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방송통신위성 ‘무궁화2호’, 미국 케이프커내버럴 공군기지에서 발사
방송-통신위성 ‘무궁화2호’가 1996년 1월 14일 미국 케이프커내버럴 공군기지에서 발사됐다. 무궁화2호는 크기와 성능면에서 1호위성과 똑같지만 1호위성이 발사실패로 수명이 4년6개월 밖에 되지 않는 반면 2호위성은 10년 이상 사용할 수 있게 제작됐다.
무게 약 6백12Kg으로 12개의 통신용 중계기와 3개의 방송용 중계기가 실렸다. 방송용 중계기는 각각 4채널을 확보할 수 있어 2호위성으로만 12개의 디지털 위성방송이 가능하게 됐다. 2호위성의 위치도 적도위 동경 1백16도 보르네오 상공 3만6천Km지점으로 1호위성의 바로 옆이었다. 1호위성과 거리는 35-50Km를 유지했다. /조선
[1987년] 서울대생 박종철군 고문사
← 서울대 재학 중 경찰 고문을 받다 숨진 고 박종철군.
서울대생 박종철군이 치안본부 남영동 분실에서 수사요원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의 물고문을 받다 1987년 1월 14일 사망했다. 박종철군은 서울대 `민주화추진위원회`사건 관련 주요 수배자인 박종운의 소재파악을 위해 참고인 자격으로 영장없이 불법 연행돼 치안본부에서 조사를 받던 중이었다.
15일자 석간신문에 "책상을 ‘탁’치자 ‘억’하고 쓰러졌다"는 경찰발표에 의해 단순 쇼크사로 보도됐으나 16일자 신문에 오른쪽 폐에 탁구공 크기만한 출혈이 있었다는 부검입회 가족의 증언이 실리고 17일 사체를 첫 검안한 의사 오씨의 “조사실 바닥에 물이 흥건했다”는 등 고문 시사 증언이 신문이 보도되면서 사건의 실체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결국 치안본부 특수대는 17일 수사에 착수 19일 고문사를 공식인정하면서 조한경 강진규 2인을 고문 치사 혐의로 구속했다.
그러나 5월18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성명발표를 계기로 이 사건이 축소조작되었으며 고문가담 경관이 모두 5명이었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짐으로써 정권에 대한 국민의 분노와 민주화열기가 다시 폭발했다. 국민의 반독재 민주화운동은 격렬하게 전개되어 곧바로 6월항쟁으로 이어짐으로써 이 사건은 5공 몰락의 기폭제가 됐다.
이후 박군의 유족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내, 2억4000여만원의 배상금을 지급받게 됐다. 그러자 국가는 다시 고문사건에 연루됐던 일선 고문경관들을 상대로 구상금 청구소송을 냈다. 대법원은 지난 2000년 12월 26일 "배상액의 70%를 일선 고문 경관들이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리고 2001년 3월 14년 만에 ‘박종철’군은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최종 확정돼 명예회복됐다./조선
[1974년] 긴급조치 3호 선포(12월 27일 해제)
긴급조치 준비작업 : OPEC의 석유값 인상을 보고 받자, 朴 대통령은 즉시 김정렴 실장에게 "경제난국을 이겨 나갈 수 있는 근본적인 조치"를 마련토록 지시했다.
金 실장은 이 일을 내각에 맡기지 않고 청와대에서 직접 다루기로 했다. 이렇게 돼서 이 과제는 김용환(金龍煥) 경제제1수석비서관의 총지휘 하에 고병우(高炳佑) 비서관(후에 건설부장관 역임, 97 동계유니버시아드대회 조직위원장)이 실무책임을 맡고, 8·3 조치 작업에 참여했던 이현재(李賢宰) 과장, 심형섭(沈亨燮) 과장(후에 재무부 국장, 아시아개발은행(ADB) 이사, 현 대한재보험 사장)이 중심이 되어 일을 해 나가게 됐다. 8·3 조치 때와 같이 당시의 정부종합청사 부근에 있는 서린호텔에 방을 잡고 연말 연초의 휴가를 반납한 채 밤낮 없이 작업을 진행해 나갔다.
