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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化遺産踏査(7); 國立古宮博物館 常設展示(6)
(225) 大韓帝國皇室 生活空間
宮闕 內 近代施設의 導入
西洋文物이 수용되면서 궁궐은 전통적인 모습과 함께 西洋式이 결합된 형태로 변모하였다.
특히 궁궐 내에 근대시설의 도입은 궁궐의 생활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高宗 24년(1887) 景福宮 乾淸宮에 최초의 電燈이 켜지면서 電氣施設이 궁궐에 도입되었으며,
침대와 의자가 배치되고 샹들리에와 커튼 박스 등의 시설을 설치하였다.
궁궐에 水道施設이 설치된 다음에는 서양식 요리를 만드는 西洋式 廚房에 수도를 연결하고,
실내에 水洗式 化粧室도 설치하였다. (*廚: 부엌 주)
(226) 유리전등갓[琉璃燈] -20세기 초 (*琉: 유리 유 *璃: 유리 리)
궁궐 殿閣의 天障에 설치했던 電燈器具의 유리 갓으로, 상부 중앙에는 연꽃봉오리 꼭지가
부착되어 있으며, 가운데가 볼록한 타원형으로 등갓의 가운데는 3개의 오얏꽃을
장식하였다.
당시 전등을 사용했던 皇室의 생활모습을 살필 수 있다.
(227) 대리석책상[大理石冊床]
상단을 백색 대리석으로 만든 책상으로, 손잡이가 있는 두 개의 서랍이 달려있다.
*궁궐의 家具들은 대부분 유럽과 美國으로부터 들여온 것으로 王의 處所에는 값비싼
西歐風의 家具들이 갖추어져 있었다.
그리고 王이 主宰하는 宴會를 열기 위해 궁궐에는 서구풍의 食卓과 주방설비도
갖추어져 있었다. –길모어 <서울풍물지> -
(228) 탁자[卓子]
프랑스 바로크式 탁자로, 4개의 다리는 하단에서 중앙으로 연결되었다.
전체적으로 화려한 彫刻으로 장식했으며 상단 각 귀퉁이에는 꽃무늬를 그렸다.
(229) 서랍식 책상[冊床]
피아노를 聯想시키는 로코코 樣式의 서랍식 책상이다.
책상에는 18세기 英國의 肖像畵家 토마스 게인버러(Thomas Gainsborough)의 초상화를
포함한 여러 人物畵가 그려 있다,
13개의 서랍이 달려있어 수납공간이 다양하며, 다리에는 바퀴가 달려있어 쉽게 하는
이동할 수 있어, 裝飾性과 實用性을 겸비하였다.
(230) 近代期 皇室 宮闕內部 모습
황금색 안락의자(왼쪽부터)—장식안락의자-대리석 탁자-장식안락의자-
(뒤) 오얏꽃무늬 자수병풍
大韓帝國期를 전후하여 궁궐 내부는 프랑스, 영국, 중국, 일본 등에서 수입한 의자, 탁자,
커튼, 카펫 등 家具와 장식용품으로 꾸미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가구 등 대부분의 생활용품은 大韓帝國 皇室의 상징인 오얏꽃 무늬로 장식하였다.
또한 샹들리에와 같은 電氣用品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德壽宮, 昌德宮의 생활공간은
점차 西洋式으로 변모하였다.
(231) 大韓帝國 象徵紋樣
오얏꽃[李花](왼쪽부터)-태극[太極]-무궁화[槿花]-매[鷹]
大韓帝國 時期에 주로 사용한 象徵紋樣은 太極, 오얏꽃[李花], 무궁화[槿花], 매[鷹] 등
네 가지이다.
국가상징은 開港 이후 국제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외국과의 교류가 빈번한 상황에서
국가의 正體性을 드러내는 象徵物이 필요해지면서 제정되었다.
국가의 상징은 皇室을 중심으로 民家에서도 널리 사용되고, 의복∙공예품∙國旗 등을 통하여
사회 전반에 보급되어 大韓帝國을 對內外에 인식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여러 가지 近代的인 制度와 함께 활용되어 대한제국이 近代國家로 나아가고자 했던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232) 皇室에서 사용한 여러 가지 生活用品
(233) 오얏꽃이 장식된 침 뱉는 그릇[白磁 李花紋 唾具](왼쪽부터)-오얏꽃무늬 은제 담배합
[銀煙草盒]-오얏꽃무늬 은제 담배합[李花文 煙草盒]-오얏꽃무늬 칠보합과 분합
[李花紋 七寶盒∙盆盒]-봉황장식 은제 서랍장식품[銀製 鳳凰裝飾 盒]
=오얏꽃이 장식된 침 뱉는 그릇[白磁 李花紋 唾具] (*唾: 침 타)
白磁로 만든 침 뱉는 그릇으로 중앙에 오얏꽃 무늬가 있다.
