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방송대인의 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깜시
세계 정치와 경제
예하자료 받아서 워드치느라 고생한만큼 학우님들께도 많은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파일참고 하세요~
세계 정치와 경제
제 1 장 국가 중심적 페러다임 : 중상주의와 신중상주의
문제: 국가중심적 페러다임의 기준과 발전과정을 기원과 발전과정을 고전적 중상주의,
경제민족주의, 그리고 신중상주의를 들어 설명하시오.
15세기 유럽에서 국가형성이라는 과제는 민족국가의 안보문제를 최우선적 목표로
만들었는데, 그 이유는 무방비인 체로 번영과 평화를 성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 형성된 근대민족국가는 국가안보와 군사력의 우월성을 가장 중요시 하였다.
고전적 중상주의의 특징은
1) 수출증진과 수입제한을 통해 금 , 은화의 축적을 도모하는 것,
2) 국고제정을 충실히 하여 군비강화를 꾀하는 것,
3) 군사력의 모체가 될 공업을 육성하는 것이다.
국가중심적 페러다임인 중상주의는 정치경제적 변화와 함께 18세기 이후 경제민족주의의
형태를 띠고 나타났는데, 이는 부와 권력의 관계가 독립적인 정치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독립적인 경제력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고전적 중상주의를 직접적으로 계승한 것이었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브레턴우즈체제를 중심으로 한 자유무역질서와 시장개방이 경제적
독립과 국가 안보에 대란 걱정으로붕터 모든 국가들을 해방시킨 것은 아니었다.
이시기에도 각 민족국가들은 '상대적 이득'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자국의 경제안보를 보장하는
방법들, 즉 소위 '이웃나라 거지만들기'로 불리는 각종 관세 및 비관세 정책 등의 신중상주의
전략을 활용하였다.
세계화라는 전지구적 변화 속에서 국가주의자들은 세계화의 추세에 대해 세계화가
민족국가의 주권에 잠재적이며 근본적인 안보위협을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들은 세계화로 국가의 영역의 점점 축소되어 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국가가
국민의 복지를 증진시키고,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국가를 방어하며, 국가의 가치와
생활방식을 보호해야 하는 일차적 책임을 지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렇듯 국가중심적 페러다임 혹은 중상주의의 요체는 부국강병을 통한 국가안보의
확립이였다. 즉, 중상주의는 국가안보와 독립을 유지하고 보호하기 위해 부와 권력을
축적하고자 하는 모든 민족국가의 기본적 욕구를 반영하는 이론적 관점인 것이다.
이는 좁세는 수출증진과 수입축소를 통해 부와 권력을 창조해 내는 국가의 노력이라고
정의될 수 있으며, 넓게는 국가의 사회문화적 응집력을 약화시킬 수 있는 모든 위협에
대한 안보를 국가의 주요한 역할로 간주하는 이론틀로 정의내릴 수 있다.
문제: 국가와 시장과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중상주의 페러다임과 자유주의 페러다임을 들어
국가와 시장과의 관계를 설명하시오.
국가중심적 페러다임 혹은 중상주의의 요체는 부국강병을 통한 국가안보의 확립이었다.
즉, 중상주의는 국가 안보와 독립을 유지하고 보호하기 위해 부와 권력을 축적하고자 하는
모든 민족국가의 기본적 욕구를 반영하는 이론적 관점인 것이다. 이는 좁게는 수출증진과
수입축소를 통해 부와 권력을 창조해 내는 국가의 노력이라고 정의될 수 있으며,
넓게는 국가의 사회문화적 응집력을 약화시킬 수 있는 모든 위협에 대한 안보를 국가의
주요한 역할로 간주하는 이론틀로 정의내릴 수 있다.
중상주의로 표현되는 국가주의가 부와 권력의 추구에서 국가의 적극적인 역할을 강조한데
반해, 자유주의로 표현되는 시장중심적 페러다임은 시장과 개인의 삶에 대한 국가의 과도한
개입에 비판적이다. 즉, 개인적 자유와 옹호와 국가권위의 남용에 대한 두 가지 사고가
자유주의의 근본적 가치였던 것이다. 따라서 시장중심적 페러다임은 경제활동의 영역,
즉 자본과 노동에 대한 통제권이 국가가 아니라 기업에게 주어질 때 최상의 사회를 이룰 수 있다는
신념체계를 지니고 있다. 즉, 정부의 통제가 없는 시장만이 자원의 최적배분을 이루어낼 수 있고,
이 때 국가의 부가 가장 크게 증진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유방임주의로 표방되는 고전적 자유주의의 최대의 적은 바로 중상주의의 국가였다.
제 2 장 시장중심적 페러다임 : 자유주의에서 신자유주의로
문제: 세계의 정치경제에 대한 자유주의적 페러다임의 역사적 전개를 설명하시오.
중상주의로 표현되는 국가주의가 부와 권력의 추구에서 국가의 적극적인 역할을 강조한테 반해,
자유주의로 표현되는 시장중심적 페러다임은 시장과 개인의 삶에 대한 국가의 과도한 개입에
비판적이다. 즉, 개인적 자유와 옹호와 국가권위의 남용에 대한 두 가지 사고가 자유주의의 근본적
가치였던 것이다. 따라서 시장중심적 페러다임은 경제활돌의 영역, 즉 정부의 통제가 없는 시장만이
자원의 최적배분을 이루어낼 수 있고, 이 때 국가의 부가 가장 크게 증진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유방임주의로 표방되는 고전적 자유주의의 최대의 적은 바로 중상주의 국가였다.
그러나 밀은 자유주의의 지도원칙인 자유방임이 여전히 유효한 것이지만, 국가 또한 시장을 보완하는
제한적이고 선택적인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고 보았다. 즉,그는 부의 생산에 관한 한 자유방임의 법칙은
진리로 받아들일 수 있으나, 자유방임의 생산이 가져오는 분배에 있어서 사회적 병폐를 발생시킬 수
있는 영역 (예: 어린이 교육, 빈민구제등)에서 국가의 개입은 피할 수 없다고 보았다.
밀이 시장에 있어서 국가의 제한적 역할을 옹호했다면, 케인스는 시장을 보다 좁은 영역에
국한시키고 더 많은 건설적인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시장과 국가를 결합시켰다.
그는 1930년대 세계대공황의 원인을 유효수효의 부족에 기인한 것이라고 보았으며, 이러한 유효수효
부족의 문제는 국가가 완전고용을 목표로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줌으로써 노동자들의 소득을
증대시키고, 이것이 다시 소비의 증가를 가져올때 해결될 수 있다고 처방했다.
그러나 1970년대 전세계에 만연된 높은 실업률, 물가상승, 그리고 경기후퇴라는 악조건은 경제내
국가개입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케인스주의를 불신하게 만들었고, 이처럼 국가개입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자 하이에크와 프리드먼은 국가를 다시 고전적 자유주의 국가로 되돌려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이에크와 프리드먼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는 1980년대 미국과 영국에서 소위 레어거노믹스와
대처리즘과 같은 신자유주의정책으로 나타났고, 이들은 구체적으로 각종 산업에 대한 규제완화,
국영기업의 민영화, 각종 산업보조금 그리고 복지정책의 축소 내지 폐지라는 보수적인 혁명의 특징을
보였다.
문제: 국가와 시장과의 관계에 대한 자유주의 (시장중심적) 페러다임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설명하시오.
1)애덤 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도 중심의 초기 고전적 자유주의에서 국가와 시장과의 관계,
2) 존스튜어트 밀의 자유주의에서 국가와 시장과의 관계,
3) 존 케인스는 고전적 자유주의의 국가와 시장과의 관계에 어떤 수정을 가했는가,
4) 신자유주의에서 -하이에크와 프리드먼- 국가와 시장과의 관계는? (핵심문제)
애덤 스미스를 비롯한 자유주의자들은 자유로운 국제시장에 대한 국가의 규제에 일반적으로 반대한다.
중상주의자들이 부의 집중과 권력 추출의 도구로 보았던 관세정책에 대해 스미스는 관세정책으로 국내산업을 보호,
육성한다면 지금까지 외국에서 수입하던 상품도 국내에서 생산이 가능하겠지만, 입지조건이나 국제분업의 이익등을
고려할 때 가격이 비쌀 수밖에 없고, 따라서 그러한 정책이 과연 현명한 것인가라고 반문한다.
리카도는 비교우위에 입각한 자유무역은 국가를 효율적으로 만들며, 효율성이야 말로 결국 국가의 부를 증진시키는
것으로 보았다. 다시말해, 자유주의자들은 효울성이 자유만큼이나 높은 가치기준이라고 본 것이다. 또한 리카도는
개인의 성공적인 이윤추구는 보편적 선(good)과 직결되며 이는 곧 국가들을 연결하여 세계를 문명화된
하나의 공동체로 만들어 낼 것이라고 보았다. 자유무역이 모든 국가를 하나의 공동체로 만들어 낼 것이라는 표현은
리카도를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하다.
