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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함양) 지리산 ; 동북부 절터-함양독바위-공개바위 (15.07.05)
* 한쟁이골 다리-적조암-노장대동-환희대-선열암터-유슬이굴-선녀굴-의론대-고열암터-신열암터-독바위-안락문-군계능선-베틀재-공개바위-천상바위(굴)-한쟁이골 다리(원점산행)
* 산행시작~종료시간 ; 09 시 00 분 ~ 4 시 48 분
* 총 산행시간 ; 7 시간 48 분 (알바, 널널 산행)
* GPS 실거리 ; 약 12.7 km (알바 포함) (이동+정지 평균속도 약 1.6 km/h)
* 산행지도와 고도표 ...... 참고하십시오. 본 지도의 등로(or 고도)는 GPS 트랙을 그대로 옮긴 것으로서 GPS 수신상태에 따라 등로(or 고도)와 약간의 차이가 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차이가 날 경우는 (별로 없지만) 약간의 편집, 수정작업을 하여 만듭니다. ※ 화살표 표시는 갈림길이 왼쪽이나 오른쪽 방향 표시일 뿐 특정지점 등로 방향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지도 원본 및 GPS 트랙자료 --> cafe.daum.net/galdae803 (다음카페 ; 갈대의산이야기)
* 산행지도
◎ <날짜> 2015. 7. 5. (일)
◎ <인원> 마굿간, 마굿간2, 명숙, 수미, 갈대 ; 5명
◎ <산행 코스 및 주요지점 통과시간>
07*03 남대구 나들목 07*40-59 거창 휴게소 08*27 생초 나들목 08*46 한쟁이골 입구 다리 (삼거리 지점) 주차
9:00 한쟁이골 입구 다리(삼거리)...출발...포장 길 따라 간다. 전원주택 위 상대날등 능선 들머리가 보인다.
다리 밑..산행 후 알탕자리
9:04 주차공터,<해동검도무술원 전용주차장>木푯말
9:05 주차공터, 화장실
9:07 다리 건너 복덕사입구 (해동검도생들의 수련장 및 민박집, 해동산장)
9:10 적조암 주차장
9:12 급수시설탱크, 마지막민가 (새마을지도자 집?)
~~ 민가 뒤에서 좌측으로 내려가니 계곡... 길 없다... 다시 민가로 되돌아가야겠다..
9:22 재출발...마지막 민가 뒤에서 직진하니 뚜렷한 길이 나온다. (진행방향 좌측 계곡을 건너지 말고 계곡 진행하면 환희대까지 갈 수 있다)
9:25 <출입금지>안내문
9:37 산죽비트 터... 산죽비트 안내문이나 마네킹은 없고 터만 남아있다. 여기서 좌측으로 가면 박쥐굴로 갈 수 있으나 길이 안 보인다... 직진한다.
9:55 돌배나무 (양민거주지 입구)
9:58~10:16 노장대(노장동 마을의 옛이름) 터...진행방향 직진 기와 조각, 돌로 석축을 쌓아 주민들이 거주한 흔적들이 남아 있는데, 전란 당시 10여 가구가 살면서 토벌대와 빨치산 양측으로 부터 고통을 받다가 결국은 모두 다 이주하였다고 한다.
10:17 바위 공터
10:26~10:49 환희대(망바위) 황새날등 능선진입(삼거리)
“노장동 마을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던 주민의 증언에 의하면, [유두류록]에 나오는 환희대를 [망바위]이라 불렀고, 망바위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배바위]가 있다 하였다. 노장동 마을이 있었던 응달골에서 능선에 붙어 만나게 되는 [환희대]는 탁 트인 전망으로부터 환희를 느낄 만 하였으므로 문자를 좋아하는 선비들은 [환희대]라 불렀을 것이고, 능선 아래 주민들은 망보기 좋은 바위였으므로 자연스럽게 [망바위]라 불렀을 것이다.”
10:52 小바위... 배바위는 아닌 것 같고
10:53 배바위 ? .. 그냥 스쳐지나가다
“독바위 가는 등산로상 고도 780m 우측에 있는 바위. 이 바위 앞으로 들어가면 유슬이굴 가는 옛길이다. 그러나 등산로 상에서는 배바위 임을 알 수가 없다. 등산로에서 유슬이굴 방향으로 조금 들어가야 비로소 배의 모양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10:55~59 돗대바위 ?
