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 68년 2년동안 계속된 가뭄으로 혹심한 피해를 입은 삼남지방이 1969년에는 수마에 휩쓸렸다. 1969년 9월 14일 오후부터 16일 낮까지 부산, 경남, 전남 등 남해지방과 제주와 경북 일부 지역에 집중폭우가 쏟아져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이 폭우로 2백89명이 죽고 1백7명이 실종했으며, 2백21명이 부상했다. 이것은 1959년 9월 17일 내습, 8백46명을 사망 실종케한 사라호 태풍 이래 가장 비참한 재난이었다. 또 가옥과 농지. 도로파손 등 재산피해도 1백60억3천3백20만원에 달했다. 3일동안의 강우량은 양산과 마산이 각각 6백27mm로 기록적이었다. 정부는 수해 복구를 위해 90억원을 쏟고 영농, 영어자금 10억원을 방출했으며 이미 지원한 영농, 영어자금 회수를 연기하고 수재민의 조세를 감면하는 등의 긴급조치를 취했다.
가정의례준칙 발표
국민생활의 합리화를 기하고 허레허식화된 가정의 전통적 폐습을 바로잡기 위해 정부가 마련한 가정의례준칙(전문71조 부칙2항)이 1969년 3월 5일 대통령 고시로 선포됐다. 정부는 이 준칙의 실천보급을 위해 각 시-도-군단위로 심의위원회를 설치하고, 범국민운동을 전개했다. 이 준칙에 의하면 1. 부모, 조부모, 배우자의 상기를 1백일로 하고 2. 호적등본과 건강진단서를 첨부한 약혼서의 교환으로 약혼을 하고 3. 혼인신고서에 신랑, 신부가 서명한 혼인 신고서를 당일에 제출하고 4. 상복을 간소화하고 노제, 삼우제 등을 없애기로 했다. 결혼청첩장. 부고장 수수답폐품 증정, 결혼피로연, 화환증정 및 진열 등이 일체 금지됐고, 장례는 3일로 제한됐다.
콜레라 전국 확산
1969년 8월 27일 전북 군산시와 옥구군에서 처음 발생해 10월 24일 경북 울진으로까지 발전한 콜레라 환자가 전국에서 1천5백38명이 발병해 이중 1백37명이 사망했다. 이번 콜레라의 병원체는 그때까지 국내에 침투한 것과는 다른 비용혈성 비브리오 엘톨 오가와형인데다 투입경로를 의학적으로 규명하기 어려워 발생 후 14일이 지난 9월 9일에야 겨우 확진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20명의 환자 발생으로 그쳤던 64년의 콜레라 방역과는 달리 강원, 충북, 제주를 제외한 전국으로 확산, 맹위를 떨쳤다. 그동안 의학계는 콜레라니 장염비브리오 중독이니하고 의견이 분분해 방역사업에 차질을 빚었다. 콜레라 발생으로 정희섭 보사부장관이 물러났다.
3선개헌안 변칙통과
공화당이 1969년 9월 14일 새벽 2시50분경 야당이 농성중인 국회 본회의장을 피해 국회 제3별관 특별회의실에서 제6차 본회의를 소집, 3선개헌안을 전격적으로 변칙 통과시켰다. 개헌안 표결은 공화당 소속의원을 비롯한 개헌안 발의 서명자 1백18명 전원과 무소속의 김용태의원 등 3명과 정우회의 양찬우 의원 등 모두 1백22명이 참석, 참석의원 전원이 가표를 던져 개헌통과선 1백14표를 넘었다. 이에따라 이효상 의장은 개헌안을 가결했음을 선포했다. 공화당의 3선개헌안은 박정희 대통령의 임기를 연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 개헌안을 처리하는 절차법안인 국민투표법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함에 따라 10월 17일 개헌찬반을 놓고 국민투표를 실시, 총유권자 1천5백4만8천9백25명 중 77.1%가 투표를 했고 이중 65.1%가 찬성, 개헌을 확정했다.
