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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산림 대법회 154강 – 3 – b
(3) 如來無碍行
佛子야 如來應正等覺이 住無碍行하야 無有住處나
而能普爲一切衆生하사 示現所行하야 令其見已에
出過一切諸障碍道하나니 佛子야 譬如金翅鳥王이
飛行虛空에 廻翔不去하야 以淸淨眼으로
觀察海內諸龍宮殿하고 奮勇猛力하야 以左右翅로
鼓揚海水하야 悉令兩闢하고 知龍男女의
命將盡者하야 而搏取之ㄴ달하야
如來應正等覺金翅鳥王도 亦復如是하사 住無碍行하야
以淨佛眼으로 觀察法界諸宮殿中一切衆生하사
若曾種善根하야 已成熟者면 如來가 奮勇猛十力하사
以止觀兩翅로 鼓揚生死大愛水海하사 使其兩闢하고
而撮取之하야 置佛法中하야 令斷一切妄想戲論하고
安住如來無分別無碍行이니라
佛子야 譬如日月이 獨無等侶하고 周行虛空하야
利益衆生이나 不作是念호대 我從何來하야
而至何所ㄴ달하야 諸佛如來도 亦復如是하사
性本寂滅하야 無有分別이나 示現遊行一切法界하사
爲欲饒益諸衆生故로 作諸佛事하야 無有休息호대
不生如是戲論分別하야 我從彼來하야
而向彼去라하나니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應以如是等無量方便과
無量性相으로 知見如來應正等覺所行之行이니라
如來無碍行(여래무애행)
佛子야 如來應正等覺이 住無碍行하야 無有住處나
而能普爲一切衆生하사 示現所行하야 令其見已에
出過一切諸障碍道하나니
佛子야
如來應正等覺이 住無碍行하야,
여래ㆍ응공ㆍ정등각이 걸림이 없는 행에 머물러서,
無有住處나, 머물 곳이 없지만,
而能普爲一切衆生하사,
그러나 능히 널리 일체중생을 위해서, 두루 일체중생을 위해서
示現所行하야, 행할 바의 일을 시현해서, 나타내서
令其見已에, 그들로 하여금 그 나타낸 행을 딱~~ 보게 하고는,
어디로 나아가게 하느냐?
出過一切諸障碍道하나니,
일체 장애가 없는 도에서 출과하게, 확실히 벗어나게 해준다.
그 어디 현수품인가요? 보살문명품에 나오나요?
현수보살 게송에 나오지요. 원효스님이 잘 인용하시는 것.
“一切無碍人은 一道出生死(일체무애인일도출생사)라.”
일체에 걸림이 없는, 一切無碍人은 바로 부처님을 상징하지요.
일체의 모든 부처님은 = 3세 제불은 一道로, 한 길로 出生死라. 생사를
벗어났다고 하는 대목이 示現所行令其見已에 出過一切諸障碍道 ←이런
대목에 해당이 되겠습니다.
보살문명품이지요? “현수보살 게송 1도 장” 이라고 나오는 것요.
業果가 甚深(업과심심)하고, 敎化가 심심하고, 緣起가 심심하고 하는 대
목이 나오잖아요. 1도 장! 얼마나 좋아서 원효스님이 3국유사에 딱 따 놨
지요. “一切無碍人의 一道出生死라.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났다”
佛子야 譬如金翅鳥王(비여금시조왕)이 飛行虛空(비행허공)에
廻翔不去(회상불거)하야 以淸淨眼으로
觀察海內諸龍宮殿(관찰해내제용궁전)하고
奮勇猛力(분용맹력)하야 以左右翅(이좌우시)로
鼓揚海水(고양해수)하야 悉令兩闢(실령양벽)하고,
佛子야
譬如金翅鳥王이, 마치 금시조왕이
飛行虛空에, 허공을 날면서
廻翔不去라. 빙빙 돌아다니면서, 가지 않으면서 뱅뱅 돌면서,
솔개가 높이 떠서 뱅뱅도는 것은 뭡니까? 먹이를 노리는 것이잖아요.
그렇지요?