입 부분에는 닦을 때 분리할 수 있게 깔때기를 설치했다.
=오얏꽃무늬 은제 담배합[銀煙草盒] -20세기 초 (*盒: 합 합)
담배를 넣는 銀製 합으로 몸체와 뚜껑으로 구성되었다.
바닥에는 ‘小林製’, ‘純銀’이라는 글자를 새기고, 뚜껑 뒷면에는 金으로 도금된
오얏꽃무늬를 장식하였다.
=오얏꽃무늬 은제 담배합[李花文 煙草盒] -20세기 초
휴대용 담배상자로 상자와 保護 천, 外函에 모두 오얏꽃무늬로 장식하였다.
=오얏꽃무늬 칠보합과 분합[李花紋 七寶盒∙盆盒] -20세기 초
소형 은제 합으로 뚜껑에 七寶나 金 도금으로 오얏꽃 무늬를 장식하였다,
四角의 은제 합 바닥에는 ‘小林製’, ‘純銀’이라는 글자를 새기고, 원형의 분합바닥에는
제조회사인 ‘KOBAYASHI’와 材質을 표시하는 ‘SILVER’를 새겼다.
=봉황장식 은제 서랍장식품[銀製 鳳凰裝飾 盒] -20세기 초
은제 받침대에 봉황장식을 꾸민 장식품으로, 받침대 뒷면에는 金製로 오얏
꽃무늬를 넣고, 唐草무늬를 새겼으며, 唐草紋에는 부분적으로 七로 장식해 문양을
강조하였다. 받침대에는 서랍이 있다.
=오얏꽃을 장식한 병[銀製李花文甁](뒤 왼쪽부터)
오얏꽃이 장식된 은제 병으로 실내장식에 사용하였다.
병 바닥에는 ‘純銀’, ‘小林謹製’-‘純銀’, ‘小林’-오얏꽃 장식 아래 ‘渡歐記念’이라는
銘文이 있어 유럽으로 건너간 것을 기념하여 특별 제작한 것이다.
(234) 오얏꽃을 장식한 병[銀製李花文甁] -20세기 초
오얏꽃이 장식된 은제 병으로 실내장식에 사용하였다.
병의 바닥에는 ‘純銀’, ‘小林謹製’라고 새겼다.
(235) 파도무늬 욕실용품[白磁波濤文 浴室用品](왼쪽)-오물수거통[白磁波濤文 汚物收去桶]-
침실용 변기[白磁花文便器]-제수용 물병과 대야(뒤)
=파도무늬 욕실용품[白磁波濤文 浴室用品] (*濤: 물결 도)
皇室에서 사용하던 白磁 浴室用品 셋트로 발을 씻는 浴槽, 洗手用 물병과 대야,
汚物收去桶으로 구성되었다. (*桶: 통 통)
표면에 푸른 파도무늬를 두르고 가장자리에 金色 顔料를 뿌려 장식하였다.
바닥에는 도자기제작사의 商標를 녹색으로 찍어 수입품임을 알 수 있다.
=오물수거통[白磁波濤文 汚物收去桶]
白磁 浴室用品 셋트로 寢室用 便器와 오물수거통으로 구성되었다.
=침실용 변기[白磁花文 便器]
=제수용 물병과 대야(뒤)
(236) 전선사(典膳司)를 새긴 접시(왼쪽)-철제로 만든 제과형틀[鐵製 製菓機]
=전선사(典膳司)를 새긴 접시 -1911년 이전
접시 상단에 오얏꽃과 ‘典膳司’를 새긴 둥근 백자접시이다. (*膳: 반찬 선/선물 선)
=철제로 만든 제과형틀[鐵製 製菓機]
茶菓를 만드는 형틀로 하단에 十字架 마크가 찍혀있는데 이는 英國 런던의
‘벤젠 엔 프루드’社가 19세기말~20세기초에 사용하던 마크이다.
뒤는 ‘典膳司’를 새긴 식기상자이다.
*典膳司: 高宗 32년(1895) 종래의 司饔院을 고쳐 궁중내의 음식·잔치와 그 器具를
보관하는 일을 관장하던 宮內府 산하 官署. (*饔: 아침밥 옹)
(237) 근대식 연회와 황실식기[近代宴會∙皇室食器]
접시, 높은 굽 접시, 수프/스튜 그릇, 소스 그릇, 차 주전자, 커피 주전자
開港 이후 世界各國과 條約을 체결하여 서양의 外交官들과 교류하기 위해 近代式
宮廷宴會가 도입되었다.
