,13 참조)는 야고보 서간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란다.
무엇보다 유념할 것은 참회 예식을 통해 고해성사를 한 것처럼 모든 죄를 용서받았다고 여기면 안 된다는 거야. 이 참회 예식은 죄의 사함을 받는 예식이 아니라 하느님과 화해를 이루고 또 우리가 서로 화해를 이루기 위한 예식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해. 그래서 대죄를 지었다면 미사 참여 전에 꼭 고해성사를 해야 돼.
전례 탐구 생활 (23) 두 개의 식탁
우리가 사는 집은 여러 공간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그중에 가족들이 함께 모이는 장소가 둘인데, 하나는 이야기를 나누거나 TV를 보는 거실(마루)이고, 또 하나는 음식을 준비하고 밥을 나누어 먹는 부엌(주방)입니다. 옛날에는 부엌에서 상을 차려 마루나 방에서 밥을 먹었지만, 요즘에는 부엌에 식탁까지 갖추어 놓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 같습니다. 이 두 공간에는 가족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탁자나 상이 있습니다. 그 둘레에 앉아 밥을 먹거나 TV를 보거나 이야기를 나눌 때 가족 간에 어떤 일들이 일어납니다. 어머니가 딸에게 귀를 기울이고, 동생이 형에게 말을 걸고, 아버지가 할아버지에게 안부를 묻고, 할머니가 어린 손주의 코를 닦아줍니다. 이런 일들은 사소해 보이지만 가족이 아닌 사람의 눈으로 봤을 때 그들이 가족임을 알게 해주는 구체적인 흔적들입니다. 혼자 사는 사람도 손님이 찾아오면 탁자에 마주 앉아 서로의 이야기와 마음을 나눕니다. 설령 아무 말도 오가지 않더라도 함께 있는 것 자체로 둘 사이에는 어떤 일들이 마구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함께 있을 때 우리 사이에 놓인 탁자는 우리 육신의 허기를 채워주는 자리일 뿐 아니라 영혼의 교감이 일어나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별하는 연인마저 안녕이라는 그 한마디를 차마 “말로는 못하고 탁자 위에 물로 썼다”고 노래했을 정도입니다(이문세/고은희, ‘이별 이야기’[1987년]).
교회가 하나의 집이자 가정이라면 그 안에 함께 사는 형제들에게도 두 개의 식탁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바로 ‘말씀의 식탁’(독서대)과 ‘성찬의 식탁’(제대)입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성체에 대한 신심이 워낙 강해서 자칫 말씀 전례를 성찬 전례의 준비 단계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실제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렇게 여기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미사에 대한 잘못된 신심이었지만, 전례의 역사 안에서 오랜 시기 동안 성직자가 라틴어로 혼자 중얼거리듯 말씀을 읽었기에 그러한 생각이 널리 퍼진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보통 사람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방식으로 성경을 봉독하는데 누가 그것을 자신과 관계 있는 일로 느끼겠습니까?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를 바로잡고자 두 식탁 – 하느님 말씀의 식탁과 그리스도의 몸의 식탁 – 이라는 표현을 써서 두 부분이 서로 밀접히 결합되어 하나의 예배 행위를 이룬다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교우들이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고 받아 모시기를 갈망해 마지않는 예수님의 몸과 피가 그리스도인 생활의 원천이자 정점이라면, 성경은 성체성사 안에 계신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분과 진정한 일치를 이룰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끄는 유일무이한 안내자입니다.