이 대목은 세주묘엄품. 여러분 기억나실 겁니다만,
“가루라왕” 할 때 이 대목이 나옵니다. 철위산 꼭대기에서 가루라왕이...
가루라중에 남바 완 일륜속질 가루라왕이라고 있잖아요.
태양이 확 뜨는 것처럼 속질, 빠르게. 쏜살같이 빛보다 더 빠른 속도로 가는
가루라왕이 파도에 고기를 한 마리 잡아서 물이 갈라졌다가 합쳐기도 전에
철위산 꼭대기로 날아온다는 새 가루라왕 있잖아요. 그 얘기가 이것 하고
똑 같은데요.
입법계품 미륵보살 장에는 그 대목이 그렇게 나오지요.
“張大敎網 漉人天之魚(장대교망녹인천지어)라.
큰 그물을 펼쳐서 인천의 고기를 다 건진다.” 하는 겁니다.
여기도 건질만 하고 죽을 만 할 때, 근기가 익은 중생들을 건져내는 것을
금시조가 바다의 용왕의 궁전을 살펴보고...
용은 또 금시조한테 꼼짝을 못하는가 봅니다.
(재수 없이... 용자 훌륭한 건데요.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금시조가 용 잡아먹고 살잖아요. 그렇지요?
여기서는 반대로 금시조가 용을 구제하는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以淸淨眼으로, 아주 집착 없는 눈으로
觀察海內諸龍宮殿하고, 모든 바다 궁전을 잘 관찰해 보고는,
奮勇猛力(분용맹력)으로, 쏜살같이 그렇게, “日輪速疾(일륜속질)”이라고
나옵니다. 태양이 확 비치면 어둠이 싹 가셔버리잖아요.
“日輪速疾 가루라왕” 하는 것처럼 용맹한 힘으로, “용맹한 힘” 이라고 하는 것은 쪼잔하게 번뇌에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고 수갑차고 칼차고 이렇게 하
는 것이 아니잖아요.
以左右翅(이좌우시)로, 좌우 양 날개로,
“양 날개” 라고 하는 것은 행원이 있다는 것이지요. 行願!
행원은 보살은 행과, 보살의 원과, 안에 품고 있는 원력과, 바깥으로 행하는
그런 행이ㆍ보시행이ㆍ바라밀행이 “如鳥兩翼(여조양익)이라. 양 날개와
같다. 行願은 兩翼이라.” 이렇게 얘기하지요.
원효스님은 “자리이타는 여조양익이라.” 하기도 하지만요.
화엄경에서는 行願을 “양 날개” 라고 얘기합니다.
행과 원력으로
鼓揚海水(고양해수)하야, 바닷물을 쳐서
悉令兩闢(실령양벽)이라.
두 쪽으로 헤치고는, 바닷물을 촥~ 헤치고는
知龍男女의, 용의 암컷 수컷의,
命將盡者하야 而搏取之ㄴ달하야,
남녀노소 안 가리고, 암 놈 됐다가 숫 놈 됐다가 꼴까닥 죽을 만 한것은
어떻게요? 사로잡아서 골라서 잡아서 가느니라.
잡아죽이려고 가는 것이 아니고, ‘생사의 바다에서 건져준다.’ 이 말입니
다.
如來應正等覺金翅鳥王도, 여래ㆍ응ㆍ정등각 금시조같은 부처님도,
亦復如是하사, 이와 같아서,
住無碍行하야, 걸림이 없는 무애행에 머물러 있으면서,
以淨佛眼으로, 청정한 부처님의 눈으로,
觀察法界諸宮殿中一切衆生하사,
법계에 모든 궁전, 사람사는 중생들의 모습을, 모든 중생들을 살펴보고는,
若曾種善根하야 已成熟者면 如來가
奮勇猛十力(분용맹10력)하사 以止觀兩翅(이지관양시)로
鼓揚生死大愛水海(고양생사대애수해)하사,
若曾種善根하야 已成熟者면,
만일 미리 착한 뿌리를 심어 성숙하였다면,
如來가 奮勇猛十力(분용맹10력)하사, 여래가 용맹한 열 가지 힘을 빌어서
以止觀兩翅(이지관양시)로, 여기는 “止觀”이라고 해놨네요.