이에 따라 식탁 등 서양식 食堂家具와 洋食器가 유입되었으며 주로 英國과 日本의
磁器 제작사의 제품으로 오얏꽃 무늬를 장식하였다.
晩餐場에는 주로 서양식요리가 준비되고, 일부 朝鮮 料理가 포함되기도 했다.
傳統 술, 샴페인, 맥주 등의 酒類와 담배와 같은 嗜好食品도 마련하였다.
(238) 西洋式 官服裝 導入
大韓帝國 皇室은 중요한 행사에 皇帝國 格式에 맞게 전통 官服을 착용하여 전통을 근본으로
하면서도 세계적인 흐름에 발맞추어 적극적으로 서양식 服飾을 도입하였다.
서양식 官服을 본격적으로 입기 시작한 것은 高宗 32년(1895) 乙未改革 때였다.
우선 軍의 근대화에 발맞춰 武官服부터 서양식이 도입되고, 1900년에는 文官服도
서양식을 채택하였다.
서양식 관복은 신분에 따라 紋樣의 종류와 숫자에 差等을 두었다.
軍服의 標章으로는 오얏꽃[李花]을 채택하고, 文官 복장의 主 紋樣으로는 무궁화[槿花]를
채택했는데 宮內府 官員은 오얏꽃을 주 문양으로 사용하였다.
(239) 영친왕 유년기 부장예복[英親王 副將禮服]-영친왕 유년기 참위예복[英親王 參尉禮服]-
대한제국 군모[大韓帝國 軍帽]
=영친왕 유년기 부장예복[英親王 副將禮服]
英親王이 幼年期에 입었던 陸軍副將 禮服 형식의 軍服이다.
겉은 紅色의 絨으로, 안쪽은 紅色 貢緞으로 제작하였다. (*絨: 가는 베 융 *緞: 비단 단)
앞면은 오얏꽃 모양의 장식과 매듭단추를 장식하였다.
소매에 부착된 ‘人’字 모양의 금색 袖章의 숫자로 신분을 나타내는데 副將은 8줄이다.
(*袖: 소매 수)
=영친왕 유년기 참위예복[英親王 參尉禮服]
英親王이 幼年期에 입었던 陸軍步兵 參尉 禮服 형식의 軍服이다.
참위 예복은 옷섶이 깊게 겹쳐지고 단추가 두 줄인 더블 브레스트 형태이다.
소매에 부착된 ‘人’자 모양의 금색 袖章의 숫자로 신분을 나타내는데 참위는 한 줄이다.
=대한제국 군모[大韓帝國 軍帽]
大韓帝國 陸軍 副尉의 예식용 모자이다.
軍帽의 정수리부분과 정면 중앙에는 오얏꽃을 繡놓고 정면에는 깃털을 부착하여 장식했다.
(*繡: 수놓을 수)
*大韓帝國 陸軍 階級
大元帥-元帥-陸軍大將-副將-參將-正領-副領-參領-正尉-副尉-參尉-
特務正校-正校-副校-參校-上等卒-一等卒-二等卒
(240) 오얏꽃 무늬 견장[李花文 肩章](앞)-오얏꽃 무늬 식서[李花文 飾緖]
=오얏꽃 무늬 견장[李花文 肩章]
대한제국 시기 制服에 착용하던 大禮肩章이다. 금실로 織造된 판 위에
도금재질의 원형단추와 오얏꽃을 부착하였다.
뒷면에는 제복의 어깨에 부착하도록 금속고리를 달았다.
=오얏꽃 무늬 식서[李花文 飾緖] (*緖: 실마리 서)
어깨 줄[飾緖]이 달려있는 견장으로 두 갈래의 金色 매듭 줄로 되어 있으며,
한쪽 끝은 어깨에 다른 한쪽 끝은 가슴 쪽에 걸어 착용한다.
肩章은 制服이나 軍服 어깨에 다는 장식품으로 어깨끝부분에는 금색실로
수놓은 오얏꽃 무늬를 부착하였다.
(241) 훈공1등 태극장[勳功一等 太極章]
(242) 훈공7등 팔괘장[勳功七等 八卦章](왼쪽)-훈공6등 팔괘장[勳功六等 八卦章]
(243) 영친왕 망토[英親王 肩蔽](앞)-영친왕 외투[英親王 外套]
=영친왕 망토[英親王 肩蔽] (*蔽: 덮을 폐)
어깨에 걸치는 망토로 소매 없이 밑이 퍼진 짧은 옷이다.
