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꼭 알아야 할 한국 전쟁의 역사!
아! 아! 어찌우리 잊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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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꼭 알아야 할 한국 전쟁의 역사!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한반도에서 최초의 냉전이 일어났다.
한국 전쟁은 세계의 관심을 거의 받지 못했지만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은 전 세계를 아우르는 것이었다.
냉전의 강대국들은 수백만 명의 목숨을 희생시키면서
세계 패권에 대한 그들의 열망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북한과 남한의 전쟁을 이용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한국 전쟁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사진을 통해 자세히 읽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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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한반도에 내전이 발발한 이유는
일제가 대한제국을 침략하고
한반도를 일본 제국의 식민지로 존속한
20세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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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한국은 1910년에 공식적으로 일본에 합병되었고,
그 결과 다양한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자, 자본가,
다른 혁명 단체들이 일본 정부에 저항하여 생겨나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이 단체들은 통합 할 수 없었고,
미래에 대한 그들의 상충되는 견해에 의해 점점 더 분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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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한국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한국 난민들과 혁명가들은
중국 만주의 일부를 병합한
일본과의 전쟁에서 중국의 지원을 받았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후,
일본은 1945년 9월 2일 공식적으로 항복했고,
한국의 운명은 연합국의 손에 맡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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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분단
새로 형성된 북한은 소련의 관할이 되고
남한은 미국의 보호국이 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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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선
미국과 소련은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남과 북으로 나누었다.
38선은 한반도의 수도인 서울이 미국의 통제 하에
있어야 할 필요성을 느낀 미군 장교들에 의해 제안되었다.
소련 지도자 조셉 스탈린은 그 조건에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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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일제에 대항한 한국 공산주의의 지도자 김일성은 소련를 등에업고
1948년에 총리로 선출되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을 기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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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이승만은 미국에서 수십 년을 보낸 후
1948년에 한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공산주의와 소련과의 긴밀한 관계에 있던 김일성과는 반대로,
이승만은 반공 정책을 추진했고 중국이나 소련과의
대부분의 협상에 맞서 싸웠다.
그리고 남북한 점령군은 1949년에 한반도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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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불안
북한은 공산주의 이웃 국가들의 관대하고 즉각적인 도움으로
사회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빠르게 번영하기 시작했다.
남한은 국민들 사이의 경제적 분쟁과 심각한
정치적 불안으로 계속해서 고통을 받았다.
김일성과 이승만은 38선이 영구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각자의 통치하에 통일된 한국을 열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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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에서 일어난 사회주의자들의 봉기
이승만의 당선 직후부터, 북한의 지원을 받는
공산주의자들의 봉기가
남한 전역에서 정기적으로 일어났다.
첫 번째 봉기는 1948년 4월 제주도에서
시작되어 1949년까지 계속되었다.
남한 정부에 의해 행해진 대량 체포를 제외하고,
3만 명의 한국인들이 그 분쟁에서 죽었고,
그들 중 절반은 민간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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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국경 분쟁
38선을 따라 발발한 국경 분쟁도
각 나라 점령군이 떠난 직후부터 불붙기 시작했다.
한반도 중앙의 산악지대에서 벌어진 게릴라식
전투에서 수천 명의 군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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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침략
남한 내부의 지속적인 반란때문에 1950년까지
남한의 병력은 크게 줄어들었고,
김일성에게 침략의 기회를 주었다.
모스크바에 있는 스탈린의 지지를 받으며 북한군은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38선을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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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략의 공식적인 이유
첫 번째 접촉지인 옹진반도에 누가 먼저 발포했는지
학자들의 의견은 다르지만, 완벽하게 준비된 김일성의
군대는 빠르게 남한을 함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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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대교 폭파 사건
이틀 후, 북한군은 서울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이승만은 수원 대전 부산으로피신하게 되고
그는 남한군에게 남과 북을 잇는 유일한 통로인
한강 다리를 폭파하라고 명령했다.
이 다리는 6월 28일 이른 시간에 폭발했고,
약 4,000명의 난민들이 도시를 탈출하려고
시도하고 있었지만, 수백 명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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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서울 전투
서울은 몇 시간 만에
북한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침공에 앞서 몇 달 동안
소련은 북한에 탱크, 중포, 항공기 등
완벽한 무장을 갖추도록 도왔다.
전차나 중장비가 없는 남한군은
북한군의 포격과 전차 사격에 빠르게 굴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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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의 공식 개입
북한의 침공 소식이 전해진 직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의가 열렸고,
소련이 유엔을 보이콧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회원국들은 분쟁에서 한국을 도울 의무가 있다는 데
만장일치로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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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왜 한국전쟁에 참여했나?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이끄는 미국 정부는
처음에 전쟁에 동참하는 것을 주저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들은 한국을 돕는 것이 동양 전역에
공산주의가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필요하다고 결정했다.
만약 남한이 함락된다면, 일본에 대한 방위도
어려워질 것을 두려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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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서 일어난 대리 전쟁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과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 사이의 냉전은
전 세계의 다른 나라들에서 많은 "대리 전쟁"으로 일어났고,
한국 전쟁은 이것의 최초였다.
한국인들의 고향인 한반도에서 내전을 벌이는 동안,
그들 뒤에 있는 각각의 초강대국들은
수많은 생명을 희생시키면서 세계적인 영향력과
통제를 위해 싸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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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단으로 밀려나다.
미국과 유엔군이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남한군과 동맹국들은 한반도 아래로 점점 더 밀려났고,
마침내 그들은 부산의 항구를 중심으로
부산의 최남단 만을 방어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곳은 이승만 대통령과
그의 정부가 옮겨있던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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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단으로 밀려나다.