止觀의 양 날개로, 사마타와 바파사나의 두 날개로
鼓揚生死大愛水海(고양생사대애수해)하사,
나고 죽는 그런 애착의 바닷물을 갈라쳐서,
使其兩闢(사기양벽)하고, 두 쪽으로 헤치고는,
而撮取之(이촬취지)라.
그것을 딱~~ 잡아서 중생들을 생사의 물결에서 꺼내서,
置佛法中(치불법중)에, 불법 가운데 두어서,
令斷一切妄想戲論(영단일체망상희론)하고, 그들로 하여금 끊게한다.
무엇을요? 一切의 妄想戲論을 끊게한다.
부질없는 말과 허망한 생각을 싹~~ 끊어버리게한다. 그래서 어디에요?
安住如來無分別無碍行이니라.
여래의 분별심이 없는, 허망한 생각이 0.1프로도 없는 그런 무애행에
안주하게 한다.
佛子야 譬如日月이 獨無等侶(독무등려)하고 周行虛空하야
利益衆生이니 不作是念호대 我從何來하야 而至何所ㄴ달하야
佛子야
譬如日月이, 비유컨대 마치 해와 달이,
獨無等侶라. 짝이 없어서, 태양이나...
周行虛空하야, 해와 달이 홀로 허공을 돌면서
利益衆生이나, 중생을 이익 되게 하되,
남이 찾아오든지 안 찾아오든지 정상이 되면 외롭잖아요.
그런데 외로움에 떨어져버리면 중생심이고, 외로움을 극복해버리면
부처심이지요.
不作是念호대 我從何來하야 而至何所ㄴ달하야
내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간다고 생각하지도 않느니,
‘내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 이 말입니다.
諸佛如來도 亦復如是하사, 제불 여래께서도 이와 같아서
性本寂滅하야, 성품이 본래 고요해서, 성품이 본래 적멸해서,
無有分別이나, 분별심이 없다.
부처님도 어떤 번뇌도 일어나지 않지만, 그러나
示現遊行一切法界(시현유행일체법계)라.
모든 법계에 다니면서, 一切法界에 遊行하면서
爲欲饒益諸衆生故로, 중생들을 넉넉하게ㆍ이익되게 하기위해서,
중생 때문에 부처님 다니시는 것이지요. 부처님 당신이 허공에 갈 일이
없지요.
作諸佛事하야 無有休息호대, 불사를 쉬지 않고 지으면서
不生如是戲論分別하야, 不生, 내지 아니한다 이와 같은 희론.
그냥 허망한 이론이나 그런 분별심을 내지 아니하고, 무엇을 내느냐?
我從彼來하야 而向彼去라하나니,
내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느냐?
그것 뭐 최희준의 하숙생인가요? 그런 것 있잖아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원래는 나옹스님 누이가 지은 게송이지요?
生從何處來 死向何處去(생종하처래사향하처거)
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생야1편부운기사야1편부운멸)
浮雲自體本無實 生死去來亦如然(부운자체본무실생사거래역여연)
我從彼來하야 而向彼去라하나니,
내가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향하여 간다는 생각을 내지 않느니라.
이런 것이 화엄사상을 전형적으로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고 감이 이미 정리된 것이 부처님의 여래 행이다.’ 이 말입니다.
중이 ‘어디 가서 살고 싶다.’ 해서 갔다가, 마음에 안들면 그날 바로 따나
버릴 수도 있고, 그냥 실쭉이 갔다가 앉아서 30년 살아버릴 수도 있고 그
렇지요뭐...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應以如是等無量方便과, 응당히 이와 같은 등의 무량방편과
無量한 性相으로, 이와 같은 한량없는 안쪽의 모양과,
안쪽의 성질이나 바깥의 모양. 性相, 성품과 형상으로써
知見如來應正等覺所行之行이니라
知見, 알고 봐야 된다는 말이지요? 여래ㆍ응공ㆍ정등각. 부처님의 행을
그렇게 봐야 된다.
그 다음에 네 번째.