겉은 검정색 융이고, 안감은 紅色의 무늬가 없는 비단인 貢緞이다.
(*貢: 바칠 공 *緞: 비단 단)
=영친왕 외투[英親王 外套] (*套: 씌울 투)
흑색 융단의 외투로 안감은 흑색의 무늬가 없는 비단인 공단으로
만들었다.
소매부분에는 紅色絨과 金沙線을 둘러 장식하였다. (*絨: 가는 베 융)
흑색 외투는 1907년 10월 茶褐色으로 개정되었다.
(244) 문관 칙임관 1등 대례복[文官 勅任官 一等 大禮服] -대한제국 (再現)
光武 4년(1900)에 제정된 <文官服裝規則>에 있는 文官
勅任官(正一品~從二品의 관료) 一等의 大禮服이다. (*勅: 칙서 칙)
대례복은 대한제국 때 문관들이 皇帝가 참석하는 공식 국가행사와
外交行事, 궁중 연회 때 입었던 제복이다.
대례복 上衣의 문양은 大韓帝國 상징문양의 하나인 무궁화를 수놓았다.
같은 칙임관이라도 직위에 따라 무궁화의 數가 다르며, 칙임관 1등은
상의 전면에 완전한 무궁화 6송이와 절반형태의 무궁화 6송이를
수놓았으며, 후면에도 무궁화를 수 놓아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양 소매의 안팎에도 모두 한 송이씩 무궁화를 수놓았다.
(245) 훈공2등 팔괘장[勳功二等 八卦章](왼쪽)-훈공3등 팔괘장[勳功三等 八卦章]
(246) 훈공2등 태극장[勳功二等 太極章](왼쪽)-훈공3등 태극장[勳功三等 太極章]
(247) 훈공1등 태극대수정장[勳功一等 太極大綬正章] (*綬: 끈 수)
勳功一等의 太極章으로 어깨에서 허리에 걸쳐 드리우는 綬가 달려있다.
태극장은 光武 4년(1900) 4월 勅令 제13호 <勳章條例>를 반포하면서
제정하였으며, 文武官 중에서 功이 뛰어난 사람에게 勳一等부터
勳八等까지 구분하여 수여했다.
(248) 서성대훈장[瑞星大勳章]
瑞星大勳章은 光武 6년(1902) 8월에 제정한 훈장으로 勳等은 等級이 없는 大勳位에
해당되며, 皇族 출신의 文武官 중에서 李花大勳章을 받은 者에게 특별한 功이 있을 때
수여했다.
정식 훈장인 正章은 어깨에서 허리에 거쳐 드리우는 보라색 바탕의 큰 綬에 달려있다.
大綬 아래쪽에는 오얏꽃 모양으로 접어 부착하였다. (*綬: 끈 수)
大綬正章 외에도 가슴에 다는 副章, 禮服의 옷깃 단추 구멍에 걸어서 다는 約綬 등으로
구성되었다.
(249) 태극장[太極章]
太極章은 光武 4년(1900) 4월 勅令 제13호 <勳章條例>를 반포하면서 제정한 훈장으로
명칭은 國旗에 그려있는 ‘太極’에서 따왔다.
文武官 중에서 功이 뛰어난 사람에게 勳一等부터 勳八等까지 구분∙수여했다.
(250) 英親王-純宗-高宗-純貞孝皇后-德惠翁主 사진(왼쪽부터) -1918년
당시 日本에 억류되어있던 英親王이 일시 귀국했던 1918년에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
(251) 영친왕비 매화그림[英親王妃 梅花圖] -20세기
(252) 붓걸이[筆架] -20세기
(253) 연적[硯滴](왼쪽)-각진 주전자[角形 酒煎子] -20세기
(254) 陸軍大將服을 입은 純宗 -1909년경
(255) 純貞孝皇后 -1907년경
*純貞孝皇后(1894~1966)
純宗의 妃, 海平 尹氏 海豊府院君 尹澤榮의 딸로, 光武 10년(1906) 13세에 東宮繼妃로
책봉되고, 이듬해 純宗이 즉위하자 皇后가 되었다.
1910년 國權이 被奪될 때 御前會議의 진행을 병풍 뒤에 숨어 엿듣고 있다가, 親日派들이
純宗에게 合邦條約에 날인할 것을 강요하자 玉璽(國璽)를 치마 속에 감추고 내놓지
않았으나 伯父 尹德榮에게 강제로 빼앗겼다.
국권피탈 후 李王妃殿下로 降等되고, 1926년 純宗이 後嗣 없이 昇遐 後 佛敎에 歸依하여
‘大地月’이라는 法名을 받았다.