11:00~10 선열암 4거리 (희미)...좌측으로 계속 오르면 독바위, 우측으로 길이 보인다. 유슬이굴로 가는 길이다. 이 길은 바위 옆을 지나 너덜로 길이 이루어지는데 사면으로 이어진다. 언뜻 삼거리로 보이는 듯하나 선열암터를 생각한다면 좌측으로 길이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이 길 역시 사면으로 이어진 희미한 길이다. 좀 가다가 시계 방향으로 약간 돌아가면 바위군이 보인다. 바위 위쪽으로 올라갔다가 이리저리 헤매다 다시 내려온다. 올라가면 바위 위쪽이니 오르지 말고 비스듬히 가야한다.
11:19 바위굴.. 뭔가 심상치 않은 바위군이다. 선열암터는 좀 더 가야한다.
11:21 선열암터, 샘터, 평평한 터가 있다.
“선열암(先涅菴)을 찾아가 보니, 암자가 높은 절벽을 등진 채 지어져 있는데, 두 샘이 절벽 밑에 있어 물이 매우 차가웠다. 담장 밖에는 물이 반암(半巖)의 부서진 돌 틈에서 방울져 떨어지는데, 반석(盤石)이 이를 받아서 약간 움푹 패인 곳에 맑게 고여 있었다. 그 틈에는 적양(赤楊)과 용수초(龍須草)가 났는데, 모두 두어 치[寸]쯤이나 되었다. 선열암은 오로지 <유두류록>에 등장하는 고유명사 하나만을 가지고 한번 들면 사흘 안에는 나올 수가 없다는 노장동 상류 음달골 일대를 토끼몰이 방법으로 수색한 결과 어렵게 찾아낸 난공불락의 요새 같은 곳에 위치해 있다. 천길난애의 반석위에 자리한 선열암은 함양 독바위를 상부로 한 황새날등의 최 하단부이며 환희대에서 기존 등로를 따라 독바위 가기 100 여m 직전에 길을 버리고 좌측으로 접어들어 100 여m쯤 산의 사면을 따라 들어가 응달골과 건너편 상대날등이 훤히 보이는 절벽 위에 위치해 있다. 智異山의 산중 수양처인 많은 대(臺)에 견주어 전혀 손색이 없는 천연요새와도 같은 선열암에 당도하게 된 것이다.”
11:26 선열암 4거리로 되돌아와 유슬이굴로 향한다. 너덜 길이다. 지나간 흔적이 보인다.
11:31 너덜 길이 끝나다.
11:33~11:37 유슬이굴
“[유슬이굴]의 집명 어원도 [최마니굴]과 유사합니다. [유]씨 성을 가진 분이 그 굴에서 공부를 했다고 그렇게 전해오고 있습니다. 산자락 주민들에게는 어떤 장소를 자연스럽게 지칭하게 되는 지명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산꾼들은 10년 전부터 [향운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만 산자락주민들은 지금도 [영감절터]라고 부릅니다. 어떤 [영감]님이 절을 짓고 있다가 공단에서 파괴해 버렸다고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유슬이굴]로 불리게 된 이력은 60년전 노장동에 거주하신 분도 그렇게 부르고 있으니 그 이전부터라고 보아야 할 것이고, 다만 유씨 성을 가진 그 분에 대한 정보는 전해지는 것이 없습니다. 유슬이굴은 6. 25때에는 이곳에 빨치산이 직선으로 500여m 거리에 있는 솔봉에는 토벌군이 주둔을 하며 피아간에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고 합니다. 기와조각이 많이 발견되고 터가 그리 크지 않은 것으로 보아 독립적인 절은 아니고 인근에 있는 선열암, 신열암, 고열암등과 같이 지장사의 부속암자로 보이며 서로 왕래를 하였던 것 같습니다.”
11:38 흐르는 샘터.. 역시 샘이 있다. 고인 물이 아니라 흐르는 물이다.
~~ 너덜 구간이다. 길이 소실되어 주의 구간이다. 사면으로 진행하다 약간 좌측으로 오르는 듯 가면 된다.
11:42 너덜구간이 끝나자 고목이 한 그루 서 있다.
11:43 이번엔 구멍 있는 고목을 지나간다.
