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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완두콩밥을 좋아한다. 어릴 적 우리집은 완두콩을 '왜콩', '왜팥'이라고 불렀다. 내가 밥을 잘 먹지 않아 걱정스럽던 집안에서는 그나마 왜콩밥만은 잘 먹어서 많이 심어 가꿨다.
그 왜콩밥 향미와 흰쌀에 연초록 동그란 콩의 비주얼은 예나 지금이나 식탁의 행복감을 안겨 준다. 남편이 나이 들어 밭농사를 짓게 되었다. 농사를 시작한 첫해 봄 어느 날, 싱글벙글하며 말했다.
"어머니 말씀이 당신 제일 좋아하는 밥이 완두콩밥이래. 그래서 오늘 완두콩을 많이 심었어."
그 후에도 해마다 지주대를 깎아 세워주며 1년 내내 먹을 완두콩 농사를 열심히 지었다.
올해도 수확 철이 되었다. 그런데 심한 가뭄으로 밭에 물을 주다 보니 완두콩에 손 갈 새가 없다고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날 위해서 많이 심고 가꿨다는데, 그렇다면 내가 가서 따는 일이라도 해야지.'
평소 잘 가지 않던 농장에 작업복을 입고 남편을 따라 나섰다. '허창'이라고 불리는 창고에는 뿌리째 뽑힌 완두콩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먼저 작업 준비를 했다. 내가 앉을 의자 앞에 바구니 셋을 갖다 놓았다. 씨앗 받을 특상품 완두콩, 잘 익어 보관할 것, 덜 여물어 금방 먹을 것, 세 가지로 분류해 담기 위해서였다. 부지런히 손을 놀려 구분해 따 담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꼬투리에 크고 작은 구멍이 간간이 보였다. 뻥 뚫린 구멍은 거무스럼하고 바늘구멍보다는 컸다.
'왜 이렇지? 벌레 구멍인가?'
남편이 지은 농작물에는 농약이나 제초제를 쓰지 않기 때문에 온갖 벌레들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완두콩 꼬투리까지 구멍이 뚫려 있다니....
어릴 적 경험으로 완두콩벌레는 본적이 없었다. 수퍼에서 초록 그물망의 껍질 완두콩을 사다가 까서 냉동실에 보관할 때도 완두콩벌레는 없었다. 상추에 달팽이는 붙어 있을 망정 다른 벌레는 끼지 않듯, 완두콩도 벌레가 좋아하지 않을 줄로 당연히 그렇게 알고 있었다.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혹 벌레일까?' 이상하다 여기면서 손놀림을 빨리하여 양이 만만찮은 콩꼬투리를 부지런히 땄다. 그런데 자꾸만 구멍 난 것이 보였다. 껍질에 구멍이 뚫렸다는 것은 아무래도 알갱이 속에도 벌레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다른 콩과 함께 담아서는 안 되겠다 싶어 바구니 하나를 더 갖다가 구멍 난 꼬투리만 분리해 담았다. 한참이나 따 담다가 정말 벌레가 들어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졌다. 따는 일을 멈추고 구멍 뚫린 콩을 까보기 시작했다.
와, 역시 구멍 뚫린 꼬투리는 하나같이 모두 벌레가 들어 있는 게 보였다. 어떻게 이 두꺼운 껍질을 뚫고 알을 낳아서 벌레로 자랐단 말인가?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완두콩 꽃이 지면서 열매를 맺는 순간 동시에 알을 까서 함께 꼬투리 속에서 자란 것일까.'
생물 시간에 공부를 해본 적도 없고 상식도 없어서 의문의 날개를 단 채 벌레에만 관심이 바짝 모아졌다. 먼저 구멍이 크게 뚫려 있는 탱탱 여문 꼬투리를 조심스럽게 쪼개서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아휴, 무서워. 징그러워!"