발표 시기는 대통령의 74년 연두기자회견이 1월 12일로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이날을 전후해서 발표한다는 스케줄이 마련됐다. 이렇게 되니 불과 20일이라는 시간 여유밖에 없게 됐다. 案을 작성하는 데만도 이만한 시간이 필요한데다 세법개정, 예산 등이 포함되기 때문에 국회통과 사항이 된다. 그러나 국회에서 통과시키자면 시간상 도저히 불가능했다. 나머지 방법이라고는 「대통령 긴급조치권」을 발동하는 길뿐이었다. 그래서 朴 대통령의 사전 승인을 받게 됐는데, 이때 朴 대통령은 "지금 우리나라는 경제적 위기에 처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우물쭈물할 때가 아니지 않느냐?" 하면서 OK를 했다. 우선 헌법 제53조, 즉 「대통령은 천재지변 또는 중대한 재정 경제상의 위기에 처하거나 국가의 안전보장 또는 공공의 안녕질서가 중대한 위협을 받거나 받을 우려가 있어 신속한 조치를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할 때에는 … 필요한 긴급조치를 할 수 있다」에 해당된다는 뜻이었다.
이렇게 돼서 본 건은 「대통령 긴급조치 제3호」라는 명칭이 붙게 됐다. 긴급조치 제1호는 「유신 개헌논의 금지」에 관한 것이고, 제2호는 「긴급조치 위반자를 심판하기 위한 군법회의 설치」에 관한 것이니 이 두개의 긴급조치는 유신체제를 위한 것이다. 그러니 긴급조치 제3호야말로 국가위기 때 발동된 첫 번째 긴급조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작업방향은 에너지위기 이후 물가파동에 따른 민생불안을 안정시키고 불황의 늪으로 빠져드는 기업경기를 동시에 부양하는 문제로 초점이 모아졌다. 에너지위기 이후 관계부처가 제시한 각종 시책을 중심으로 기본적인 틀은 이미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작업은 빠른 속도로 진행되어 나갔다. 작업진행 과정에서 관계부처의 의견이 필요한 사항이 생기면, 관계자들을 불러들이는 일은 高 비서관이 맡아서 했다. 외부의 눈치를 채지 못하게 철저한 위장전술을 쓴 것이다. 관계부처에서 이의를 제기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다만 상공부에서 주요물자의 관세 인하문제를 놓고 반론을 제기하기도 했으나, 경제난국을 타개해 나간다는 대명제 앞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실무작업반이 마련한 초안을 중심으로 관계부처의 국장 및 차관보 등을 불러 구체적인 문제점을 보완하는 작업은 74년 1월 2일부터 시작하여 대통령의 연두 기자회견 날인 12일에 일단 마무리되었다. /Google
긴급조치 3호(1974.1.14)
1. 저소득층의 부담을 경감하기 위하여
가. 근로 소득세, 사업 소득세 및 주민세를 1974년 1월부터 12월까지 면세 또는 대폭 경감한다.
나. 국민 복지 연금 및 교원 연금제도의 실시를 1년간 연기한다.
2. 버스 등의 대중 교통수단의 요금 인상을 최소한으로 억제하기 위하여 통행세를 감면한다.
3. 농가 소득의 증대와 적정 미가의 유지를 위하여 1973년산 미곡 수매 가격을 가마당 500원씩 인상하여 그 수매량을 대폭 늘리고 이미 정부가 수매 완료한 분에 대해서도 동액을 추가 지급한다.
4. 영세민의 취업 기회를 보장하기 위하여 긴급 취로 대책비 1백억원을 확보한다.
5. 중소 상공업에 대하여 특별저리 금융자금 3백억원을 지원하고 이에 필요한 예산 조치를 한다.
6. 임금의 우선변제제를 신설시행하고 임금채불, 부당해고, 및 근로조건의 악화를 방지하기 위하여 악덕 기업가에 대하여는 가중처벌 할 수 있도록 조치한다.
7. 재산세의 면세점을 인상하고 각종사치성입장세, 보석, 테레비전, 냉장고, 고급주류, 고급주택, 자가용승용차에 대한 조세를 중과한다.
8. 유류를 절약하기 위하여 휘발유에 대한 세율을 인상한다.
9. 공무원의 급여 인상과 급여 체계의 조정을 앞당겨 1974년 2월부터 실시한다.
10. 이상의 조치와 아울러 정부의 관계 각 부처는 다음 사항을 지체 없이 추진할 것을 지시한다.
