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태종 이방원을 연기했던 배우 유동근. |
사람을 알아보는 눈 지인지감
그런데 이 문제를 훨씬 구체적이고도 현실적인 맥락에서 표현한 조선의 군주가 있다. 숙종(肅宗)이다. 요즘 사람들이야 숙종 하면 장희빈(張禧嬪)의 치마 폭에서 놀아난 임금 정도로 가벼이 여길지 모르나 그건 잘못된 드라마 때문이다. 실록 속의 숙종은 태종에 버금가는 강명(剛明)한 임금이다.
숙종이 당쟁을 완화할 목적으로 신하들에게 “널리 인재를 구하도록 하라”고 하면 당쟁에 물든 신하들은 늘 “지금은 인재가 부족한 때라서 그렇다”고 둘러댔다. 이때 숙종은 “우리 태조께서는 망해가던 고려에서 인재를 찾아내 새 나라 조선을 세우셨다. 인재가 없는 것이 아니라 인재를 찾아내려는 마음이 없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극적인 대비를 통해 사안의 핵심을 적출해 낸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숙종의 이 말은 그저 식견 있는 선비나 학자의 말이 아니라 몸소 임금의 자리에 있었던 주인공의 입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더욱 귀담아들을 만하다. 특히 역사에서 나라를 세우거나 건국 초기 나라를 반석 위에 올린 임금들의 인재 보는 눈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를 제시한 것이라는 점에 큰 의미가 있다 하겠다.
건국(建國)은 위대하지만 실은 그것은 큰 반역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건국이라는 성공과 반역이라는 실패를 가르는 기준은 두 가지, 하나는 대의명분이고 또 하나는 일을 성공으로 이끌 인재의 확보다. 역으로 건국에 성공했다는 것은 대의명분을 장악함과 동시에 인재 확보를 제대로 했다는 뜻이다.
중국의 한나라 유방이나 당나라 이연, 명나라 주원장과 우리의 고려 왕건이나 조선 이성계가 바로 건국 제왕이다. 이들에 대해서는 각각 그들의 지인지감을 살펴봐야 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일단 나라를 반석에 올린 당 태종 이세민과 조선 태종 이방원의 관인지법(觀人之法)을 짚어본다.
먼저 이방원이다. 조선 왕조의 탄생은 명나라에 대한 사대(事大)외교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었다. 반원(反元)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어도 ‘1년3사’라 해서 신년에는 하정사, 황제 생일을 축하하는 성절사, 그리고 황태자 생일을 축하하는 천추사를 기본으로 하는 명나라와 조선의 외교관계가 성립됐다. 그 밖에도 사은사, 주청사, 계품사 등 다양한 이름의 비정기 사행(使行)이 있었기 때문에 적어도 1년에 3회 이상 조선은 명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이에 대해 명나라는 1년에 한두 차례 명나라 사신을 보냈다.
이방원, “말과 사람을 알아보는 눈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민씨가 안장돼 있는 헌인릉(서울 강남). |
게다가 이때 사태를 어렵게 만든 것은 두 가지 더 있었다. 하나는 조선 해적이 중국 연안을 침입한 사건이고 또 하나는 조선의 요동 정벌론이었다. 뒤엉킨 명나라와 조선의 외교 문제는 다음해인 태조 3년 최연과 황영기가 각각 연이어 파견되면서 실마리가 잡히기 시작했다. 명나라는 북벌에 필요한 말 1만 필을 보낼 것, 그리고 이성계의 장남이나 차남이 조선 해적 사건의 범인을 직접 압송해 금릉으로 들어올 것 등을 요구했다.
이성계는 고민에 빠졌다. 진안공 이방우는 이미 1년 전 세상을 떠났다. 다섯째 아들인 정안공 이방원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학식을 갖춘 아들이 없었다. 게다가 이방원은 이미 6년 전인 1388년 이색을 따라서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이성계로서는 이 중차대한 순간에 목숨까지 위태로울 수 있는 일을 이방원에게 맡기기에는 크게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건국 직후 대부분의 신하가 당연하게 세자감으로 보았던 이방원을 제치고 신덕왕후 강씨의 눈물 작전에 넘어가 방석을 세자로 정한 게 불과 2년 전의 일이 아니던가? 태조 3년 6월 1일 태조는 이방원을 불러 이른다.
“명나라 황제가 지금 우리에게 어려운 요구를 하고 있다. 네가 아니면 답할 사람이 없다.”
뜻밖에 이방원은 기꺼이 수용한다.