부처님의 행을 중송으로 다시 한 번 거듭 폅니다.
(4) 二行의 重頌
가. 眞如行
爾時에 普賢菩薩이 欲重明此義하사 而說頌言하사대
譬如眞如不生滅이라 無有方所無能見인달하야
大饒益者行如是하야 出過三世不可量이로다
法界非界非非界며 非是有量非無量이니
大功德者行亦然하야 非量無量無身故로다
二行의 重頌(2행중송)
眞如行(진여행)
爾時에 普賢菩薩이 欲重明此義하사 而說頌言하사대
이때 보현보살이 이 뜻을 거듭 밝히려고 게송을 말씀하셨다.
譬如眞如不生滅이라 無有方所無能見인달하야
大饒益者行如是하야 出過三世不可量이로다.
譬如眞如不生滅이라. 비유컨대 마치 진여는 불생불멸이라.
그러니까 이런 것을, “진여는 불생불멸이다.”고 하는 것을 “心體(심체)”
라고 합니다. 心體 = 마음의 본체. 심상은 어떠냐?
아까 우리얘기했던 것. “저~ 바다에 보배가 가득하다. 중생이 가득하다.”
이것이 심상에 해당합니다. 心相.
無有方所無能見이라. 있는 곳도 없으며 보는 사람도 없다.
볼 수 있는 것도 없다. 이런 것을 의상스님께서는,
“證智所知非餘境(증지소지비여경)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나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겁니다.
大饒益者行如是하야, 여래께서 하는 행이 이와 같다.
“大饒益者(대요익자)”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이지요.
“나 혼자만 잘먹고 잘 사람사는 것이 아니라 완전 남을,
한 두 사람의 이익도 아니고, 전체가 이익되도록 하게 하는 大饒益者는
행이 이와 같다.” ←이런 사람은 ‘몇 번지에 사는 것이 아니다. 전체 번지에
같이 산다.’ 이 겁니다.
“주소가 어떻게 됩니까?” “허공입니다.”
“몇 번지입니까?” “허공 번지입니다.” 헛 번지지요. 헛 번지...
出過三世不可量이로다. 그래서 과거ㆍ현재ㆍ미래가 그것이,
‘그 시간을 잴 수 있는 시간이 아니다.’ 이 것이지요.
3세를 넘어 가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으로써는 헤아릴 수 없다.’ 이런
말씀입니다.
法界非界非非界며 非是有量非無量이니
大功德者行亦然하야 非量無量無身故로다
法界非界非非界며, 법계는 계도 아니고 비계도 아니고,
非是有量非無量이니, 이것은 유량도 아니고 무량도 아니니,
大功德者行亦然하야, 큰 공덕자, 부처님께서는 여래의 행은, 여래출현은
어떻게 나오시느냐? “많다 적다” 이렇게...
그러니까 제일 쉬운 말로 이겁니다.
부처님의 입장에서는,
“선도 악도 없다. 선ㆍ악을 따지는 것은 마음이 아니다.
선악은 心念(심념)이고, 心性(심성)에서는 선악이 없다.
선성도 악성도 없다. 때로는 악하게 쓰지만, 중생의 업에 따라서 악하게
쓸 때도 있고, 업의 근기가 무르익으면 선하게 쓸 때도 있다.” 이것이 자꾸 우리 공부쪽으로 당겨야 되는 대목이지요.
非量無量無身故로다.
나. 無碍行
如鳥飛行億千歲나 前後虛空等無別인달하야
衆劫演說如來行호대 已說未說不可量이로다
金翅在空觀大海하고 闢水搏取龍男女하나니
十力能拔善根人하사 令出有海除衆惑이로다
譬如日月遊虛空에 照臨一切不分別인달하야
世尊周行於法界하사 敎化衆生無動念이로다
無碍行(무애행).
如鳥飛行億千歲(여조비행억천세)나 前後虛空等無別인달하야
衆劫演說如來行호대 已說未說不可量이로다.
如鳥飛行億千歲나, 저 허공에 나는 금시조가 억 1000년을 날아다녀도
前後虛空은 等無別인달하야, 우리가 49재 지낼 때 뭐라고 하지요?