둘 중 하나의 식탁에만 깨어 앉아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에게는 성령의 영감을 받아 성경에 기록된 하느님 말씀과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 안에 현존하는 강생하신 하느님 말씀 둘 다 필요합니다. 영혼이 얼마나 이 두 식탁으로부터 양육되기를 갈망하는지 「준주성범」이 전하는 말을 듣고 우리 안에서도 그러한 갈망이 커지기를 기도합시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데 특별히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이것 없이는 제가 살 수 없으니, 하느님의 말씀은 제 영혼의 빛이요, 당신 성사는 생명의 떡입니다. 이것은 성교회의 보물 창고에 마련된 두 개의 상(床)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상은 제대인데, 그 위에는 거룩한 면병 곧 그리스도의 성체를 모셨습니다. 다른 상은 법의 상인데, 그 안에는 거룩한 교리가 있어 옳은 신앙을 가르치고 휘장 뒤에 있는 지성소에까지 안전하게 인도합니다.(『준주성범』, 4권, 11장, 4)
[미사의 모든 것] (9) 미사는 성사이다
그리스도인의 삶 보여주는 거룩한 표징 ‘미사’
조언해: 요즘 가까운 사람들을 만날 수 없어 너무 불행해요. 친구는 물론, 주일학교 교사인데도 올해 아이들을 한 번도 만날 수가 없었어요. 전염병 예방도 중요하지만 만남과 소통이 있어야 사람 사는 사회가 될 것 같아요.
나처음: 코로나 방역이 이젠 일상이 되었어요. 마스크를 하지 않은 사람을 보면 눈살을 찌푸리게 되고, 사람 많은 곳은 아예 가려 하지 않으려 하니까요.
라파엘 신부: 20세기 저명한 신학자인 예수회 칼 라너 신부님은 “일상을 일상으로 두라”고 말씀하셨지. 가장 사소한 일에도 하느님의 숨은 은혜와 인간다운 삶의 참다운 본질이 내포돼 있다는 말씀이지. 참으로 인간다운 삶이란 더없이 진지한 자유 안에서 하느님을 향한 믿음과 희망, 사랑으로 드러나는 영원한 하느님의 무게를 지닌 삶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게 중요해.
조언해: 주일 미사 참여가 예전처럼 일상이 되는 날이 하루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라파엘 신부: 나도 그러길 바란단다. 일상사가 짜증을 내게 하는 것은 우리가 짜증스럽게 받아들이기 때문이야. 일상이 우리를 무디게 만드는 것 또한 단지 우리가 일상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야. 우리가 주일 미사에 참여하는 것도 우리 힘이 아닌 하느님의 은혜로 우리를 준비시켜 준 것임을 깨달을 때 우리의 일상이 훨씬 소중해지는 것이지.
나처음: 결국, 항상 하느님을 인지하고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군요.
라파엘 신부: 우리가 주님의 가르침대로 살지 못하고, 현실이 그러하지 못하더라도 하느님의 은총으로 우리의 일상이 거룩해질 수 있다는 것이지. 그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일상적 형태인 인내의 태도, 성실과 공평, 책임감의 태도, 사랑이 깃드는 몰아의 태도야.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전염병이 창궐할 때 사회의 방역 지침을 철저히 지킬 뿐 아니라 근원적으로 하느님이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인가 깊이 고민하고, 교회 안에서 교회를 통해 시대의 징표를 읽고 공동선을 위한 삶을 살아가야 해요. 미사가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삶과 일상을 보여주는 가장 ‘거룩한 표징’이지.
나처음: 미사가 그리스도인 일상의 표징이라는 건 억지 아닌가요?
라파엘 신부: 사람은 몸을 보고 영혼을 알고, 지상에서 행해지는 것을 보고 영적이고 숨겨진 것을 깨닫지. 하느님을 믿고 주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안 보이는 것을 은혜로 보고’, ‘거룩한 표징’을 깨치고 받아들여 체현하는 생활을 우선으로 익혀야 해. 이를 교회는 ‘성사’라고 표현한단다.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사와 같다. 교회는 곧 하느님과 이루는 깊은 결합과 온 인류가 이루는 일치의 표징이며 도구이다. 인간과 하느님의 깊은 일치를 이루는 성사가 되는 것, 이것이 교회의 첫 번째 목적”(775항)이라고 설명하고 있지.