밀은 단순한 부의 축적보다는 도덕적, 정신적 진보를 가져오는 사회진보의 철학을 원했다. 우선그는 국가가 시장을
보완하는 제한적이고 선택적인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밀은 자본주의적 생산과 분배의 영역을
분리해서 사고하기 시작했다. 자유방임의 생산이 가져오는 사회적 병폐현상을 국가가 나서서 교정하는 역할을
국가가 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회진보를 성취하기 위해 시장실패를 교정하는 역할을 국가가 맡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주의의 케인스식 해석은 애덤 스미스의 정신에서 벗어나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 손'을 보다 좁은 영역에
국한시키며, 더 많은 건설적인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시장과 국가를 결합시킨다. 중상주의와
공산주의를 모두 거부하는 케인스는 불가피하게 자유주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케인스는 극단적
자유주의가 대표하는 시장에 대한 숭배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이러한 신념은 1930년대 대공항으로부터의 경험,
즉 보이지 않는 손이 때로는 재앙적인 결과를 가져온다는 증거로 뒷받침되었다. 케인스는 공황이 주요하게
유효수요의 부족때문에 발생한 것이라 결론을 내렸다. 일반적으로 자본가는 예상되는 상품의 수요에 대응하여
투자를 결정하며, 유효수효를 창출하여 투자하려 하지 않는다. 결국 유효수효의 창출은 국가에 맡겨져야 하고
이를 위해 국가는 완전 고용을 목표로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줌으로써 노동자들의 소득을 증대시키고,
이는 다시 소비의 증대를 가져오고, 결국 자본가의 투자를 증대시키게 되어 경제를 성장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정부의 과감한 개입으로 유효수요를 촉진시킴으로써 대공황의 어둠 속에서 빠져 나올 수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하이에크는 "노예의 길"에서 더 많은 경제안보를 제공한다는 명목으로 국가의 역할을 증대시키는 것은
위험한 길로 접어드는 첫 단계라고 주장했다. 경제안보에 대한 국가의 역할을 요구하기 시작하면,
더 많은 국가의 간섭과 개입이 뒤따르게 되고, 그 결과 개인의 자유는 사라지고 국가는 결국 독재와 전체주의로
귀결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오히려 그는 안보와 자유에 대한 유일한 길은 국가의 역할을 축소시키는 것이며
시장의 자생적 질서가 개인들에게 제공하는 기회에 의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이에크의 토대로부터 출발한 프리드먼은 "자유주의와 자유"에서 "국가에 무억을 해줄 것인가 요구하기 보다는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어보라"며 강력한 정부를 주창한 미국 케네디 대통령의 정책을 직접적으로
비판하고 나섰다. 그는 "어떻게 하면 정부를 우리가 가꾸어 온 자유를 파괴하는 프랑켄슈타인이 되지 못하게 할 수 있는가?"라고 물으면서, "역사는 자유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이 바로 권력의 집중임을 말하고 있다"며 권력은 작고 분산될수록 좋다고 주장했다.
제 3 장 구조중심적 페러다임 : 칼 마르크스와 그 후예들
문제: 세계의 정치경제에 대한 구조주의적 페러다임의 접근법에 대해 설명하시오.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주의에 기원을 둔 몇몇 이론과 개념, 즉 종속이론과 세계체제론 및 기타 급진적 사고들은
'구조가 결과를 조건짓는다.'는 점에서 공통된 특징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이들을 구조주의라는 하나의
분석틀로 묶어 볼 수 있다.
우선 구조주의적 페러다임은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이론으로부터 출발한다. 마르크스는 자유주의나 중상주의적
관점에서 자본주의를 분석하지 않고, 생산수단의 소유여부로부터 파생된 계급관계로부터 그 정치경제적 특징을
파악하려 하였다. 그는 자본을 소유한 부르주아지 계급이 노동자인 프로레타리아트 계급을 착취하는 생산관계로부터
자본주의의의 깊은 사회적 균열을 보았고, 그에 기초해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권력관계에
불평등 원인을 생산수단의 소유여부, 즉 계급관계에서 찾았다.
마르크스의 계급착취의 개념을 국제관계의 틀로 확장시킨 사람은 레닌이었다. 레닌은 마르크스의 생산양식과
계급투쟁의 개념을 이용하여 생산과 금융 분야에서 선진자본주의국가들에 의한 빈곤지역과 저개발국에로의 침투라는
자본주의의 국제적 효과를 설명하는 세계정치경제의 관점을 개발했다. 그는 선진자본주의국가들이 자본주의 소멸의
세 가지 법칙을 해외식민지 획득과 같은 제국주의적 정책을 통해 모면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와 레닌이 이론은 1950년대 이후 남미의 종속이론학파에 큰 영향을 미쳤다. 프랑크, 엠마뉴엘, 그리고 아민으로
대표되는 종속이론은 제 3세계 국가들이 공통적으로 부딪히고 있는 저발전을 그 자체가 본원적인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세계체제 발전의 중심 - 주변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역사적 산물로 바라보았다.
월러슈타인의 세계체제론은 종속이론과 또 다른 구조주의의 특징을 보여준다. 그에 의하면 유럽은 16세기에 새로운
세계체제로 등장했는데, 이 체제의 결정적인 성격은 상품 생산체제이나 중심부 - 반주변부- 주변부의 국제적 분업 체제를
갖춘 자본주의 세계경제였다.
구조주의는 자유주의 혹은 중상주의가 간과하고 있는 여러문제들과 쟁점, 예를 들면 계급, 착취, 부와 권력의 분배, 종석, 자본주의의 세계적 양상 등을 다루고 있다. 또한 구조주의는 현존하는 자본주의 질서에 대한 과학적 분석의 틀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차원에서 자본주의가 생산해 내는 불평등과 착취에 대한 도리적인 비판을 행하는 토대를 제공한다.
아울러 억압받는 계급들과 가난한 개발도상국 관점에서 세계정치경제에 대한 분석을 행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접근방법이다.
문제: 종속이론과 세계체제론에 대하여 설명하시오.
1) 종속이론
종속이론은 선진자본주의의 팽창과 침투가 저개발국들의 발전을 가져오기보다 오히려 '저발전의 발전'을 초래한다고 본다.
즉,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확산으로 중심부 자본주의국가의 정치, 군사, 경제적인 힘이 주변부 지역에 침투함으로써 중심부는 발전하고 주변부는 저 발전한다는 것이다.
프랑크는 중추와 위성 관계의 작용원리를 1)자본주의의 세계적 발전은 경제잉여의 수탈하고 영유하는 세계중추와 경제는
발전하게 되지만 그 경제잉여를 수탈당하는 위성 부문의 저발을 초래한다.(경제잉여의 착취와 저발전), 2) 잉여수탈 과정에서
중추와 위성의 간격은 점차 확대된다(중추와 위성의 양극화), 3)이러한 종속형태는 끊임없이 재생산되어 결국 세계체계를
양극화 시킨다고 지적했다. 종속이론가들은 국제경제를 개혁하는데 이보다 훨씬 공격적이며 새로운 신국제경제질서를
만들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이를 종속이론가들은 세계체제를 중심 대 주변의 관계로 파악하고
이러한 관계에 대해 비판적이라는 공통분로를 가지고 있다.
2) 세계체제론
월러슈타인의 세계체제론의 중심적 논거는 유럽세계경제가 내부에 국제적 분업체계(중심부 - 주변부- 반주변부)를
형성시켰다는데 있다. 서북유럽(영국,네덜란드, 북부프랑스)은 임금노동제를 중심으로 하는 중심부 지역으로,
그리고 동유럽은 농업과 억압적 노동통제 양식에 입각한 주변부 지역으로, 그리고 스페인, 이탈리아, 프로방스,
납부프랑스 등은 양자가 혼재하는 양상을 보여 주는 반(半)주변부 지역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세계체제론의 한 가지 문제점은 세계체제만이 유일한 사회체제라고 결론지음으로써 일국의 체제 구성을 부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말해, 세계자본주의체제 구조가 모든 국가간의 정치, 사회적 관계를 규정하며, 각 개별 민족국가들은 정책이나
스스로의 길을 모색할 수 있는 자주성이 없다는 것이다.
제 4 장 안보구조
문제: 냉전체제 붕괴 이후 전개된 세계 안보구조의 전개양상을 평가해 보아라.
냉전은 미국과 소련의 이념적, 군사적 대립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 시기 국가안보개념은 국가방위(군사안보)와 유사한 의미였다. 그러나 사회주의 종주국이었던 소련의 몰락은 국제질서를 탈냉전기로 접어들게 했고, 이는 군사적 안보영역을
축소시키고 경제, 자원, 환경, 사회문제 등 비군사적 안보영역을 확대시켰다.
그러나 레이건행정부시대를 제외하면 1990년대 이후 미국의 국방비는 냉전시대 평균보다 훨씬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접근해 볼 수 있다.
1) 미국군수산업의 논리이다. 탈냉전기 세계 각자에서 벌어지는 지역분쟁은 중심부국가의 군산복합체에 의해 제공되는 전쟁물자들을 소모시켜 준다. 다시 말해, 주변주의 전쟁이 중심부의 발전과 평화를 보장해 주는 구조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세계 무기시장이 고가의 첨단장비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무기시장이 축소되었고, 이는 무기생산자들간의 치열한 경쟁을 부추기고 있다. 더욱이 미구근 자국의 군산복합체의 이익을 위해 정부차원의 세일즈외교에 적극 나서고 있다.
2) 미국이 현재 추진하고 있는 미사일방어망(MD) 계획과 관련된다. 냉전시대 레이건 행정부가 주도했던 전략방위계획(SDI)의 연장선상에 있는 MD계획은 현재 미국이 구상하고 있는 차세대 안보체제의 일환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이를 휘애 미국은 최소 600억 달러의 국방예산을 마련해 놓고 있다. MD의 주요 대상국이 중국이라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또한 미국은 동해에 이즈스함을 배치하여 북한의 미사일발사에 대비한다는 미사일방어망계획의 축소판을 발표하기도 했는데, 미국의 미사일방어망계획에 있어서 북한은 당분간 미국이 명명한 대로 '불량국가'로 남아 있어 줄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아사아에서 미국의 MD추진이 탄력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세계의 안보구조에 있어 유럽은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북대서양조약기구, 유럽방위공동체 구상,
그리고 서유럽동맹 등을 통해 지역안보협력논의를 선도해 왔으며, 아시아 지역은 아세안지역안보포럼을 통해 아시아,
태평양지역의 평화와 안보를 추구하려고 하고 있다. 이들 지역안보협력은 각 지역의 평화와 안보문제를 다자간 협의를
통해 해결하려 한다는 데 있어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문제: 냉전시대와 탈냉전시대의 안보개념에 대해서 설명하시오.
냉전기의 국가안보 개념은 국가방위와 유사한 의미로서 군사적 차원에서의 외부적 위협에 대응하는 국가적 노력을 의미했다. 그러나 탈냉전기에 들어서 국가안보 개념은 군사전략적 측면에서의 안보개념에 덧붙여서 경제,자원,환경,사회 문제 등
비군사적인 요소들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급속히 변화하고 있다. 이처럼 안보영역이 다양한 분야로 확대된 만큼 개념상의
복잡성과 모호성이 더욱 증대되었다. 물론 아직도 군사력이 국가안보정책에서 필수불가결한 핵심적 요인으로 남아 있지만, 비군사적인 요소들의 상대적인 중요성이 부각되는 한편 군사적 분야와 비군사적 분야가 밀접하게 연계되고 있어
이러한 분야를 모두 포괄하는 새로운 안보개념이 정립되어야 할 필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문제: 미국의 군사적 헤게모니와 국제관계에 대해서 설명하시오.
