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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은 대중들에게까지 잘 알려져 있지만, 그의 형제들 김부필, 김부일, 김부의 등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마량하고 마속 중간 형제들: 그래도 우리보단 나.....)
김부일은 4형제 중의 둘째였는데, 그의 문장능력도 매우 탁월하였습니다. 송나라 황제가 두번이나 칭찬을 했다는 기록이 등장할 정도죠
"추밀원사(樞密院使) 왕하(王嘏)를 따라 송나라로 들어가 왕하를 대신해 표문을 지었는데 글이 우아하고 아름다워 황제가 두 번이나 내신(內臣)을 보내어 칭찬하였다."
- 열전 김부일 -
이랬던 인물이니 만큼 현재까지 그의 문장이 남아있습니다. "서경 용언궁 연회의 치어[西京龍堰宮大宴致語]" 가 그것이죠.
근데 이 문장에는 당대 고려 인들의 영토의식(?)을 알수 있는 재미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서경 용언궁 연회의 치어[西京龍堰宮大宴致語]
서경(西京)의 용언궁(龍堰宮)의 연회[大宴]에서 올린 치어(致語)[西京龍堰宮大宴致語]병신년(1116) 김부일(金富佾)
반경(盤庚, 주나라 왕)이 은(殷)으로 옮긴 것은 대개 장차 만세의 이익을 도모함이요, 호발(虎發)이 호경(鎬京)에 있었던 것은 한때의 기쁨을 취했을 뿐은 아니었습니다. 밝고 어진 이가 서로 모이고, 가깝고 먼 곳에서 서로 달려오기 때문이었습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성상께서는 상지(上智)의 자질을 몸에 타고 나시어 중흥(中興)의 업을 손에 쥐셨사옵니다. 임금님의 밝은 지혜[聖明]가 일어나 계승되니 삼대(三代)의 문장이 찬연하고, 다스림이 정해지고 공을 이루니 백년의 예악(禮樂)이 우뚝 섰습니다. 어찌 다만 만백성이 진실로 살아날 뿐이겠사옵니까? 화(火)·수(水)·목(木)·금(金)·토(土)·곡(穀)의 유수(惟修), 정덕(正德), 이용(利用), 후생(厚生)의 아홉 가지 공이 펼쳐짐을 노래하게 할 것입니다.[九敍惟歌] 따르는 이들은 태사(太史)의 말을 여러 차례 어기며 구부리어 서경 사람들의 바람을 좇았사오니, 이곳을 천자의 덕[龍德]의 길한 땅이라 하였으니 실로 이곳은 봉성(鳳城)의 옛 터입니다.
이에 유사(有司)에 칙명을 내리시어 새 대궐을 짓게 시키시니 비록 웅장하지 않고 아름답지 않아도 무리들이 보기에는 다함이 없사오니, 그리하여 한번 검소하고 한번 사치함은 반드시 중도에 맞는 것입니다.이미 대장(大壯)의 법도에 맞으시니 의당 사간(斯干)의 시로 낙성하소서. 비로소 좋은 때를 점치시어 행차하실 것을 전교하시고 곧 장락(長樂)을 따라 건원(乾元)에 이어하시어 여러 제후의 조회를 보시고 천령(千靈)이 하사하심을 나아가 맞이하시옵니다. 이때에 하늘은 그 덕을 살피시어 은혜로 응하시고 땅은 보배를 아끼지 아니하여 상서로운 옥을 생산하였나이다. 기자(箕子)의 풍습을 싣기에는 오늘이 적당하옵고, 요양(遼陽)의 땅이 다시 우리의 강역으로 들어옴을 보게 될 것이오니(行見遼陽之地), 실로 만고에 없는 보기 어려운 일인지라 마땅히 사람들과 더불어 즐겨야 할 것이옵니다........
동인지문사륙(東人之文四六) 권 8 낙어(樂語)
출처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동인지문사륙에 김부일이 1116년 고려국왕 예종에게 "요양(遼陽)의 땅이 다시 우리의 강역으로 들어옴을 보게 될 것이오니(行見遼陽之地)" 라고 했던 기록이 남아있습니다.(참고로 동문선에도 있습니다. 다만 연도기록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요양이야 당연히 요동에 있는 그 요양이 맞겠죠. 그리고 요양 앞에 "行見"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 글자는 좀 더 자세히 파고 들어가면 "장차 ---하게 될 것을 볼 것이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장차 우리 고려가 요양의 땅이(우리강역으로 들어오게 됨을) 볼 것이다"고 되는 것이죠.
근데 대체 왜? 김부일이 이런 이야기를 했을까요? 윤관의 9성도 큰 피해를 입고 철수한 뒤에, 고려가 다시 대대적으로 일으켜 북벌을 계획했던 일도 없었는데 말이죠.