대한항공 여객기 납북
대한항공 YS-11 여객기가 1969년 12월 11일 북한에 의해 공중피랍됐다. 승객 47명과 승무원 4명 등 51명을 태운 YS-11 쌍발여객기는 이날 낮 12시 25분 강릉비행장을 떠나 서울로 향하던 중 대관령 상공에서 납치돼 오후 1시 18분 원산 근처 선덕비행장에 착륙했다. 사건발생후 조사를 통해 범인은 고정간첩 강릉 자혜병원원장 채헌덕을 비롯 조창희와 이 비행기의 부조종사 최석만 등 3명이라고 밝혔다. 북한은 이 사건을 정치적 흥정대상으로 삼으려다 국제적인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1970년 2월 5일 납북 민간인들을 송환키로 약속했으나 송환 당일 약속을 뒤집기도 했다. 이후 남북이 이 사건처리를 둘러싸고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으로 치닫자 북한은 종전의 태도를 바꿔 결국 납북 66일만인 1970년 2월 14일 탑승자 가운데 승객 39명 만을 판문점을 통해 송환했다. 이후 북한은 승무원 및 승객 11명의 송환을 거부한 채 지금까지 억류하고 있다.
명주·삼척 무장공비 출현
1969년 3월 16일 새벽 1시경 강원도 명주군 주문진읍 어선통제 경찰초소에 무장 공비 수명이 나타나 경비중이던 강관수 순경을 죽이고 달아났다. 이 무장공비들은 주문진 수상검문소에 근무중인 강 순경과 이웅재 순경에게 "우리는 인민유격대다."라고 소리치고 반항하는 강순경 등을 비롯해 8군데를 찔러 숨지게 했다. 또 6월 8일 새벽 1시50분경 삼척군 북평읍북쪽 1.2km지점에서 무장간첩선이 발견돼 집중사격 끝에 침몰됐으며 같은 날 새벽2시 반경 아군 해안경비부대서 2백m 떨어진 해안에서 괴선박 1척이 적발 격침됐다. 이 교전에서 아군의 피해는 없었으나 괴선박이 82mm무반동포를 발사, 민간인 이대진씨 일가족 5명이 사망했다.
해외원정 등반대 10명, 설악산에서 훈련 중 실종·사망
한국산악회 주관 제1회 해외원정등반에 앞서, 적설기 내한훈련을 위해 설악산의 주봉인 대청봉에 등반한 등반대원 19명이 1969년 2월 13일부터 14일까지 내린 폭설과 눈사태로 죽음의 계곡 부근에서 조난돼 대장 이희성 육군중령 등 10명이 실종됐다. 국내 베테랑급 산악인인 이들은 70년대 히말라야 등반에 대비, 훈련차 2월 4일 서울을 떠났다. 이같은 조난 사실은 같은 대원인 이재인씨 등이 산에서 내려와 속초경찰서에 신고함으로써 알려졌다. 정부는 2월 17일부터 3월 3일까지 조난자 수색본부를 설치하고 군인, 경찰, 민간인 등 2천명을 동원해 시체 10구를 찾아 3월 3일 설악산 신흥사 보제루에서 합동장례식을 치렀다. 조난 원인은 기상이변과 눈사태를 경시한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다.
한국대표팀, 킹스컵 축구와 ABC농구대회 우승
한국축구대표팀이 1969년 11월 28일 밤 방콕국립경기장 메인스타디움에서 열린 제2회 킹스컵 축구대회 결승전에서 전년도 우승팀인 인도네시아를 1대0으로 꺾어 우승을 차지했다. 전반 15분 서윤찬이 오른쪽 깊숙이 몰고 들어간 볼을 센터링, 정강지가 가슴으로 밀어 넣어 선취점을 올렸다. 이로써 한국축구는 인도네시아의 2연패를 저지하고 이 대회에서 처음으로 우승했다. 한편 한국 남자농구는 11월 29일 방콕에서 아시아 정상을 차지하는 괘거를 올렸다. 제5회 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대회(ABC) 최종일 결승전에서 한국팀은 제4회 우승팀인 필리핀을 95대86으로 가볍게 물리쳐 한국농구 60년사상 처음 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했다. 이로써 한국팀이 70년 유고슬라비아에서 개최하는 세계농구선수권대회아시아지역 대표로 참가하게 돼 한국은 아시아에서 스포츠 최강국으로 급부상했다.