조언해: 교회 안에선 ‘신비’라는 말도 쓰는데 성사와 신비는 다른 뜻인가요.
라파엘 신부: 초기 교회 신학자들이 사용했던 헬라어 ‘μυστηριον’(미스테리온)은 ‘신비’(mysterium)와 ‘성사’(sacramentum)라는 두 가지 말로 번역된단다.
신학자들은 ‘성사’는 ‘신비’가 가리키는 구원의 감추어진 실재에 대한 표징을 더 눈에 보이도록 표현한다고 설명하지.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신비’를 눈으로 볼 수 있는 표징으로 드러내는 것이 바로 ‘성사’라고 할 수 있지. 그래서 성체, 세례, 견진, 고해, 성품, 혼인, 병자 등 교회의 일곱 가지 성사는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 그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은총을 펼치시는 표지이며 도구라고 교회는 고백하고 있단다.
나처음: 어머니가 자녀들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세세히 가르쳐주는 것처럼 교회도 성사를 통해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 그 신비를 가르쳐 준다는 것이군요.
라파엘 신부: 바로 그거야. 우리의 인생에는 위대한 신비가 담겨 있단다. 그것이 가장 평범하고 가장 일상적인 행위라 해도 깊은 뜻을 품고 있다고 했지. 우리가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셨다는 현실을 더는 파악할 줄 모르면 어떻게 될까? 아무런 뜻도 없는 말을 하고, 그 뜻을 깨치지 못하는 몸짓만 하게 된다면 우리 인생은 어떻게 될까? 하느님, 은총, 그리스도, 교회, 신앙 이런 말을 하면서 우리가 그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무슨 의미가 있겠니. 그래서 어머니가 자녀에게 삶의 지혜를 일깨워 주듯이, 거룩한 표징인 성사를 통해서 하느님과 일치하는 길을 제시해 주는 거란다.
나처음: 그러면 미사는 하느님의 어떤 거룩한 표징을 드러내는 성사인가요?
라파엘 신부: 주님의 수난과 부활을 기념하는 ‘성체성사’이지.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수난 전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하신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성체성사를 세우셨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이 성체성사를 거행할 것을 사도들에게 명하셨지.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세우실 때 하신 말씀은 성경에 잘 기록돼 있단다. 마태오ㆍ마르코ㆍ루카 세 권의 공관 복음서와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에서 우리에게 성체성사의 제정에 관한 주님의 말씀을 전해주고 있지. 그중 루카 복음의 내용을 들려주마. “예수님께서는 또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사도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방식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루카 22,19-20) 주님께서 행하신 이 예식은 오늘도 우리가 미사를 거행할 때 이루어지고 있단다.
조언해: 신부님, 좀 전에 미사에 참여하는 것도 우리 힘이 아닌 하느님의 은혜로 우리를 준비시켜 준 것이라고 하신 것처럼 성사에 참여하려면 우리 스스로도 그에 합당한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라파엘 신부: 아주 중요한 말을 해 주었구나. 성사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려면 몸과 마음의 준비를 잘 갖추어야 한단다. 너희도 입학, 졸업식 때나 데이트를 할 때 가장 예쁘게 꾸미지 않니! 그런데 하느님을 만나러 주님의 집에 가는데 아무렇게나 하고 가면 예의가 아니겠지. 또 우리가 공연이나 전시장을 갈 때도 프로그램을 꼼꼼히 살피는 것처럼, 미사도 마찬가지야. 그 날의 독서와 복음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어떤 지향으로 미사에 참여할 것인지 미리 준비해 가는 것이 중요하단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사에 참여하기 전에 우리 각자의 허물을 살펴 뉘우치고 하느님께 고백하고 이웃과 화해하는 회심의 마음을 갖추어야 한단다. 우리의 마음을 하느님과 이웃을 향해 활짝 여는 겸손의 자세를 갖추어야 해.
