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도 목섬을 가다
청산도(靑山島). 그 이름만으로도 굽이치는 황톳길과 바람에 일렁이는 청보리밭, 그리고 봄날을 노랗게 물들이는 유채꽃의 향연이 눈앞에 그려진다. 사람들은 흔히 이곳을 '느림의 섬(Slow City)'이라 부르며, 구들장 논의 척박함을 이겨낸 촌로들의 주름진 미소나 상서리 돌담길의 정겨운 곡선에서 마음의 안식을 찾고자 한다. 서편제의 구성진 가락이 환청처럼 들려오는 진도아리랑 고개를 넘어, 나 역시 그 느릿한 걸음에 동참하기 위해 이 섬에 발을 들였다.
하지만 청산도의 진짜 매력은 인공의 손길이 닿지 않은 벼랑 끝, 날것 그대로의 자연이 숨 쉬고 있는 곳에 웅크리고 있다는 것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나의 발걸음은 널리 알려진 관광지의 안온함을 뒤로하고, 섬의 동북쪽 끄트머리에 외롭게 돌출된 '목섬(새목아지)'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목섬으로 향하는 길은 마치 흔한 일상에서 미지의 세계로 넘어가는 경계선과도 같다.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질수록 풀벌레 소리는 더욱 또렷해지고, 공기의 질감은 점차 서늘하고 축축하게 변해간다. 여행 책자나 안내판에서도 크게 조명하지 않는 이 고독한 비경을 찾아가는 과정은, 번잡한 속세의 찌꺼기를 하나둘 벗어던지는 침묵의 순례길과 같았다.
슬로길의 연장선에서 만난 좁은 산길은 이내 빽빽한 해송과 상록수림으로 몸을 감춘다. 길바닥에는 솔잎이 푹신하게 깔려 있어 발소리마저 삼켜버리지만,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정체불명의 굉음이 심장 박동을 서서히 끌어올린다. 쏴아아, 쏴아아. 처음에는 바람이 소나무 가지를 흔드는 소리인 줄 알았다. 그러나 걸음을 옮길수록 그 소리는 둔탁한 타악기의 울림처럼 변하더니, 이내 대지를 진동시키는 우레와 같은 파도 소리로 귓전을 때리기 시작했다.
빽빽한 숲길의 장막이 걷히는 순간, 짭조름한 바닷바람이 얼굴을 강타하며 시야가 폭발하듯 열렸다. 그리고 그곳에는, 잔잔하고 평화로웠던 청산도의 안쪽 마을들과는 전혀 다른 거친 생명력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깎아지른 듯한 해안 절벽과 짙고 푸른 바다, 그 경계에서 무수히 부서지는 하얀 포말들이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강렬한 시각적 충격을 안겨주었다. 평온함의 대명사였던 섬이 숨겨둔, 거대한 짐승의 심장부로 걸어 들어온 것이다.
발아래로 펼쳐진 목섬의 지형은 기이하고도 웅장했다. 현지인들이 이곳을 '새목아지'라고 부르는 이유를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뭍에서부터 뻗어 나간 바위 능선이 마치 거대한 새의 목덜미처럼, 혹은 바다를 향해 목을 길게 빼고 포효하는 짐승의 형상처럼 바다 한가운데로 돌진해 있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영락없이 육지와 바다를 잇는 좁고 위태로운 징검다리 모양새다.
양옆으로는 수십 미터 낭떠러지가 도사리고 있는 아찔한 바위 능선 위에는, 모진 해풍을 견뎌낸 덤불과 작은 소나무들이 바위틈에 뿌리를 박고 끈질긴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었다. 붉은빛과 잿빛이 뒤섞인 거칠고 마초적인 암석의 표면은 수만 년 동안 태양과 비바람에 깎이고 패인 세월의 나이테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이 척박한 바위 등짝을 타고 아슬아슬하게 바다 끝을 향해 걸어가는 동안, 오금이 저려오는 아찔함과 함께 묘한 해방감이 교차했다. 좌우에서 끊임없이 불어닥치는 바람은 나를 바다로 밀어낼 듯 사나웠지만, 동시에 내 안의 해묵은 번뇌까지 말끔히 씻어내는 듯했다.
시선을 바위 능선 너머, 바다와 뭍이 격돌하는 최전선으로 던져본다. 그곳에는 거대한 독립된 기암괴석이 마치 파도를 쳐내는 방패처럼 바다 한가운데 버티고 서 있었다. 밀려오는 파도는 옥빛을 띤 탁한 에메랄드색을 머금고 무서운 속도로 바위를 향해 돌진했다. 바다 밑바닥의 모래와 암석이 뒤섞여 만들어낸 신비로운 물빛은, 파도가 바위에 부딪히는 순간 새하얀 거품으로 산산이 조각났다.