이하 각 세부항은 생략함. (함께 하는 역사 교실) /Google
[1959년] 북한 노농적위대 창설
← 시가행진을 하는 조선인민군
1959년 1월 14일 북한에서는 전인민의 무장화 방침에 따라 민간 군사조직인 노농적위대가 창설되었다. 북한의 군사조직은 크게 정규군인 조선인민군과 예비병력인 노농적위대, 교도대, 붉은청년근위대 등으로 나누어진다. 1959년 결성된 노농적위대는 조선노동당의 당조직을 통해 지방 행정 및 직장 단위로 지역과 인구 등의 특수성에 따라 편성되어 있다. 1963년 이후 북한 지도부는 노농적위대에서 선발된 정예요원들로 각급 공장 및 기업소에 교도대를 조직했다. 일반기업소의 경우 젊은 층은 대부분 직장 교도대에 편성되어 있으며, 지방의 경우는 대부분이 노농적위대에 속해 있다. 또한 17~30세의 여성들도 노농적위대에 속해 있으며 일반적으로 북한의 정규군 체계와 비슷한 편성을 유지하고 있다. 1970년에는 15~16세의 남녀 학생들로 구성된 학생군사조직인 붉은청년근위대가 창설됨으로써, 북한은 전 인구의 약 30%를 동원 대상으로 하는 준군사조직을 갖추게 되었다./브리태니커
[1957년] 영화배우 험프리 보가트 사망
← 〈Sahara〉에 출연한 보가트(1943)
1899. 12. 25 ~ 1957. 1. 14
'아프리카의 여왕`(1951년작)으로 아카데미 주연상을 수상한 미국 영화배우 험프리 보가트가 식도암으로 1957년 1월 14일 사망했다. 향년57세였다. 보가트는 1940~50년대 영화에서 거친 남성의 이미지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사망 3일 후 비버리 힐즈 교회에서 거행된 장례식에서는 '아프리카의 여왕'을 연출한 존 휴스톤 감독이 간결하고 감동적인 조사를 읽어 사람들의 눈물을 자아내게 했다. 영화 '탈출'에서 공연한 로렌 파콜과 4번 째 결혼했지만 '처 다음으로 좋아하는 것은 요트'라는 그의 뜻을 기려 관에 그가 가장 좋아하는 요트 '산타나호'의 모형을 함께 넣어 묻었다. /조선
[1954년] 마릴린 먼로,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와 결혼
← '세기의 결혼' 으로 대서특필된 먼로와 디마지오.
미국 최고의 인기를 자랑하는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와 섹스 심벌 마릴린 먼로가 1954년 1월 14일 샌프란시스코 시청에서 결혼했다. 매스컴은 이들의 결혼을 ‘세기의 결혼’이라고 대서특필했다.
먼로를 독점하려했으나 먼로는 이미 만인의 연인이었다. 먼로의 인기는 그녀를 한 남자의 여자로 가두어 두려 하지 않았다. 두사람은 물과 기름이었다. 결혼식에서부터 성격차가 드러났다. 결혼식을 조용하게 치르려는 디마지오와 달리 먼로는 화려한 결혼식을 원했다. 먼로는 디마지오와 상의도 없이 각 매스컴에 연락, 기자들과 500여명의 하객들을 모이게 한 후 성대한 결혼식을 치렀다. 먼로는 결혼증명서에 ‘노마 진 모튼슨 보거티’라는 본명을 서명했으나 나이는 실제나이보다 세 살 아래인 스물 다섯으로 기록했다.
허니문 기간동안 먼로는 디마지오의 사전 스케줄에 맞춰 일본행에 동행했다. 일본에서의 열렬한 환영에 먼로는 고무됐고, 그곳에서 즉흥적으로 한국행을 결정했다. 디마지오는 그녀의 한국행에 동참하지 않았다. 막 전쟁이 끝난 폐허에서 그녀를 맞은 주한 미군 병사들은 열광했다. 병사들의 폭발적인 환영은 그녀를 더욱 들뜨게 했고 심지어 행복감까지 느끼게 했다. 먼로의 한국행은 그녀와 디마지오를 헤어지게 한 결정적인 이유가 됐으며 먼로의 인생과 경력의 정점이기도 했다./조선
[1953년] 티토. 유고 초대 대통령에 선출
← 요시프브로즈 티토
1948년 유고가 코민포름으로부터 추방된 후 국내에서는 자주관리형 사회주의 노선을, 대외적으로는 비동맹중립외교를 추진해 온 유고슬라비아 수상 티토(Tito, Josip Broz, 1892~1980)가 1953년 1월 14일 개정헌법에 의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개표 후 티토는 우뢰와 같은 박수를 받으며 회의장에 모습을 드러내 "‘인민 모두에게 권력을’이라는 슬로건이 달성된 지금 국가에 의한 강제관리는 이미 필요없다"고 연설했다. 회의장에 있던 선거인은 ‘우리들의 티토’라며 환호를 보냈고 밖에는 수 만명의 군중이 몰려들었다.