11:46 솔봉능선상의 선녀굴 4거리이다...직진
11:49~12:34 선녀굴 / 삼거리 (송대마을,견불사,용유담 하산길/고열암으로 가는 험로길)
“큰 바위들을 등지고 석간수가 풍부한 이곳도 절터의 흔적으로 기와파편이 널려있고 이 곳 역시 금낭굴 암자 터와 같이 무명암자이다. 의논대에서 인근 세 암자의 중들과 대승 소승을 논했다는 노숙 우타스님이 거처했던 곳이 이 곳 선녀굴이 아닌 가 추측을 해본다. 이 암자 터는 해방 직전까지만 해도 작은 암자가 있어서 스님이 가끔씩 송대리에 내려와서 소금을 얻어가고 했다고 한다. 바위틈에서 선녀가 목욕을 했던 전설이 있던 곳으로 역사적으로는 여성 빨치산 이은조가 사살된 곳으로서 절벽 아래에 동굴이 있고 굴 앞에는 바위가 가로막아 바깥쪽에서는 눈에 잘 띄지 않은 은신처로 적당한 곳이다. 바위 안쪽에는 제법 널따란 공간이 있으며 옆에는 샘물까지 있어 빨치산이 은둔하기에는 정말 좋은 장소였던 것 같다. 바위 앞에는 네모반듯한 터가 있으며 굴비트와 샘터도 있다. 선녀굴에는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샘물이 있는데다 좁은 입구와는 달리 안이 넓은 2중 동굴이어서 굴 내부에서조차 안이 잘 보이지 않아 빨치산의 은신처로 적당한 곳이었다고 한다. 근방에는 이와 비슷한 동굴이 5개나 더 있다.“
* 선녀굴 : 선녀굴은 바위틈에서 선녀가 목욕을 하던 전설이 있으나 예쁘고 고운 이름에 걸맞지 않게 처절한 한국전쟁의 비화를 안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함양군 휴천면 송전리 송대마을 뒤 해발 약 1000m에 위치한 선녀굴은 마지막 여성 빨치산이었던 망실공비 3인 부대인 정순덕, 이홍이, 이은조 3인방이 10여년 동안 은거해 있었던 곳이며 여기서 정순덕과 함께 했던 마지막 빨치산 이은조(45세. 이북출신의 남파 공비)가 1963년 2월 토벌대에 사살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1963년 11월 정순덕이 체포되면서 증언하였다고 한다. 한때는 부처님의 도량이었던 작은 무명암자 터 이곳도 지리산의 여느 사찰들과 마찬가지로 전쟁의 참화는 피해갈 수 없었다.
* 선녀굴 암자터 ; 1961년 12월 어느 날 선녀굴 앞에서 아침밥을 짓고 있던 중 토벌대의 총격에 이은조가 사살이 되고 나머지 잔비 정순덕과 이홍희는 이은조의 시체를 선녀굴 석간수 바로 앞에 대강 매장을 했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2년 후 1963년 11월 정순덕이 내원골에서 체포가 되어 산청경찰서에 수감 중 이은조의 주검을 확인하는 현장검증이 이루어지던 날 이었다고 합니다. 선녀굴의 선바위에는 그 때의 총탄흔적들이 남아있어 당시의 역사를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한때는 부처님의 도량이었던 작은 무명암자 터였던 이곳도 지리산의 여느 사찰들과 마찬가지로 전쟁의 참화는 피해갈 수 없었나 봅니다.
“추성의 석덕완 할아버지부터 1962년 지리산 선녀굴에서의 마지막 빨치산 사건(정순덕, 이홍이, 이은조)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예전에 그것을 정리해 둔 적이 있습니다. 석덕완 할아버지께서는 1962년 선녀굴에서 문영만으로부터 이은조가 사살당하고 그 다음날 마천 방위대의 일원으로 선녀굴 부근을 직접 수색했던 장본인으로서 자세한 내막을 알고 계시더군요...” ......이은조의 사망 년도가 왜 다를까 ???
12:37 선녀굴 4거리로 되돌아와 우측으로 올라간다.