꼬투리 안에는 토실토실 살찐 하얀 벌레가 자기가 싸 놓은 똥 위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어릴 적 보았던 기침 해소제 '용각산' 미립자와 같은 회색 똥이었다. 잘 여문 일곱 알갱이 중 반 이상씩 흠집을 내고 있었고 그렇게 갉아먹은 탓인지 배설물도 엄청 많은 양이었다. 몸의 크기로 보아 성충이 다 되어 금방이라도 번데기가 될 것 같았다.
다음은 제일 작게 구멍 난 꼬투리 콩을 까 보았다. 좀 덜 여물고 집이 작아서인지 벌레 크기도 작고 색깔도 흰 빛이 아니라 아름다운 연둣빛을 띠고 있었다. 그야말로 애벌레였다. 큰 벌레가 막은 분량과는 달리 한두 알갱이만 파먹었다. 따라서 싸놓은 똥의 분량도 적었다. 그래도 손에 닿을까 무섭고 징그럽기는 마찬가지여서 창고 땅바닥에 후드득 털어버렸다.
계속 까보아도 틀림없이 벌레는 들어 있지만, 꼬투리 하나에 두 마리가 든 것은 없었다. 희한했다. 아마도 저희들끼리 생존경쟁 을 시키지 않으려는 어미나비의 지혜였을까?
한 코투리, 한 꼬투리 깔 때마다 한 마리씩 땅바닥에 팽개쳐진 벌레들은 안식처에서 딴 세상으로 나온 갑작스런 변화에 놀랐나 보았다. 몸을 동그랗게 말며 오그라들었다.
'이 벌레들을 모두 어떻게 해야지...?'
징그럽지만 해충이니 별수 없이 신발바닥으로 문질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문득 카프카의 《변신》주인공이 떠올려졌다.
그레고르 잠자가 하룻밤사이에 여러 개의 다리가 달린 벌레로 변신되어 종탑에서 울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죽음을 맞듯이 이 벌레들도 순식간에 자기 집을 잃고 무슨 생각을 하며 죽어가야 하나...? 물컹한 배가 터지며 으깨진 것이 땅바닥과 내 운동화 바닥에 묻었다. 정말 못할 짓이었지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중간 크기의 콩을 깠다. 역시 크지도 작지도 않은 2cm 정도 길이의 연둣빛을 띠고 있는 보통 크기의 벌레가 보였다. 꼬투리와 벌레의 크기는 비례하는구나 생각하면서 마찬가지로 창고 흙바닥에 힘껏 내리쳐 털어냈다.
어? 지금까지의 벌레와는 달리 땅에 떨어졌건만 동그랗게 말아 웅크리지도 않았다. 떨어진 긴 몸 그대로 잠시 머뭇하고 있는 게 아닌가.
온도 습도 딱 맞는 파라다이스에서 갑자기 변을 당한 자신이 어이없어서였을까, 아니면 이럴지라도 정신을 차려 살아야 한다고 체력을 가다듬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다른 벌레와는 달랐다.
아니나 다를까. 곧 움직이기 시작했다. 활기찬 모습으로 몸체 마디마디를 꿈틀대며 더듬이도 없건만 제 머리 쪽을 향해 창고 흙바닥 위를 돌진해 갔다. 등줄기를 불쑥 올렸다 내렸다 얼마나 씩씩하게 가는지 칭찬해 줄 만한 도전이었다.
"용감한 탈출이구나. 어디로 왜 가는 거지?"
까던 콩을 아예 멈추고 벌레 기어가는 대로 내 눈도 마음도 열심히 따라가며 물었다.
'나는 살아야 해요. 살 곳을 찾아갑니다.'
"그래, 장하다. 열심히 가 보거라."
그런데 얼마 동안 기어가더니 움직임을 딱 그쳤다. 멈춰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 길 없지만 머리를 좌측 방향으로 높이 들었다 내렸다.
'.....?'
다시 별일 아닌 듯 힘찬 움직임으로 직진하여 기어갔다. 신이 준 생의 본능대로 움직여 가겠지만 미물 벌레에게도 강인한 정신력과 IQ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 직진해 간 녀석 앞에 큰 조개 껍데기만큼 움푹 파인 곳이 나타났다.