노동자 출신인 티토는 2차 대전 때 독일에 대항하는 빨치산으로 활약하다 유고가 독립하자 정권을 장악했다. 이때부터 유고는 티토의 화합적 리더십과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안정된 국가를 유지했다. 티토는 스탈린주의와 거리를 두는 독자적인 사회주의 노선을 펼치며 냉전시대 양극대결에 휘말리지 않는 지혜를 보였다. /조선
티토는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의 국경지대에 있는 쿰로베츠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크로아티아인이고 어머니는 슬로베니아인이었다. 형제는 15명이었는데 그는 7번째였다. 그의 공식적인 출생일은 5월 25일로 되어 있으나 가난한 대가족의 아이들은 대개 출생일이 정확하지 않다. 13세 때 시사크로 가서 자물쇠 제조공이 되기 위한 도제생활을 했다. 청소년시절에는 트리에스테·보헤미아·독일 등지에서 금속품제작자로 일했다. 이때 금속제조업자의 노동조합과 크로아티아 사회민주당에 참여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자그레브에 있는 제25연대에 참여했는데, 이 연대는 1914년 8월 세르비아에 대항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그는 반전활동을 확산시켰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페트로바라딘 감옥으로 호송되었다. 그러나 1915년 1월 무죄판결을 받아 카르파티아 전선에 배치되어 있던 제25연대로 귀대했다. 이후 그는 이곳에서의 용감한 행동으로 훈장을 받았다.
[1949년] 항공사관학교 창설
1949년 1월 14일에 설치된 항공사관학교는 3월 15일에 현역사병 중에서 우수한 자 45명을 제1차 소집학생으로 선발하여 입교시킴으로써 개교를 보았는데 동교는 5월 31일 김포 비행장 안으로 병사를 이동하고 6월 10일에 제1기 사관후보생 97명을 입교시켜 본격적인 군 간부요원 교육에 착수하였다.
또한 1949년 10월 1일에는 마침내 대통령령 제254호에 의거하여 1,600명의 병력과 20대의 항공기를 가지고 육군에서 분리하여 독립된 군으로서 육·해군과 정립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초대 총참모장에 김정열 대령이 보직되어 독립된 군으로서의 기구를 개편하는 등 발전을 도모한 바 12월 17일에는 본부청사를 국방부 별관 내에서 중구 회현동으로 이동하는 한편 김포와 여의도 기지이외에 제주도, 광주, 대구, 군산, 수원기지를 관할하고 여기에 각 기지부대를 전개하였다.
[1946년] 경복궁 태극기 게양식
첫눈이 서울을 하얗게 덮은 1946년 오늘, 경복궁 앞 미 군정청 건물에서 국기 게양식이 열렸다.
국내 저명인사는 물론 하지 중장 등 미 군정청 관계자들도 참석했다.
이날 게양된 태극기는 이화여대생들이 하나하나 수를 놓아 만든 것이었다.
국기 게양은 경찰학교 생도들이 맡았다.