우리 몸은 그 전체가 영혼의 도구이며 표현이야. 영혼은 제집에 들어앉아 있는 사람처럼 그저 몸 안에 머물고만 있는 게 아니라 지체 하나하나에서 속속들이 작용해. 영혼은 몸의 모든 선과 자태와 움직임에서 드러나. 그러므로 우리가, 즉 우리의 몸과 영혼이 하느님 앞에서 환희와 감사로 기뻐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선 우리의 몸가짐과 마음가짐이 중요해요.
[성모동산의 꽃과 풀들] ‘성 요셉의 지팡이’라 불린 식물들
성 요셉은 생업이 목수였기에 목수용 직각자로, 정결하신 마리아의 배필이었기에 백합으로 흔히 표상된다. 그런가 하면 성가족이 헤로데 왕의 지명수배령을 피해 부랴부랴 피신 길에 올랐을 때 가장으로서 마리아와 예수님 모자를 이집트로 모셔간 성 요셉은 지팡이로 표상된다. 이러한 상징성 때문인지, 성모 동산의 식물들 중에는 ‘성 요셉의 지팡이’(St. Joseph’s Staff)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들이 있다. 칼라(Calla Lily), 접시꽃(Hollyhock), 노랑수선화(Jonquil), 월하향(Tuberose)이 그것들이다.
칼라
칼라는 천남성과의 여러해살이풀이다. 영어 이름(Calla Lily)만 놓고 보면 백합과 식물의 일원인 듯이 보이지만, 이는 18세기 중반에 이 식물의 종(種)에 이름을 지어 붙이던 어느 식물학자의 실수의 결과일 뿐이다. 하얀 꽃과 무성한 녹색 잎이 어우러지는 이 식물은 남아프리카 원산으로, 꽃꽂이용으로나 화단용으로 널리 재배된다.
칼라는 상아빛이 도는 흰색의 우아한 꽃을 봄에 피우기에, 일찍부터 그리스도교회 안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상징하는 꽃으로 받아들여졌다. 또한 수많은 그림들과 예술 작품들에서는 성모 마리아 또는 성모 영보(수태 고지)를 표상하는 소도구로 활용되었다. 그러다 보니 칼라는 신성함, 신앙, 정결, 소생(재생)을 상징하는 꽃이 되었다.
칼라의 꽃은 대체로 흰색이지만 노란색, 분홍색, 녹색, 보라색, 주황색, 심지어 검은색도 있다. 흰색 꽃은 순수·정결·무죄함을, 분홍색 꽃은 찬미·경탄을, 보라색 꽃은 지체 높은 신분·열정을, 노란색 꽃은 감사를, 검은색(검은색이라기보다는 짙은 보라색 또는 적갈색) 꽃은 우아함·신비를 나타낸다.
이렇듯 풍부한 상징성에 더해서, 칼라는 꽃 중에서는 드물게 전통적으로 인생의 새로운 시작인 결혼식에도(특히 신부의 부케에), 인생의 마지막인 장례식에도 두루 사용되어 왔다. 이는 칼라가 한편으로는 결혼의 행복, 진정한 헌신 등을 상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을 떠난 이에 대한 애도와 영혼의 정화도 상징하는 까닭이다. 나아가, 칼라는 결혼 6주년을 나타내는 꽃이기도 하다.
접시꽃
접시꽃은 쌍떡잎식물로 아욱과의 여러해살이풀이다. 중국이 원산지이며, 우리나라 전역에서도 잘 자란다. 봄이나 여름에 씨앗을 심으면 그해에는 잎만 무성하게 자라고, 이듬해에 줄기가 곧고 크게 자라면서 잎사귀 사이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접시꽃은 한 번 심으면 저절로 자라고 번식한다. 그러나 일단 싹을 틔워 자라는 포기를 다른 곳으로 옮겨 심는 것은 아주 싫어한다.