12:51 슬랩바위가 의론대이다. 의론대 옆 함양독바위를 바라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이곳을 옛 선인들은 삼반석이라고도 했으며, 함양독바위 조망이 가장 좋은 곳이다. 슬랩지대에 소나무가 있는 곳은 상내봉 및 벽송사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수 십 명이 앉아서 쉴 수 있는 면적의 너럭바위가 있으며 절벽 아래에 석굴(石窟)이 있는데, 그곳에 기거하는 노숙(老宿) 우타(優陀)가 그 곳에 거처하면서 인근의 세 암자 선열암, 신열암, 고열암의 중들과 함께 이 돌에 앉아 대승(大乘), 소승(小乘)을 논하다가 갑자기 깨달았으므로 의논대라 한다.”
12:56~57 고열암터4거리..우측으로 가면 고열암터 / 좌측은 독바위 방향
12:58~1:01 고열암터
“주변엔 기와조각이 여러 널려있으며 왼쪽에 커다란 병풍처럼 둘러진 바위 아래 터가 있으며 샘터가 있으나 고여 있는 물이라 식수라는 곤란할 것 같다. 사람이 계속 기거했다면 식수 가능할 것이다.” “이 곳엔 근세에 누가 기도터로 사용을 했는지 기와조각들로 축대를 쌓고 구들장 흔적까지 있다. 이곳에는 후세의 누군가가 기도터를 삼아 정착을 하였던지 아예 기와파편으로 석축을 쌓아서 축대를 만들어 놓았다. 고열암은 예전에 일반대중의 기도 도량이었다기보다는 학승이나 구도승의 도량이었을 것이다.”
예전 <고열암에서 자다>안내문이 있었던 곳인데 왜 안내문을 철거했는지... 중요한 의미 있는 자료일 것인데...
<고열암에서 자다[宿古涅庵]> 병든 몸을 지탱하고자 하여 잠시 포단을 빌려 깔고 자는데 소나무 파도가 달빛 아래 들끓으니 구곡에 노니는 듯 착각케 하네 뜬구름은 또한 무슨 뜻인고 한밤중엔 바위 골짜기 닫혀 있구나 오직 정직한 마음을 가진다면 혹 산신령의 비록(備綠)을 얻을는지
-김종직의 “유두루록” 중에서- <함양군>
위의 글은 <김종직 ; 조선초기 성리학자, 호는 점필재, 함양군수 역임(1470년~1475년), 1472년 지리산 기행문 “유두루록” 지음> 선생이 함양관아에서 출발하여 지장사, 선열암, 신열암 등 세 암자를 거쳐 그 날의 숙박지인 고열암에서 천왕봉 등정 길 산행 첫 밤을 묵은 후 지은 時이다.
~~ 고열암터 4거리로 되돌아나와 직진
1:05 신열암터 .. 함양독바위 직전 등로 우측 바위이다. 나무에 가려 안 보일 수 있다. 커다란 바위벽 아래 샘터와 빈 공터가 있다.
“신열암 암자 터는 정확히 독바위에서 서쪽으로 2분 정도의 거리에 위치해 있으며 큰 바위를 등진 곳에 암자의 필수 조건인 샘이 있고 축대의 흔적과 구들장돌, 기와조각과 옹기 및 자기파편이 주변에 널려있고 묻혀있다. 옛날 고승들은 절터를 잡을 때 먼저 그곳의 물맛을 보고 잡았다 하더니만, 바위틈에 절묘하게 자리 잡은 석간수는 아직도 물이 마르지 않고 있고, 물맛은 흔히 말하는 감로수 수준이다. 앞서 지나온 수십 길 벼랑 위에 터 잡은 선열암이 고행승의 수도처 같았다면, 이 곳 신열암은 암자 터가 편안하고 아늑해서 학승의 공부도량 같은 곳이다. 구름처럼 떠도는 운수납자를 주저앉게 하는 눅진한 그런 곳이다. 한편 산 아래 사람들은 이곳을 “독바우 금강대” 라고 부른다. 지금 현존하는 사람들은 본 적이 없지만 금강대와 주지승에 관한 얘기들을 선대 어른들로부터 자주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한국전쟁 직후까지 신열암터에는 거의 원형의 기왓장이 많았었다고도 한다. 이러한 편력으로 보아서는 신열암은 암자 이름이 어느 때인가 금강대로 바뀌면서 거의 19세기 초까지는 존재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1:10~41 독바위 아래 공터, 함양독바위(독녀암)(지도 1117.5m) 예전에 <함양독바위>안내문이 있었던 곳인데 안내문은 사라지고 없다.