일제에 빼앗겼던 국권을 다시 찾았음을 확인시켜 주는 뜻깊은 행사였다. /YTN
[1946년] 국방경비대 창설
← 미군정 요인과 남조선과도입법의원들
1946년 1월 14일 국방경비대가 창설되어 미군정하에서 국내 치안을 담당하기 시작했다. 당시 국내에는 각종 사설군사단체와 반(半)군사단체가 조직되어 있었기 때문에 미군정은 통일적인 군사기구를 조직하는 작업에 착수하여 미군 장교와 한국인 보좌관을 중심으로 남조선 국방경비대를 창설했다. 국방경비대원의 자격은 소학교 이상의 학력을 가진 21∼30세의 건강한 청년으로, 특히 군대 훈련 경험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지원할 수 있었다. 국방경비대의 창설에 따라 모든 사적인 군사단체에 대해 해산 명령이 내려졌다. 그해 6월 15일에는 조선경비대로 명칭이 바뀌었고, 이후 9개 연대 규모로 성장해 각도에 분산 배치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 간에 잠정적 군사안전에 대한 협정이 체결됨으로써 조선경비대는 국군에 편입되어 육군으로 개편되었다./브리태니커
[1943년] 2차대전 중 연합국 수뇌들 카사블랑카에서 회합, 독일에 무조건 항복 요구 성명
← 왼쪽부터 헨리 H. 지로, F.D.루스벨트, C.드골, W.처칠
1943년 1월 14∼26일 북아프리카 프랑스령(領) 모로코의 카사블랑카에서 미국 대통령 D.루스벨트와 영국 수상 W.처칠의 제3차 연합국 전쟁지도회의인 카사블랑카회담(Casablanca Conference)이 개최되었다.
1943년의 연합국측 공동작전을 토의하여 구체적으로는 시칠리아섬 상륙을 결정하였다. 회담에서 루스벨트는 처음으로 이 전쟁을 추축국(樞軸國)의 무조건 항복으로써 종결시킨다는 방침을 명백히 하였다. 이 시기에 북아프리카에 본토의 비시 정권으로부터 독립해서 수립되어 있던 프랑스정권에는 드골과 H.H.지로의 양 지도자가 대립상태에 있어서 이 회담에 양 지도자를 참석시켜 조정을 시도하였으나 충분한 해결은 보지 못하였다. /naver
[1908년] 소설가 이무영(李無影) 출생
1908. 1. 14 충북 음성~1960. 4. 21.
한국의 농민문학 선구자로 농촌을 제재로 한 소설을 많이 썼다. 본명은 용구(龍九).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하고 1925년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조[成城] 중학교를 다닐 때는 일본작가 가토 다케오[加藤武雄]의 집에 머물면서 문학을 공부했다. 1929년 귀국해 잠시 소학교 교원으로 일했고, 1932년 '극예술연구회' 동인과 1933년 '구인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1934년 동아일보사에 입사했으나 1936년 일장기말소사건으로 그만두고 〈조선문학〉 주간으로 일했다. 서울대학교·연세대학교·숙명여자대학교 등의 강사를 거쳐 단국대학교 교수를 지냈고, 1946년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최고위원, 1955년 한국자유문학가협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1956년 런던에서 열린 국제 펜클럽 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했다.
[1906년] 시인·교육자·정치가 이효상(李孝祥) 출생
1906. 1. 14 경북 대구~1989. 6. 18 서울.
호는 한솔. 1930년 일본 도쿄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 독문과를 졸업했다. 1936년 〈카톨릭 청년〉에 시 〈기적 奇蹟〉·〈생활〉 등을 발표하여 등단했다. 이후 릴케에 관한 연구로 논문과 번역서를 많이 발표했다. 8·15해방 이후인 1952년 경북대학교 문리대 교수와 학장을 역임했으며, 1960년 참의원에 당선되면서 정치에 입문했다. 1963~71년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대구지역에서 제6·7대 국회의원을 지내면서 국회의장과 영남대학교 이사장을 역임했고, 이후 제9·10대 국회의원을 지내면서 1973년 국회의장서리, 1979년 민주공화당 상임고문을 역임했다. 1985년 민족중흥동지회 명예회장을 지냈다. 서독 1급 대십자가 훈장, 교황청 대십자가기사훈장, 말레이시아 판쿠안네가라 최고훈장 등을 받았다. 저서로 〈나의 강산아〉·〈교육의 근본문제〉·〈정치와 종교〉 등이 있으며 시집으로 〈사랑〉·〈산〉·〈인생〉 등이 있다.