무력으로 황제 자리를 쟁취한 영락제. |
태조는 눈물을 글썽였다고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너의 체질이 파리하고 허약한데 만 리의 먼 길을 탈 없이 갔다가 올 수 있겠는가?”
조정 신하들은 하나같이 정안공이 위험에 처할 수 있다고 만류했다. 위험은 크게 두 가지였다. 여행 도중의 위험과 명나라에 인질로 잡힐 수 있는 위험이었다. 이방원이 이끈 사신단은 금릉으로 갔고 이들은 다행스럽게도 황제를 여러 차례 직접 만나 조선에 대한 주원장의 의구심을 말끔하게 풀어주고 ‘1년3사’의 외교관계도 회복하는 외교적인 대성공을 거두고 돌아왔다.
당시 금릉에 다녀올 때 정안공 이방원은 북경에서 주원장의 아들인 연왕(燕王)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당시 연왕을 만나본 후 이방원은 함께 갔던 사람들에게 “연왕은 왕으로 있을 인물이 아니다”고 말했다. 평소에도 “말과 사람을 알아보는 눈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해 온 이방원이다. 실제로 4년 후인 1398년(태조 7년) 명태조 주원장이 사망하자 황태자는 7년 전에 죽었기 때문에 황손인 명혜제가 즉위하지만 얼마 후 연왕은 형제, 조카들과 피비린내나는 내전(內戰)을 치른 끝에 황제의 자리를 쟁취한다. 이를 중국사에서는 ‘정난(靖難)의 역(役)’이라고 부른다. 이때가 태종 2년(1402년)이다. 그가 바로 영락제 성조다. 성조는 1421년(세종 3년) 수도를 금릉에서 북경으로 옮긴다. 자금성 공사를 설계하고 기초를 다진 것도 영락제 때이며 유명한 환관 정화의 7차례에 걸친 해양 원정도 그의 주도로 이뤄졌다. 북경을 중심으로 중국의 골격을 재편한 주인공이다.
연왕의 황위 탈취 과정은 우리 역사에서 세조와 비슷하다. 그래서 수양대군이 단종 때 안평대군과 김종서 등을 숙청하고 권력을 잡았을 때 ‘정난(靖難)공신’이라고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무력을 통한 권력쟁취라는 면에서는 영락제와 태종의 관계도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권력투쟁에서 첩보전의 중요성을 잘 알고 활용했던 점에서도 공통점을 갖는다. 아마 이방원이 연왕을 알아본 것처럼 연왕도 이방원을 보면서 ‘조만간 임금이 될 사람’임을 알아차렸을지 모른다. 우연이겠지만 이방원의 봉호도 ‘난을 진압해 평안을 이룬다’는 뜻의 정안(靖安)이다. 정(靖)이라는 한자는 이 무렵 주요 역사적 사건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당나라 태종의 신언서판
시간을 훨씬 거슬러 올라가서 이번에는 이연이 세운 당나라를 반석에 올린 당태종 이세민을 만나볼 차례다. 당태종 하면 지금도 우리는 《정관정요(貞觀政要)》를 떠올리게 된다. 당나라 사관 오긍(吳兢)이 정리한 이 책은 태종이 신하들의 간언(諫言)을 얼마나 잘 받아들이며 정치를 펼쳐갔는지를 보여주는 책으로 흔히 경청(傾聽)의 리더십의 교과서라 할 만하다. 특기할 만한 점 하나는 사람을 알아보는 법을 아주 체계적으로 정리했다는 것이다.
요즘도 종종 사람을 판단할 때 쓰이는 신언서판(身言書判), 이것이 바로 당태종의 작품이다. 신언서판이란 당나라 때 관리 선발 시 사람을 보는 네 가지 기준을 말한다. 통상 몸가짐, 언변, 필적, 판단력이라 옮기는데 실은 그렇게 간단히 옮길 것이 아니다. 우선 정확히 이 말이 어디에 어떻게 실려 있는지부터 살펴보자.
《신당서(新唐書)》 권(卷) 45 지(志) 제35 선거지(選擧志)하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무릇 사람을 고르는 법[擇人之法]에는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몸[身]인데 그 얼굴과 몸매가 듬직하고 위풍당당해야 한다[體貌豊偉]. 둘째는 말[言]인데 그 말하는 바가 조리가 있고 반듯해야 한다[言辭辯正]. 셋째는 글[書]인데 글씨가 해서처럼 또박또박 정확하면서 아름다워야 한다[楷法遒美]. 넷째는 판단력[判]인데 사안의 이치에 대한 판단력이 우수하고 뛰어나야 한다.”