그때의 안내문을 잠시 소개하면... <함양 독바위 ; 함양독바위에서 생성한 상대날등과 황새날등을 좌우로 거느린 음달골이 오죽 깊고 험했으면 “그곳에 가면 사흘 안으로 나오기 힘들다” 는 말까지 전해져 올 지경이다. 한국동란 지리산 전사에도 등재되어 있는 노장동 전투에서는 골짝의 요새 같은 지형 탓에 피아간에 수없는 혈전이 수 없이 이루어져 아군의 피해가 막심했었다고 한다 ; 함양군>
독바위로 오르는 밧줄이 바위에 아직도 남아있네... 근데 낡아 위험해 보인다. 보조자일이 꼭 필요하다. 독바위 오르는 밧줄아래 왼쪽 下길은 황새날등으로 환희대, 운서리로 이어진다. 밧줄 붙잡고 올라가 독바위 정수리 건너편에 서서 주변 조망하고 정수리로 올라가려면 바위틈새에 매달린 밧줄 잡고 가까스로 오를 수 있다. 날씬한 사람만 바위틈새를 헤집고 오를 수 있다.
“함양독바위는 생긴 모습도 특출하고 대단하거니와 주변의 지형을 보면 풍수쟁이가 아니더라도 예사롭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뒤로는 크게 상내봉능선과 군계능선이 독수리 날개 모양으로 독바위를 감싸고 있고 엄천강이 포근하게 받치고 있어 환상적인 배산임수 지형이다. 독수리 머리에서 지맥인 황새날등이 시원스레 뻗어 내리고 있는 정수리에 독바위가 기품을 품어내며 서있다. 어디 그뿐이랴. 펼쳐진 날개 안쪽으로 또 다시 양쪽의 솔봉능선과 상대날등이 황새날등을 이중으로 근접호위하며 품고 있는 형상이다. 여기에다가 하늘이 일부러 천하 명당자리에 내려준 듯 암자터와 동굴을 이룬 바위들이 그렇게 많으니 노장대 마을의 연유가 그러하듯이 예로부터 수행자들과 비결꾼들이 몰려들 수밖에 없는 명당이다. 한 부인이 도를 연마하여 하늘로 올라갔다”는 독녀암의 전설은 듣고 흘려버릴 야사가 아닌 실체의 역사로 다가온다.
► 함양 독바위의 별칭 굳이 이 바위의 명칭에 함양이라는 지명을 부치는 이유는 동부능선의 진주독바위와 구별을 위한 것으로 두 독바위가 이름은 같아도 어원은 다르다. 동부능선의 진주(산청)독바위는 독아지를 닮았다고 해서 항아리 옹(甕)자를 부쳐 옹암(甕巖)이라고 하여 독(甕) 바위가 되었고, 이 곳 함양독바위는 예전에 늙은 무녀가 혼자서 기도를 드리던 곳이라고 독녀암(獨女巖)이라 부른데서 독(獨)바위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독녀암을 두고 산 아래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은 각각이다. 산청 쪽의 화개 사람들은 상투를 닮았다고 상투바우라 하고, 함양의 휴천 사람들은 독아지를 닮았다고 장독바우라 부른다. 또 한 마천 쪽 사람들은 筆鋒이라 부르기도 하기에 마천의 60번 도로 위에서 확인해 보니 붓끝을 닮기도 했으나 가장 두드러진 형상은 유림 쪽에서 본 상투 모양의 독바위 모습이다.
예전에 함양군에서 운암마을에서 노장동을 거쳐 이곳 독녀암 까지를 빨치산 탐방루트로 지정을 해서 함양 독바위를 “노장대” 라고 하였으나 한국전쟁까지 노장동에서 5대를 살았다는 <손종만>씨 외 여러 지역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노장대는 토착민들이 부르는 노장동 마을의 별칭이며 함양독바위와는 전혀 무관하다고 한다. 노장대는 노장동 마을의 옛 이름이라고 하는데 아마도 일제강점초기에 전국적으로 행정구역을 정리할 때 행정표기상 노장대 마을이 노장동으로 바뀐 듯하다. 독바위는 그 예전부터 독바위라고 불렀다고 문헌에도 나와 있다. 다섯 개의 거대한 바위로 구성된 함양독바위는 한 부인이 이 바위 사이에 돌을 쌓아 거처를 만들고 그 안에서 혼자 살며 도를 닦아 허공으로 날아올랐다고 하여 독녀암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돌을 쌓아 놓은 것이 여태 남아 있어 독녀암의 [독]자를 인용하여 독바위라 전해졌다 한다.