제3한강교 개통
한강을 가로지르는 4번째 길목인 제3한강교가 1969년 12월 26일 오전11시 박정희 대통령부처와 김현옥 서울시장이 테이프를 끊음으로써 1966년 1월 19일에 착공한지 만3년1개월 만에 개통됐다. 용산구 한남동과 성동구 신사동간을 연결하는 이 다리의 개통으로 서울의 도심부와 경부고속도로가 직결돼 제1한강교로 우회하던 길이 6km나 단축됐다. 현대건설에서 시공한 이 다리는 교폭이 27m(보도4m, 차도23m)로 가장 넓은 6차선이며 길이 9백15m 양쪽으로 4백W의 수은등 51개가 설치됐다. 투입된 총공사비는 11억3천만원에 달했다. 제3한강교는 경부고속도로에 접속되는 교량으로 부산에서 출발한 차량이 서울 도심까지 곧바로 진입할 수 있게 되어 우리 국토의 남-북을 연결시키는 대동맥이 최종적으로 연결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강남과 강북을 연결하는 요충지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교통수단이 나룻배에서 육상교통 수단으로 바뀌고 영동지역에 처음으로 전기와 수도가 공급되는 등 영동지역이 급속하게 개발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수근 탈출
1967년 3월 22일 오후 5시25분 경 판문점을 통해 위장 귀순한 이수군(북한중앙통신부사장)이 북에 있는 본처의 조카 배경옥과 1969년 1월 27일 오후 5시30분경 CPA기편으로 서울을 탈출, 캄보디아로 도망치려다 1월 31일 사이공공항에서 붙잡혀 2월 1일 서울로 압송돼 왔다. "자유를 찾아 월남했노라."던 이수근이 결국 자유의 탈을 쓴 첩자였음이 드러난 것이다. 그는 전국순회강연 및 TV-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북한실정을 폭로하는 척하면서도 한국의 각종 기밀을 수집하여 북한으로 보내려 하였다. 그의 여러가지 행동이 점차 수상해지자 한국정부의 정보 및 수사당국에서는 그를 주시하고 경계하기 시작했고 이수근은 더이상 한국에 있을 수 없음을 눈치채고 위조여권을 만들어 비행기로 탈출, 호치민에서 북한으로 귀환하려다 한국정부의 정보요원에 의하여 체포, 군용기 편으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고 1969년 7월 3일 사형이 집행됐다.
1967, 68년 2년동안 계속된 가뭄으로 혹심한 피해를 입은 삼남지방이 1969년에는 수마에 휩쓸렸다. 1969년 9월 14일 오후부터 16일 낮까지 부산, 경남, 전남 등 남해지방과 제주와 경북 일부 지역에 집중폭우가 쏟아져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이 폭우로 2백89명이 죽고 1백7명이 실종했으며, 2백21명이 부상했다. 이것은 1959년 9월 17일 내습, 8백46명을 사망 실종케한 사라호 태풍 이래 가장 비참한 재난이었다. 또 가옥과 농지. 도로파손 등 재산피해도 1백60억3천3백20만원에 달했다. 3일동안의 강우량은 양산과 마산이 각각 6백27mm로 기록적이었다. 정부는 수해 복구를 위해 90억원을 쏟고 영농, 영어자금 10억원을 방출했으며 이미 지원한 영농, 영어자금 회수를 연기하고 수재민의 조세를 감면하는 등의 긴급조치를 취했다.
가정의례준칙 발표
국민생활의 합리화를 기하고 허레허식화된 가정의 전통적 폐습을 바로잡기 위해 정부가 마련한 가정의례준칙(전문71조 부칙2항)이 1969년 3월 5일 대통령 고시로 선포됐다. 정부는 이 준칙의 실천보급을 위해 각 시-도-군단위로 심의위원회를 설치하고, 범국민운동을 전개했다. 이 준칙에 의하면 1. 부모, 조부모, 배우자의 상기를 1백일로 하고 2. 호적등본과 건강진단서를 첨부한 약혼서의 교환으로 약혼을 하고 3. 혼인신고서에 신랑, 신부가 서명한 혼인 신고서를 당일에 제출하고 4. 상복을 간소화하고 노제, 삼우제 등을 없애기로 했다. 결혼청첩장. 부고장 수수답폐품 증정, 결혼피로연, 화환증정 및 진열 등이 일체 금지됐고, 장례는 3일로 제한됐다.
