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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3대첩 중의 하나인 귀주대첩에 대해서는 다들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근데 보통 우리는 당시 쳐들어 온 거란군의 규모에 대해서 "10만" 정도라 이야기 하죠.
그건 아마도 이 구절들 때문일 겁니다.
거란의 소손녕(蕭遜寧, 소배압)이 10만 군사를 동원해 침략해오자, 왕은 평장사(平章事) 강감찬(姜邯贊)을 상원수(上元帥)로, 대장군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로 각각 임명했다.
거란의 소손녕(蕭遜寧)이 내침할 당시 10만 대군이라 했는데, 당시 강감찬은 서북면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가 되었다.
그래서 "10만정도의 거란군이 왔다가 수천명만이 살아돌아갔다" 가 일반적인 인식일 겁니다.
그런데 뜬금없이 세종-성종 연간의 문신 양성지는 "귀주대첩 당시의 군대가 30만이었다"는 주장을 합니다.
"1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양성지(梁誠之)가 상서(上書)하였다. "신(臣)이 그윽이 우리 나라의 역대(歷代)의 일을 보건대, 수(隋)나라와 당(唐)나라는 고구려(高句麗)에 크게 패(敗)하였고, 사구(沙寇)도 또한 고려(高麗)에 패(敗)하였습니다. 강감찬(姜邯贊)이 거란(契丹)의 30만 병(兵)을 막을 때 한 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하였고...."
세조실록 34권, 세조 10년 8월 1일
"2 남원군(南原君) 양성지(梁誠之)가 상소하기를.....귀주(龜州) 동교(東郊)의 싸움에서는 거란(契丹)의 30만 군사가 한 사람도 살아 돌아간 것이 없었는데, 이것은 나라의 형세가 바야흐로 강하고 강감찬(姜邯贊)이 그 재주와 지혜를 펼 수 있었기 때문이며...."
성종실록 84권, 성종 8년 9월 16
"3 남원군(南原君) 양성지(梁誠之)가 상언(上言)하기를.....요(遼)나라는 인국(隣國)이며 적국(敵國)이었으므로, 소손녕(蕭遜寧)의 30만 병이 하나도 돌아가지 못하였으며...."
성종실록 134권, 성종 12년 10월 17일
양성지의 세 상소문에서 각각 "거란군사 30만" 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고려사에 30만이라는 숫자는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았는데, 대체 저 숫자는 어디서 나타난 것일까? 과연 양성지가 근거도 없이 가져다 붙였을까요?
중국 남송대 편찬된 《속자치통감장편(續資治通鑑長編)》에는 1044년에 부필(富弼)이라는 송나라 관리가 송황제 인종에게 하북(河北)지역을 수어(守禦)하는 12가지 책략(十二策)을 상주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상주문에는 "거란을 견제하기 위하여 고려를 활용하는 방안"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저 고려가 여러차례 봉공하기를 애걸하였으나, 조정이 끝내 허락하지 않아, 마침내 고려는 거란에 종사하기로 결심하였으니, 이 것이 거란이 고려를 활용하는 이유입니다(*필자 주: 앞의 생략한 문장에 거란이 서하 고려와 연합하여 송을 치겠다고 협박하는 내용이 있음). 거란에 교화되어 잘 따르고 있지만, 조정이 만약 고려의 진공을 허락한다면, 그 뜻을 바로 하여, 반드시 반대로 우리가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니, 거란이 어떻게 그렇게 하겠습니까? 신은 고려가 비록 거란에게 종사하고 있으나, 거란이 고려를 어려워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천성 3년(天聖三年 1025)에 거란은 일찍이 고려를 정벌하였고, 이 해에 조정은 이유를 고려에 파견하였는데, 고려는 거란 군대 20만명을 죽여, 말 한 마리와 바퀴 한 짝도 되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이로부터 거란은 항상 고려를 두려워하고 더 이상 감히 군대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조정이 만약 고려를 얻는다면, 거란의 동요를 기다리거나 구조를요청할 필요도 없이, 신의 생각으로는 거란이 반드시 고려를 후환으로 의심하여, 결국 감히 대규모 군대를 남쪽으로 보내지 못할것이니, 이것이야말로 중국에 큰 이익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므로, 폐하께서는 의심하지 마시고 실행하시기 바랍니다."
