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센 제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세력이 안서의 4개 진(쿠차·언기·우전·소륵)에 도전함에 따라 고선지 장군은 석국(石國, 타슈켄트) 의 탈라스로 진격하게 된다. 사라센 제국을 중심으로 한 세력들은 당의 포로가 된 석국 왕이 한 정치가에 의해 살해된 사건이 발생하자 침공 준비를 서둘렀다.
사라센의 침공 계획을 사전에 탐지한 고선지는 안서도호부에서 군사를 이끌고 출정했다. 출정할 즈음 고선지는 한족과 이민족 병사로 구성된 3만여 명을 거느렸다. 고선지는 원정길에 그가 지휘하는 안서 지역의 서역 병사 3만여 명을 합류시켰던 것 같다. 이 같은 추론은 아랍측 사료에서 사라센이 고선지의 중국 병사 5만명을 죽이고 2만명을 포로로 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때는 751년 7월경이었다.
고선지의 군대는 탈라스 강가의 탈라스 성에서 기습공격을 당하였다. 그때 그곳에서 고선지 부대를 공격한 것은 사라센 제국의 연합군이었다. 그 전황은 다음과 같다. 고선지가 안서의 쿠차에서 700여 리나 깊숙이 들어가 탈라스의 긍라사 성에 이르러 대식국(大食國)과 마주쳤다.
그곳에서 서로 닷새 동안이나 대치하였는데, 이때 고선지 휘하의 케르룩 유목 부중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런 위기상황에서 대식군이 당군을 협공하니 고선지가 크게 패배하였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때 고선지의 사졸들은 거의 다 죽음을 당하거나 포로가 되었으며, 살아남은 자는 불과 수천 명 정도였다. 이는 ‘자치통감’에 전하는 내용이다.
탈라스 전투는 750년 우마이야 왕조를 멸망시킨 압바스 왕조의 이슬람 군과 당 군이 격돌한 동서 문명의 대회전이다. 달리 표현하면 탈라스 전투는 서아시아를 평정한 신흥 압바스 왕조와 동방에서 세계국가를 구가하던 당 제국의 충돌이다.
전투에서 패배를 경험한 적이 없는 고선지였다. 그런 고선지가 탈라스에서 참혹하게 패배하였던 이유를 몇 가지로 추정하고 싶다.
하나는 고선지가 적진 깊숙이 무려 700여 리나 진격했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이 적진 깊숙이 진격한 것은 고선지가 즐겨 썼던 전법 중 하나다. 그러나 앞의 토번이 험준한 힌두쿠시 산맥 넘어 있어 지리적으로 고립되어 있던 것과 달리 이슬람 세력권은 그렇지 않은 지역에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고선지가 크게 주목하지 않은 것이 실수인 것 같다. 이런 지리적 상황에 대한 고려 없이 700여 리나 깊숙이 진격하였는데도 고선지는 척후에 거의 신경쓰지 않았던 것 같다.
어찌 보면 고선지가 적진 깊숙이 들어갔기 때문에 척후병을 파견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고선지는 토번 연운보 공격에서는 작전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3군으로 나누어 진격하였던 작전을 썼다. 그뿐만이 아니다. 만년설과 빙하로 덮여 있는 무생물의 세계, 힌두쿠시 산맥을 통과하여 탄구령을 내려갈 때는 고도의 심리전을 사용하였던 용의주도한 지휘관이었다는 사실을 무색하게 한 진격이 탈라스 전투였다.
고선지 장군이 탈라스까지 거침없이 진격하였던 다른 이유도 있다. 즉, 750년에 석국을 정벌하였던 경험과 석국 일대를 자주 평정하였던 경험 때문에 고선지는 석국 정벌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는지 모른다. 반면 고선지는 휘하에 7만명이나 되는 대군을 거느렸다는 사실에서 탈라스 전투가 간단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두번째는 고선지의 군대가 전열을 정비할 시간적인 여유를 갖지 못하였다는 사실이다. 사실 고선지는 탈라스까지 원정하느라 지친 병사들을 곧바로 전투에 투입할 만큼 무모한 지휘관은 아니었다. 이는 고선지가 토번을 정벌할 때 3분법 같은 공격대형을 사용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다. 하지만 탈라스 전투를 앞두고는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엄청난 수의 사라센 군이 고선지의 기민한 전술을 미리 알아차리고 이에 대응하는 재빠른 군사작전을 개시하였기 때문에 고선지는 어쩔 수 없이 허점이 뚫렸다.
세번째는 케르룩 부중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이다. 케르룩은 714년경 양주(凉州)에서 항복하면서 당에 편입되었던 돌궐의 지파다. 그런데 양주는 당에 의해 멸망된 고구려 유민들이 잡혀갔던 지역이다. 고선지 일가가 한때 생활하였던 곳도 양주였다. 아무튼 케르룩의 모반은 탈라스 성에서 5일 동안이나 사라센 군과 대치하던 중에 발생하였기 때문에, 당군에는 그야말로 치명적이었다.
이는 8세기 후반부터 당의 위치가 흔들림으로써 일어났던 많은 반란 가운데 하나로 보아도 좋을 듯싶다. 고선지의 병사는 사라센 군에 의한 협공보다 탈라스 성안에서 일어난 케르룩 부중의 반란으로 혼돈에 빠졌다. 그 결과 고선지 장군은 참담한 패장이 되었다. 그러나 고선지에게도 책임이 있다.
그에게는 이미 석국을 정벌하고도 아랍세계가 새로운 압바스 왕조 중심으로 통합돼 그의 휘하 유목부락이 동요하고 있었음을 사전에 감지하지 못한 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압바스 왕조에 대한 정보 부재로 탈라스 전투에서 참패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고선지를 감시하는 감군들의 역할이 고선지에 대한 감시 외에 적정을 살피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음을 감안하면 정보 부재가 고선지의 책임만은 아니다. 이러한 감군의 주임무를 이때 환관들이 감당하지 못하였던 것이 틀림없다.
만약 고선지 장군이 토번 정벌때 사용하였던 작전을 그대로 사용하였다면 탈라스 전투의 승리는 고선지 몫이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토번 연운보 공격에 앞서 특륵만천에서 전열을 가다듬었던 것처럼 당군이 탈라스 진격에 앞서 전투태세를 갖춘 후 일시까지 지정하는 정밀한 전술 전략을 구사하면서 삼분법의 공격대형을 갖추고 사라센 군과 싸웠다면 고선지는 탈라스 전투에서 승리하였을 것이라는 추정이 어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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