[1904년] 영국의 사진가 비턴(Beaton, Cecil) 출생
← The cover of Cecil Beaton's Fair Lady Beaton's diary of working on the film
1904. 1. 14 ~ 1980. 1. 18
주로 유명인사들의 장식 인물사진들로 유명하다. 그는 소년시절 그림엽서와 일요신문 부록에 실려 있는 사교계 여성들을 비롯한 여배우들의 사진에 감탄하면서 사진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의 유모가 그에게 사진기 다루는 법과 인화를 가르쳤으며 11세 때 처음 사진기를 갖게 되자 누이들에게 의상을 차려 입히고 포즈를 취하게 하여 장식 인물사진을 모방했다. 1920년대에 비턴은 그가 대부분의 작품활동을 하게 된 패션잡지 〈배너티 페어 Vanity Fair〉·〈보그 Vogue〉지의 수석 사진가가 되었다. 그는 알루미늄 은박이나 지점토 반죽 같은 재료로 특별히 제작되어 너무나 장식적이 되어버린 배경 때문에 그의 모델 또한 하나의 장식요소로 변하게 되는 초상화 스타일을 개발했다. 그결과 그의 사진들은 때로는 아주 섬세하고, 이국적이며, 때로는 기이하기도 했지만 언제나 세련된 멋을 풍겼다. 그러한 사진들은 사진집 〈아름다움의 책 The Book of Beauty〉·〈호평받는 사람 Persona Grata〉·〈그것은 내게 커다란 기쁨을 준다 It Gives Me Great Pleasure〉 등에 실려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비턴은 정보국에 근무하면서 아프리카와 극동지역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취재했다. 그러나 전시 사진 가운데 가장 감동적인 것은 사진집 〈날개달린 비행중대 Winged Squadrons〉(1942)에 실린 영국의 포위공격 사진들이다. 전쟁이 끝난 뒤 다시 인물사진을 시작했지만, 그의 스타일에는 현란함이 훨씬 줄어들었다. 또한 활동범위를 넓혀서 오스카 와일드의 연극 〈윈더미어 부인의 부채 Lady Windermere's Fan〉의 재공연에 사용된 무대장치와 의상을 디자인했고, 뮤지컬 코미디 〈마이 페어 레이디 My Fair Lady〉의 의상을 맡기도 했다. 1972년 기사작위를 받았다. /브리태니커
[1900년] 오페라 ‘토스카’ 로마에서 초연
← Original poster
푸치니의 오페라 토스카(Tosca)는 전3막, 대본은 프랑스의 극작가 J.사르두의 사극 《토스카》(1887)를 루이지 일리카와 주세페 자코사가 개작한 것이며 1900년 1월 14일 로마에서 초연되었다. 제재는 베리스모(사실주의)파의 영향이 강한 비극적인 것이나 푸치니의 서정적인 선율과 친근하고 센티멘털한 화성감각(和聲感覺)이 합치하여 매력적인 작품이 되었다. 무대는 1800년 6월 나폴레옹군이 이탈리아 북부에 침입하여 정정(政情)이 불안한 로마이다.
제1막은 가희 토스카의 애인 화가 카바라도시가 교회 안으로 도망쳐 온 정치범 안젤로티를 숨겨 주고 때마침 그곳을 찾아온 토스카가 이를 목격한다. 토스카를 짝사랑한 경시총감 스카르피아남작도 교회에 나타나 카바라도시를 의심한다. 제2막은 궁전 내의 스카르피아의 방. 그는 카바라도시를 고문, 그 모습을 토스카에게 보여주며 카바라도시를 사형에 처하겠다고 한다. 토스카는 자기의 몸을 바칠 것을 거짓 맹세하고 스카르피아로부터 거짓 사면장을 받아낸 후 그를 찔러 죽인다. 제3막은 감옥의 옥상. 감옥 옥상에 끌려나온 카바라도시를 토스카가 찾아와 사면장을 보이며 총살형은 형식적인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 사면장은 위조였으며 카바라도시가 총살된 것을 알고 토스카는 형장(刑場)의 높은 벽에서 몸을 던져 죽는다.