미사일방어망계획을 둘러싸고 새로운 중심무대로 부상하고 있는 것은 유럽이라기보다는 아시아다. 중국이
미사일방어망계획의 주요 대상국의 하나로 지목되고 있기 때문이다.
오랜 역사를 통해 대내적 균열을 대외적 팽창을 통해 봉합해 왔던 미국의 생존논리는 오늘날에도 되풀이되고 있다.
군산복합체에 의해 뒷받침되는 미국 군사력의 '전면적 우위'를 위해 중국위협론이 미국민들의 황화론적 감정을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위협론을 강조함으로써 기대할 수 있는 효과는 중국의 패권을 경계하는 주변국가들을 미국 편에 묶어 둘 수 있다는 점이다.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러한 구도는 향후 미국이 추구하는 새로운 안보체제의 구축에 필요한 재정적 부담을 이들 국가들에게 부분적으로나마 전가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미국의 미사일방어망계획에서 러시아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972년 미국과 소련이 체결한
방어미사일(ABM) 협정은 미국으로 하여금 국게적 조약을 무시하면서까지 미사일방어망을 구축하려 한다는 중요한
비난의 근거가 되고 있다.
러시아도 이런 점을 들어 미국이 주도하는 미사일방어망계획에 대한 반대진영의 선봉에 서고 있다.
현재 러시아의 최대관심사는 'NATO가 그 영역 바깥에서 UN안전보상이사회의 승인이 없이도 군사력을 사용하고,
그것이 하나의 전략적 독트린으로까지 발전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것은 더욱더 러시아의 대미전략에서 차지하는
유럽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동아시아에서 미국은 동해에 이지스함을 배치하여 북한의 미사일 발사에 대비한다는 미사일방어망계획의 축소판을
발표하였다. 미해군이 이지스함을 활용해서 북한의 미사일을 차단할 수 있다고 한다면, 육군과 공군이 중심이 되어
추진하고 있는 미사일방어망 사업에 오히려 부정적인 효과를 미칠 수가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지스함을
확보하고자 하는 한국에 미칠 영향도 복합적이다.
현재 한국정부는 미사일방어망계획에 참여한다는 것이 한반도라는 전장에 대한 부적합성, 주변국(중국과 러시아)들을
자극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계획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 소극적인 '이해'를 표명하는 수준이다.
제 5 장 무역 구조
문제: 세계의 정치의 경제질서 중 무역질서를 설명하는 자유주의 패러다임 이론을 설명하고, 이에 대한 국가중 심적패러다임과 구조중심적 패러다임의 비판을 설명하시오. (무역에 대한 자유민주주의 패러다임과 WTO체제에 대한 중상주의와 구조주의의 비판을 설명하시오.)
국제무역에 대한 자유주의 패러다임은 18세기 영국의 저치경제학자 데이비드 리카도의 비교우위론을 바탕으로
발전되어왔다. 그러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전세계적으로 폭발적인 무역략의 증가를 설명할 새로운 무역이론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그 대표적 이론에 헥셔 - 올린의 원리와 버논의 제품수명주기이론이다. 헥셔 - 올린의 원리는
비료우위가 각국의 생산요소의 부존상태, 즉 자본, 노동, 자원, 관리기술 등 몇 개의 생산요소들의 결합에 의해 결정되며,
가장 풍부한 요소를 이용해 가장 높은 이윤을 창출하는 것이 최적의 무역전략이라고 본 이론이다. 그리고 버논의 제품수명주기이론은 한 제품이 선진국에서 개발, 생산되다가 성장기, 성숙시를 거치면서 후발국가들이 이를 모방해
대량생산하게 되면 이를 개발한 선진국은 가격경쟁력이 뒤지기 때문에 오히려 후발국가로부터 수입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유주의 무역이론에 대한 국가중심적 패러다임의 비판도 만만치 않다. 국가중심적 패러다임은 자유주의 무역이론이
1)비교우위에 입각하여 국내산업을 재편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울 뿐만 아니라 오히려 비용을 증대시킬 수 있다는 점
2) 열위 산업종사자들은 다양한 정치적 통로를 통해 보호받을 수 있는 저이적 압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 3) 특정 민족국가가
안보상 혹은 전략상의 이유로 보호하고자 하는 산업부문이 존재한다는 점, 4) 자유주의 무역을 강조하는 미국조차 다양한
중상주의 보복조치를 이용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자유주의 패러다임을 비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구조주의적 패러다임도 자유주의 무역이론이 기본적으로 선진국들의 제국주의적 무역을 옹호라는
이론이라고 보고 있다. 다시 말해, 자유무역은 부등가교환을 통해 세계체제의 주변부와 중심부를 고착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또한 무역의 급속한 자유화로 빚어지는 국가간, 계급간 빈부격차의 심화, 환경파괴의 문제,
노동력의 자유로운 이동이 보장받지 못하는 문제 등을 제기하며 자유주의 무역이론을 비판하고 있다.
한편,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무역질서는 자유주의 무역질서는 자유주의 무역질서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1948년 1월 발표한 GATT는 다자간무역체제로서 총 8차례의 다자간협상을 통해 그 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구조주의 패러다임과 국가중심적 패러다임 역시 WTO체제에 대해 공격을 가햇는데, 이들은 WTO체제가 농민들의 생존권을 보호하고, 식략안보정책이나 국내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정책 등 사회적 다수의 필요에 따른 정책들을 비관세장벽이라는 개념안에 넣어서 없애버리려 한다고 비판하였다. 아울러 구조주의자들은 WTO가 국제적인 부의 재분재에 역행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는데, 부의 공정한 재분재보다는 소수의 초국적기업들에게로의 부의 집중시키고 있으며 빈곤은 확대되고 있다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오늘날의 세계에서는 자유로운 무역질서가 모든 시장참여자들을 위해 바람직하다는 자유주의적 패러다임이 합의의 폭을 넓혀 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각각의 국가들은 여전히 보다 큰 국가이익을 얻기 위한 국가중심적 패러다임을 견지하면서 서로 갈들을 빚고 있다. 아울러 무역의 과도한 자유화가 인간의 해방과 행복을 위해 기여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의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구조주의적 패러다임도 여전히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문제: 무역과 관련라여 자유주의적 패러다임에 대한 국가중심적 패러다임을 비판하시오.
1) 국가중심적 패러다임에서는 비교우위에 입각하여 국내산업을 재편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울 뿐만 아니라 오히려 비용을 증대시킬 수 있다고 본다.
2) 특정산업이 경제적으로 열위에 있다고 할지라도 그 산업의 종사자들이 정치적으로 열위에 있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이들은 다양한 정치적 통로를 통해 보호를 받고자 하는 압력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냉전시기 일본의 자민당과 농민의 관계를
예로 들 수 있다.
3) 특정 민족국가가 지나치게 다른 나라에 기대서는 안 되는 산업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농업 분야는 국민건강이나 식량안보의 측면에서 그리고 문화안보의 측면에서 보호될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아울러 특정기간 산업의 경우 역시 국가안보의
논리에 의해 보호무역론이 제기될 수 있다.
4) 무역정책이 외교정책의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엠바고(수출입금지)와 불매 등의 수단이 한 국가의 외교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는 현실은 자유주의적 패러다임의 한계를 보여 준다.
문제: 우루과이라운드와 WTO에 대해서 설명하시오.
우루과이라운드의 진행과정은 참여국가들의 첨예한 이해대립으로 인해 당초 4년간의 협상시한을 넘겨 7년이상 계속 되었다.
이 협상은 미국과 유럽의 농산물합의, 도쿄 4자 회담, G7정상회담을 거쳐 마지막에 농산물 개방과 관련된 진통을 거쳐
1993년 12월 15일 타결되었다.
1995년 1월 정식 출범한 WTO는 제네바에 본부를 드고 우루과이라운드협정의 사법수 역할을 맡아 국가간 경제분쟁에
대한 판결권을 행사하며, 이를 통해 국가간 분쟁이나 마찰을 조정한다.
WTO에 의해 주도될 뉴라운드는 무역과 관련된 노동문제를 다루게 될 블루라운드, 무역과 관련된 환경문제를 다루게 될
그린라운드(Green, Round), 무역과 관련된 각국의 시장관행과 기업경영관행의 차이에서 오는 불평등조건을 해소하고자 컴피티셔나운드 그리고 기술개발정책에 대한 세계적인 규칙을 정하고자 하는 테크놀로지라운드 등을 포괄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현재 WTO체제를 지리하는 자유주의적 패러다임 내에서조차 WTO체제에 대해 다음과 같은 비판들이 나오고 있다.
첫째, WTO체제가 전통적인 교역 분야외에 회원국의 국내 정책에까지 관여함으로써 오히려 비효율성을 초래하고 있따.
둘때, WTO는 미국과 유럽 및 일본 간의 대립,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대립을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 각종 의제들과 관련하여 미국과 일본, 그리고 EU간에 이견이 존재하며, 인도, 말레이시아 등 개발도상국은 선진국 주도의 일방적 룰의 제정에 반발하고 있다. 셋째, 세계화의 확산에 따라 기업차원의 경제통합에 대한 욕구가 증대하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기업들은 세계적 수준의 무역자유화보다는 자신의 주 활동 대상국의 관세인하나 무역장벽의 철폐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문제: 세계의 정치의 경제질서 중 무역질서를 설명하는 자유주의 패러다임의 제 이론 – 데이비드 리카도의 비교우위론, 헤크세르 – 올린의 원리, 버논의 제품수명주기이론, 크루거먼의 수요결정형 이론 – 중 두 가지를 설명하고, 이에 대한 국가중심적 패러다임과 구조중심적 패러다임의 비판을 설명하시오.