이 식물의 꽃은 멀리서 보면 우리나라의 나라꽃인 무궁화와 비슷해 보이는데, 품종에 따라 홑꽃으로 피는 것도 있고 겹꽃으로 피는 것도 있다. 꽃의 색깔은 진분홍, 흰색 그리고 그 중간색 등이다. 어떤 이는 열매의 둥글넓적한 모양이 접시를 닮아서 접시꽃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말하는데, 꽃의 모양도 접시와 비슷하게 생겼다.
이 식물이 동양에서는 여성에게 좋은 효능을 지닌 약재로 알려져 이용된다. 그리고 서양에서는 다산과 생식 능력, 풍요를 상징한다. 우리 시대의 한 시인이 쓴 시로 해서 그 이름이 우리 사이에 친숙해진 꽃이지만, 예전부터 촉규화, 어승화라는 이름으로도 달리 불려 왔다. 그리고 일찍이 신라시대에 당나라에 유학해서 외로움과 소외감 속에 지내던 소년 최치원이 접시꽃을 소재로 소회를 노래한 시도 우리에게 전해 온다.
노랑수선화
노랑수선화는 외떡잎식물로 수선화과의 여러해살이 알뿌리식물이다. 남유럽 원산으로 스페인과 포르투갈, 그리고 십자군 전쟁 이후에 로마 군인들에 의해 유럽 대륙을 거쳐 영국에까지 퍼져서 분포하고, 한국, 중국 등 동북아시아에도 널리 분포한다.
이 식물은 내한성이 강해서 가을에 햇볕이 잘 드는 곳에 알뿌리를 심으면 이듬해 3월 하순부터 4월에 걸쳐 길이 30cm 정도의 꽃줄기가 자라서 노란색 꽃을 피운다. 꽃의 모양과 색이 비슷해서 종종 수선화로 오인되기도 하는데, 수선(水仙)이라는 이름은 꽃이 물 위에 떠 있는 신선의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다. 그만큼 꽃이 예쁜 식물이라고 할 수 있다. 노랑수선화의 꽃은 수선화 종류의 꽃들 중에서 가장 좋은 향기를 품은 꽃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신들에게 노여움을 산 나르키소스가 죽은 자리에서 피어난 수선화가 자기애와 자존심을 나타낸다면, 노랑수선화는 사랑에 대한 염원, 가버린 사랑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갈망을 나타낸다. 또한 서양에서 노랑수선화는 가정의 행복과 우애를 상징한다.
월하향
월하향은 달리는 만향옥이라고도 하며, 튜베로즈(Tuberose)라는 서양 이름이 더욱 친숙할지도 모르겠다. 이 식물은 외떡잎식물로 수선화과의 여러해살이 알뿌리식물이다. 멕시코 원산으로, 봄에 심으면 8∼10월에 꽃을 피우는데, 꽃에서는 강한 향기가 난다.
월하향은 아마도 전 세계적으로 꽃집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꽃 중 하나일 것이다. 일찍이 멕시코의 고대 아즈텍 인들이 이 식물을 재배했고, 16세기에 멕시코에 도착한 유럽인들이 이 식물을 유럽과 다른 식민 지역으로 퍼뜨렸다. 그리하여 월하향은 차츰 지구상의 향수 세계를 휩쓸게 되었다.
이 식물의 학명은 폴리안테스 투베로사(Polianthes Tuberosa)인데, 이는 ‘여러 송이의 꽃이 핀다’라는 뜻의 그리스어 폴리안테스(polianthes)와 ‘부풀어 오른 뿌리 또는 덩어리 뿌리’라는 뜻의 라틴어 투베르(tuber)에서 유래한 투베로사(tuberosa)가 합쳐진 것으로, 이름 자체가 ‘여러 송이의 꽃을 피우는 알뿌리식물’이라는 특징을 말해 준다. 멕시코에서는 이 식물을 성 요셉의 지팡이(vara de San José)라고 불렀고, 마리아 막달레나가 값진 나르도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발라 드렸다는 성경 이야기를 알게 된 뒤로는 나르도라고도 불렀다. 한편, 인도와 인도네시아에서는 ‘밤에 향기를 풍긴다’라는 뜻이 담긴 이름으로 불렀다.