"쾅!" 하는 폭음과 함께 허공으로 솟구친 포말은 이내 흩뿌려지는 비가 되어 기암절벽을 적셨고, 바위를 타고 흘러내린 바닷물은 다시 여러 갈래의 굵은 폭포가 되어 바다로 회귀했다. 바위틈 사이사이, 깊게 파인 해식동굴과 좁은 협곡으로 파도가 밀려 들어갈 때면 마치 거대한 바다 괴물이 물을 들이마시고 뿜어내는 듯한 요란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이것은 지구가 지휘하고 바람과 바다가 연주하는 장엄한 교향곡이었다. 그 압도적인 풍경 앞에서는 인간의 어떤 수식어로도 자연의 위엄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음을 겸허히 깨닫게 된다.
깎아지른 벼랑 위, 비교적 평평한 너럭바위를 찾아 조심스레 몸을 기대고 앉았다. 눈앞에 펼쳐진 절벽의 단면은 시루떡처럼 겹겹이 쌓인 퇴적암의 결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억겁의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 굳어진 단단한 지층, 그리고 그 뼈대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며 조각해 낸 파도의 맹렬한 집념. 목섬은 단순히 눈이 즐거운 경승지를 넘어, 행성이 지닌 시간의 무거움과 대자연의 폭발적인 에너지를 묵묵히 증명하는 야외 박물관과도 같았다.
우리는 늘 시간표에 쫓기며 살아간다. 1분 1초를 다투며 무언가를 이뤄내야만 한다는 강박 속에서 스스로를 소모한다. 청산도에 와서 '느리게 걷기'를 다짐하면서도, 여전히 스마트폰의 지도를 켜고 다음 목적지를 향해 걸음을 재촉하던 나의 모습이 퍽 부끄러워졌다. 목섬의 기암괴석은 수만 년의 세월을 하루같이 견디며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는데, 찰나를 살아가는 나는 무엇이 그리 불안하여 끊임없이 쫓기듯 살아온 것일까.
바위는 파도에 상처 입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파도는 바위에 부서지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 무심하고도 맹렬한 대자연의 순환 앞에서, 나의 자그마한 고민들은 바다에 섞여드는 한 줌의 포말처럼 하찮고 가볍게 느껴졌다.
이곳에서는 인위적인 장식이나 친절한 안내판이 필요 없다. 날카롭게 찢어진 바위, 흙 한 줌 없는 돌 틈에서 자라난 강인한 소나무, 그리고 끊임없이 몰아치는 성난 파도만으로도 목섬은 완벽한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도 손색없을 만큼 경이로운 이 해안 비경이 아직 다수의 사람에게 소비되지 않은 것이 내심 다행스럽게 여겨졌다. 너무 많은 발길이 닿으면 이 원초적인 생명력마저 길들여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한참을 멍하니 앉아 바다의 우렁찬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니, 어느덧 먼바다 위로 옅은 주홍빛 노을이 스며들고 있었다. 사나웠던 물결 위로 윤슬이 황금빛으로 부서져 내리며, 짐승처럼 울부짖던 바다도 조금씩 다정하고 온화한 빛을 띠기 시작했다. 거치디거친 환경 속에서도 기어이 따스한 아름다움을 빚어내는 자연의 섭리에 다시 한번 시선을 빼앗긴다.
이제는 목섬을 등지고 사람의 온기가 있는 마을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왔던 길을 되짚어 가는 발걸음은 처음에 비해 한결 가벼웠다. 등 뒤로 멀어지는 파도 소리가 마치 잘 가라며 손을 흔들어주는 듬직한 거인의 인사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빽빽한 소나무 숲의 장막을 빠져나와 다시 상서리의 돌담길로 접어들었을 때, 청산도의 저녁 공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 어김없이 평온하고 따뜻했다.
불과 한 시간 남짓 걸어온 거리에 이토록 상반된 두 세상이 공존한다는 사실이 경이롭다. 평화롭고 나른한 농어촌의 풍경이 섬의 표정이라면, 벼랑 끝에서 파도와 맞서는 목섬의 야성은 섬을 무너지지 않게 지탱하는 단단한 척추와도 같았다.
청산도의 진정한 '느림'은 그저 물리적인 발걸음의 속도를 늦추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때로는 잔잔한 봄바람을, 때로는 맹렬하게 부서지는 파도를 묵묵히 마주하며 자신만의 굳건한 시간을 살아내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저 바위가 무수한 비바람을 견디며 그러했듯, 다시 일상의 뭍으로 돌아가는 배 안, 눈을 감아도 여전히 새목아지 끝에서 몰아치던 서늘한 바람과 하얀 포말이 망막에 선명하게 맺힌다.
내 삶이 다시 인공의 속도에 지쳐 무기력해질 때쯤, 청산도 끝자락에 숨겨둔 그 거칠고도 눈부신 바다의 심장, 목섬의 포효를 조용히 꺼내어 들어야겠다. 그것은 내 영혼이 세상의 속도에 함몰되어 무뎌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일깨우는, 벼랑 끝의 죽비소리가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