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번(眞番)과 진국(辰國)이 글을 올려 천자를 뵙고자 했으나 (조선이)가로막아 통하지 못했다(眞番 辰國 欲上書見天子 又雍閼弗通)" 《한서》 (漢書) 권95 <서남이양월조선전>(西南夷兩粤朝鮮傳)
위 문장은 우리나라 상고시대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거나, 혹은 국사시간에 졸지 않으셨던 분들이라면 다들 기억하시거나 한번 쯤은 들어 보았을 내용일 겁니다.
상고시대 고조선 보다도 관련기록이 너무나 적어 실체를 알 수는 없습니다만, 어쨌든 한반도 남부에 진국(辰國)이 위치했다는 사실에는 대체적으로 동의를 하고 있습니다.
진국의 대략적인 위치(출처: 위키피디아).
사회과 부도에서도 대충 이런식으로 표시했었죠.
그런데 진국은 과연 어떻게 중국으로 가려했을까요? 아니 그보다 왜 중국으로 가고자 했을까요?
답은 사실 몰루? 입니다.
정말로 기록이 위의 저 한줄 뿐이기 때문에 정확하게 진국이 "왜, 어떻게" 중국으로 가려고 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는게 현실입니다만.....
그래도 제한된 기록들을 몇 가지 추정은 해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진국이 중국과 교류를 하려고 했다는 기록이 위만조선이 성립하고 나서야 등장하는데, 그렇다면 위만조선이 성립하고나서 한반도 남부에 어떤 정세변화가 일어났고, 그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라는 추정을 해볼 수 있다 봅니다.
우선은 위만조선이 성립하면서 준왕이 한반도 남부로 도망가는 상황이 연출되는 기록이 나타나죠.
"將其左右宮人走入海, 居韓地, 自號韓王."
좌우 궁인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한지(韓地)에 도달하여 한왕(韓王)을 자칭했다.
- 《삼국지》 동이-
준은후에 멸절되었고, 마한인이 다시 자립하여 진왕이 되었다
準後滅絶, 馬韓人復自立爲辰王
- 《후한서》-
다만 위 기록들은 사기나 한서에는 등장하지 않고 수백년 뒤에 편찬된 후한서나 삼국지에가서야 처음 등장을 하기 때문에 의문이 들 수 밖에 없습니다. 다만 연나라가 멸망하고 연나라의 유민들과 위만이 조선으로 온 것 처럼 위만정권이 수립되면서 기존의 권력층 일부가 한반도로 남하하는 상황이 연출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으리라 보고, 이러한 상황에서 준왕 남천설이 전래되어 온 것이겠죠(그리고 이러한 구도는 다른 설화들에도 나타날 것이었죠 ex 백제 건국설화)
그리고 위만의 손자인 "우거" 때에 이르러서 진국이 중국과 교류를 시도하는데 이 우거왕때에도 중요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처음에 우거가 아직 격파되지 않았을때 조선상 역계경이 우거에게 간언했으나 우거가 들어주지 않자, 동쪽으로 진국으로 갔다. 이때 백성으로 따라 나선 자가 2천여호 였고, 또한 조선에 조공하는 번(蕃)들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初,右渠未破時,朝鮮相曆谿卿以諫右渠不用,東之辰國. 時民隨出居者二千餘戶,亦與朝鮮貢蕃不相往來。"
- <삼국지> 동이전 -
역계경이 간언하고 진국으로 간 시기가 우거가 진국이 중국과 교통하려는 것을 차단한 이전인지 이후인지가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뒤의 " 조선에 조공하는 번(蕃)들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는 기록을 통해서 우거왕이 멸망하기 상당히 이전에 진국으로 갔다는 이야기인데, 그렇다면 우거가 진국이 중국과 교통하려는 것을 차단한 이전으로 추정을 할 수도 있다 봅니다.
그렇다면 역계경이 무엇을 진언했을까인데, 중국측의 사서인 만큼 아마도 우거의 대중국 강경책(?)을 말리는 모습이지 않았을까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동천왕의 비류수 전투이전 기록에도 비슷한 양상이 나타나죠).