이 오페라 중 카바라도시가 노래하는 〈미묘한 조화〉 〈별은 빛나건만〉, 토스카가 노래하는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 등의 아리아는 특히 유명하다. 한국에서는 1958년 10월 한국오페라단(김생려 지휘)에 의해 국립극장에서 초연되었다. /naver
[1875년] 독일의 의사, 신학자, 철학자, 오르간 연주자 알베르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출생
← 슈바이처, Yousuf Karsh가 찍은 사진
1875년 1월 14일 태어남 / 1965년 9월 4일 죽음 "낙천주의자는 어디서나 청신호를 보는 반면에 비관주의자는 모든 곳에서 붉은 정지신호를 본다. 그러나 정말 현명한 사람은 마치 색맹처럼 색을 구분하지 않는다." - 알베르트 슈바이처
슈바이처는 아프리카에서 원주민을 치료하면서 평생을 보낸 선교의사이다. 그는 의사로 활동하기 전에는 신학과 철학 부문에서도 재능을 인정받았다. 음악가로서도 자질을 보여 오르간 연주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박애사업에 헌신하기 위해 1913년 의학박사가 된 그는 아내 헬레네와 함께 아프리카로 건너가 선교의사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가봉의 랑바레네에 병원을 세우고 자신의 재산과 기부금으로 운영했다. 그러나 당시 가봉은 프랑스령이었기 때문에,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적국 외국인(독일인)이라는 이유로 구금되기도 했다. 그는 '생명에 대한 경외'만이 문명의 존속에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믿었다. 1952년 '인류의 형제애'를 위해 노력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브리태니커
[1863년] 독립운동가 이명균(李明均) 출생
1863. 1. 14 경북 금릉 ~ 1923. 5. 2.
본관은 연안(延安). 호는 일괴(一槐). 아버지는 연성(淵性)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뒤 이에 격분해 침략의 원흉을 암살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경상남북도 일대에서 활동했으며, 파리 강화회의에 보내는 유림단(儒林團)의 독립청원운동에 가담하여 일본경찰에 체포되었으나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서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1920년 3월 경상북도 김천에서 신태식(申泰植)·김찬규(金燦奎)·이응수(李應洙) 등과 함께 해외에 있는 항일운동단체와 연락하며 국권회복운동을 하기 위해 대한독립후원의용단(大韓獨立後援義勇團)을 조직했다. 신태식과 김찬규는 각각 경상북도단장·경상남도단장을 맡고 그는 재무총장의 책임을 맡아 5차례에 걸쳐 10여 만 원을 상해 임시정부에 보냈다. 그해 10월 상해 임시정부로부터 의용단장 겸 재무총장에 임명되었다. 그뒤 가산을 정리하여 군자금으로 송금하는 한편, 1922년 청송·안동·영일·영천·군위·영덕·창녕 등지의 부호들에게 군자금요구서와 사형선고서를 발송하는 등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했다. 1922년 11월 동료단원 30여 명과 함께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이듬해 3월 병보석으로 출감했으나 여독으로 죽었다. 1970년 경상북도 김천에 순국기념비가 세워졌다. 1968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1863년] 미국의 풍자만화가 아웃콜드(Outcault, Richard Felton) 출생
1863. 1. 14 ~ 1928. 9. 25
연속만화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친 연속 풍자만화 〈옐로 키드 Yellow Kid〉를 창작했다. 아웃콜트는 오하이오의 신시내티와 파리에서 미술을 공부한 뒤 1880년대초에 발간된 유머 잡지 〈저지 Judge〉·〈라이프 Life〉에 원고를 기고했다. 1885년에 이르러서는 조지프 풀리처가 1883년에 사들여 활기를 되찾은 〈뉴욕 월드 New York World〉에 빈민가의 삶을 다룬 풍자만화를 그렸다. 1896년 2월 16일 〈뉴욕 월드〉가 실시한 컬러 작품 심사에서 그가 그린 잠옷 차림의 개구장이 소년의 그림이 뽑혔다. 밝은 노란색 옷을 입고 있는 그 소년은 널리 인기를 끌었으며 '옐로 키드'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처음부터 그 소년이 입고 있는 잠옷에는 의미있는 속어가 씌어 있었다. 아웃콜트가 그해말에 〈뉴욕 월드〉를 그만두자 〈뉴욕 저널 The New York Journal〉의 소유주인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가 그를 고용했다.
