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은 아련한 동경이다. 낭만과 신화가 가득 쟁여져 있는 곳이다. 섬마을 선생님은 왠지 달콤한 로맨스와 깊은 사연을 지닌 주인공 일 것만 같다. 그래서 섬마을 유람에 나섰다. 섬마을 선생님들의 훈훈한 휴먼스토리와 낙도의 아름다운 풍광을 지면에 담아낼 작정이다. 서해의 백령·연평군도에서 남해 한려수도를 돌아 동해의 울릉도까지….
전남 완도 앞바다는 거대한 양식장이다. 분홍빛 테두리를 두른 격자 모양의 가두리들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져 있다. 전국 전복 생산량의 80% 가량이 이곳에서 나온다. 배는 마치 사열이라도 하듯 가두리 사이를 지난다. 어민들이 작은 배를 타고 가두리 사이를 누비며 미역과 다시마를 가두리 안으로 던져 넣고 있다. 전복은 미역과 다시마, 그리고 남쪽 바다의 쪽빛 정기를 먹으며 자란다.
배가 닻을 내린 곳은 노화도 동천항이다. 완도 화흥포를 출발한 지 1시간 만이었다. 배는 남쪽의 보길도를 들르지 않고 동쪽의 소안도로 향한다. 2008년 1월 노화도 이목항과 보길도 청별항을 잇는 620m 길이의 보길대교가 들어선 이후 대부분 여객선들은 보길도엔 들르지 않는다.
보길도 행 셔틀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농협에서 운영하는 버스다. 버스의 종점은 청별항이다. 청별항에서 택시를 불러 예송리 해수욕장에 도착했다. 해수욕장 건너편으로 500m 정도의 물길을 사이에 두고 작은 섬이 떠 있다. 면적 0.33㎢, 해안선길이 3㎞의 예작도다. 주로 톳과 전복 양식을 생업으로 하는 14가구 주민들이 보금자리를 틀고 있는 곳이다.
건너편 예작도 방파제에 묶여 있던 작은 모터보트 한 척이 택시에서 내리는 외지인을 발견하고는 냉큼 물을 건너온다. 어부와 함께 배를 타고 온 젊은 남자가 배에서 내려 인사를 한다. 보길동초등학교 예작분교의 김혁(25) 선생님이다.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순박한 시골청년의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2008년 봄 광주교대 졸업과 함께 발령을 받은 첫 학교가 바로 이곳 예작분교라고 했다.
학교는 방파제에서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학교래야 교실 두개와 그 옆에 딸린 관사 하나 뿐인 초미니 분교다. 운동장은 부잣집 정원 넓이만한 규모다. 교실로 들어갔더니 중년의 여 선생님이 반갑게 인사를 한다. 분교장인 한경애(49) 선생님이다. 후덕하고 마음씨 좋은 맏며느리 인상을 지닌 분이다.
학생은 모두 세 명뿐이다. 1학년 정시온과 3학년 정고운, 5학년인 정대운, 정다훈이다. 25년 교사 경력의 베테랑인 한 선생님이 1학년, 3학년 복식수업을 담당하고, 신참인 김 선생님은 5학년을 담임을 맡고 있다. 한 선생님이 아이들을 소개한다.
“모두 한 집안 식구들이에요. 시온이와 고운, 대운이는 한 형제자매들이고, 다훈이는 이들과 8촌간이랍니다. 대운이와 다훈이는 몇 해 전 사물놀이 솜씨로 세상을 화들짝 놀라게 한 주인공들이에요.”
아이들이 일을 낸 것은 2007년 11월 충남 공주대학교에서 ‘세계 사물놀이 겨루기 한마당’에서였다. 전국은 물론 해외에서 까지 몰려든 61개 사물놀이패들이 참가한 대회였다. 예작분교 어린이들은 이 대회에서 당당히 우수상(행자부 장관상)을 차지했다. 전교생 6명으로 꾸린 어린이 사물놀이패가 내놓으라하는 성인 사물놀이패들을 누른 것이다. 그해 6월에는 인천에서 열린 전국학생풍물경연대회에서 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송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사물놀이를 가르쳤다면, 한 선생님은 자전거와 인라인스케이트를 가르쳤다. 자전거는 본교 교장선생님에게 한 대 사달라고 졸랐고, 인라인스케이트는 지인들의 자녀들이 타던 중고 네 켤레를 얻었다. 아이들은 좁은 운동장을 빙빙 돌며 자전거를 타고, 방파제 도로 위에서 인라인스케이트를 탄다.
“이곳 아이들은 좁은 섬 안에서 갇혀 살고 있습니다. PC방은 고사하고 구멍가게조차 없는 곳이니까요. 마음껏 뛰어 놀 공간조차 없어요. 섬 아이들에게도 자전거와 인라인스케이트 타는 재미를 누려보게 하고 싶었어요. 자전거와 인라인스케이트를 통해 사회체험, 도시체험을 시키려는 뜻도 있었어요. 아이들에게 도시 이야기를 하면 눈만 껌벅껌벅 하면서 무슨 소린지 이해를 하지 못해요. 1학년 시온이는 신호등이나 횡단보도, 지하도, 육교가 무엇인지, 왜 필요한지를 몰라요. 얼마 전엔 복도라는 말을 설명해 주느라 애를 먹기도 했어요.”