콜레라 전국 확산
1969년 8월 27일 전북 군산시와 옥구군에서 처음 발생해 10월 24일 경북 울진으로까지 발전한 콜레라 환자가 전국에서 1천5백38명이 발병해 이중 1백37명이 사망했다. 이번 콜레라의 병원체는 그때까지 국내에 침투한 것과는 다른 비용혈성 비브리오 엘톨 오가와형인데다 투입경로를 의학적으로 규명하기 어려워 발생 후 14일이 지난 9월 9일에야 겨우 확진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20명의 환자 발생으로 그쳤던 64년의 콜레라 방역과는 달리 강원, 충북, 제주를 제외한 전국으로 확산, 맹위를 떨쳤다. 그동안 의학계는 콜레라니 장염비브리오 중독이니하고 의견이 분분해 방역사업에 차질을 빚었다. 콜레라 발생으로 정희섭 보사부장관이 물러났다.
3선개헌안 변칙통과
공화당이 1969년 9월 14일 새벽 2시50분경 야당이 농성중인 국회 본회의장을 피해 국회 제3별관 특별회의실에서 제6차 본회의를 소집, 3선개헌안을 전격적으로 변칙 통과시켰다. 개헌안 표결은 공화당 소속의원을 비롯한 개헌안 발의 서명자 1백18명 전원과 무소속의 김용태의원 등 3명과 정우회의 양찬우 의원 등 모두 1백22명이 참석, 참석의원 전원이 가표를 던져 개헌통과선 1백14표를 넘었다. 이에따라 이효상 의장은 개헌안을 가결했음을 선포했다. 공화당의 3선개헌안은 박정희 대통령의 임기를 연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 개헌안을 처리하는 절차법안인 국민투표법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함에 따라 10월 17일 개헌찬반을 놓고 국민투표를 실시, 총유권자 1천5백4만8천9백25명 중 77.1%가 투표를 했고 이중 65.1%가 찬성, 개헌을 확정했다.
대한항공 여객기 납북
대한항공 YS-11 여객기가 1969년 12월 11일 북한에 의해 공중피랍됐다. 승객 47명과 승무원 4명 등 51명을 태운 YS-11 쌍발여객기는 이날 낮 12시 25분 강릉비행장을 떠나 서울로 향하던 중 대관령 상공에서 납치돼 오후 1시 18분 원산 근처 선덕비행장에 착륙했다. 사건발생후 조사를 통해 범인은 고정간첩 강릉 자혜병원원장 채헌덕을 비롯 조창희와 이 비행기의 부조종사 최석만 등 3명이라고 밝혔다. 북한은 이 사건을 정치적 흥정대상으로 삼으려다 국제적인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1970년 2월 5일 납북 민간인들을 송환키로 약속했으나 송환 당일 약속을 뒤집기도 했다. 이후 남북이 이 사건처리를 둘러싸고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으로 치닫자 북한은 종전의 태도를 바꿔 결국 납북 66일만인 1970년 2월 14일 탑승자 가운데 승객 39명 만을 판문점을 통해 송환했다. 이후 북한은 승무원 및 승객 11명의 송환을 거부한 채 지금까지 억류하고 있다.
명주·삼척 무장공비 출현
1969년 3월 16일 새벽 1시경 강원도 명주군 주문진읍 어선통제 경찰초소에 무장 공비 수명이 나타나 경비중이던 강관수 순경을 죽이고 달아났다. 이 무장공비들은 주문진 수상검문소에 근무중인 강 순경과 이웅재 순경에게 "우리는 인민유격대다."라고 소리치고 반항하는 강순경 등을 비롯해 8군데를 찔러 숨지게 했다. 또 6월 8일 새벽 1시50분경 삼척군 북평읍북쪽 1.2km지점에서 무장간첩선이 발견돼 집중사격 끝에 침몰됐으며 같은 날 새벽2시 반경 아군 해안경비부대서 2백m 떨어진 해안에서 괴선박 1척이 적발 격침됐다. 이 교전에서 아군의 피해는 없었으나 괴선박이 82mm무반동포를 발사, 민간인 이대진씨 일가족 5명이 사망했다.