이런 지침을 만든 이는 사람 보는 데 누구보다 뛰어났다는 평을 받는 당태종인데 그는 특히 셋째 해법주미(楷法遒美)를 자신의 통치철학으로까지 끌어올렸다. 해법주미란, 글씨체가 또박또박한 해서의 글꼴이어야 하며 붓을 부리는 데 있어서는 굳센 힘과 아름다움이 조화되어 우러나야 한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요즘이야 모두 컴퓨터 자판으로 글을 쓰기 때문에 이를 실행에 옮기기에는 난점이 있다. 그러나 언(言)에 적용된 조리와 반듯함으로 그 글을 깊이 들여다 본다면 얼마든지 사람을 알아보는 훌륭한 실마리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신언서판에 이어지는 뒷부분을 조금 더 살펴보자.
“이 네 가지가 다 갖춰지고 나면 일단 잠정적으로 합격시킨 다음 우선적으로 다움과 행실[德行]을 살피고 이어 다움이 재능과 균형을 이루는지[德均以才]를 보며 끝으로 재능이 수고로움(혹은 실행)과 연결되는지[才均以勞]를 점검한다. 이 세 가지를 통과하면 남겨두고 통과하지 못하면 탈락시킨다.”
일단 신언서판이라는 외형적인 점검이 끝나고 나면 덕행, 재능, 실천력을 상호 연결해서 깊이 살펴봄으로써 사람을 뽑는[選擧] 기본적인 절차는 마무리된다. 사람의 안과 밖[內外]을 빈틈없이 살피는 것이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사실은 덕행, 재능, 실천력 중에서 덕행이 가장 우선시된다는 점이다.
고려 무신정권 최우의 인사 4원칙
《고려사》는 30년간 권력을 잡았던 최우를 반역열전에 소개했다. |
최우는 장장 30년 동안 최고권력의 자리를 지켰다.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겠지만 그 특유의 문신(文臣) 포섭 전략이 결정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최우는 확고한 용인(用人) 철학을 갖고 있었다. 그는 인재를 4단계로 나눴다. 첫째는 능문능리(能文能吏), 학문이나 문장에도 능하고 관리로서의 재능도 뛰어난 자다. 둘째는 문이불능리(文而不能吏), 학문이나 문장에는 능하지만 실무능력이 떨어지는 자다. 셋째는 이이불능문(吏而不能文), 실무에는 능하나 학문 혹은 문장이 뒤떨어지는 자다. 넷째는 문이구불능(文吏俱不能), 문장이나 실무 모두 능하지 못한 자다. 이를 보아도 그가 문(文)을 이(吏)보다 앞세웠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곧 무신정권이 문신을 우대함으로써 자신들의 약점을 보완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했다. 이런 원칙에 따라 이규보가 큰 우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좋은 인재 선발을 위한 인사권자의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을 단번에 무력화시키는 역사 속의 사건이 있다. 당쟁, 즉 당파에 따른 인재 천거다. 이 점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당쟁이 극에 달했던 숙종 16년(1690년) 2월 25일 대사헌(大司憲) 이현석(李玄錫)이 올린 상소는 지인지감과 당쟁의 대립구도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아! 붕당(朋黨)이 서로 원수가 돼 화(禍)가 상대를 죽이는 데까지 이르고, 승패(勝敗)가 반복돼 일이 적국(敵國) 사이와 같아졌습니다. 우리나라는 인재가 본래 드문데 또 그 사이에서 색목(色目)이 갈라져, 이들이 등용되면 저들이 물러가고, 갑이 성장하면 을이 소멸하여, 모두 시세에 따라 서로 돌아가며 끝내 모일 기대가 없으니, 지사(志士)가 개탄하는 것은 예전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끝으로 신하들 사이의 당쟁 못지않게 지인(知人)에 해악이 되는 것은 지도자가 사사로운 감정이나 호오(好惡)에 따라 사람을 쓰는 것이다. 당장은 편할지 모르나 자신이 맡은 조직은 서서히 무너져내려 그 오명(汚名)을 뒤에 가서 혼자 몽땅 덮어쓰게 된다. 필자의 사견이 아니라 오랜 역사가 이를 실증해 주고 있다.⊙
첫댓글 즐감
당 태종 이세민과 조선 태종 이방원의 관인지법(觀人之法)을
공부 잘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글,잘읽었읍니다.박근혜대통령에게도 관인의 현안과 주변인물이 있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