"夫高麗累表乞貢奉, 朝廷終不許, 遂決志事契丹, 所以為契丹用也. 契丹所教無不從, 朝廷若能許高麗進貢, 正遂其志, 則必反為我用矣, 契丹何能使之耶? 臣熟知高麗雖事契丹, 而契丹憚之. 天聖三年, 契丹常伐高麗, 是年, 朝廷遣李維奉使, 高麗殺契丹兵二十萬, 匹馬隻輪無回者. 自是契丹常畏之, 而不敢加兵. 朝廷若得高麗, 不必竢契丹動而求助, 臣料契丹必疑高麗為後患, 卒未敢盡眾而南, 只此已為中國大利也, 亦願陛下行之無疑. "
《續資治通鑑長編》 卷一百五十 慶曆四年 六月戊午
위 부필의 고려 활용방안에서 보면 "天聖三年"에 고려가 거란병 20만을 죽였고 말과 수레도 돌아간 자가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天聖三年(1025)"을 ""天禧三年(1019)"으로만 바꾸면 정확히 현종10년(1019)2월에 고려가 거란을 격파한 내용과 맞아 떨어집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20만" 이라고 했는데 양성지는 "30만"이라 했으니 두 기록간에 관계 없는거 아닌가 하고 생각하실 분도 계실 겁니다만, 이 부필의 "수어책" 은 비슷한시기 편찬된 《제신주의(諸臣奏議)》라는 책에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천성 3년(天聖三年 1025)에 거란은 일찍이 고려를 정벌하였고, 이 해에 조정은 이유를 고려에 파견하였는데, 고려는 거란 군대 30만명을 패배시켜, 말 한 마리와 바퀴 한 짝도 되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이로부터 거란은 항상 고려를 두려워하고 더 이상 감히 군대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天聖三年, 契丹甞伐髙麗, 是年朝廷遣李維奉使, 髙麗敗契丹兵三十萬, 疋馬隻輪無回者. 自是契丹常畏之而不敢加兵.
《諸臣奏議》 卷一百三十五 邊防門
여기서 정확히 거란병30만(契丹兵三十萬)이라는 구절이 등장하게 되지요. 아마도, 《제신주의(諸臣奏議)》가 편찬되는 과정에서 二가 三으로 오기가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건 중국 남송대 기록인데 조선의 양성지와 무슨 상관임?" 이라는 의문을 표하실 분이 계실수도 있을 겁니다만, 이 《제신주의》는 조선태종연간에 조선에 유입이 되었습니다.
(명나라) 예부(禮部) 자문(咨文)은 이러하였다.....흠의(欽依)하여 조선 국왕(朝鮮國王)과 왕부(王父)에게 주는 단필(段匹)·서적(書籍) 등의 물건과, 중궁 전하(中宮殿下)에게 상사(賞賜)하는 왕비 관복(王妃冠服)과 예물(禮物)을 흠차 내관(欽差內官) 태감(太監) 황엄(黃儼) 등에게 교부하여 가지고 가게 하고, 이를 본국(本國)에 이자(移咨)해서 알리어 시행한다.....《원사(元史)》 1부(部), 《십팔사략(十八史略)》·《산당고색(山堂考索)》·《제신주의(諸臣奏議)》·《대학연의(大學衍義)》·《춘추회통(春秋會通)》·《진서산독서기(眞西山讀書記)》·《주자성서(朱子成書)》 각 1부(部)이다.
태종실록 6권, 태종 3년 10월 27일 신미
그리고 이 《제신주의》를 조선사람들이 읽었던 것 같습니다. 태종 7년 9월에 권근이 병으로 사직하였습는데, 실록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동문선에 기록된 《사면찬성사차자(辭免贊成事箚子)》에 의하면
신 근(近)은 삼가 생각하옵니다. 지난 날에 안에서 내온 《송조제신주의(宋朝諸臣奏議)》 제35권에 어사중승(御史中丞) 부요유(傅堯兪)가 철종(哲宗 조후〈趙煦〉)에게 상서(上書)한 것이 있었사옵니다(제신주의 내용)......엎드려 바라옵건대 신의 쇠약한 병을 가련히 여기시사 신의 작명(爵命)을 갈아 주옵소서. 송(宋)나라 신하들의 주의(奏議)를 보옵시고, 후세를 위한 법을 세우시옵소서. 또 노신(老臣)으로 하여금 안심하고 치병(治病)하게 함으로써 여생을 보존하게 하옵신다면, 크게 다행함을 이기지 못할 것이옵니다.
《동문선》 56권 箚子
권근이 병때문에 찬성사에서 사직하겠다는 차자에 《제신주의》의 내용을 인용할 만큼 《제신주의》가 유입이 된 이후 조선 사람들에게 많이 읽혔다는 이야기겠죠. 이를 통해 양성지도 《제신주의》를 읽었고 그렇기에 상소를 할 때 "거란병 30만이라는" 구절을 삽입하였으리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고요.
그렇다면 저 2-30만이라는 숫자는 얼마만큼 신용할 수 있을까?
