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세네요. 겁 없는 비입니다.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그대로 땅에 내리 꼿히네요.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언젠가 티 브이에서 가미가제 특공대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생각났습니다. 단 한 순간의 목적을 완수하기 위해 목숨까지 내 던지 한 파일럿의 숨은 이야기를 취재한 프로였죠. 전술보다는 한 인간을 집중 조명한 프로였습니다. 그 프로를 보면서 과연 인간이란 존재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가 라고 생각 했던 게 기억났습니다. 그 때는 술을 마시고 있던 때라 기네스를 마시며 봤던 기억이 나네요. 안주는 없이. 지금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들이 그 가미가제 비행기들처럼 보였습니다.
‘너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그렇게 모든 걸 다 던지고 있니?’
바닥에 꼿히는 빗방울들을 향해 질문했습니다. 삶의 심오한 문제를 풀 생각이 아니라, 그저 원망에 가까운 질문이었죠. ‘그만 좀 내려줘’ 라는 단순히 푸념에 가까운 질문이었죠.
긴 한숨이 흘러 나왔어요. 가방을 최대한 몸 쪽으로 끌어안고 우산을 폈지만, 선뜻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더라구요. 아마 너무 땅만 보았던 탓인 것 같아, 잠시 하늘을 올라다 보았습니다. 그리고 어느 새 움츠려든 척추와 어깨를 살짝 폈어요. 그리고 이어폰을 귀에 꼿고 음악을 틀었습니다. 건스 앤 로지즈의 'Knockin' on heaven's door'가 흘러 나오더군요.
‘그래도 뚫고 가야겠지.“
그렇게 액슬의 목소리에 용기 내서 빗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순식간이었습니다. 피할 수 없었어요. 용기 백배한 빗방울들 속에서는 제 자신을 온전히 지킬 수 없더라구요. 불과 몇 발자국 떼지도 않았는데, 빗방울들은 제 신발과 바지를 자신의 영토로 만들어 버렸죠. 속수무책.
‘좋아, 그렇단 말이지.’
엉망이 된 신발과 바지를 보며 결심했습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즐겨 보자. 어떻게? 바로 드문드문 고여 있는 물웅덩이를 발로 꽉 밟는 거죠. 물론 주변에 사람이 있나 없나 확인한 뒤 했습니다. 타인에게 피해 주면 안되니까요. 그래서 살짝 주변을 돌아본 뒤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뒤, 고여있는 물웅덩이를 꽉꽉 밟으며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어 갔어요. 어쩜 그리 재밌는지. 꼭 나이를 삼십 년 쯤 신에게 던져준 기분이었어요. 고여있던 물이 사방으로 퍼질 때의 그 느낌은 정말, 최고에요.
“Knockin' on heaven's door."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비오는 날 물 웅덩이만 보며 견딜 수 없이 꽉꽉 밟고 싶거든요. 뭐가 그렇게 재밌냐고 물어보면 뭐라 설명 할 순 없지만, 상당히 재밌어요. 해보세요. 돈 버는 것보다 훨씬 더. 때론 함께 할 여자친구가 있으면 좋겠지만, 이제 그런 여자를 찾기에는 우주가 너무 빨리 팽창하고 있죠. 예? 무슨 소리냐구요? 글쎄요. 모든 감정을 너무 솔직하게 말하면 재미없잖아요. 뭐든 여유를 갖고 받아 들이는 게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아주 멀리에도 사람이 보이지 않고 넓은 광장에 혼자 있을 때도 있었죠. 마치 이름 모를 행성에 혼자 남겨진 기분이랄까 그랬어요. 그럴 때면 점프를 해서 두 발로 물 웅덩이를 꽉 밟기도 했어요. 한 발로 밟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기분도 좋고 물도 멋지게 퍼졌죠. 생각해 보니 열 번 조금 넘게 물웅덩이를 밟은 것 같아요. 물론 그런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사람들도 있었죠. 그런 시선 따위는 괜찮아요. 일일이 그런 것에 신경 쓰면 내가 무엇에 행복한 지 어떻게 알겠어요. 결국 행복은 혼자 찾아야 하고 혼자 느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내가 느낄 수 있는 행복은 모두 내 마음속에 숨어 있죠. 전 그렇게 생각해요. 이제는 속지 않아요. 행복은 절대 외부에서 오지 않는다는 걸 아니까요.