망상에 망상을 더해 보면 대중국 강경책을 말리다가 역계경의 의견에 동조하는 대중국 온건파들이 남하하여 진국에 도착한 뒤에 진국과 중국의 교류시도 및 우거의 교통차단이 발생 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아마도 진국이 고조선에서 온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난뒤 이 사람들이 한나라와 교류하여 조선을 견제하는 방책을 이야기 했고(개로왕이 북조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견제하려 한 모습), 진국에서 이를 받아들여 시도 했으나, 우거에 의해 저지 되었다는 내러티브가 성립합니다. 그리고 역계경의 의견에 동조하여 남하한 대중국 온건파들 중에는 위만이 조선에 망명하기 좀 전에 유입이된 연, 제, 조등의 "중국 유민"들도 어느정도 포함되었으리라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죠.
자 그렇다면 진국은 어떻게 중국으로 가려고 했을까?
진국의 북부에 고조선이 있으니 일반적으로는 육로로 교통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원효와 의상이 처음에 육로로 중국에 가려다 고구려 병사에 막힌 설화내용), 저는 해상으로 교통을 하려 했다고 생각합니다.
위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진국의 대중국 교통 시도는 "준왕 남천설" 이후 시점에 진행이 되는데, 이 "준왕 남천설"에는 대부분 "바다"가 등장을 합니다.
위에서 기록한 것 외에 위략에도 "준왕이 바다 가운데 있으며, 조선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準王海中, 不與朝鮮相往來)"는 기록이 있고, 이러한 기록을 토대로 우리나라의 응제시주에서는, 준왕이 위만을 피해 바다로 금마군에 이르렀다는 전승을 남겼죠(箕準避衛滿之亂, 浮海而南至金馬郡) 즉, "준왕 남천설"과 "해양 교통"은 서로간에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이야기 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한국사에서 처음으로 "해양 교통"이 직접적으로 명시된 기록이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 기록 이전에도 조선이 중국이나 한반도 남부와 해상으로 교통을 했을지도 모르지만, 준왕 남천설 시점에 이르러 고조선의 해양교통이 "문헌에 기록이 될 만큼" 발달하고 왕성했다는 것이겠죠. 아까도 잠깐 언급 했지만, 위만이 망명하기 약간전에 연, 제, 조의 유민이 고조선에 유입되었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연나라야 국경을 접하고 있으니 육로로 왔겠지만, 제나라나 조나라 사람들은 어떻게 왔을까요? 아마 산동에서 바다를 통해 요동으로 와서 육로로 한반도로 왔던가(고려말 정몽주 권근등의 대명사행로), 아니면 산동에서 바다를 건너 현 묘도 열도를 지나 한반도서북부연해 지역으로 왔던가(명청교체기 조선의 대명사행로) 했을 겁니다.
어느쪽이던 바다를 통해서 조선으로 왔고, 이 유이민 세력들이 바다를 이용할 수 있을 만큼 바닷길에 익숙학고 항해술이 뛰어난 세력이었다는 이야기겠죠. 이들을 받아 들임으로서 준왕시기 조선의 해양능력이 비약적으로 성장하였고, 그래서 이후 "준왕 남천설"에 "해양교통"이 직접적으로 기록이 되었으리라 봅니다. 그리고 "준왕 남천설"의 시점 부터 "역계경 세력이 진국에 도달하는 시점"에 이르기 까지 "중국까지의 바닷길"에 익숙하고 "해양능력"을 가진 집단이 진국에 유입이 되었고, 이후 이들을 통해 "진국이 바다를 통해 글을 올려 천자를 뵙고자 했으나" 우거가 막아 그럴 수 없었다는 상황이 연출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만약 제 뇌내 망상이 실제였다고 한다면, 조선의 중심지는 현재 평양일대가 확실하다는 이야기도 성립합니다. 당시까지는 항해술의 제한으로 황해횡단이 불가능해(문헌상에 남북조 시대는 가야 나타남), 죄다 연안항해였습니다. 진시황이 불로초 캐라고 보낸 서복이 진짜 일본으로 갔다면 한반도 연해를 경유해서 일본으로 건너갔을 거라는게 정설이죠.