비교우위론에 입각해서 볼 때, 한 국가는 비록 모든 상품생산에서 열위에 있다 하더라도 상대적으로 덜 열위에 있는
(즉, 비교적으로나마 우위에 있는) 상품의 생산에 주력하고 보다 열위에 있는 상품은 수입함으로써, 모든 상품을 생산할 때 기회비용을 줄이고 이익을 구가할 수 있는 것이다. 리카도는 무역이 국제적인 분업과 노동분할의 증대를 통해 전반적으로
경제적인 번영을 촉진한다고 보았다. 모든 종류의 상품생산에서 열위에 있는 국가라고 할지라도 무역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 리카도의 주장이었다. 리카도의 주장은 영국의 융성과 밀접한 관련을 맺도 잇으며, 당시 영국의 헤게모니를 뒷받침해 주는 이론이기도 했다. 이러한 점은 국가중심적 패러다임이나 구조주의적 패러다임에서 볼 때, 중요한 비판의 준거가 되고 있다.
올린은 리카도의 비교우위론을 새롭게 발전시켜서 각국의 생산요소 부존상태에 따라 비교우위가 결정된다는
‘헤크세르 – 올린의 원리’를 제시했다. 이 원리에 따르면, 설사 기술수준에서 큰 차이가 없더라도 국가별로 보유하고 잇는 토지, 노동, 자본 등의 부존량이 다르기 때문에 국가간 무역이 발생하게 된다. 즉, 자본이 풍부한 나라는 자본집약적인 상품을 수출하고, 노동이 풍부한 나라는 노동집약적인 상품을 수출하게 된다는 것이다. 일본과 미국의 기술수준이 비슷하다고 가정하더라도 땅값이 상대적으로 싼 미국에서는 농산품이, 임금이 상대적으로 싼 일본에서는 공산품이 비교우위를 갖게 되는 것이다.
한편, 미국 하버드 대학의 버논 교수는 제품수명주기이론으로 무역을 설명하고자 했다. 선진국이며 고도의 기술과 제품개발
능력을 가지고 있는 A국과 후진국이며 임금이 A국보다 낮은 B국만 있다고 가정하자. 먼저 특정 형태의 제품의 A국에서 개발되면, 이 제품은 A국 내에서 상품화되어 판매된 다음 B국으로 수출된다. 그리고 B국은 처음에는 이 제품을 수입해 쓰다가 점차 디자인과 생산과정을 모방함으로써 이 제품을 생산할 수 있게된다. B국이 이 제품에 대한 수출을 시작하면 A국과 B국 간의 임금차이로 인한 생산원가의 차이로 인해 A국은 경쟁력을 잃게 되고 B국은 이 제품을 주도적으로 생산해 수출시장을 전 세계적으로 확대하게 된다. A국은 다시 부가가치가 놓은 새로운 제품을 개발, 생산하지 않을 수 없게 되며 이에 따라 산업구조는 더욱 고도화된다. 이와 같이한 제품이 선진국에서 개발, 생산되다가 성장기, 성숙기를 거치면서 후발국가들이 이를 모방해 대량생산하게 되면 이를 개발한
선진국은 가격경재력이 뒤지기 때문에 생산을 중단하고 오히려 후발국가로부터 수입하게 된다는 논리가 이른바 제품의 수명주기이론이다. 버논의 이론은 많은 타당성을 가지고 있지만, 숙며온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버논의 이론은 기술상의 혁신이 선진국에서만 일어나고 후진국은 단지 이를 모방하는 데 그친다고 보고 있는데, 이것은 자유주의자들은 스스로가 무역의 숙명적 불평등성을 전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수요결정형이론은 폴 크루그먼과 같은 학자에 의해 더욱 발전되었다. 크루그먼은 상품차별화와 규모의 경제라는 두 현상에 주목하여 소비자들은 취향이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종류의 상품이 시장에 공급되기를 원한다고 보았다. 즉, 소량 – 다종생산방식은 소비자들의 기호에 가장 잘 부합되는 것이다. 그러나 생산자들이 지나치게 소량 – 다종생산방식을 선택할 경우, 이것은 규모의 경제원리에 역행함으로써 생산단가를 급증시키고 생산자는 손실을 입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생산구조는 소비자의 다양성에 대한 욕구와 규모의 경제원리 사이에 팽팽한 긴장 속에서 결정된다. 크루그먼의 이론에 따르자면, 무역은 이러한 긴장을 완화시키는 주요한 수단이다.
무역에 관한 자유주의적 패러다임이 점차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추세지만 국가중심적 패러다임과
구조주의적 패러다임으로부터의 비판도 여전히 날카롭다. 자유주의적 패러다임에 대한 국가중심적 패러다임의 비판을 들어보자. 첫째, 국가중심적 패러다임에서는 비교우위에 입각하여 국내산업을 재편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울뿐만 아니라 오히려 비용을 증대시킬 수 있다고 본다. 리카도가 사용했던 포도주와 의복의 예로 설명하자면, 설사 한 국가가 포도주보다 의복에서 비교우위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포도주업계의 종사자들을 의복업계 종사자로 강제적으로 전환시키고, 포도밭 등을 갈아엎고 의복공장을 세우는 데 드는 비용이 충분이 고려되지 않고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포도주업계를 고사시킬 경우 그것으로 인해 국민 전체의 삶의 방식이 변화될 수 있는데, 이러한 상황이 가져올 수 있는 폐해가 충분히 계산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다.
둘째, 특정산업이 경제적으로 열위에 있다고 할지라도 그 산업의 종사자들이 정치적으로 열위에 있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이들은 다양한 정치적 통로를 통해 보호를 받고자 하는 압력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냉전시기 일본의 자민당과 농민의 관계를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셋째, 특정 민족국가가 지나치게 다른 나라에 기대서는 안 되는 산업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농업 분야는 국민건강이나
식량안보의 측면에서 그리고 문화안보의 측면에서 보호될 필여가 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넷째, 무역정책이 외교정책의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엠바고(수출입금지)와 불매 등의 수단이 한 국가의 외교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는 현실은 자유주의적 패러다임의 한계를 보여 준다.
구조주의적 패러다임에서 보는 무역은 국가중심적 패러다임이나 자유주의적 패러다임과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 준다,
구조주의적 패러다임에서는 16세기 이후의 중상주의시대를 고전적 제국주의 시대라고 규정한다. 유럽열강들의해외진출은
자국의 경제적 논리에 따른 것에 불과하다. 대양무역을 강조했던 국가중심적 패러다임 역시 국내의 경제적 침체에 따른
압력의 산물이었다. 보다 저렴한 가격에 원료를 획득하고, 과잉생산된 물자를 판매할 시장을 개척하고, 새롭게 자본을
투자할 장소를 모색하고자 했던 경제적 욕구가 대양무역과 식민주의를 낳았다고 보는 것이다.
문제: 자유주의 무역질서에서 경제통합 5단계 이론을 설명하시오. 그리고 유럽연합의 발전과정을 이론에 맞춰
설명해 보시오.
일반적으로 지역경제공동체는 다음과 같은 다섯 단계를 거쳐 완성된다.
제 1단계는 자유무역지대로, 이는 특정영역 내에서 그 영역내에서 생산된 원산품의 무역에 대해 관세 및 비관세장벽을
부과하지 않는 것을 목적으로 협약이 체결되어 있는 경우를 말한다. 미주, 아프리카, 중동지역의 많은 국가들간에
진행되는 경제통합은 주로 이 단계의 경제통합이다.
제 2단계는 관세동맹으로, 이는 1) 동맹을 구성라는 지역 내의 모든 무역 또는 적어도 동 지역을 원산지로 하는 상품의
모든 무역에 대한 관세 및 비관세장벽의 실질적 폐지를 위한 목적과2) 동맹의 각 구성원이 동맹지역 외부에 대해 실질적으로 동일한 관세 및 비관세 장벽을 적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공동대처하는 경우를 의미한다. 유럽공동체(EC)는 이미 1968년 공동대외관세율을 채택함으로써 당초 계획보다 18개월이나 앞당겨 관세동맹을 완성하였다. 관세동맹과 달리 자유무역지대의
경우 각 구성국이 제 3국과 관세수준을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다.
제 3단계는 공동시장으로, 역내 구성국간의 무역자유화와 비구성국에 대한 공동대외관세 이외에 역내 구성국 영역 내에서의 노동과 자본 및 기업의 자유로운 이동까지도 보장하는 경제공동체를 말한다. EC는 1986년 단일유럽법(SEA)을 채택함으로써
1992년 말까지 단일시장의 완성을 목표로 하였고, 현재 단일시장이 완성 중에 있다.
제 4단계는 경제동맹으로, 공동시장보다 발전된 형태로 역내 구성국간의 공동 경제, 금융, 재정정책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EU는 1992년 마스트리히트조약을 통하여 경제통화동맹(EMU)을 채택하여 이를 주관할 유럽중앙은행을 설치함과 동시에 유로화라는 유럽단일통화를 창설하였다.
제 5단계는 완전한 경제통합의 단계로, 통화와 재정 및 사외정책상의 통합까지도 포함한다. 이 단계에서는 관련 지역의 경제가 완전히 통합되어 모든 경제관련 분야가 한 국가 내에서와 마찬가지로 운영된다. 그러나 이 단계는 정치적인 측면이 함께 논의되어, 국가형식으로서 연방의 형태 또는 연합의 형태가 될 수 있다. 연방은 국제법상 하나의 국제법적 주체가 되고 그 회원국은 국가성을 상실하게 되며, 연합은 국제법상 별도의 국제법적 주체를 창설하지 않고, 그 회원국들이 자신의 국가성을 그대로 유지하는 국가결합형식이다. 일부 유럽인들은 미국에 준하는 연방형태의 ‘유럽합중국’을 지향하고 있다.
제 6 장 통화와 금융구조
문제: 브레턴 우즈체제의 핵심적인 요소 세가지를 그 기능과 역할을 중심으로 설명하고(10점), 왜 그것이 ‘트리핀딜레마’로 표현되는 패권의 역설로(5점) 이어디는지를 논술하시오.
