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일보 " 신문게재 및 인터뷰
★ 신문게재 : 2023. 7.24 (석간) 1면과 5면
※ 인터뷰 일 시 : 2023. 7 .17 (월) .15:00
■ 장소 : 국립 현충원
■ 대 상 : 류재식 6.25참전유공자회 서울시 지부장 ,
고융희 전)인천시 지부장 ,김영환 회원
※ 인터뷰 진행자 : 민병기 차장, 서종민 기자
■ 주 요 내 용
● 6.25전쟁 정전70주년 기념일 10일전 - 국립현충원에서 참전용사의 묘 참배
★ 정전 70년 미래 70년 : 노병들의 "끝나지 않은 전쟁" 인터뷰
( 6.25전쟁 경험을 회상하고, 전, 후세에게 전하고 싶은 말 )
"우리 발밑에 참전용사 묻어있어 잔혹한 전쟁 참상 기억해 주길"
☞ 류재식 6.25참전유공자회 서울시 지부장
" 중국 영화 금성전투 왜곡 제대로 다룬 한국영화 나오길"
☞ 고융희 전)인천시 지부장
"적군 기습에 친구 잃어 눈만 껌뻑이며 죽어가던 모습"
☞ 김영환 회원
"삶에서 6.2기억되고 후손들 일상에 스며들었으면"
※ 2023년 문화일보 1면, 5면 신문게재내용 및 인터뷰 주요장면
“6·25 전쟁은 자유민주주의 수호 투쟁”
문화일보입력 2023-07-24 12:10업데이트 2023-07-24 16:47
민병기서종민프린트댓글0폰트공유
엄숙한 거수경례 6·25 전쟁 정전기념일(7월 27일)을 10일 앞둔 지난 17일,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에서 한국전 참전 유공자들이 참전용사의 묘에 경례하고 있다. 왼쪽부터 류재식(91)·고융희(88)·김영환(90) 참전 유공자. 윤성호 기자
■ 정전 70년 미래 70년 - 노병들의 ‘끝나지 않은 전쟁’
“우리 발밑에 참전용사 묻혀있어
잔혹한 전쟁 참상 기억해주길”
“지금은 무기도 더 좋은데, 제대로 된 총도 있고. 북한이 쳐들어오면 당연히 다시 싸워야지.”
제복을 차려입은 노병(老兵)들이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을 찾았다. 먼저 간 전우의 묘비를 한참 어루만지던 노병들에게 아직 “끝나지도 잊어지지도 않은 전쟁’이었다. 인민군을 모집한다는 소식에 산으로 도망갔다가 다시 우리 군이 춘천 지역을 수복한 뒤 학도병으로 입대한 류재식(91) 씨의 가슴엔 아직도 총알이 박혀 있다. 정전 직전인 1953년 7월 강원 김화 일대(옛 금성군 지역)에서 벌어진 ‘금성지구 전투’ 당시 중대장으로 ‘406 고지’ 쟁탈전을 벌이다 중공군과 육박전 도중 서로 방아쇠를 당겼다. 휴전(정전)이 됐는지도 모르고 병원에 누워있었다는 류 씨는 정전 70주년(7월 27일)을 앞두고 지난 17일 오후 현충원에서 가진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내 마지막 소원이 사대문 안에 사무실 겸 기념관을 하나 만들어 달라는 것”이라며 “매년 4000명, 5000명씩 참전 용사들이 죽어가는데, 잊어진 전쟁이 되지 않도록 기억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강조했다.
지금 다시 전쟁이 발발해도 기꺼이 참전하겠다는 김영환(90) 씨. 그가 기억하는 최대 격전지는 1951년 8월 강원 양구의 백석산 전투다. 몇 번의 공격 끝에 고지는 탈환했지만, 그 대가는 너무 아팠다. 땅이 출렁일 정도로 많은 시체를 묻었다고 했다. 김 씨는 “6·25 전쟁은 자유민주주의와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었다”며 “우리가 무슨 대가를 바라고서 참전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유공자에 대한 교육이나 예우가 너무 없다”고 토로했다. 올해 1월 1일 기준 생존 참전 유공자는 5만1000여 명이다. 몇 달 새 또 많은 용사들이 세상을 떠났다. 정전 70년이지만, 노병들의 6·25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한편, 북한은 24일 스스로 ‘전승절’이라고 부르는 정전협정 70주년을 앞두고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에 ‘위대한 전승의 역사적 의의는 영원불멸할 것이다’란 제목의 논설을 통해 핵 개발과 경제 파탄 정당성 및 불가피성을 강조하면서 내부 결속에 나섰다.