즉 진국이 바다를 통해 중국으로 가려 했다면, 한반도 서해안을 따라 북상하여 산동으로 가는 연안항해를 이용하는 방법밖에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근데 만약 조선의 중심지가 요동이었다고 한다면, 이 바닷길 교통을 막는다게 당시로서는 사실상 불가능 합니다. 동아시아 역사에서 중심지가 아닌 먼 국경연해와 도서지역에까지 "상설 해양 방위체계"가 설립되는 건 "여말선초"시기에나 시작되는 일이니 말이죠. 만약 고조선의 중심지가 요동이었다고 한다면 진국은 한반도 서북 연해 도서지역을 지나 묘도열도를 통해 얼마든지 산동을 갈 수 있었으니까요(명청교체기 조선측 대명사행로, 참고로 삼국시대 "위나라" 조차 산동 연해지역을 거쳐 요동 공손연에게 가는 "오나라" 사신단을 막지 못했습니다. 전예가 잡은 건 귀환중에 폭풍으로 떠밀려 온 세력이었습니다).
즉 "(한반도 남쪽의) 진국이 (한반도 서북연해를 지나 산동으로 가는 해상교통로를 통해) 글을 올려 천자를 뵙고자 했으나" "(평양 지역을 중심으로 한 조선이 자국 연해지역 바닷길을) 가로막아 통할 수 없었다"는 상황이 연출되지 않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부족한 지식을 바탕으로한 저의 뇌내망상일 뿐입니다(대역물이라고 해도 무방할 듯 하네요, 근데 이런 내용으로 쓰면 아마 폭망할 것 같은데;;). 문헌적으로나 고고학적으로 부족한 지식에 가르침을 주시거나 비판을 해 주실 분이 계신다면 매우 환영합니다. 다만 당연히 "이덕일류"는 진지하게 사양합니다.
첫댓글 크고 작은 많은 국가를 중원에서 진국으로 퉁친걸로 볼수있나요?
저도 지식이 얕아서.... 애초에 "연맹왕국" 체제이지 않았을까요?
@배달의 민족 전혀 어떤 구심점도 없고..... 그냥 중국하고 무역할 때 적당히 그때그때 대표 세워서 간 건 아니었나 그런 생각은 듭니다. 노스아스터님 말씀이 보다 실상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읽어보니 꽤 타당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키기 이전에는 대체로 연안항해로 오갔다는 것이 통설인 만큼, 평양에 중심지를 둔 고조선이 연안항해의 항로를 차단함으로써 중국과 진국의 교통을 막았다는 해석이 가장 자연스럽게 보이네요. (뭐, 저야 고대사는 문외한인만큼 가지고 있는 지식이 한정적입니다만...)
뭐 저도 얕은 지식으로 추정해 본 것 뿐이니까요 ^^
동시대 로마나 더 오래된 시기의 그리스, 혹은 페니키아 등은 서해보다 몇배는 더 큰 지중해 흑해 이런 바다를 제집 드나들듯 왔다갔다하며 곳곳에 도시세우고 무역망 세우고 그랬는데 동아시아는 그게 안되었군요.
평균 1000m 수심의 동해는 그렇다치고
서해가 지중해보다 항해하기 껄끄러운 곳이여서 그랬을까요
어찌보면 서해도 반지중해인데
제주 상해 아래는 대양이라쳐도 그 이북은 대륙붕이라 상대적으로 얕았을텐데
왜 해상무역이 활성화되지 못한건지 궁금하네요
유사이래 주요 문명권 중 하나이고 무역 수요가 생각보다 없다쳐도 딱 바다 가운데두고 해상무역하기 좋아보이는 지리인데....
무슬림 인도 상인들도 저기 아프리카 케냐 모잠비크 이런 곳까지 갔던거 생각하면 동아시아 해상 무역은 참 소극적인 느낌이에요.
생각해보니 또 화교들은 인도네시아까지 잘만 갔었던거 같고...아리송하고 호기심이 생기네요 ㅎ
근데 역으로 말하면 그 지역들은 어떻게든 해양으로 나가야만 할 동기가 있었던 반면에, 동아시아 특히 중원지역은 해양으로 진출할 이유가 동기가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이야기죠 명나라 홍무제가 죽으면서 "비용대비 수지타산이 안맞으니까 절대로 중원 외부지역에 군사 파견하지 말라"고 했다던가, 정화의 남해원정이 돈만 잡아먹어서 폐지 시켰다던가, 건륭제가 "우리는 서양 물건 필요 없는데?" 등등의 표현이 그냥 나오는게 아닌 것이죠. 실제로 아편 전쟁 직전까지 서양의 대중국 무역은 손해가 심했다죠.