브레턴우즈체제는 금을 각국 통화가치의 기준척도로 삼고, 각국 통화와 금의 교환성을 보장한 금환본위제, 각국 통화의
기준환율을 고정시킨 고정환율제, 그리고 회원국의 국제수지 적자조정을 위한 국제통화기금의 설립을 기본골격으로 하였다.
당초 IMF는 금각격을 1온스당 35달러로 고정시키고 회원국 통화가치를 달러화로 표시하도록 하였으며 기축통화국인 미국은 외국의 통화당국이 요청하는 경우 온스당 35달러의 가격으로 금을 무제한 공급하도록 규정하였다. 또한 각 가맹국은 자국의 환율변동폭을 +_ 1% 범위내에서 유지하도록 의무화했다.
금환본위 고정환율제도의 채택은 무엇보다도 안정된 환율제도하에서만이 무역의 안정적 성장을 이룩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는 한 국가의 통화가 다른 국가의 통화와 안정된 환율로써 항시 교환될 수 있고, 또한 달러화를
통해 항상 국가의 교환이 가능하도록 함으로써 상품과 서비스, 그리고 자본의 자유로운 흐름을 보장하겠다는
제 2차 세계대전 이휴 미국의 자유주의 국제경제질서에 대한 신념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브레턴우즈체제의 또 다른 특징은 미국이 패권국으로서의 지위를 실질적으로 행사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경제의 파탄은 유럽국가들로 하여금 브레턴우즈체제의 관리에 큰 역할을 담당할 수 없게 하였고, 소련과의 냉전적 대립은 결국 미국으로 하여금 세계통화체제의 관리에 일차적인 책임을 맡게 하였다. 이는 무엇보다도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세계경제의 유일한 강국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미국은 유럽과 일본의 재정적자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다시 말해 미국의 정치경제적 패권의 유지는 지속적인 적자현상을
경험해야 했다. 다시 말해 미국의 정치경제적 패권의 유지는 지속적인 국제수지적자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었고,
결국 이는 트리핀(Robert Triffin) 교수가 지적한 ‘패권의 딜레마’를 가져와 달러화의 위기와 함께 브레턴우즈체제의 붕괴로 이어진다.
트리핀의 우려는 현실로 드러났다. 미국은 1960년대 이르러 더 이상 의도적인 국제수지적자정책을 추구할 수 없는
형편에 처하게 되었다. 지속적인 국제수지적자를 무릅쓰고 국제통화질서를 유지한 결과 미국의 금보유고는
1948년 244억 달러에서 1959년 195억 달라로 줄어들었다.
문제: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의 국제통화질서의 형성과 변화과정을 설명하시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자유주의 국제경제질서를 위해 탄생한 브레턴우즈국제통화체제는 금환본위제, 고정환율제,
그리고 IMF의 설립을 기본 골자로 하였다. 금환본위 고정환율제의 채택은 상품과 서비스, 그리고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겠다는 전후 미국의 자유주의 국제경제질서에 대한 신념에서 기인하는 것이었고, IMF는 일시적인 국제수지적자를
경험하고 있는 국가가 이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구제금융을 지원해 주는 데 목적을 두고 설립되었다.
이와 같은 골격을 갖춘 브레턴우즈체제의 또 다른 특징은 바로 전후 미국이 패권국으로서의 지위를 실질적으로 행사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서유럽의 경제복구를 위해 시행된 마셜플랜과 1960년대 베트남전쟁의 확산, 그리고 존슨행정부의 ‘위대한 사회’ 복지프로그램에 따른 과도한 달러와지출은 내적으로 미국정부의 재정적자를 비롯한 경기후퇴를, 그리고 외적으로 막대한
규모의 국제수지적자를 초래해, 결국 달러화의 국제적 신용도를 하락시키기에 이르렀다. 1970년대 들어 미국은 달러화의
지속적인 유출로 인한 만성적 국제수지적자로 들어섰고, 닉슨대통령은 금에 대한 달러의 교환을 중지시킨다는 것을 골자로
한 신경제정책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닉슨의 신경제정책은 금과 달러의 관계를 일방적으로 차단시킴으로써 브레턴우즈체제의 중심을 제거해 붕괴를 방치한 셈이 되어버렸고, 결국 국제통화질서는 다자간협력의 국면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1970년대의 국제통화질서의 회복을 위한 다자간협력은 달러화의 평가절하와 엔화와 마르크화의 평가절상을 합의한 워싱턴회의(스미스소니언협정), 그리고 변동환율체제를 공식화하고 금 – 달러본위제를 특별인출권(SDR)본위로 전환시키려 했던 킹스턴회의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국제통화질서의 혼란을 잠시 방지한 잠정적인 조처에 지나지 않았으며, 조정성과 유동성과 같은 국제통화질서의 아주 중요한 측면에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는 못하였다. 또한 1980년대의 국제통화질서의 회복을 위한 다자간협력은 달러화를 엔화와 마르크화에 대비하여 1/3이나 평가절하한다는 G5의 플라자협정과 환율변동의 목표범위를 설정하여 고정환율젝\로 복귀하고자 하는 미국측의 희망이 표출된 도쿄 G7 정상회담을 들 수 있다.
1970년대 이후 국제통화질서는 유로화의 등장과 엔화의 국제화로 특정지어긴다. 유로화의 도입은 브레틴우즈체제 붕괴 이후 국게통화질서에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온 사건 중 하나로, 이는 단순한 하나의 통화출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 경제통합뿐만 아니라 정치통합에 의한 범유럽통합으로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할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국제화는 미국의 달러화에 대한 과도한 의존에서 초래된 아시아 금융외환위기에 대한 경험과 유로화 출범에 따른 엔화의 위기의식에서 추진된 것이다.
결국 2000년 이후 달러 – 유로- 엔의 3극체제는 달러화와 유로화의 약진, 엔화의 약세로 특징지을 수 있다. 즉, 현재 국제통화질서의 구조는 미국이 여전히 패권적 위치를 점하고 있고, 유럽의 약진이 두드러지고 있지만, 일본은 경제규모나 엔화의 사용비중을 고려해 볼 때 아직 국제기축통화가 될 수 있는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문제: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브레턴우즈체제의 통화질서는 어떤 변화과정을 겪어 왔는가. 아울러, 1990년대 이후 국제통화질서를 달러 – 유로- 엔의 삼각관계 측면에서 예측해 보시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자유주의 국제경제질서를 위해 탄생한 브레턴우즈국제통화체제는 금환본위제, 고정환율제, 그리고 IMF의 설립을 기본 골자로 하였다. 금환본휘 고정환율제의 채택은 상품과 서비스, 그리고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겠다는 전후 미국의 자유주의 국제경제질서에 대한 신념에서 기인하는 것이었고, IMF는 일시적인 국제수지적자를 경험하고 있는 국가가 이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구제금융을 지원해 주는 데 목적을 두고 설립되었다. 이와 같은 골격을 갖춘 브레턴우즈체제의 또 다른 특징은 바로 전후 미국이 패권국으로서의 지위를 실질적으로 행사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서유럽의 경제복구를 위해 시행된 마셜플랜과 1960년대 베트남전쟁의 확산, 그리고 존슨행정부의 ‘위대한 사회’ 복지프로그램에 따른 과도한 달러화지출은 내적으로 미국정부의 재정적자를 비롯한 경기후퇴를, 그리고 외적으로 막대한 규모의 국제수지적자를 초래해, 결국 달러화의 국제적 신용도를 하락시키기에 이르렀다. 1970년대 들어 미국은 달러화의 지속적인
유출로 인한 만성적 국제수지적자로 들어섰고, 닉슨대통령은 금에 대한 달러의 교환을 중지시킨다는 것을 골자로 한 신경제정책을 선초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닉슨의 신경제정책은 금과 달러의 관계를 일방적으로 차단시킴으로써 브레턴우즈체제의 중심을 제거해 체제의 붕괴를 방치한 셈이 되어버렸고, 결국 국제통화질서는 다자간협력의 국면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한 국가의 통화가 국제통화체제에서 기축통화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지불수단과 가치저장수단으로 각종 국제거래에서 폭넓게 활용되어야 한다.
현재 세계경제의 구조는 미국이 여전히 패권적 위치를 점하고 있으나 유럽통화동맹(EMU)의 약진이 두드러진다고 하겠다.
아울러 EU회원국 중 EMU 미가입국인 영국, 덴마크, 스웨덴, 그리고 그리스가 EMU에 가입하여 유로랜드에 들어오게 된다면
EU의 경제규모나 유로화의 시장은 더욱 커지게 될 것이고, 또한 최근 민주화 과정을 밟고 있는 동구권의 국가들마저 궁극적으로 EU와 EMU에 가입하게 된다면, 강력한 유럽경제권이 형성되어 결국 유로화는 달러화와 강력한 경쟁관계에서 국제통화체제의 한 축을 형성하리라는 전망은 그리 어렵지 않아 보인다. 그렇지만 일본은 아직 경제규모나 엔화의 사용비중을 고려해 볼 때 달러화나 유로화에 비해 국제기축통화가 될 수 있는 일정한 조건을 충족시키고 있지 못하고 세계경제적 영향력에 있어서도 뒤떨어져 있는 실정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달러 – 유로- 엔의 3극체제 형성에 대한 기대는 아직은 시기 이른 추측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일본이 계속해서 경상수지흑자를 보이고 또한 국제화폐로서의 여러 가지 지표에서 성장세를 보이고 있어 엔화의 국제화는 이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될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문제: 1990년대 종반 아시아 금융외환위기의 원인과 위기를 당한 각 국가들의 위기해결정책에 대해 서술하시오.