The Yellow Kid
Buster Brown
경매에서 그 그림의 소유권을 놓고 풀리처와 허스트 사이에 경쟁이 붙었으나 결국 풀리처가 포기하고 조지 룩스를 고용해 '옐로 키드'를 그리게 했다. 아웃콜트의 고용을 놓고 벌어진 신문 전쟁과 야바위로 인해서, 그뒤 세상을 놀라게 하거나 무도한 출판업에는 ' 옐로 저널리즘'이라는 표현이 붙게 되었다. 〈옐로 키드〉가 성공하자 다른 많은 연속만화들이 나왔다. 1897년에 아웃콜트는 〈뉴욕 저널〉을 떠나 〈뉴욕 헤럴드 The New York Herald〉로 갔으며 1902년 2번째로 중요한 풍자만화 〈버스터 브라운 Buster Brown〉을 탄생시켰다. 버스터는 외모가 말쑥하고 깔끔했으며 〈옐로 키드〉의 거칠고 활기에 찬 빈민가와는 전혀 다른 상류사회를 무대로 짓궂은 장난을 치는 사람이었다. 이 연속만화는 그뒤 여러 제품 광고에서 버스터 브라운이라는 이름으로 쓰임으로써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브리태니커
[1841년] 프랑스 화가 모리조(Berthe Morisot) 출생
← 마네가 그린 모리조(Édouard Manet, Berthe Morisot with a Bouquet of Violets, 1872)
프랑스의 화가로 집 안팎의 가정적 정경이나 정물화를 자유롭고 경쾌한 필치로 그려, 섬세하고 감미로운 감각을 나타내었던 프랑스의 화가 모리조(1841. 1. 14~1895. 3. 2)는 어릴 때부터 그림을 좋아하여 J.B.C.코로의 지도를 받았으나, 마네를 알게 되면서 인상파 화가들과 교제하였으며, 1874년에 시작된 인상파 그룹전(展)에 처음부터 참가하였다. 그 후 1886년의 제8회전까지, 제4회전(1879)을 빼고 매회 출품하였다. 1874년, 마네의 동생 우젠과 결혼하였으며, '발콩', '휴식'등에서 자주 마네의 작품모델이 되었다. 모리조의 작품은 코로의 감화를 받은 초기의 풍경화로부터 차차 인상파의 밝은 색조로 바뀌어갔으며, 집 안팎의 가정적 정경이나 정물화를 자유롭고 경쾌한 필치로 그려, 섬세하고 감미로운 감각을 나타내었다. 수채화에도 뛰어나서 유화 못지않은 경쾌하고 멋있는 가작들을 남겼다.
그 밖에
2002년 신승남 검찰총장 사퇴
2000년 첫 영장류 복제 원숭이 ‘테트라(Tetra)’가 탄생했다고 과학전문지 사이언스에 발표
2000년 재일동포작가 현월(玄月), 일본 아쿠타가와상(芥川賞) 수상자로 선정
1997년 대만, 미국에서 도입한 패트리어트 미사일 실전배치
1996년 삼파이오, 포르투갈 대통령에 당선
1984년 부산 대아관광호텔 화재(38명 사망, 23명 중경상)
1983년 한국, 비행정보구역 일본-중공기 통과 허용. 일본, 미국에 군사기술 제공 결정
1981년 단국대, 강원도 영월에서 고구려 왕검성 발견
1980년 유엔특별총회, 아프간주둔 소련군 철수결의안 가결
1978년 수학자 쿠르트 괴델 사망
1978년 영화배우 최은희 홍콩서 북한에 납치
1977년 포항제철 단일규모로 세계최대 분괴공장 착공
1975년 정부, 석가탄신일-어린이날을 공휴일로 제정
1972년 덴마크의 왕 프레데리크 9세 사망
1967년 해군함정과 여객선 한일호 충돌
1966년 베트남 쿠데타(6차) 실패로 웬찬띠 장군 해외도주
1963년 드골 프랑스 대통령, NATO협정 불참가 및 영국의 EEC 가맹거부를 표명.
1962년 알제리의 OAS(비밀군조직) 조직적 테러 개시
1960년 흐루시초프, 소련 최고회의서 병력 1/3 삭감 제의
1960년 농림부, 농촌고리채정리요강 작성
1938년 일본의 정치가 호소카와 모리히로 출생
1935년 자르지방, 인민투표로 독일복귀 결정
1934년 진강에서 재중국독립단체대표회의
1920년 스페인의 소설가 페레스 갈도스 사망
1912년 프랑스, 포앙카레내각 성립
1896년 미국 작가 도스패소스 출생
1874년 독일의 물리학자 조한 필립 라이스 사망
1850년 프랑스의 소설가 피에르 로티 출생
1818년 핀란드 역사 소설의 아버지 토펠리우스 출생
1753년 영국의 철학자 조지 버클리 사망
1742년 영국의 천문학자 핼리 사망
1701년 일본의 봉건영주 도쿠가와 미쓰쿠니 사망
926년 발해, 거란의 침입을 받고 멸망
877년 고려 태조 왕건 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