민병기·서종민 기자
“가슴에 아직도 총알 박혀있어… 북한이 침공땐 또다시 총 들겠다”
문화일보입력 2023-07-24 11:46업데이트 2023-07-24 12:16
민병기서종민프린트댓글4폰트공유
여전히 늠름한 용사들 6·25전쟁 참전용사들이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에서 ‘전우’들에게 참배를 마친 뒤 태극기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이들은 자유민주주의와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싸웠던 6·25전쟁의 의미를 기억해 달라고 당부했다. 왼쪽부터 고융희(88), 류재식(91), 김영환(90) 참전용사. 윤성호 기자
■ 정전 70년 미래 70년 - (2) 노병 3인의 자부심·아쉬움
고융희 “적군 기습에 친구 잃어
눈만 껌뻑이며 죽어가던 모습”
류재식 “중국 영화, 금성전투 왜곡
제대로 다룬 한국영화 나오길”
김영환 “삶에서 6·25 기억되고
후손들 일상에 스며들었으면”
6·25전쟁에 대한 노병들의 기억은 또렷했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체결 후 70년, 놀라운 성장을 거듭한 한국에 대한 자부심도 가득했다. ‘내 손으로 지킨 나라’의 뿌듯함 속에는 갈수록 퇴색돼 가는 6·25전쟁의 의미, 끝나지 않은 전쟁에 대한 아쉬움도 짙게 묻어 있었다.
미국 극동군 사령부가 운영한 한국인 특수부대인 켈로(KLO)부대 출신 고융희(88) 참전용사는 17일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에서 이뤄진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전쟁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그리고 담백하게 말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개풍군 전투다. 개풍군이 개성인데, 103고지라고 백마산 바로 옆이다. 1951년 5월인가, 새벽에 자고 있는데 중공군이 기습을 했어. 1개 소대 30명쯤이 있었는데, 정신없이 총을 쏘며 가까스로 뚫고 나오니 다 죽고 7∼8명 살았나. 그렇게 살아남았어. 그때 내 친구 이영찬도 죽었어. 우측 어깨에 총을 맞았는데 피가 워낙 많이 나서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 눈만 껌뻑하고 죽어가는데, 나뭇가지와 나뭇잎으로 덮어줬다. 나만 알아볼 수 있는 ‘표식’을 해뒀지만 다시 친구의 시신을 수습할 수는 없었어.”
6·25 참전 유공자 중앙회 임원이기도 한 고 용사는 “6·25 참전 유공자 중앙회 위치가 서울 외곽이라 90살 전후인 용사들이 전국에서 모이기도 힘들다. 서울역이나 용산역에서 쉽게 올 수 있도록, 용산 전쟁기념관이나 시내에 우리 공간이 작게라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6·25전쟁의 최후의 전투, 1953년 6∼7월 두 달 새 중공군 12개 사단과 한국군 4개 사단이 맞붙었던 금성지구 전투에 나섰던 류재식(91) 참전용사는 2021년 금성지구 전투를 다룬 중국의 프로파간다 영화 ‘금강천’(한국명 ‘1953 금성 대전투’)의 국내 상영을 몸으로 막기도 했다.
그는 “금성지구 전투는 절대 우리가 진 전투가 아니다. 무려 12개 사단과 맞붙어 끝내 금성지구 탈환에 성공한 전투다. 이런 걸 중국이 자기들이 이긴 것처럼 ‘항미원조’라고 하며 영화로 만드는 게 너무 화가 난다. 우리가 훨씬 더 잘 만들면 얼마나 좋은가. 금성지구 전투를 제대로 다룬 영화 하나 만들어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가 이끌던 중대원 170명 중엔 단 7명만 살아남았다. 그는 “우리나라 땅 어디를 밟아도 전쟁터가 아니었던 곳이 없어. 우리 발밑에 참전용사들이 묻혀 있어. 잔혹한 전쟁의 참상을 잊지 말고 기억하고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가슴에 평생 남아 있는 총탄은 육박전 중 박혔다. 군의관이 후송 중 죽을 수도 있으니 편히 가라며 모르핀을 놔줬다. 그러고도 살아남은 그는 이후 월남전까지 참전했다.
18살 나이에 1·4후퇴 당시 인천에서 부산까지 걸어와 그 길로 입대한 김영환(90) 참전용사까지, 정전 70주년을 맞은 노병들의 소원은 거창하지 않았다. 잊히지 않는 것. 6·25전쟁이 삶에서 기억되고 후손들의 일상에 자연스레 스며드는 것. “학생들을 보면 부러워. 우린 정말 못살고 어려웠는데. 우리를 우러러봐 달라는 게 아니라, 6·25전쟁을 기억하면 좋겠어. 그리고 남아 있는 용사들에 대한 예우가 좀 제대로 되면 좋겠어.” 고 용사는 ‘즐거운 보훈’ ‘일상 속의 보훈’을 위해 지난 6월 30일 제복을 입고 현충원에서 열린 제복·한복 패션쇼 ‘자락을 펴다’에 참여, 런웨이에 서기도 했다. 인터뷰를 마친 뒤 노병들은 밝게 웃으며 ‘먼저 간 동료’들을 향해 ‘또 오겠다’고 인사하고 현충원을 떠났다. 정전 70년, 노병은 여전히 씩씩했다.
민병기·서종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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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가슴에 아직도 총알 박혀있어… 북한이 침공땐 또다시 총 들겠다”
첫댓글 금성지구 전투는 잘 알려진 전투가 아닙니다. 그건 휴전 직전에 중공군의 총 공격으로
일진일퇴의 백병전이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