해외원정 등반대 10명, 설악산에서 훈련 중 실종·사망
한국산악회 주관 제1회 해외원정등반에 앞서, 적설기 내한훈련을 위해 설악산의 주봉인 대청봉에 등반한 등반대원 19명이 1969년 2월 13일부터 14일까지 내린 폭설과 눈사태로 죽음의 계곡 부근에서 조난돼 대장 이희성 육군중령 등 10명이 실종됐다. 국내 베테랑급 산악인인 이들은 70년대 히말라야 등반에 대비, 훈련차 2월 4일 서울을 떠났다. 이같은 조난 사실은 같은 대원인 이재인씨 등이 산에서 내려와 속초경찰서에 신고함으로써 알려졌다. 정부는 2월 17일부터 3월 3일까지 조난자 수색본부를 설치하고 군인, 경찰, 민간인 등 2천명을 동원해 시체 10구를 찾아 3월 3일 설악산 신흥사 보제루에서 합동장례식을 치렀다. 조난 원인은 기상이변과 눈사태를 경시한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다.
한국대표팀, 킹스컵 축구와 ABC농구대회 우승
한국축구대표팀이 1969년 11월 28일 밤 방콕국립경기장 메인스타디움에서 열린 제2회 킹스컵 축구대회 결승전에서 전년도 우승팀인 인도네시아를 1대0으로 꺾어 우승을 차지했다. 전반 15분 서윤찬이 오른쪽 깊숙이 몰고 들어간 볼을 센터링, 정강지가 가슴으로 밀어 넣어 선취점을 올렸다. 이로써 한국축구는 인도네시아의 2연패를 저지하고 이 대회에서 처음으로 우승했다. 한편 한국 남자농구는 11월 29일 방콕에서 아시아 정상을 차지하는 괘거를 올렸다. 제5회 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대회(ABC) 최종일 결승전에서 한국팀은 제4회 우승팀인 필리핀을 95대86으로 가볍게 물리쳐 한국농구 60년사상 처음 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했다. 이로써 한국팀이 70년 유고슬라비아에서 개최하는 세계농구선수권대회아시아지역 대표로 참가하게 돼 한국은 아시아에서 스포츠 최강국으로 급부상했다.
제3한강교 개통
한강을 가로지르는 4번째 길목인 제3한강교가 1969년 12월 26일 오전11시 박정희 대통령부처와 김현옥 서울시장이 테이프를 끊음으로써 1966년 1월 19일에 착공한지 만3년1개월 만에 개통됐다. 용산구 한남동과 성동구 신사동간을 연결하는 이 다리의 개통으로 서울의 도심부와 경부고속도로가 직결돼 제1한강교로 우회하던 길이 6km나 단축됐다. 현대건설에서 시공한 이 다리는 교폭이 27m(보도4m, 차도23m)로 가장 넓은 6차선이며 길이 9백15m 양쪽으로 4백W의 수은등 51개가 설치됐다. 투입된 총공사비는 11억3천만원에 달했다. 제3한강교는 경부고속도로에 접속되는 교량으로 부산에서 출발한 차량이 서울 도심까지 곧바로 진입할 수 있게 되어 우리 국토의 남-북을 연결시키는 대동맥이 최종적으로 연결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강남과 강북을 연결하는 요충지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교통수단이 나룻배에서 육상교통 수단으로 바뀌고 영동지역에 처음으로 전기와 수도가 공급되는 등 영동지역이 급속하게 개발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수근 탈출
1967년 3월 22일 오후 5시25분 경 판문점을 통해 위장 귀순한 이수군(북한중앙통신부사장)이 북에 있는 본처의 조카 배경옥과 1969년 1월 27일 오후 5시30분경 CPA기편으로 서울을 탈출, 캄보디아로 도망치려다 1월 31일 사이공공항에서 붙잡혀 2월 1일 서울로 압송돼 왔다. "자유를 찾아 월남했노라."던 이수근이 결국 자유의 탈을 쓴 첩자였음이 드러난 것이다. 그는 전국순회강연 및 TV-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북한실정을 폭로하는 척하면서도 한국의 각종 기밀을 수집하여 북한으로 보내려 하였다. 그의 여러가지 행동이 점차 수상해지자 한국정부의 정보 및 수사당국에서는 그를 주시하고 경계하기 시작했고 이수근은 더이상 한국에 있을 수 없음을 눈치채고 위조여권을 만들어 비행기로 탈출, 호치민에서 북한으로 귀환하려다 한국정부의 정보요원에 의하여 체포, 군용기 편으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고 1969년 7월 3일 사형이 집행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