동아시아권의 금융외환위기의 원인에 관해서는 상반된 견해가 존재한다. 먼제 MIT대학의 크루그먼(Paul Krugman)교수는 동아시아 국가들의 정실자본주의가 그 주요 원인이었다고 주장한다. 국가의 과도한 시정개입과 정부 – 금융 – 이겁 간의 긴밀한 공생관계, 그리고 이로 인한 도덕적 해이현상이 금융외환위기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한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동아시아 국가들의 경우 정부는 경제발전을 위해 금융기관을 동원하여 기업의 부실을 책임져 왔다. 이에 외국은행과 국제투자자들은 정부의 보증을 믿고 과도한 자금을 동아시아 금융기관들에게 대출해 주고, 이어 동아시아 금융기관들은 정부의 암묵적인 보증 아래 적절한 금융거해에 대한 규제없이 부실기업에 대출을 해왔다. 이러한 도덕적 해이현상은 한편으로 기업의 자산가치를 부풀려 거품경제를 유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금융기관의 부실화를 초래햇다. 이와 더불어 1990년대 중반 엔화의 약세와 함께 동아시아 국가들의 수출경쟁력 악화로 인한 경기침체와 국제수지적자는 기업의 도산을 이끌고, 결국 동아시아 경제게 대한 국제자본들의 신뢰를 감소시켜 국제자본의 유출을 가져와 금융외환위기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한편 아시아 지역에서 동시적으로 진행된 금융외환위기에 대한 각국의 대응방식은 나라마다 사정이 조금씩 달랐지만, 크게 IMF 구제금융을 받아들이거나 혹은 그 반대로 IMF의 처방을 거부하고 독자회생의 길을 선택한 두 유형으로 구분된다.
먼저, 한국의 경우는 IMF에 구제금융을 공식요청해 1997년 12월 총 195억 달러의 긴급구제금융을 지원받았다. 한국은 IMF의 자금지원을 받는 조건으로 대기성자금지원협약을 맺었고, 지원조건으로 통화, 재정정책의 긴축적 운용과 금융산업의 구조조정,
무역 및 자본 자유화, 그리고 노동시장의 유연화 등 구조조정 프로그램 등에 합의했다.
한국이 경제안정화정책으로 IMF관리체제를 선택했던 반면, 말레이시아는 1998년 7월 IMF의 지원을 거부하고 일종의 ‘반(反) IMF실험’을 강행했다. 말레이시아는 우선 IMF의 경제안정화정책의 한 요소인 통화의 평가절하에 반하여 자국 통화인 링깃화를 달러당 3.8에 고정하여 종전의 달러당 4.2링깃에 비해 약 10.5% 쳥가절상하였다. 그리고 IMF의 재정축소정책과는 반대로 약 12억 달러 규모의 대형 건설프로젝트를 추진하였고, 그간 유지하던 제정긴축, 물가안정, 고금리정책을 포기하고 적극적인 경기부양에 나섰다. 이는 확실히 IMF의 보수적인 통화긴축정책에 반하는 것이었다. 이어 말레이시아는 투기성 해외자본의 유입을 막고 민간 소비촉진과 투자확대등에 주력하는 한편, 아시아지역내 무역증가와 투자회복으로 자율성장의 기반을 확충했다. 그 결과 말레이시아는 1998년 5.6%의 경제성장율, 그리고 2001년 현재까지 연간 8~9%의 경제성장을 보였다.
제 7 장 지식구조
문제: 지적재산권을 둘러싼 국제적 협약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는 국제적 논의에 대해 설명하시오.
지식의 생산과 기술혁신은 지적재산권에 대한 국게적 협약을 통해 보호 받아 왔다. 지적재산권에 관한 국제협약은 특허, 상표 및 산업디자인 분야의 지적 재산권 보호를 목적으로 체결된 파리협정(1883)과 문학, 음악 및 미술에 관한 저작물 보호를 위한 베른협정(1886)으로부터 출발했다. 그리고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지적재산권은 1967년 유엔산하기구로 탄생한 세계지적재산권기구(WIPO)를 중심으로 논의되어 왔다. 파리협정과 베른협정의 이행여부를 감시하기 위해 탄생한 WIPO를 둘러싼 논쟁의 양대 축은 선진국과 후진국이었다. 이리하여 결국 우루과이라운드를 통해 WTO/TRIPs라는 지적재산권협정이 체결되었으며, WTO/TRIPs는 기술혁신의 촉진, 기술이전과 전파의 촉진, 기술 및 지식의 생산자와 이용자의 상호공생 등을 기본원칙으로 하고 있다.
지적재산권문제와 관련해서 WTO/TRIPs체제를 주도했던 자유주의자들은 1)지적재산권 보호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는 점, 2) 행정, 사법 분야에서 보다 완비된 분쟁해결절차를 도입했다는 점, 3) 개별 조약들을 통합한 최초의 종합적 조약이라는 점, 4)WTO를 통해 지적재산권의 범세계적 보호가 가능하게 되었다는 점, 5)개인의 권리가 국제법의 영역에서 직접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 등을 대체로 WTO/TRIPs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구조주의자들은 이에 대립되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첫째, 자유주의자들은 지적재산권 보호를 통한 기술성장을 강조하고 있는데 반해, 구고주의자들은 지식의 공유와 이전을 통해 세계적 기술발전과 빈부격차 해소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둘째, 구조주의자들은 저작권을 보호하려드는 자유주의자들과 달리 조작권과 관련해 원저자의 의도를 훼소하지 않는 한 마음대로 복제, 변형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카피레프트운동에 동조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구조주의자들은 WTO/TRIPs의 오입에 반대하며 오히려 WIPOrk 지적재산권 문제에 관한 보다 적합한 국제적 토의의 장이라 주장하고 있다. 더욱이 WTO/TRIPs가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가들이 누리고 있는 지적재산권 분야의 독립적 특권을 강화하는데 초점을 맞춘 나머지 새로운 기술의 확산과 공유를 통해 세계적 빈부의 격차를 축소시키는 shfyur과는 정반대로 가고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더군다나 강대국들은 국제 특허권을 생명체, 음식, 문화 등의 다양한 장르에 대해 부여하고 있다. 이러한 강대국들의 논리에 대해 구조주의자들은 우리 조상 대대로 내려져 오는 음악, 미술, 민간의학 혹은 약초 등 광범위한 생활, 문화분야에 있어서 모든 대상이 국제시장에서 선진국의 상품화 대상으로 지목받고 있으며, 결국 국제시장에 있어서 선진국의 기득권을 보호해 주는 법이 바로 지적재산권이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문제: 미국 중심적 국제지식구조가 형성된 결정적 계기와 배경에 대해 설명하시오.
세계 다른 지역에 관한 지식 부문에서 미국이 유럽, 특히 영국에 대한 무임승차적 수준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지식구조 수립에 박차를 가하게 된 데는 제 2차 세계대전의 영향이 컸다. 미국에서는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비롯된 태평양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 지역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생겨났던 것이다. 제 2차 세계대전에서의 승리 이후 미국의 이러한 노력은 더욱 큰 지원을 받게 된다. 제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미국으로 이주한 유럽의 학자들도 유럽중심적 국제지식구조가 미국중심적 국제지식구조로 변화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미소간의 냉전이 본격화되면서 다른 지역을 자국중심적 인식구조 안에 끌어들이고자 하는 요구가 증대되었다. 냉전은 비단 정치, 경제, 군사적인 구조뿐만 아니라 지식구조 또한 미국중심적 체제와 소련중심적 체제로 양극화시켰다. 그러나 소련중심적 지식구조는 결코 미국 중심적 지식구조와 동등한 지위를 구가할 수 없었다. 미국은 오랫동안 학문적 측면 중심으로 군림했던 영국 및 서유럽의 지위를 계승했다. 이에 비해 소련은 지식구조적 측면에서는 계속 이류적 서구에 머물렀다. 특히 미국과 서유럽이 단일한 지식구조로 쉽게 통합될 수 있었던데 반해, 소련과 중국은 서로 경쟁적이고 상호배타적이기조차 한 지식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문제: 역사적으로 정복과 지식은 어떤 관련을 지니고 있는지 설명하시오.
역사상, 출몰했던 제국들은 각기 자시중심적 표준에 입각한 지식구조를 만들어 냈고, 제국의 경영을 위해 갖가지 토치기술을 발전시켰다. 로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중국제국은 중충적 지식구조를 발전시켰다. 광대한 영통화 그 곳에 거주하는 3억 이상의 인구가 이와 같은 구조를 통해 관리되었고, 매우 효율적인 우편제도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당시의 중국제국은 베이징에서 우편을 통한 지식전달이 각기 1주일, 2주일, 3주일, 그리고 4주일이 걸리는 4개의 지대로 분류 되었다.
포르투갈이 해양제국을 건설할 당시 포르투갈의 해양왕자 엔리케가 건설했던 사그레스 궁전은 당시 지식체계의 중심에 서 있었다. 일종의 씽크탱크였던 이 사그레스 궁전에는 각지의 우수한 조선기사 항해기술자 세공업자, 탐험가, 지리학자, 천문학자 등이 모여서 정복프로잭트의 수행을 위한 일종의 학제간 연구를 수행했다. 이와 같은 두뇌의 집결과 아울러 사그레스 궁전에는 기행기와 지리서적, 갖가지 지도와 항해 관련 서적들이 수집되었다. 이것은 일종의 도서관이기도 했다.
1492년 에스파냐의 지원을 받은 콜럼버스의 대서양횡단은 로마제국의 전통을 계승한 서구중심적 지식구조의 발전을 촉진시킨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토도로프(T.Todorov)는 “지식의 정복이 힘의 정복으로 이어진다.”고 말하면서 ‘정복의 무기’로서의 성격을 지닌 서구중심적 지식구조의 탄생을 이야기했다. 이어지는 정복과 선교, 망명과 유학, 그리고 이민과 입양은 서구중심적 지식구조의 발전을 위해 기능하렸다. 그러나 코르테스나 피사로에 의해 대표되는 에스파냐의 중남미정복은 앎의 정보게 기반했지만, 타자에 대한 이해(지역학적 관심)을 통해 지식구조를 발전시키기보다는 해당 지역의 문명에 대한 말살과 동화에 치우치고 말았다. 후발정복국가였던 프랑스와 영국은 이와 대조적으로 ‘타자에 대한 이해’를 정복정책의 근간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다시 힘의 정복을 지식의 축적으로 발전시키는 데 어스파냐와 포르투갈 등이 선발정복국가들을 능가하였다.
한편 미국중심적 국제지식구저의 형성은 제 2차 세계대전의 영향이 컸다.