1:44~49 함양독바위 내려와 공터에서 좌측으로 돌아가면 안락문이다.
바위틈새처럼 생긴 이 석문은 현재까지 알려진 지리산 석문 중에 길이가 가장 길고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安樂門이라고 쓰인 붉은색의 각자가 다른 각자보다 특이하다. 이 석문이 왜 안락문일까 ? 지리산 토벌작전 때 이 문을 통해서 내려오면 안락한 생활을 보장해 준다고 회유한 데서 유래 되었다나 ? 믿거나 말거나 ... 언제 누가 뭐 땜에 쓴 것인지 궁금할 뿐이다. 누군가에 의해 안락문이라고 이름 붙여져 있지만 예전엔 그곳을 금강대라고 이름 불렸다고 했다. 전설에 의하면 바위 두개가 쪼개져 있는 그곳에 엽전만한 금부처가 있는데 도인이 나타나면 그것을 찾을 수 있다는 전설을 믿고 노장대에 살았던 손종만 씨는 그곳에서 부처를 찾는다고 어렸을 적에 많은 고생을 했다는 후문도 들려 온 곳이다.
1:52 안락문 통과 후 왼쪽으로 가면 나무에 걸린 조그마한 <벽송사 5.6>푯말을 지난다.
2:01 능선삼거리...우측
2:07 갈림길...좌측 (우측으로 가면 상내봉 삼거리)
2:08~18 1213.9봉 삼거리이다. 좌측으로 군계능선이 시작된다. (우측 상내봉삼거리)
~~ 이제 편안한 능선길이 이어진다.
2:33 바위 우회
2:44~49 등로 우측 바위전망대...오봉리, 왕등재 일대 조망
2:56~3:03 베틀재 삼거리 <↗오봉마을 / ↖공개바위 / ↓조개골>...좌측
3:20 공개바위 3거리 <→공개바위 / ↓베틀재 / ↑동강 운서>...우측
3:22~45 공개바위(755m) : 경남 산청군 금서면 방곡리
“인적이 드문 깊은 숲 속, 미스터리한 바위 탑, 사람이 쌓았다고 하기엔 그 크기가 너무나 거대하고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기엔 그 형상이 너무나 신비로운 바위 탑. 비스듬히 쌓인 채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있는 이 바위 탑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지리산 깊은 숲 속 오랜 세월 숨어있던 거대 5층 바위 탑의 실체를 SBS '순간포착 ! 세상에 이런 일이‘ 에서 그 미스터리를 공개 했다. 2006년 3월 17일 조선일보에서도 기사화된 경남 산청군 금서면 병곡리 지리산 자락에 소재한 공개 바위로서 산청군은 이 탑을 경상남도 지정문화재 지정신청을 하기위해 2007.1.12 계명대, 경상대 교수님 두 분과 경남 문화재 담당 공무원까지 실사를 마쳤고 2007년3월 24일 경상남도 문화재 관리위원회에서도 기념물로 지정 하였다. 일본의 문예춘추 사진부 기자도 직접 와서 사진을 촬영해 갔고 나중에 잡지에 실렸다고 한다.
