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아름다워(1068) - 고구마에 얽힌 사연
하늘 맑고 들녘은 황금물결, 가을기운이 완연하다. 쾌청한 가을날, 은퇴동료들의 정례모임에 맞춰 남녘나들이에 나섰다. 차창으로 살피는 황금들녘이 내 것 인양 마음부자, 모두에게 넉넉함을 안기는 가을이어라!
차창으로 살핀 황금들녘
정례모임 후 인연이 있는 지인과 함께 예전에 자주 드나들었던 천혜경로원을 찾았다. 코로나 여파로 오랜만의 방문인데도 고향에 온 듯 아늑한 분위기의 환담이 정겹고 작별에 즈음하여 건네는 고구마 봉지가 따뜻하다. 장사꾼 전용의 근사한 통에 따끈하게 구워 요양원 어른들과 함께 나누던 군고구마의 추억이 그리워라. 서울생활이 어려웠던 청소년기에 신촌의 골목길에서 고구마를 구워 팔던 전력을 뉘 알랴.
어릴 적 고향에서 가장 풍성한 작물은 윗목에 여러 가마를 쌓아놓은 고구마 더미, 화롯불에 구워먹던 구수한 맛을 어찌 잊으랴. 한국전쟁 후 북한에서 살다 세상을 떠난 둘째 형님이 자식들에게 전한 사연, 내 고향 뒷밭의 황토고구마가 맛있었다. 지금도 마트에서 사온 고구마를 찌거나 구워서 자주 먹는다. 가을 들어서 직접 농사지은 지인들이 보내준 고구마가 줄을 잇네.
지인들이 보내준 고구마 무더기
우리나라에 고구마를 처음 들여온 이는 조선 영조시대 고위관직에 오른 조엄, 조선통신사 정사로 대마도를 다녀오면서 고구마 종자를 들여온 것으로 전해진다. 2년 전 조선통신사가 오가던 길 따라 부산에서 서울로 오는 노정 중 충청북도 음성지역에서 고구마밭을 지나며 같이 걷던 일행과 고구마에 얽힌 조엄의 자취를 회상하기도.
우연의 일치인가, 오늘자 신문의 고구마에 얽힌 조엄 관련 칼럼이 반갑다. 그 내용을 살펴보자.
‘아침저녁으로 차고 맑은 바람 불어오니 과연 시월이다. 뜨거워진 머리를 식혀주고, 몸 곳곳에 채워지는 염증도 호호 불어주는 가을바람. 그 덕에 숨 쉴 만하니 달빛 또한 진하게 느껴진다. 멀리 밤하늘을 올려다보니, 어느새 이지러진 달이 손톱만 해졌다. 이렇듯 한참 운치에 빠져 있는데, 지인에게서 고구마순을 볶아오겠다는 문자가 왔다. 말 나온 김에 고구마 얘기나 해드려야겠다. 두어 달 전, 범어사에서 무비 큰스님을 친견하고 돌아오는 길에 용학 스님으로부터 들은 낭백(浪伯) 스님의 환생담이다. 동래관찰사 조엄(趙曮·1719~1777)의 실화라 한다. 사연은 이러하다.
불교가 핍박받던 조선시대, 범어사에 낭백 스님이라는 분이 계셨다. 스님은 가난한 백성을 위해 밭을 개간하여 야채를 심어 먹게 해주고, 샘을 파 물을 마실 수 있게 해주었으며, 밤에는 짚신을 삼아 행인에게 나눠주었다. 입적하기 전 스님은 대중 앞에서 세 가지 서원을 했다고 한다. 첫째, 관리들이 절에 오면 꼭 일주문 앞에서 내리는데, 스님은 아래쪽 어산교에서 내리겠다고 했다. 둘째, 입적한 뒤 쓰던 방을 봉해두면 훗날 찾아와 직접 열 것이라 했으며, 셋째, 절에 어려움은 없는지 주지에게 물어 해결할 테니, 이 세 가지를 실천하는 사람이 있으면 자신이 환생해서 온 줄 알라는 말씀이었다.
그 후 40여 년이 지나 제자들조차도 노승이 되었을 무렵, 조엄이라는 높은 관리가 찾아왔다. 그는 상례를 깨고 어산교 앞에서 말을 내려 절까지 걸어 올라왔다. 법당을 참배한 뒤 도량 구석구석 텃밭까지 둘러보고는 자신이 쓰던 방으로 가 폐문을 뜯었다. 문을 열고 바라보니 시선이 머무는 그 자리에 “문을 연 자가 곧 문을 닫은 자니라(開門者是閉門人)”라고 쓰여 있었단다. 즉 문을 연 자 조엄이 바로 문을 봉한 자 낭백 스님이라는 얘기다.
전생에도 많은 이들을 구하며 생을 바친 스님은 다시 태어나서도 자신이 서원한 대로 살았다. 낭백(조엄) 스님에게는 과거 현재 미래의 부처가 오직 백성이었다. 그분의 유산 가운데 하나가 고구마다. 통신사로 대마도에 갔다가 고구마 종자를 가져와 보급한 것이 오늘에 이르게 된 사연이다. 앗, 고구마! 달이 고구마로 변했다.’(2023. 10. 11 중앙일보 원영 스님, 고구마같이 생긴 달에서)
달 모양의 고구마
* 1년 반 넘게 이어지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선에 이어 며칠 전 발생한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의 이스라엘 기습공격으로 전 세계가 긴장하고 있다. 이에 따른 한반도의 안보지형도 일촉즉발의 위험상황, 국가역량을 총동원해도 쉽지 않은 과제 앞에서 당리당약에 매몰된 여야의 정쟁이 안타깝다. 우리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나라와 겨레 위한 지혜와 경륜을 발휘하였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