첫 인상 그대로 김 선생님은 수줍음을 많이 타는 분이었다. 좀처럼 대화에 끼어들지 않는다. 이곳 생활이 어떠냐고 일부러 물었더니 그제야 조심스럽게 말문을 연다.
“처음 한 달 동안은 정말 적응하느라 힘이 들었습니다. 파도소리, 바람소리가 어찌나 큰 지 잠이 오지 않더라고요. 바람에 유리창이 덜컹덜컹 흔들리면 오싹오싹 소름이 돋고는 했습니다. 귀신이 노크하는 소리 같았거든요. 그럴때면 무릎걸음으로 벌벌 기어서 문을 잠그고는 이불을 뒤집어쓰고는 했답니다.”
김 선생님이 겪어야 했던 또 다른 고역은 식사문제였다. 한 선생님이 부임하기 전에는 제대로 음식을 만들 줄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2008년까지는 교사 세 명이 근무를 했는데 모두 젊은 남자였어요. 분교장은 제 한 해 위 선배였고, 또 다른 선생님은 제 동기였어요. 매일 카레나 라면 등 인스턴트식품으로 끼니를 해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 선생님이 부임한 이후로 식탁이 지옥에서 천국으로 바뀌더군요. 정말로 음식 솜씨가 뛰어난 분이세요. 특히 닭도리탕과 김치찌개 솜씨는 일품입니다. 마치 어머니가 아들 챙겨주시듯 잘 해주세요. 한 선생님이랑 저희 어머니랑 동갑이시더라고요.”
두 사람은 광주교대 선후배 사이다. 한 선생님이 80학번, 김 선생님은 04학번이다. 이래저래 서로 챙겨줄 수밖에 없는 사이인 셈이다. 까마득한 후배의 칭송을 듣고 있던 한 선생님이 이번엔 후배 자랑을 늘어놓는다.
“요즘 젊은이들과 다르게 상대방을 배려할 줄 압니다. 마을 어른들에 대한 예의범절 깍듯하고, 궂은일은 스스로 나서서 합니다. 화단에 수북이 쌓여있는 낙엽을 깨끗이 치우고, 하수구가 막히면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섭니다. 마음 씀씀이가 아주 예쁜 선생님이에요.”
대부분 선생님들은 하루 종일 서서 수업을 한다. 만보기를 차고 재보면 하루 2~3만보는 족히 나온다고 한다. 저녁이 되면 다리가 퉁퉁 붓고, 허리가 뻐근해지기 일쑤다. 그렇지만 학생이 서너 명 밖에 안 되는 섬마을 학교에서는 그런 걱정을 안 해도 된다. 학년이 다른 아이들을 앉혀놓고 공부를 가르치는 복식수업은 대개 선생님도 책상에 앉아서 수업을 하기 때문이다. 다른 학년의 집중력을 흩트리는 칠판 수업은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앉아서 하는 수업이 편하기만 한 걸까?
“이곳에서 수업을 시작한 지 한 달 반 쯤 지났을 때였어요. 갑자기 걸음을 걷지 못하겠는 거예요. 갑자기 다리에 힘이 빠지면서 주저앉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깜짝 놀란 나머지 광주의 큰 병원으로 가서 자기공명영상(MRI)을 찍고, 주사를 맞고 난리를 피웠지요. 갑작스럽게 운동을 하지 못해 생긴 증상이었습니다.”
탈이 난 곳은 다리뿐이 아니었다. 한 달 후인 5월 중순 목에 통증이 오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고개 숙인 자세를 유지해야 하는 복식 수업 때문에 생긴 병이었다. 다시 광주 큰 병원을 다니면서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루 종일 몇 만보씩 걸으며 종종거리던 사람이 갑자기 몇 백m도 안으니 몸의 곳곳에서 이상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수업을 끝내고 운동을 하려해도 그럴만한 공간이 없었다. 가볍게 뛸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50m 정도 되는 방파제 도로였지만, 그곳은 마을 주민들이 배를 타고 드나들거나 어구를 손질하는 장소였다. 끙끙 힘들게 일하는 주민들 앞에서 운동을 한답시고 펄쩍펄쩍 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교사들의 운동부족 뿐 아니라 아이들 발육에도 문제가 있을 거라는 데 생각이 미쳤습니다. 매일 아이들과 함께 새천년 건강체조와 국민체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쉬는 시간에는 세움대 위에 정구공을 올려놓고 스윙을 하는 티볼을 하고, 배구공을 이용한 피구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섬 아이들은 뭍의 아이들에 비해 발육상태가 부진하다. 왜소한 아이들을 바라보는 한 선생님의 마음이 편안할 리 없다. 그래서 아이들 간식을 열심히 챙긴다. 물만두와 떡볶이도 해먹이고, 각종 유제품과 과일 등을 사다 주기도 한다. 그런 덕인지 아이들의 볼에 살이 오르고, 키도 훌쩍 큰 것 같아 기분이 좋다고 했다. 이야기를 듣다보니 학교라기보다는 한 가족의 이야기를 듣는 듯하다. 예작분교는 모자지간 같은 두 선생님이 친 자식들을 가르치고 키우는 예쁜 공간이었다.