"거기 들어가면 안 되는데, 네겐 함정이야. 뒤로 돌아가!"
역시 멈칫멈칫 했다. 그러나 여기를 통과해야 삶의 목적지를 갈 수 있다는 판단을 했나보다. 더 빠르게 움씰움씰 벽면을 타고 기어 내려갔다. 하지만 다시 올라와야 되는 걸 알게 되었다. 내려갈 때보다 속도를 늦추며 올라왔다. 힘겨워 보였다. 얼마나 절망스러웠을까. 그러나 다 올라온 후에는 곧바로 힘찬 직진을 히였다.
"다시 직진해서 어디로 가려는데?"
'살 곳을 찾아가는 거 몰라요? 내 한살이를 마칠 때까지 나는 살아야 합니다.'
"그래 장하다. 열심히 가 보거라."
그런데 한참을 직진하던 길이 아무래도 뜻한 길이 아니다 싶었는지 갑자기 180° 회전을 하였다. 지금까지 온 길로 다시 되돌아 움씰움씰 가는 것이었다. 돌아가는 그 길에 아까의 함정이 있음을 알았을까. 좌측으로 방향을 바꾸어 갔다.
"힘들지? 길이 안 보이는 곳에 가자니 많이 힘들 게다."
좌측으로 한참이나 가다가 우로, 또 우로 방향을 수시로 바꿨다. 사람 신발바닥만으로도 목숨을 잃는 하찮은 미물이지만 포기하지 않고 방향 바꿔 최선을 다하여 전진하는 모습이 대단했다. 그러나 움직임의 빠르기가 아까와 달리 느린 감이 있었다. 불룩불룩 꿈틀대던 등줄기 높이가 많이 낮아졌다. 그만 쉬라고 하고 싶었다. 그러나 살아야 할 목적지에 가야만 하는지 계속 기어갔다.
"그렇지. 그래 그쪽으로만 가면 네 삶의 터 풀밭이 나온다. 그리로만 직진해라."
응원을 해 주건만 가다가 애석하게도 다시 뒤로 돌아서서 기어갔다.
"왜 또 방향을 바꿔? 그냥 가면 네가 살 자연의 집 풀숲이라니까!"
'이 넓은 광야, 어딘지는 잘 몰라요. 나는 오직 살 곳을 찾아서 가는 거예요.'
제 말대로 어딘지 모르는 채 풀밭 반대쪽으로 한참을 기었다. 그러더니 웬일인지 몸의 반 이상을 번쩍 쳐들었다. 둘레둘레 좌우를 쳐다보았다.
살 곳을 찾아가는 길의 방향을 나름대로 판단하며 모색하는 것 같았다.
"무엇이 보이니? 머릴 들어서 가야 할 방향을 찾는가야?"
'여기가 어딘지 막막하고 알 수가 없네요. 그러나 나는 살아야 합니다.'
직진하던 길을 멈추고 다시 또 우회전을 하였다. 정말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한참 기어가다가 이제 우회전 코스도 아니다 싶었는지 다시 뒤로 돌아 기어가기 시작했다. 처음 출발할 때의 힘찬 돌진력은 이제 소실 되어버린 듯 했다. 그 힘 빠진 동작을 보자니 안쓰럽기 그지없다. 지친 몸으로 여기저기 방향만 바꾸며 흙바닥을 긴들......
얘
"애야, 너 가는 목적지는 알지 못하며 수없이 길만 바꾸고 있으니 얼마나 힘드냐?"
'힘 들어도 내 살 곳만 가면 돼요. 그 길을 찾는 겁니다.'
"그래, 네 갈 길을 찾아가 보아라."
한참이나 멈췄다가 정신 차린 듯 뒤로 오던 녀석은 다시 느릿느릿 우회전을 시작하였다.