우선 이 글의 제목에서도 알다시피 이 글은 "서경(西京)의 용언궁(龍堰宮)의 연회[大宴]"에서 올린 치어입니다.
그리고 중간에 "새 대궐을 짓게 시키시니 비록 웅장하지 않고 아름답지 않아도 무리들이 보기에는 다함이 없사오니"라고 되어 있는 것을 통해서, 서경에 새 궁궐을 지은 뒤에 이 이야기를 했음을 알 수 있고요. 즉 1116년에 서경에 용언궁이라는 새로운 궁궐이 지어졌고, 예종과 김부일을 포함한 신하들이 서경에 갔고, 그 연회석상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는 것이죠.
이러한 상황은 "고려사"와 "고려사 절요"를 통해서 교차 검증이 가능합니다.
우선 용언궁이 언제 지어지기 시작했는지부터 검증해 보도록 하죠.
내인(內人) 정극공(鄭克恭)에게 명하여 사천소감(司天少監) 최자현(崔資顯), 태사령(太史令) 음덕전(陰德全)·오지로(吳知老), 주부동정(注簿同正) 김위제(金謂磾) 등과 더불어 서경(西京)에 가서 용언(龍堰)의 옛 터를 살펴보게 하였다.
고려사절요 권7 예종1년 9월
평장사(平章事) 최홍사(崔弘嗣) 등이 아뢰기를, “태사(太史)가 말하기를, ‘송악(松岳)을 도성으로 삼은 지 이제 200여 년이 되었습니다. 기업(基業)을 연장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서경(西京)의 용언(龍堰) 옛 터를 선택하여 따로 새로운 궁궐을 창건하고 옮겨가서 조회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오연총(吳延寵)이 다시 아뢰어 말하기를, “최홍사 등이 아뢴 용언에 궁을 짓는 것은 3가지의 불가(不可)함이 있습니다.....왕이 끝내 최홍사 등이 말한 바를 따르니, 당시 의론이 이를 애석하게 여겼다.
고려사절요 권7 예종2년 9월
고려사 절요를 통해서 10년전인 1106년에 서경에 용언이라는 터에 궁궐을 짓게 할 수 있는지를 살펴 보았고 그 1년후에 오연총이 반대를 했으나, 예종은 궁궐 공사를 강행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김부일의 기록을 통해서 1116년 시점에는 완공되어 연회를 열었음도 확인 할 수 있죠.
자 그렇다면 예종과 김부일은 진짜 1116년에 서경에 갔을까요?
3월 을묘
왕이 서경(西京 : 지금의 평양특별시)에 행차하면서 이위(李瑋)와 김연(金緣)을 판행종사(判行從事)로, 이자겸(李資謙)과 조중장(趙仲璋)을 판유수사(判留守事)로 각각 임명했다....
4월
갑자일. 서경(西京 : 지금의 평양특별시)에 도착하자 대동강에 띄워놓은 배 위에서 술자리를 베풀었는데, 어가(御駕)를 호종한 종친·재추·시신 및 서경유수와 분사(分司)16)의 3품 이상 관리들이 참석했다. 마침 일기가 맑고 화창한지라 왕이 기뻐하며 시신들과 시를 주고받았다.
신묘일 왕이 개경으로 돌아와서 사면령을 내렸는데, 그 교시는 이러하다. “군주는 순수(巡狩)의 의례를 통해 지방을 시찰하고 교화를 수립하는 법이다[省方設敎]. 짐이 외람되게 왕업을 계승해 이제 전해온 큰 업적을 부흥시키고자 태사(太史)의 건의에 부응해 선왕께서 순수하시던 것을 본받아, 옛 도읍[舊都 : 서경]으로 가서 새 궁궐을 완공했다. 짐의 행차에 따른 많은 폐해를 줄이려고 했지만 소란스러움이 어찌 없었겠는가? 이에 큰 은택을 널리 베풀어 온 나라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하고자 한다.
- 고려사 권14, 예종11년 -
예종 11년(1116) 3월에 서경에 갔다가 4월에는 개경으로 돌아왔음을 확인 가능합니다. 그리고 4월의 "옛 도읍[舊都 : 서경]으로 가서 새 궁궐을 완공"이 용언궁임도 확인 할 수 있겠죠.
그렇다면 1116년 3월과 4월사이에 예종과 신하들이 용언궁에 가서 연회를 열었고, 그 때 김부일이 예종에게 위의 "장차 우리 고려가 요양의 땅이(우리강역으로 들어오게 됨을) 볼 것이다"라는 발언을 한 거죠.
자 그렇다면 왜 저런 발언이 나왔을까?