다만 한반도나 일본의 경우는 (정치적인 동기던 경제적인 동기던 간에) 황해를 건너서 중국과 활발히 교류를 하려 시도 한 편이기는 합니다. 처음에는 한반도 연해를 따라서 한사군이나 그 너머 산동을 통해 중국과 교류를 했지만 백제가 전라도에서 다이렉트로 중국 남쪽으로 가는 황해 사단항로를 개발하고 한동안 일본도 백제를 통해 남조와 교류하게 되죠. 나중에 통일 신라시기에 신라방들과 이를 활용한 장보고가 출현하는게 이러한 상황하에서 이루어진 것이겠죠.
태풍이나 자연재해가 훨씬 심하지 않나요??
그쪽은 내해고 여긴 아니라 난이도가 높음
동해바다 지랄 맞은거야 원체 유명하고
흥미롭네요 잘 보고 갑니다
한씨조선의 준왕이 전북 서해안을 통해 익산 일대에 건마국을 건국하고 이른바 '韓'의 수장이 된 것은 고고학적 발굴로 실증된 사항입니다. 문헌 사료상 기록된 위만조선 건국기인 BC194년도에 거의 들어맞게 기원전 2세기 초반경으로 추정되는 대규모 한씨조선계 남래 집단이 문득 익산에 등장해서 지배 세력이 되고 이들의 지배력 관찰에 반발하는 세력이 침미다례로 빠져나갑니다.
또한 백제 건국 설화는 주로 비류계와 온조계가 집권할 당시 백제 국내 사정에 맞춰져 윤색되었고 주로 고구려 건국 설화에 맞춰 가공된 얘기기에 마한이나 조선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 아하 그럼 준왕남천설은 고고학적으로 증명이 되는 이야기로군요. 역시 꺼무위키발에 있는 논란 어쩌고는 씹어도 되겠네요.
- 제가 표현을 제대로 못한 것 같네요. "유이민 집단이 들어와서 기존의 있던 집단이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는 구도"가 백제 전승에도 나타난다는 표현을 하려던 것 뿐이지, 준왕남천이야기가 직접적으로 백제 건국설화에 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하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표현을 수정해야 겠네요.
여러 지적 감사합니다 ^^
@배달의 민족 준왕 남천은 나무위키에 제대로 들어가 있습니다. 1년전에 제가 수정해놓았습니다.
@마법의활 그러나 여기에는 수많은 논란이 따른다. 준왕남천설에 대한 비판 중 몇가지만 열거해보면 다음과 같다. 1). 준왕이 남천해서 한반도 남부로 가서 마한을 건국했다는 얘기는 진수가 <삼국지> 위서동이전에서 처음한말인데, 편찬연도가 A.D 280년이다.삼국지 위서동이전에 따르면 준왕이 마한을 건국했다는 시점은 B.C194년인데 그로부터 무려 500여년이나 지나서 쓰여진 책이다. 사건과 무려 500여년의 시차가 난다. 2). 준왕과 동시대 인물인 사마천이 지은 <사기>나 <한서> 등에 위만에게 쫓겨난 준왕의 행보가 나타나야 정상인데 준왕이 반도로 향했다거나 마한을 건국했다는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3). 준왕이 위만에게 쫓겨난 후 마한에 가서 왕이 되었다는 것은 역사적 서술이 아니다..........준왕이 마한의 지도자가 되어 문화를 전파한게 사실이라면 마한 지역의 고인돌 문화와 고조선 지역의 고인 그러한 일부의 유물들은 고조선 지역과 연속성이 없으며 또 준왕의 것이라고 단정지을 근거도 없다.
https://ko.wikipedia.org/wiki/%EC%A4%80%EC%99%95
여긴 이렇게 되어있더라고요 ^^;; 나무위키는 아니고 위키백과기는 합니다만...
@배달의 민족 옛날 책만 보고 헛소리만 기입해놨네요. 기원전 2세기 고조선 묘제는 토광묘지 고인돌이 아닙니다. 그리고 뭔 마한이 고인돌이여? 쥐롤하고 자빠졌네요.
@마법의활 그렇군요. 어쨌든 준왕의 남천설이 고고학적으로도 증명된다는 사실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몰라서 그러는데 준왕 남천설 관련 연구에 대해서 알려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배달의 민족 나무위키 건마국 및 준왕 항목을 보시면 되겠습니다.
@배달의 민족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42985115
저의 주장과 견해는 주로 이 책에 근거합니다.
@마법의활 옙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