그곳은 창고 바닥에 깔아 놓은 두꺼운 비닐 장판이 있는 곳이었다. 녀석이 기어가는 대로 쫓는 내가 잔인하다고 생각되었다. 아무리 미물이라도 이대로 보기만 한다는 것은 가혹한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녀석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거기로 가면 비닐이야. 가면 안 돼! 네게는 차라리 흙바닥이 낫지! 거긴 아니라니까!"
그래도 고집을 부리면서 장판 모서리까지 기어갔다. 흙바닥에서 단단한 모서리를 무릅쓰고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장애물이라고 인식하였는지 멈칫하고 한참을 정지했다.
'살아야 해요. 장애도 뚫어야 합니다.'
다시 온 힘을 다해 장판 위로 기어오르는 것이었다. 모서리에 몸을 반 이상 걸쳤을 때다.
어? 이게 아닌데, 하는 듯 멈췄다. 그래도 잠시 후 기어코 장판 위에 올라왔다. 장애를 뚫은 기운으로 노란 비닐 바닥을 한 뼘 가량이나 힘차게 기어갔다. 그러나 배에 닿는 미끈미끈한 촉감이 제 길은 아니라고 생각했나 보다.
'이런 느낌은 전무후무한데? 아무래도 여긴 아니야.'
몸을 돌려서 회전하였다. 결국은 되돌아와 비닐 장판 모서리를 타고 흙바닥으로 다시 기어 내려왔다.
"시행착오를 너무 하는구나. 불쌍한 것아!"
이제 땅바닥으로 내려왔으나 어디로 가야 할지 종을 못 잡는 것 같았다. 몸을 반이나 힘겹게 들어올렸다가도 다시 내린 채, 방향을 잡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출발 때의 씩씩했던 돌진력은 어디로 가고 이제 지칠 대로 지쳐 탈진된 패잔병같이 되어 있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시시포스가 생각났다. 커다란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 올리다가 바위가 정상 근처에 다다르면 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또 올리고, 이러한 고역을 되풀이하는 시시포스의 헛된 수고 같았다. 그러나 시시포스의 역사와 비교해선 안 되었다. 살아야 한다는 강인한 의지와 희망, 목표가 있는 벌레다. 최선을 다해 우회전으로 기어가려고 다시 몸을 틀어 움직이며 외치는 듯했다.
'나는 살아야 해요! 내 한살이를 마쳐야 한단 말예요.'
하지만 녀석의 몸은 뜻과 같이 따라 주지 않았다. 기진한 모습을 보면서 한숨이 나오며 가슴이 저려 왔다. 길을 바꾸고 또 바꾸어가도 미로일 뿐, 무거운 몸을 쳐들고 보아도 끝이 보이지 않는 광활한 광야!
용을 써가며 헤매서 도착한 곳은 엉뚱한 비닐 장판! 그 애처로움을 이제는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지금까지만 해도 잔인한 추적이었다.
"애야, 네 힘으로는 안돼! 향방도 모르며 기고 또 기어도 광야 사막 길, 헛수고일 뿐이야."
종이 한 장을 구해 왔다. 종이 위에 올라오도록 바짝 갖다 대어 줬으나 몸을 웅크리며 거부했다. 징그럽더라도 손으로 집어올릴까 생각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내 손을 대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여겨졌다. 하는 수 없이 종이 모서리를 찢어 녀석 몸을 밀어 종이 위에 얹혔다.
종이에 올려진 녀석은 무슨 생각을 할까? 아직도 살아야 해요! 뿐일까?
풀숲으로 가서 종이를 흔들어 벌레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어디로 떨어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미안하다. 헛수고를 너무 시켰어.
너의 생을 향한 불굴투지 장했단다! 너는 친구들처럼 단숨에 죽어간 버러지가 아니었어. 벌레였어. 이제 이곳에서 힘차게 살아 번데기, 나방이 되는 한살이를 살아라."
첫댓글 변신/ 카프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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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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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론/ 허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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