樂善齋에서 病死하여, 南楊州 金谷洞 裕陵(사적 207호)에 純宗과 合葬되었다.
(256) 禮服을 입은 英親王 -1907년
*英親王(1897~1970.5.1) -호; 明暉 -본명; 李垠 (*暉: 빛 휘)
高宗의 일곱째 아들이며 모친은 純獻皇貴妃 嚴氏이다.
1900년 英親王이라는 封號를 받았으며, 1907년 異腹兄 純宗이 자식이 없는 상태에서
皇位에 올랐을 때 형인 義親王을 제치고 皇太子가 되었다.
1910년 國權被奪로 純宗이 ‘李王’이 된 뒤에는 ‘李王世子’가 되었다가 1926년 순종이
승하 후에는 제2대 李王으로 즉위하였다.
日帝에 의해 1911년 일본의 陸軍幼年學校에 입학, 1915년 일본 陸軍士官學校에 入校,
1917년 졸업하였으며 1920년 日帝가 政略的으로 皇族인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 方子, 한국이름 李方子)와 결혼시켰다.
일본 육군장교로 복무하여 1940년 陸軍中將이 되었으며, 日本이 敗戰 後 1947년
李王의 지위를 상실하고, 그 해 10월 일본 皇族의 명단에서도 제외되어 일본 國籍도
잃었다.
영친왕은 日帝에 順應하였다고 歸國하지 못하고 1957년 일본 국적을 취득, 미국으로
移民을 추진하다가 1959년 腦硬塞으로 쓰러진 뒤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다.
1962년 12월 韓國政府가 英親王 夫婦의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시켜 1963년 11월 病勢가
악화된 상태에서 歸國하여 鬪病하다가 1970.05.01 사망하여 경기 南楊州市 金谷洞
高宗의 洪裕陵 인근 英園에 안장되었다.
*親王: 본래 황제가 貴妃나 後宮 사이에서 낳은 아들에게 붙이는 呼稱으로 義親王과
英親王은 高宗이 직접 封號를 정했다.
展示室 관람을 마치고
(257) 國立古宮博物館 南側面 모습
(258) 光化門. 景福宮은 每週 화요일이 休務로 문이 굳게 잠겼다.
(259) 광화문에 있는 해태상
(260) 광화문에서 본 北岳山
(261) 광화문에서 본 仁王山
午餐 후 전철 3호선 안국역으로 가는 길에…
(265) 제용감 터[濟用監趾] 표석
*濟用監
조선시대 모시[苧]∙麻布∙皮物∙人蔘 등의 進上과, 賜與(나라나 관청에서 금품을 내려 줌)되는
의복∙沙羅∙綾緞에 관한 일과 교환수단으로 통용한 布貨의 관리 등을 맡아본 관청이다.
太祖 1년(1392) 설치한 濟用庫를 太宗 9년(1409) 濟用監으로 이름으로 고쳤으며,
高宗 31년(1894) 甲午改革 때 폐지했다가 光武 8년(1904) 濟用司로 고쳤으나,
1905년에 다시 폐지되었다.
(266) [평화의 少女像(平和碑)] -駐韓 日本大使館 앞 -2011년 건립
-김운성, 김서경 夫婦彫刻家 작
*平和의 少女像(平和碑)은 日本軍 慰安婦 문제 해결을 위한 水曜集會 1,000회를 맞은
2011년 12월 14일 韓國挺身隊問題對策協議會(挺對協)이 중심이 된 市民募金으로 서울
鍾路區 駐韓 日本大使館 앞에 日本軍 慰安婦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의미에서 세운
동상으로, 작년 말 기준 국내에 65점, 해외에 12점의 少女像이 있다. (*挺: 빼어날 정)
소녀상은 높이 130cm로, 치마저고리를 입고 짧은 단발머리의 少女가 의자에 앉은 채 일
본대사관을 응시하고 있는 모습으로, 慰安婦 피해 할머니들이 일본군에 끌려갔던
14~16세 때를 재현한 것이다.
少女像의 옆에는 빈 의자 하나가 놓여 있는데, 이는 할머니들의 고통에 共感해 보라는
뜻을 담고 있다.
(267) [일획(一劃)을 긋다] -윤영석 작 -安國洞사거리 仁寺洞길 입구
(268) 충훈부터[忠勳府趾] 표석 -안국역 6번춝구 부근
*忠勳府
조선시대에 나라에 공을 세운 功臣이나 그 자손을 대우하기 위해 설치했던 관청이다.
개국 초에는 功臣都監∙忠勳司 등으로 부르다가 世祖 때 忠勳府로 고쳤으며, 1894년
記功局으로 개편하여 議政府에 소속시켰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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