박상주 오지여행가
3백년 된 ‘감탕나무’가 지켜주는 예작도
자고로 선비들은 정쟁에서 밀리거나 스스로 염증이 나면 산수 속에 은거를 했다.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당파싸움에 지친 조선의 사대부들은 유행처럼 새로운 별천지를 찾아 숨어들었다. 최고의 풍수 전문가들을 동원해 물산이 풍부한 명당자리를 찾아 나서기도 했다. 왜구와 오랑캐 등 외부 세력은 물론 국내 반대 파당의 해코지로부터 가문을 보호할 길을 찾아 나섰던 것이다.
조선 중기 최고의 문신 중 하나이자 남인의 거두였던 고산 윤선도 역시 지긋지긋한 병란과 당파싸움으로부터 벗어나 자연 속에서 조용히 숨어살 작정을 한다. 고산이 은거지로 정한 곳은 제주도였다. 해남을 떠나 제주로 향하던 고산의 배는 심한 풍랑을 만난다. 그래서 정박을 한 곳이 보길도다. 이날 그의 꿈에 신선이 나타나 “보길도가 제주에 지지 않을 락지(樂地)이니 이곳에서 지내라”고 계시한다. 배에서 내려 섬을 둘러보니 과연 산으로 둘러싸인 안쪽으로 넉넉한 평지가 숨겨져 있고, 풍부한 계곡물이 그 옥토를 적시고 있었다. 고산이 보길도와 인연을 맺게 된 배경이다.
보길도에 정착한 고산은 계곡물이 흘러 모이는 곳에 세연정을 짓고 풍류를 즐겼으며, 세연정 맞은 편 안산 중턱의 동천석실에서는 조용히 독서와 시화, 차를 즐겼다. 선비들과 함께 시문을 읊었던 낙서재와 아들의 휴식공간으로 마련한 곡수당을 짓기도 했다.
몇 해 전 가족들과 함께 여름휴가차 왔다가 둘러봤던 곳들이었다. 다시 한 번 둘러보고 싶은 유혹을 꾹 눌러 참아야 했다. 요즘 자주 떨어지는 풍랑주의보 때문에 다른 일정을 서둘러 소화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섬으로 은거한 이들은 비단 고산뿐이 아니다. 고산보다 뒤늦게 공씨와 김씨 일가들이 보길도로 찾아들었다. 이들은 섬의 남동쪽에 외따로 떨어진 삿갓모양의 작은 섬까지 들어갔다. 천연기념물 338호인 감탕나무로 유명한 예작도다. 예송리 해변에서 500m 물길을 사이에 둔 섬이다.
감탕나무를 보기 위해 예작도의 마을 고샅을 오른다. 섬의 정상부에 형성된 평평한 땅에 마을회관과 집들이 옹기종기 들어서 있었다. 손바닥만한 섬에 워낙 큰 거목인지라 금방 감탕나무를 찾을 수 있었다. 나무는 섬의 중앙부에서 사방을 굽어보고 있었다.
수령이 300년 정도로 추정되는 이 나무는 높이 15m, 둘레 2.7m에 이른다. 나무의 웬만한 가지들은 모두 짧게 잘린 채 가지런히 다듬어져 있었다. 노환을 치유하기 위해 받은 외과수술의 흔적이다. 그래도 잘린 가지 사이로 새 가지들이 싱싱하게 돋아나고 있었다. 피부도 큰 흠집 없이 매끈해 보인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소나무 고목이 자라고 있다. 감탕나무의 신랑이다.
초기에 정착한 공씨와 김씨들은 감탕나무와 소나무 고목을 마을을 지켜주는 당나무로 모시기 시작했다. 지금도 매년 설에 전주민이 모여 할아버지 할머니 당나무에 제사를 지내면서 마을의 무사와 풍어를 기원한다.
아쉽게도 오랫동안 감탕나무를 감상할 수가 없었다. 물이 썰기(빠지기) 시작했으니 빨리 섬을 빠져 나가야 한다는 전갈이었다. 서둘러 선착장으로 달려갔더니 섬으로 들어올 때 신세를 졌던 주민 정선웅씨가 배의 시동을 걸어둔 채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 사리 때 물이 빠지면 수심이 얕아 지면서 배의 바닥이 걸립니다. 물때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하루 평균 4~5시간 정도는 배를 운항 할 수 없어요. 뻔히 지척에 바라보이는 집에 들어가지 못한 채 예송리 자갈밭에 앉아 몇 시간씩 물이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경우도 있어요.”
교통문제 때문에 골탕을 먹는 일은 도시나 섬이나 다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어디 서울은 안 그런가? 일상적으로 차가 막혀 길바닥에 버리는 시간을 생각한다면, 물때 때문에 예작도에서 겪는 불편은 아무것도 아니다. 시간만 잘 맞추면 되는 일 아닌가. 여기는 공기라도 맑기나 하지, 어휴 대도시의 그 혼탁한 공기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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