이 식물들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성 요셉의 지팡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연유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노라면, 그 생김새라든지 상징성과 특성 등을 미루어 보면 수긍할 수 있는 면도 없지 않다.
[미사의 모든 것] (8) 미사는 무슨 뜻인가요
성체성사 통해 신자들을 그리스도의 증거자로 파견하다
라파엘 신부: 지금까지 미사의 대상이신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았으니 처음이도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이해하겠지. 그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미사에 관해 알아보자꾸나. 코로나19로 예비신자 교리를 제대로 못 받고 있는 처음이를 위해 미사를 중심으로 가톨릭 교리에 관한 설명도 덧붙이마.
나처음: 좋아요, 신부님. 미사에 관해 늘 궁금했어요.
라파엘 신부: 미사가 무엇인지 짧게 설명하자면, 미사는 성부께 드리는 감사와 찬미이며, 주님이신 성자 그리스도와 그분의 희생을 기념하는 제사이고, 주님의 말씀과 성령의 힘으로 성체성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주님의 현존이라고 정의할 수 있지.
조언해: 신부님께서는 모든 걸 삼위일체 하느님과 연관 지어 설명하시는군요.
라파엘 신부: 단순히 내가 지어낸 억지가 아니란다. 언해야! 성부께 드리는 감사와 찬미 행위이기에 미사를 ‘성찬례’라고 해요. ‘감사하다’(루카 22,19; 1코린 11,24)와 ‘찬미하다’(마태 26,26; 마르 14,22)는 말은 하느님의 창조 사업과 인간 구원을 위한 속량과 성화의 업적을 찬양하는 말이지. 그래서 초대 교회 때부터 미사를 ‘성찬례’ 또는 ‘감사제’라는 의미의 헬라어 ‘Ευχαριστια’(에우카리스티아)라고 했단다. 또 주님께서 미사를 제자들과 함께 수난 전날 밤 마지막 만찬 때 제정하신 것을 기념해 ‘주님의 만찬’이라고도 표현하지. 이 주님의 만찬은 천상 예루살렘에서 벌어지게 될 어린양의 혼인 잔치를 미리 맛보는 것과도 관련되어 있단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과 성령의 힘으로 성체성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주님의 현존을 드러내기 위해 미사를 ‘빵 나눔’ 또는 ‘성찬 모임’(Σναξι, 시낙시스)이라고 해. 이처럼 미사에 관한 표현도 풍요롭단다.
조언해: 미사에 대한 다양한 이름이 있다는 게 흥미롭네요. 다른 이름은 없나요?
라파엘 신부: 또 있지. 성체성사가 구세주 그리스도의 유일한 제사를 재현하는 것이기에 미사를 ‘거룩한 희생 제사’ 또는 ‘미사 성제’라고 하지. 또 ‘찬양 제물’(히브 13,15), ‘영적 제물’(1베드 2,5), ‘깨끗하고 거룩한 제물’(말라 1,11)이라고도 하지. 미사가 구약의 모든 제사를 완성하고 이를 능가하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단다. 아울러 성체성사가 성사 중의 성사이기 때문에 미사를 ‘지극히 거룩한 성사’라고도 표현해. 그리고 우리는 성체성사를 통해 그리스도와 일치하며, 주님과 한 몸을 이루기 때문에 미사를 ‘친교’라고도 표현한단다.
나처음: 그럼 미사는 무슨 뜻인가요.