부필의 수어책 중 고려가 거란군 2-30만을 죽였다는 구절 바로 앞에 "이 해 조정에서 이유(李維)를 사신으로 파견하였다(是年朝廷遣李維奉使)"는 문구가 있습니다. 즉 이유라는 사람이 고려에 갔다가 고려사람이 전해주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이야기죠(그런데 고려사 기록에는 李維라는 인물이 등장하지 않을 뿐더러, 天聖三年(1025)에 송나라 인물이 왔다는 기록조차 없습니다. 다만 天禧三年(1019) 7월에 송나라 민간인들이 오고, 8월에 현종이 예빈경 최원신(崔元信)을 송나라로 보내었고, 9월에 송나라 등 외국인들을 위해 잔치를 열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사람들 중에 이유(李維)가 있지 않았을까? 하고 추정 할 수는 있습니다.)
아마도 고려 측에서 송나라에서 온 이유에게 거란군을 20만으로 과장했던 것 같습니다. 그게 《제신주의》에 30만으로 표기되고 그걸 읽은 양성지는 30만으로 표기 한 것이고요.
애초에 부필이던 양성지던 간에 그들이 중요하게 생각한 건 고려가 패배시킨 거란측의 숫자를 명확히 밝히는게 아니었습니다. 부필의 주장은 "고려가 거란군을 많이 패배시켜 거란이 두려워 하니 고려와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었죠. 양성지 또한 "고려가 거란30만을 격파 운운"한 목적은 어디까지나 이러한 역사적 사례를 통해 군비 or 성의 수축과 관련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1-1 신(臣)이 항상 분격(憤激)하여 고금(古今)에 용병(用兵)하던 방도를 두루 참고하여, 감히 군법(軍法)을 엄하게 하고, 군호(軍戶)를 구휼(救恤)하고, 군정(軍情)을 보살피고, 군액(軍額)을 실(實)하게 하고, 군령(軍令)을 간략하게 하는 5가지 일을 가지고 먼저 우선으로 삼아, 이로써 군제(軍制)를 정(定)하고, 군기(軍器)를 정비하고, 군문(軍門)을 갖추고, 군정(軍丁)을 보호하고, 군사를 사열(査閱)하는 등 그 차례를 만들어 우러러 예람(睿覽)을 바라니, 성상께서 보아 주시리라고 삼가 생각합니다.
세조실록 34권, 세조 10년 8월 1일
"2-1 먼저 의주성(義州城)을 쌓고 다음에 안주(安州)에 성을 쌓고 다음에 황주(黃州)에 성을 쌓아 만세의 계책을 삼으시면, 심히 다행하겠습니다."
성종실록 84권, 성종 8년 9월 16일
"3-1 바라건대 ‘한씨(韓氏) 족친 중에 지위와 명망이 있는 자와 통사(通事) 중에 정동(鄭同)과 교제가 있는 자에게 명하여 토산물을 많이 가지고 바로 북경(北京)에 가서, 정동을 인해서 한씨에게 말하고 한씨가 어소(御所)에 말하여 개주위(開州衛) 설치의 정지를 청하게 하소서.
3-2 신은 절실히 생각하건대, 지금 8도의 인민으로서 놀고 먹고 조부(租賦) 를 내지 않는 자는 승려(僧侶)만한 것이 없습니다. 승려들을 동원하여 (의주성을) 수축함으로써 보국(報國)하게 하는 것이 옳으며, 특별한 근로(勤勞)도 없으면서 까닭없이 복호(復戶) 된 자와 사복시(司僕寺) 제원(諸員) 등으로 수축하게 하여 보국하게 함도 좋을 것입니다. 또 번(番)을 서고 있는 정병(正兵)과 동원되고 있는 수군(水軍)에게 식량을 지급하여 압록강변 일대 행성(行城)을 쌓게 하고 또 따로 파절(把截)을 설치해야 합니다"
성종실록 134권, 성종 12년 10월 17일
즉 위와같이 양성지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군무에 관한 내용을 "상주(上奏)" 하여 국왕을 설득 해야했고, 너무나 알맞게도 "역대의 훌륭한 상주문(上奏文)"들을 모아 놓은 《제신주의》라는 책에 고려가 거란30만을 격파한 내용이 있으니 활용해야 한다고 판단하여 위에서 처럼 고려가 거란병 30만을 격파한 내용을 삽입한 것이죠.
명나라 영락연간에는 《역대명신주의》라는 책이 편찬되는데 이 책에도 《제신주의》의 내용이 수록되어 있으며(그리고 고려가 격파한 거란군 숫자도 30만이라 기록), 광해군 연간에 조선에 유입이 되었습니다. 조선후기 학자 안정복이나 한치윤-한진서도 당연히 거란병30만 구절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만, 여러 다른 사료들과 교차 검토한 결과 "30만" 이라는 숫자를 신용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서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관련 내용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첫댓글 오 잘봤습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잘 보셨다니 다행이네요 ~~ ^^
좋은글 감사합니다!
좋게 봐주셔서 고마워요~^^
잘 읽었습니다. ㅎㅎ
제신주의라는 책에도 흥미가 가네요. ㅋ
조선도 마찬가지지만 중국은 일찍부터 좋은 상주문 들을 따로 모아서 문집으로 엮더라고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