제 8장 유럽과 유럽연합
문제.유럽엽합(EU)을 지탱하고 잇는 네 가지 기둥을 설명하고 유럽의 안보구조를 전망해 보아라.
(1)유럽 연합을 지탱하고 있는 네 가지 기둥
마스트리히트조약을 통해 출범한 유럽연합은 네 가지 기둥에 의해 지탱되어 왔는데 그것은 로마조약, 공동의 교안보정책, 공동내무치안정책, 경제통화동맹이다.
첫째, 로마조약이다. 이는 유럽경제공동체 설립을 위한 조약으로서 이후 공동시장 뿐만 아니라 통화정책을 포함해서 유럽경제통합의 비전을 제시했다는 측면에 잇어서 유럽연합의 실질적인 기틀을 마련햇다고 볼수 잇다. 둘째, 공동 외교안보정책이다. 유럽의 안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북대서양조약기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미국 주도의 안보질서 속에서 나왓다는 측면에서 문제가 있엇기 때문에 유럽은 안보의 자주화를 위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그러나 유럽은 성공적인 경제통합에 비해 정치 및 외교안보 분야 통합에서 지지부진한 모습을 드러냈었다. 그리하여 한계를 인식한 EU는 안보분야에 잇어서 대미의존을 탈피하고,국제정세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마스트리히트 조약을 통해 공동외교안보정책을 추진하게 되엇던 것이다. 이후 EU는 2000년 니스조약을 통해 NATO와는 별도로 역내 평화유지를 위한 독자군사력을 확보하기로 하고, 2003년까지 6만여 명의 신속대응군(RRF)을 창설하기로 합의햇다.
셋째,공동내무치안정책이다. 즉 EU는 망명정책, 이민정책,마약범죄, 국제적 부정 및 사기, 대테러방지 등과 같은 치안과 관련된 영역에서 EU차원의 공동대응을 모색하고자 마련하였다.
넷째, 경제통화동맹이다. 이는 역내 경제통합을 완성하고, EU의 경제력에 걸맞는 통화세력으로 부상하여 미국 달러에 대한 견제를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출범한 것이다.
(2) 유럽 안보구조의 전망
NATO는 소련 등 공산권을 팽창을 봉쇄하려는 의도에서 발족한 미국과 서유럽 중심의 대서양안보기구로서, 탈냉전 이후 기구의 성격을 집단안보기구에서 다자간안보기구로 전환시키려 하고 있다. 이를 위해 NATO는 회원국을 확대하고 러시아를 NATO안으로 끌어들여 신대서양협력체제 구축을 추진하고 잇다 . 그러나 NATO는 유럽이 미국의 정치군사적 지원에 의존하고 잇는 기구로서 유럽은 안보비용 부담에 대한 미국의 압력을 받아왓고 유럽내 문제에 독자적으로 대응해오지 못하고 있엇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유럽연합은 외교안보 분야에 잇어서 미국으로부터 독립적인 혹은 대등한 관계를 추구할 거을 촉구하고 잇고 , 그 결과로 등장한 것이 신속대응군으 설립게획이었다. 이는 궁극적으로 유럽방위군을 창설하려는 징검다리 단계라고 할 수 잇다.
결국 EU의 발전사와 신속대응군이 등장하기까지 유럽안보의 변천사는 유럽이 미국으로부터의 독자성을 회복하고 세게 주도권을 회복하려는 하나의 여정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한 노력이 이루어지는 한 미국의 일방주의적 외교에 대한 견제세력으로써 EU는 하나의 대안세력이 될 가능성이 높다.
문제. 5장에는 경제통합이론 5단계의 이론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유럽연합의 발전경험을 이 경제통합 5단계론을 들어 구체적으로 설명하시오. 아울러, NAFTA(북미자유무역지대)와 FTAA(미국자유무역지대)은 이 이론의 어떤 단계에 와 있나요.
경제통합이론 5단계는 자유무역지대, 관세동맹, 공동시장, 경제동맹, 완전한 경제통합을 말한다.
유럽의 통합에 대한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1950년 당시 프랑스 외무장관인 슈만이 프랑스와 독일 간의 석탄과 철강산업 관리를 공동으로 추진하는 '슈만계획'을 발표하면서부터이다. 이 결과 1951년 독일,프랑스,이탈리아,네덜란드,룩셈부르크,벨기에 등 6개 국이 파리조약을 체결함으로써 1952년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가 발족되엇다. 1957년 로마조약을 체결하고 유럽경제공동체(EEC)와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를 1958년에 설립하엿다.
EEC는 하나의 관세동맹으로서 회원국 역내의 관세와 수량제한 등의 보호주의장벽의 철폐와 역외 공동관세의 설치를 추진하게 되는데 EEC는 1968년 관세동맹을 완성하엿다. EEC에 가입을 거부한 영국은 1960년 EEC비회원국을 묶어 유럽자유무역연합(EFTA)을 결성하였는데 이는 하나의 자유무역지대로 관세동맹보다는 한 단계 덜 성숙된 경제통합과정이다.
세 개는 공동체(ECSC, EEC, EURATOM)는 1967년 통합조약을 체결하여 유럽공동체(EC)로 통합되었다. 1987년 EC는 공동시장을 완성하기 위하여 단일유럽의 정서를 조인하엿다. 1992년에는 EC 12개 국과 EFTA 6개 국 간의 광범위한 자유무역지대를 창출하기 위하여 유럽경제지대(EEA)협상이 시작되엇고, 1994년에 협정이 발효되엇다.
EC의 12개 회원국은 1992년 네덜란드의 마스트리히트에서 만나 유럽연합조약을 체결하여 1993년 유럽연합 공동외교안보정책, 셋째는 공동내무치안정책, 넷째는 바로 경제통화동맹이다. 이리하여 EU는 경제통합뿐만 아니라 정치, 외교 안보, 내무치안 등의 분야에서의 통합을 추진하는 공동체가 된 것이다.
NAFTA는 지역경제통합이 상당한 발전단계에 잇엇던 EC에 대응하는 미국의 방책으로 이들로 하여금 다자주의 교섭에 적극적인 자세를 갖도록 함과 동시에 아울러 동아시아의 배타적인 결제블록 형성에 야심을 보이고 잇는 일본을 견제하여 GATT의 원리와 최대한 양립할 수 잇는 경제적 지역주의를 추구하게끔 유도 하려는 효과도 지니고 잇엇던 것이다. 이러한 의도 하에서 체결된 NAFTA는 최초로 개발도상국과 산업 선진국 간에 이루어진 자유무역협정이라는 점과, 단순 상품의 자유무역을 보장하는 관세 및 비관세의 제거는 물론 무역과 투자에 관련된 포괄적인 경제 통합 형태를 띠고 잇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런데 미국은 NAFTA에서 머물지 않고 더 나아가 전 미주대륙을 포괄하는 미주자유무역이대(FTAA)를 건설하고자 노력하고 잇다. 미국의 FTAA의 추진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의 범미주구상(EAI)에서 기원한다. 범미주구상은 중남미시장의 빠른 성장을 통한 적극적인 수출활로의 모색이라는 경제정책적 구상 이외에 동남아시아에서 일본의 영향력 팽창과 1992년 유럽의 공동시장 창설 등에 대한 대응책으로 남미에 대한 경제적 영향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미국의 의도가 깔려 잇다.
문제. 유럽의 안보기구에 대해 서술하시오.
OSCE는 다자간안보기구로서 1974년 탄생한 유럽안보협력회의(CSCE)가 1994년 개명된 것이다. 회원국간의 안보에 관한 포괄적인 협력을 추구하며 군축, 예방외교, 신뢰구축, 인권, 민주화, 선거모니터링, 경제안보, 환경안보 등의 이슈에서 회원국간의 협력을 통한 평화를 도모하고 잇다. 회원국은 55개 국으로서 지리적으로는 유럽,북미 구소련지역인 중앙아시아와 코카서스지역 등을 포괄하고 잇다.
냉전질서의 성립 이후 유럽의 안보를 주도적으로 지탱하고 잇는 NATO 역시 집단안전보장기구이다. NATO는 소련등의 공산권 팽창을 봉쇄하려는 의도에서 1949년 발족된 미국과 서유럽 중심의 대서양안보기구로서 2002년 현재 19개국으로 구성되어 있다.
NATO는 1989년 이후 동구가 개혁되고 1991년 소련과 바르샤바조약기구가 해체되자 기구의 성격전환을 모색해 왔다.기구의 성격전환은 기본적으로 집단안보기구로서의 NATO를 다자간안보기구로 전환 시키려는 데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경제적 지위가 상승하고 EU의 심화와 확대가 무리없이 이루어짐에 따라 유럽은 외교안보 분야에서 미국으로부터의 자립을 추구하고 대등한 관계를 견지하게 되었다.NATO는 유럽이 미국의 정치군사적 지원에 의존하고 있는 기구로서, 유럽은 그 동안 안보비용을 더 많이 부담하라는 미국의 압력에 시달려 왔고, 유고사태에서 유럽의 독자적인 대응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독자적인 유럽의 방위계획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1999년 헬싱키 유럽이사회(정상화담)에서 결정된 '신속대응군'의 설립계획으로, 이것은 궁극적으로는 유럽방위군을 창설하려는 징검다리 단계라고 할 수 있다. EU는 우선 2003년까지 6만 명 규모의 신속대응군을 출범시킬 계획이다.EU 중심의 신속대응군 간의 관계가 어떻게 정립되고,어느 쪽이 유럽안보의 주도권을 잡게 될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WEU는 1948년 브뤼셀조약을 통해 출범한 안보기구로서 신속대응군이 등장하기 전에는 서유럽의 유일한 독자적인 안보기구였다. WEU는 EU의 국제적 영향력이 강화되면서 EU의 안보기구로 발전적으로 편입시키려는 노력들이 이어졌으나 자체적인 군사력이 없다는 심각한 결점 때문에 지역의 분쟁 발생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그간 해체의 압력을 받아 왔다. 이에 따라 WEU는 보다 적극적인 유럽의 독자적 안보기구인 신속대응군이 출범할 때까지만 한시적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제 9장 미국과 아메리카 지역 통합장
문제. 미국의 통상정책 변화와 자유무역협정(FTA)의 정책목표를 설명하시오.