남한군을 포함한 14만명의 유엔 병력은
230km에 이르는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했다.
바다에서 들어오는 지원군과 무기의 안정적인 공급으로
남한군과 유엔군은 6주동안 북한군의 공격에 대항할 수 있었고,
결국 북한군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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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포로가 되다.
6주간의 긴 낙동강 방어선 전투의 일부로서,
훨씬 더 작은 마산 전투는 75명의 군인들이
전쟁 포로로 잡히면서 유엔군에게 비극으로 끝났다.
그들의 포로가 된 후, 75명은 북한군에 의해 처형되었다.
이것은 한국 전쟁 중에 일어난 많은 전쟁 범죄 중 하나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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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
낙동강 방어선 전투의 전반적인 성공 이후,
유엔군은 북한군을 38선에 더 가깝게 빠르게 밀어붙였다.
다음 공격은 당시 북한군의 최전방 160km에 위치한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인 인천에서 계획된 인천상륙작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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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으로 38선 이남을 모두 회복하다.
1950년 9월 15일 230척의 해군 함정과
약 40,000명의 유엔군들이 인천에 상륙했다.
북한군의 방비상태는 예상대로 엉성했고,
쉽게 인천을 탈환할 수 있었다.
2주 후 남한군과 유엔군은 서울을 탈환하고
북한군을 38선 너머로 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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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으로 진격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가 이끈 유엔군은 연승 행진으로
전쟁의 흐름이 남한에 유리하게 바뀌자 빠르게 북쪽으로 진격했다.
활기를 되찾은 남한군은 북한의 주요 항구를 점령하기 위해
속도를 냈고, 10월 19일에 북한의 수도인 평양은
유엔군의 통제하에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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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폭격
유엔군이 실시한 폭격은
전쟁에 돌입하자마자 시작됐지만
남한과 유엔군이 우위를 차지하자 표적 공격에서
무차별적인 파괴로 빠르게 전환했다.
1950년 11월 5일 매카시 장군은
공군에게 군대, 민간인에 관계없이
"숙소가 될 수 있는 모든 건물"을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폭발물, 화염병, 네이팜탄이 북한 건물의 85% 이상을 파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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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 참여한 중국
1950년 6월 전쟁이 시작된 이래로,
김일성의 공산주의 동맹이자 이웃인 중국은
마오쩌둥의 지도하에 조용히,
그러나 가까이에서 이 분쟁을 지켜보았다.
평양 점령 이후 유엔군이 중국 국경을 향해 빠르게
접근하는 것을 목격한 마오쩌둥과 그의 내각은
북한과의 싸움에 공식적으로 동참하기로 결정했다.
조직적이고 경험이 풍부한 인민군은 전투를 다시 한번
38선으로 후퇴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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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천강 전투
약 20만 명의 인민군 병력이 1950년 10월 18일
북한으로 건너가 북한군과 합류했다.
중국의 개입은 남한군과 유엔군의 허를 찔렀고,
전선을 중국 국경에서 80km 떨어진 청천강까지 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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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천강 전투
중국 인민군은 11월 25일 밤 기습 공격을 시작했고,
유엔군을 빠르게 밀어냈다.
북한군이 유엔군의 최전선 뒤로 이동하여 공격을 할 수 있게 했다.
막상막하인 양측은 서로에게 큰 손실을 입혔지만,
남한과 유엔군은 결국 190km 떨어진 38선까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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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평화 회담
38선으로 돌아온 유엔군은
중국과의 평화 회담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
유엔군이 더 이상 한반도에 더 많은 병력과 물자를
공급하고 싶지 않아 했고, 중국은 초기 승리로
대담해졌기 때문에 협상은 빠르게 결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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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의 소모전
12월과 1951년 상반기까지 인민군은
남한 영토로 밀고 들어왔다.
서울은 적어도 네 번 함락되었고, 공산주의 세력은
결국 다시 한번 38선으로 밀려났다.
유엔군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확신한 마오쩌둥은
남한군과 유엔군을 상대로 끊임없는 공격을
퍼부으며 소모전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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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착 상태
유엔군은 자원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지만,
남한이 공산주의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것을
훨씬 더 꺼려하면서, 38선을 계속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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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착 상태
전쟁의 마지막 2년 동안 지속적이고
잔인한 전투가 계속되었지만,
최소한의 영토만 얻고, 잃었을 뿐이다.
전쟁은 인명과 군사 자원의 블랙홀에 불과했기 때문에,
평화 회담은 결국 모두에게 점점 더 필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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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전 협정
한국 정전 협정은 1953년 7월 27일 중국, 북한,
유엔군 사령부 대표들에 의해 서명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공식적으로 통일된 한국을 위한
그의 싸움을 포기하기를 꺼리면서 휴전을 거부했다.
약 76,000명의 공산군 포로들이 며칠 후 빅 스위치 작전에서
13,000명의 유엔 포로들과 교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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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전쟁
약 5백만 명의 사람들이 처음에는 통일 한국을 위해
그리고 나중에는 세계적인 이념적 패권을 위해
싸웠던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다.
오늘날 남북간에 합의된 국경은 1945년 38선을 따라
그려진 국경과 거의 같다.
평화 조약이 체결되지 않았고,
한국이 정전 협정에 서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 전쟁은 결코 끝난 것이 아니다.
남북한 사이의 긴장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높다.
출처:
(Britannica) (History) (P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