우선 한가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건, 고려는 "고구려의 후예" 임을 대내외적으로 천명한 국가이고, 그에 따라 요양은 되찾아야 할 "고토" 였습니다. 이러한 고려인들의 사고방식은 멀리 갈 것도 없이 그 유명한 서희의 발언에서 나타나죠?
우리나라가 바로 고구려의 옛 땅이니, 그 때문에 국호를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한 것이다. 국경 문제를 두고 말한다면, 요나라의 동경(東京)도 모조리 우리 땅에 있어야 하는데.....
고려사 권94 서희
자 그렇다면, 저 고려인들의 고토회복 의식이 1116년까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렇다면 궁궐도 새로 잘 지었으니까 그냥 술자리에서 김부일이 예종 비위맞추느라고 "곧 우리가 요양을 차지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식의 영업용 멘트를 날린 것일까요?
술취해서 "진군가" 마냥 "요~~양 까지라도 밀고 나가자~"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일까?
저 자리가 술자리이기는 해도 엄연히 국왕과 신하들의 연회석상이고 신하 즉 정치가의 발언은 기본적으로 당시 정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죠.
저 시점에는 고려 북방의 상황이 매우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바로 여진(금나라)의 흥기였죠.
동북9성의 반환이후 1114년에 아골타를 중심으로한 여진이 일어나 후에 요나라를 멸망시켰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죠? 이때까 요나라가 한창 여진에게 격퇴당하고 있으며, 이러한 소식이 고려에도 전해졌던 시점입니다. 더구나 서경으로 가기 직전 3월에는 고영창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도 전달 된 시점이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당시까지 고려의 최대 숙원이었던 "보주성 탈환"도 이루어 질 수도 있을 것 같은 상황도 전해져 왔습니다.
3월
초하루 을미일(개경에서 서경으로 출발하기 전)
왕이, 요나라 내원성(來遠城 : 지금의 압록강 검동도)와 파주성(把州城 : 포주(抱州)라고도 함 ; 지금의 평안북도 의주군. 보주)이 여진의 공격을 받아 성 안에 식량이 바닥났다는 보고를 듣자 도병마녹사(都兵馬錄事) 소억(邵億)을 보내 쌀 1천 석(石)을 보냈지만, 내원성의 통군(統軍)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4월 무인일(서경에서 개경으로 돌아가기 전)
요나라의 내원성(來遠城 : 지금의 압록강 검동도)과 포주(抱州 : 지금의 평안북도 의주군 지역)의 유민들이 양과 말 수백 필을 몰고 투항해 왔다.
- 고려사 권14, 예종11년 -
여-요 전쟁이후 압록강 남쪽에 남아있던 요나라의 보주성은 그야 말로 고려의 "앓던 이" 였습니다. 그랬던 땅이 지금 요-금 전쟁으로 인해 잘하면 확보할 수도 있을 것 같은 상황이 연출되었던 것이죠.
즉 "요금 전쟁에서 요나라가 밀리고 있으며, 고영창의 반란까지 일어난 상황"과 "고려의 최대숙원이었던 보주성도 잘하면 탈환 할 수 있을 것 같은 상황"이 고려에 전해 진 뒤 시점에 "고구려의 옛 도읍인 서경의 새로 지어진 궁궐에서 연회를 벌이는 중"에 과연 예종과 신하들이 어떤 감정들을 느꼈을까요? 그 상황에서 김부일의 "장차 우리 고려가 요양의 땅이(우리강역으로 들어오게 됨을) 볼 것이오니"와 같은 발언이 나온 것이죠.
뭐 물론 고려는 자신의 처지와 한계를 철저히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몇 년뒤 압록강 안쪽의 보주성을 확보하고서 더이상 욕심을 내지는 않았죠. 묘청 일파때문에 한순간 "위험" 하기도 했었는데, 그랬었다가는 아마 저 발언은 "점심은 평양 저녁은 신의주"취급 받았겠지요. 그랬었다면 그 결과는 뭐 아시다시피....
김부일의 "서경 용언궁 연회의 치어[西京龍堰宮大宴致語]" 는 고려 북방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고려인들의 고토회복인식이 어땠는가를 알려주는 중요한 사료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첫댓글 고려(왕건)가 삼한일통이라는 이념 뿐만 아니라 고려(고구려) 계승의식도 확고하게 있었다는 증거죠
그리고 계승의식은 조선으로까지 이어져서 현대의 우리에게도 이어져 오고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봅니다.
민족 자체가 근대의 탄생물이라면, 소위 "계승의식" 또한 그러하지 않을까?
유득공이 정말 발해의 영토가 탐나서 발해고를 지었을까?
잘 읽었습니다. 재밌는 역사인데 미처 몰랐네요.
고려인들의 고토회복의식을 알고 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