.피사의 사탑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5층 바위탑으로 산청군 금서면 방곡리 야산 755m 능선상에 있는 이 바위탑은 5개의 육면체의 바위로 이뤄져 추정 무게만 100톤. 높이 12.7m. 둘레가 12.4m 나 된다. 산비탈 경사가 60도나 되는 곳에 서있는 5개 돌덩이는 25도 각도로 곧 기울어져 넘어질 듯 아슬아슬한 모습이다. 등산로에서 벗어나 있어 그동안 인근마을 주민들만 그 존재를 알다가 모습이 드디어 공개 되었다. 하지만 자연석인지 아니면 토속신앙을 위해 만든 인공 탑인지 알려지지 않았으며, 언제 만든 것인지 산청군에도 기록은 없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지리산에는 삼베 구만필로 짠 치마를 두른 거대한 마고할미가 살았는데 공기놀이를 좋아하였다고 하는데 어느 날 마고할미가 떠나면서 가지고 놀던 공깃돌 5개를 포개 놓았는데 그 공깃돌이 바로 공개바위라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지역주민들도 이 바위 탑을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로 여기고 있다. “사람이 쌓았다기에는 너무 거대하고 자연이 만들었다기엔 형상이 너무 신비스럽다며” 전문가 등의 현장 확인결과 지렛대로 바위를 이동 시킬 수 없을 만큼 가파른 지점에 있어 자연풍화작용으로 돌탑이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고 한다. .공개바위라는 확실한 어원은 공기 돌 놀이(5개)의 경남 서북부 방언은 공개놀이라 하며 아주 오래전부터 이 지방 사람들은 이에 연유되어 공개바위라고 불렀다. 방언에서 유래된 것이지만 이미 고유명사화 된 것이어서 공개바위라고 한다.“
3:49 삼거리로 되돌아오다.
3:53 작은 봉우리 넘자마자 폐헬기장
3:54~58 전망대...독바위가 아슬아슬 보인다.
3:59 이정표 3거리 <→동강 / ↖운서> <↓공개바위 / →방곡>...좌측 군계능선을 버리고 간다.
4:03~05 등로 좌측 함양독바위가 잘 보이는 전망대
4:07~10 천상바위(천상굴)... 산죽으로 둘러싸여 있다. 산죽으로 둘러싸여 있어 도저히 뚫고 갈 수 없네.. 차라리 바위 위에서 바로 내려오는 게 어떨지..
“엄천골에 또 하나의 유명 명소가 있다. 지리산의 새로운 명물인 공개바위의 이웃에 거대한 또 하나의 바위 하나가 있는 데 바로 천상바위이다. 이 천상바위의 위치는 산청과 함양과의 군계능선상에서 수독골 쪽으로 약 200m 아래에 위치하여 있는 곳이다. 천상바위는 함양군 휴천면 동강리 꽃 봉산과 한쟁이골 사이 수독골 상단부에 위치한다. 이 바위의 규모는 지리산 동북부 에서 거대한 바위인 함양독바위에 버금갈 정도의 규모이며 특징은 그 바위에 한국산 호랑이가 1970년 초까지 살았다는 추정을 가능하게 하는 천상굴이 천상바위 속에 존재하고 있다. 천상바위는 높이 약 60m 되어 보이는 거대한 바위 덩이로 함양독바위 정도의 규모이다. 군계능선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으나 아래로 내려가 보면 아프리카 밀림 지대처럼 빽빽하게 들어 찬 나무 사이에 꼭 꼭 숨어 있는 80도의 경사를 이루는 거대 바위 덩이이다. 그 아래 마을 사람들(동강, 운서)에 의하면 옛날부터 그곳에 호랑이가 자주 출몰하였고 호랑이의 존재를 많이 목격하였다고 한다. 일제시대 때로 추정이 되는 시기에 휴천면 운서리에서 한 아가씨가 호랑이에게 호상을 입었던 사실이 오늘 운서에 사시는 연세 많은 할머니들로부터 직접 이야기를 들었으며 아랫마을 사람들은 그 천상굴에서 호랑이가 산다는 것 때문에 아예 그 굴 근처에는 가지 않았으며 무서워했던 곳이기도 했다.
4:19 山표석...조그마한 표석이다.
4:39 4거리 (한쟁이골 다리 쪽으로 정확하게 원점회귀 하려면 이 지점이 상당히 중요하다. 언뜻 내려가는 길이 안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4거리이다. 좌측 진지밭골에서 오는 길과 합류되고 계속 능선을 따르면 거머리재인데 여기서 서쪽으로 내려가야 한다)
4:40 희미한 길이지만 묘가 연이어 두 곳 나타난다. 묘가 있으니 사람이 다닌다는 뜻이다.
4:42 묘를 지나니 작은 3거리가 나온다...좌측으로 (우측 거머리재)
4:45 우측으로 한쟁이골 다리가 보이는데 작은 3거리가 나온다. 다행이다. 우측으로 내려간다.
4:46~ 작은 흙절개지로 내려와 임도로 안착..
4:48 한쟁이골 다리 (삼거리).. 정확하게 원점산행 마감한다. 다리 아래에서 시원하게 알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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