“無故ㆍ 無今 ”하지요? 그 “무고ㆍ무금”이 여기에 해당하지요.
해인사 일주문에 가면,
“歷千劫而不古(역천겁이불고)요
亘萬歲而長~~~~~今(긍만세이장금)이다.”
법보단에 가면,
“圓覺道場이 何處(원각도량하처)냐?
現今生死가 卽是(현금생사즉시)다.”
“불생불멸이 어디 있느냐? 여기 생멸법이 그대로 불생불멸이다.
출세간 법이 어디 있느냐? 세간 법이 출세간 법이다.” 하는 대목들이
여기[前後虛空은 等無別]에 다 해당하겠습니다.
부처님의 입장에서는 그렇고 우리는 사실 그것이 잘 안 되지요.
衆劫演說如來行호대, 아주 많은 세월을 부처님의 행을 찬탄하고,
연설하고, 설명을 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글자로 할 수도 없고, 말로 할
수도 없고, 마음으로 할 수도 없고 미칠 수 없는 자리다.’ 이겁니다.
已說未說不可量이라. 말한 것도 말하지 못한 것도,
앞으로 해야 될 말도 굉장히 많고, 이미 해놓은 말도 너무 많다.
하루해가 지나가면 소동파 게송처럼 84000게송이 하루에 벌어지는데,
溪聲便是廣場舌(계성변시광장설)
山色豈非淸淨身(산색기비청정신)이며
夜來八萬四千偈(야래팔만사천게)
他日如何擧似人(타일여하거사인)가?
그 많은 게송을 어찌...
하루만 지나가도 80권 화엄경이 뭡니까?
하루만 지나가도 8만 권 화엄경이 지나가 버리는데요.
눈으로 본 것만 해도 8만 권이고, 귀로 들은 것만해도 수 100만 권이 돼
버리는데요. 해도 해도 안 되니까 뭐라고 했지요?
여래출현 품에도 그대로 나왔습니다.
我有一卷經(아유일권경), 나한테 경전이 하나 있는데,
不因紙墨成(불인지묵성)이라. 종이나 먹으로 된 것은 아니다. 그런데
展開無一字(전개무일자)라. 펼치면 한 글자도 없지만, (여기는 계속 나
왔잖아요. 그렇지요?) 한 글자도 없지만,
常放大光明(상방대광명)이라. (무량무변하다.)
이것이 전부 서산대사 선가귀감에 나오는 것들이지만,
여기[已說未說不可量]에 다 해당하는 글들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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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_()()()_
아름답습니다♬♪♩ 환희롭습니다♬♪♩ 감사합니다♬♪♩ 진수성찬입니다♬♪♩ 감미롭습니다♬♪♩ 꿀맛입니다♬♪♩
대♩ 방♩ 광♩ 불♩ 화♩~~ 엄♩~~ 경♩~~~
@대등행
고맙습니다.
저도 "무고 무금" 이라고 들리긴 했지만, '긴가 민가' 확신이 안 섰습니다.
이제 보니, 그 밑에 명확한 답이 있네요.
제 자신에게 '쯧쯧쯧' 합니다.
대방광불화엄경 _()()()_
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_()()()_
<법보달> -- <법보전>인가 싶습니다만..
“張大敎網 漉人天之魚(장대교망녹인천지어)라. 큰 그물을 펼쳐서 인천의 고기를 다 건진다.”
예전에 범어사에서 원효스님인가 의상스님인가, 작은 도장을 파서 쓰시다가 우물에 빠뜨린 것이
근간에 우물청소하다 발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無比 어른스님께서 더 크게 다시 만드셔서 지금 쓰고 계십니다.
중생교화의 요체가 된다고 생각됩니다.
_()()()_
고맙습니다 나무대방광불화엄경_()()()_
나무대방광불화엄경나무대방광불화엄경나무대방광불화엄경_()()()_
나무대방광불화엄경나무대방광불화엄경나무대방광불화엄경_()()()_
글귀마다 아름답습니다
_()()()_고맙습니다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
나무 대방광불화엄경