(1) 미국의 통상정책
브레턴우즈체제관리를 위한 엄청난 국제유동성 공급자 1960년대 국내복지에 대한 과도한 지출은 지속적인 달러화의 해외유출로 미국의 무역적자를 비록한 국제수지적자와 정부의 재정적자라는 쌍둥이 적자를 가져왔다.
그리하여 1970년대 초반에서 1980년대 전반기까지는 보호무역정책이 강화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보호주의정책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상대적 경제력은 하락하였고, 레이건행정부의 고금리,재정적자,강한 달러정책은 미국산업의 대외경쟁력을 약화시켰고, 이는 곧 무역적자의 급동으로 이어져 무역수지적자가 1987년에는 최고 1712억 달러는 기족하게 되었다. 무역 분야에서의 천문학적인 적자는 정치적으로 자유주의무역정책에 큰 타격을 주었고,미국은 보다 공격적인 보호주의정책으로 무역적자를 해소하려 했다. 1974년 통상법 301조를 비롯하여 1988년 슈퍼 301조와 스페셜 301조 등 1970년대의 무역대상국에 대하여 수출자율규제를 요구하고 수입보호주의에서 보다 공격적인 수출보호주의로 통상정책이 변모한 것이다.
한편,1990년대 들어 기존 국제무역관계에 또 다른 큰 변화가 일어났다. 경제적 지역주의가 대두하기 시작한것이다.
아울러, 1990년대에도 무역적자가 줄어들기는커녕 적자폭이 더욱 확대되어 감에 따라 1980년대 말부터 미국은 쌍무주의적 통상압력과 함께 경제적 지역주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통상정책을 아울러 추구하게 되었다.
(2) 자유무역협정(FTA)
미국은 전통적인 통상정책의 목표인 무역장벽 철폐 외에도 다자간무역체제의 점진적인 개선, 쌍무적인 무역관계 개선,그리고 그로 인한 무역불균형을 시정한다는 목적을 지니고 적극적으로 대외지향적인 통상정책을 추구하게 되었다.
쌍무적 혹은 복수의 자유무역협정(FTA)의 옹호은 무엇보다도 FTA가 역내 무역자유화 증진을 통해 무역 창출효과를 증대시킴에 주목한다. 즉, 역내 관세의 철폐로 인하여 회원국들이 고가의 국산재화를 저가의 역내 외국재화로 대체함으로써 생산비용을 절감하고, 이는 다시 비교우위산업에 대한 역내 교역기회를 증진시킬 뿐만 아니라 수출을 촉진시키며, 아울러 생산의 증재, 생산가격의 하락, 그리고 물가의 하락으로 이어져 궁극적으로 복제를 증진시킨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미국은 FTA추진은 GATR의 다자간체제를 보완한다는 의미도 지난 것이었다. 미국은 FTA체결을 통해 GATT협상보다는 한 걸음 먼저 의제를 제시하고, 협상이 타결될 경우 이를 GATT협상의 촉매제로 활용하고자 했다.
또한 NAFTA의 출범은 시기적으로 GATT의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이 막바지 교섭단체에 있을 때였는데, 미국은 이 협상을 성사시키기 위해 NAFTA를 하나의 ‘독촉장’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문제: NAFTA의 형성과 성과를 평가하고, 미국이 추진하고 있는 FTAA에 대해 전망해보라.
보호주의무역정책 아해 미국은 한편으로 각종 통상압력을 바탕으로 쌍무주의적 무역협상을 추구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캐나다, 멕시코와 함께 북미자유무역지대(NAFTA)를 건설하는 지역주의경제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는 유럽통합과 아시아의 지역경제블록에 대항하고자 하는 경제정책적 전술로 이해할 수 있겠다.
NAFTA 출범 3년 후 미국행정부는 NAFTA의 출범이 비교적 성공적인 성과를 거두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환경보호론자, 소비자단체, 그리고 노동조합 세력들은 NAFTA의 성과에 대해 비판을 가했는데, 이들은 NAFTA 비준 직전 협정문에서 환경보호문제와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할 수 있는 명백한 언급이 없는 부정정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첫째, 미국의 경우 NAFTA 출범 이후 지속되어 온 케나다 및 멕시코 무역적자가 실업과 소득불평등을 가져왔다.
둘째, 멕시코의 경우 NAFTA가 거시경제적으로 혜택을 가져왔지만, 이는 소득의 불평등, 실질임금의 감소, 그리고, 불안전한 직업이라는 측면에서 노동문제를 야기하였다.
셋째, 케나다의 경우 NAFTA 출범 이후 지속적인 대미무역흑자를 기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NAFTA의 진행이 실업과 노동정책의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미국은 NAFTA에 머물지 않고 전미주대륙을 포괄하는 미주자유무역지대(FTAA)를 건설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또한 1991년 브라질을 주측으로 결성된 남미공동시장(MERCOSUR)이 미국의 수출업계에 큰 타격을 가할 위협이 있고, 그 주도국들이 미주지역에서 NAFTA의 견제세력이 될 수 있는 남미자유무역지대(SAFTA)의 창설을 목표로 하고 있다.
미국이 FTAA의 협상을 마무리해 지구촌 최대의 단일시장을 만들기에는 해결해야 할 난제들이 많다. 첫째, 각 국가들은 자유무역의 범위가 어느 정도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즉, UR협정 이상의 무역자유화를 추구할 것인가 혹은 WTO체제 내에서 무역자유화를 추구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그러나 참가국의 수가 34개국이나 되고 협상의제가 많아 쉽게 합의를 도출해 낼 수 잇을지 의문이다. 둘째, 현재 미주지역에 존재하고 있는 여러 형태의 지역무역협정들을 어떻게 조화롭게 조정하여 FTAA체제 안으로 수렴시킬 수 있을 것인가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역내 국가들간의 경제력 차이의 조정여부도 FTAA의 미래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것이다. 소규모의 경제국들은 협상과정에서 미국과의 상대적 손실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고, 따라서 협상이 난관에 봉착할 가능성은 항상 존재한다.
문제: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 형성과 관련된 각국의 정치, 경제적 입장에 대해 서술하시오.
(1) 미국
1986년부터 진행된 우루과이라운드협상이 난항을 거듭하자 미국은 전략적 대응책의 일환으로 NAFTA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한쳔으로 NAFTA를 통해 EC국가들과 일본을 다자간협상에 끌어들이고, 다른 한편으로 멕시코의 저임금과 미국의 선진기술 및 관리기술을 결합시켜 국제적 경쟁력을 회복함과 아울러 지속적인 무역적자 현상을 해소하려 했다. 미국의 수출규모를 증대시키고 미굯한업에 새로운 성장의 계기를 부여하여 거대한 고용효과를 창출하는 효과를 기대하고 있었다.
(2) 멕시코
수출지향적 발전모델을 보완하기 위해 멕시코정부는 1983년부터 무역자유화 정책을 시행, 이후 중남미, 미국, EC, 환태평양지역과의 개별적 경제관계를 확대하고 라틴아메리카통합기구(ALADI) 및 GATT와 같은 지역 또는 다자간 국제기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요컨데, NAFTA를 통해 멕시코가 추구하려는 정책목표는 미국과의 무역에서 특별우대를 받는 것뿐만 아니라 미국시장에서의 접근도를 높이고, 아울러 무역자유화로 수출주도형 발전모델에 필요한 외국자본의 멕시코 투자효과를 노리며 멕시코 국내개혁을 제도화하고 안정화한다는 것이었다.
(3) 케나다
무엇보다도 케나다 정부는 만일 NAFTA에 참여하지 않을 경우 미국, 케나다, 멕시코의 3국관계가 ‘바퀴축과 살’의 관계로 전환되지 않을까 우려해야 했다. 즉, 미국은 케나다와 멕시코 양국에 자유로이 접근하여 케나다에서 값싼 멕시코로 수입을 전환하고, 멕시코의 저임금과 자국의 자본 및 기술을 결합시켜 케나다시장을 장악할 우려가 있었다. 또한 케나다는 미국시장에서 멕시코와 경쟁해야 했다. 다시 말해, 만일 케나다가 NAFTA에 참여하지 않을 경우 미국은 케나다와 멕시코에서 무역과 투자의 자유로운 이동이 보장되는 반면, 케나다와 멕시코는 미국시장에만 자유로운 접근이 보장되는 비대칭적 관계로 진행될 우려가 있었던 것이다. 또한 정치, 경제,사회적 급변화에도 불구하고 미국이라는 거대시장 때문에 멕시코 경제는 점진적으로 성장할 것이고 따라서 멕시코 인구 8000만명의 시장과 거기서 생산되는 저렴한 중간재를 무사할 수 없다는 경제적 손익계산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문제: 오늘날 세계에서 지식과 기술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는 배경에 대해 설명하시오.
오늘날의 세계에서 지식과 기술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흐름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첫째, 지식과 기술은 점점 더 누가 얼마만큼의 부와 힘을 가지는가를 결정짓는 요소로 부상하고 있다. 지식과 기술은 부상한 국가를 위해서나, 부유한 개인을 위해서 점점 더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간주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과거에는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가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를 구별지었다고 한다면, 21세기 세계에는 지식과 기술에 의해 계급이 구분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둘째, 지식과 기술의 생명주기가 더욱 짧아지고 있다. 한두 가지의 지식과 기술을 가지고 국가적 부를 창출해 내고 한 개인이 평생동안 우월한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시대는 지났다. 새로운 지식과 새로운 기술을 어떻게 창출하고 획득하며, 또는 보호 내지 보급하는가 하는 문제가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다.
셋째, 지식과 기술의 전파속도가 더욱 빨라지고 있다. 과거 구텐베르크의 인쇄술발명은 지식전파 속도에 커다란 혁명을 일으켰다. 포스트 구덴베르크시대라고도 불리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지식과 기술의 전파는 인쇄매체 이외의 다양한 매체들을 통해 더욱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다.
첫댓글 으윽......ㅠ.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