라파엘 신부: 구원의 신비를 이루는 이 하느님의 거룩한 전례는 일상생활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수행하도록 신자들을 파견(missio, 미씨오)함으로써 끝나기 때문에 ‘미사’(Missa)라고 한단다. 미사(Missa)는 ‘파견하다’ ‘보내다’ ‘해산하다’는 뜻을 지닌 라틴어 동사 미테레(mittere)에서 나온 말로 ‘파견’이란 뜻이지.
이 말은 원래 고대 로마 시대 때 “황제 알현이 끝났으니 돌아가시오” 라거나 법정에서 “폐정했으니 해산하시오”라는 뜻으로 “이테 미사 에스트”(Ite, missa est)라고 한 것을 5세기쯤부터 가톨릭교회가 받아들여 사용하면서 굳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는 말이란다. 미사를 마칠 때 사제나 부제는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또는 “평화로이 가서 주님을 찬양하며 삽시다”라고 하는데, 이 말이 라틴어로 ‘이테 미사 에스트’이지. 우리는 미사 때 받은 은총의 힘으로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말과 행동으로써 선포하도록 각자 삶의 현장에 파견된단다.
나처음: 성당에서 자주 ‘미사 전례’라는 말을 듣는데 미사와 전례는 같은 말인가요
라파엘 신부: 미사와 전례는 교회가 공적으로 하느님을 경배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같다고 할 수 있지. 그러나 미사와 전례는 내용과 방식, 의미 등에서 큰 차이가 있단다. 먼저, ‘전례’는 하느님께 드리는 가톨릭교회의 공적 예배를 말해. 전례는 헬라어 ‘λειτουργια’(레이토우르기아)에서 나온 말로 ‘백성이나 군중의 공공 이익이나 관심사를 위한 봉사’라는 뜻이란다. 히브리어로 쓰인 구약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할 때 성전에서 행해지는 모든 예배 행위를 ‘레이토우르기아’로 표기하면서 그리스도교 용어가 되었단다.
조언해: 신자들이 바치는 개인 기도나 신심 행위는 전례라고 표현해선 안 되겠네요.
라파엘 신부: 그렇지. 전례는 가톨릭교회가 성경이나 성전을 바탕으로 정식으로 공인한 교회의 공식 경신례이기 때문에 개인의 신앙생활과는 엄격히 구별해야 해요. 무엇보다 ‘전례’라고 표현할 때 교회의 공적 예배임을 꼭 유념해야 해. 교회가 공식으로 인정하고 있는 전례는 미사와 교회의 공동 기도인 시간전례, 일곱 성사와 교회가 영적 도움을 얻기 위해 일곱 성사에 따라 제정한 준성사 등이 있단다. 그러나 십자가의 길 기도나 성체조배, 묵주기도 등은 정확하게 말하면 전례가 아니라 신심 행위라고 할 수 있지. 쉽게 말해 교회가 주체가 되어 행하는 경신례는 전례이고, 개인이 주체가 되어 하는 경신례는 신심행위라고 이해하면 돼.
나처음: 그럼 미사는 전례에서 어떤 비중을 차지하나요.
라파엘 신부: 참 좋은 질문이구나. 미사는 가톨릭 전례에서 가장 중요한 경신례이지. 그 이유는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수난 전날 밤 마지막 만찬 때 미사를 제정하셨고, 사도들에게 당신을 기념해 이를 행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야.(루카 22,19 참조) 그래서 교회는 미사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 당신 자신을 십자가의 희생 제물로 바치신 것을 기념하고 현재화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단다.
그러나 미사는 단지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만을 기념하는 제사가 아녜요. 미사는 주님이신 예수님의 부활을 함께 기념하는 예식이야. 인간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은 그분의 부활로 완성되었기 때문이지. 그래서 가톨릭교회는 미사를 통해 이 구원 사건을 늘 새롭게 현재화하고 구원의 은총을 주신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려요. 미사를 찬미와 감사의 희생 제사이자 화해와 속죄의 제사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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