버스 정류장에는 이미 육십은 넘어 보이는 아저씨와 여학생 두 명, 남학생 두명 그리고 모녀로 보이는 여자와 꼬마 여자 아이가 있었어요. 육십이 넘은 남자는 화가 난 듯한 굳은 표정으로 어금니를 꾹꾹 눌러대며 버스가 오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 모습이 꼭 오랫동안 방치해 둔 녹슨 자동차처럼 보였어요. 조금만 건드려도 아주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녹이 가득한 자동차 말이죠. 그에 비해 두 명에 여학생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강아지처럼 호기심이 왕성해 보였어요. 어떻게 같은 인간인데 저리 차이가 날까?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옆에 서 있는 남학생들은 여학생들과 비슷한 또래처럼 보였는데 어딘지 모르게 여학생들에 비해서는 침울해 보였어요. 어깨도 좀 더 움추려 있고요. 한 때는 그런 학생들의 모습이 학교 교육 때문이라 했는데, 요즘은 과연 정말 그것 때문일까 라는 생각을 해요. 학교보다는 가정교육 탓이 아닐까 하고요. 물론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떤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에요. 신념도 없고요. 그저 한 개인으로써 생각해 본 거에요. 정류소에서 가장 눈에 띄었던 건 뭐니 해도 꼬마 여자 아이였어요. 레이스가 달린 어린 왕자가 그려진 빨간 우산을 양 손으로 꼭 쥐고 있는 모습이 얼마나 귀엽던지. 특히 빨간 바탕에 하얀 별이 그려진 장화를 신은 건 몹시 부럽더라고요.
정류장에 제가 들어간 자리는 없었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혼자 우산을 든 채 정류장 밖에서 그들에 모습을 지켜봤죠. 그런데 갑자기 우산을 뚫으려는 듯 빗줄기가 강해지더라고요. 마치 주먹으로 문을 두드리 듯 강한 충격이 우산을 잡고 있는 손으로 전달됐어요. ‘이봐, 일어나. 빨리 깨어나라구. 너무 늦었어!’ 라고 고함도 함께 내 지르면서 말이죠.
그렇게 버스를 기다렸습니다. 빗줄기는 점점 더 강해졌고요. 내가 어디로 가야 한다는 생각조차 잊어버리게 할 만큼. 그리고 버스가 도착 했을 때 쯤에는 기묘한 상상에 사로 잡혀 있었습니다. 아주 이상한 상상이죠. 정말 이상할 지 모르지만 그냥 읽어 주세요. 그건 바로, 나라는 인간 자체가 바로 천국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어요. 내가 들고 있는 우산은 천국의 문이고요. 천국의 문을 두드리는 건 내가 아니라 빗방울들이다. 그들이 바로 천국으로 들어오기 위해 끊임없이 천국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 거다. 뭔지 모르지만, 순서가 제멋대로 바꾸어진 기분이었어요. 나라는 존재가 완전히 뒤틀려 졌다고 할까? 그랬어요. 마치 높이 쌓아 놓은 블록을 몽땅 무너트리고 처음부터 다시 쌓는 기분. 그 기분을 안고 버스에 탔습니다. 그리고 어디로 도착했을까요? 바로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카페입니다. 천국에도 이런 카페 하나쯤 있으면 좋겠어요. 물론 그곳에서도 지금처럼 혼자 책을 읽거나 글을 쓰고 있겠죠. 아마도.
여기까지입니다. 뭐를 특별히 이야기 하고 싶은 건 없었어요. 그저 이 묘한 감정이 사라지기 전에 글로 남기고 싶었어요. 지금도 여전히 밖에는 비가 내리네요. 또 다시 천국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며 가야겠죠. 이번에는 저 빗속을 걸으며 어떤 상상이 들지 벌써 설렘이 가득하네요. 참, 이어폰으로 음악은 계속 들었어요. 처음에는 건스 앤 로지즈의 녹킹 온 헤븐스 도어로 시작해서 위저의 온리 인 드림, 서태지의 로버트, 콜드 플레이의 인 마이 플레이스를 들었어요. 버스에 탔을 때는 콜드 플레이의 픽스 유 가 나왔죠.
왠지 천국은 그런 곳이 아닐까 생각해요. 호기심을 일으키는 것이 가득해서 언제까지나 어린아이로 머물게 만드는 곳이라고. 물론 확실한 증거나 강력한 논리를 가지고 주장하는 건 아닙니다.
첫댓글 ㅎㅎ. 상당히 관찰력이 좋으시고 감수성이 있으시네요. 작가의 기본적 자질이라고 생각됩니다. 로지즈의 음악과 비와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뭔가 깨닳음 비슷한 것이 왔다는 것이겠죠. '어린 아이와 같이' 살아가는게 행복이 아닐까 라는데 동의 합니다.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